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651 - Chapter 1660

1723 Chapters

제1651화

리아에게 받은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아니면 마음속에 남아있던 벽을 끝내 넘지 못해서였을까... 병원에서 돌아온 지 하루 만에, 강서원은 쓰러졌다.조기봉은 낚시하러 나가 사흘째 집을 비운 상태였다.본가엔 집사와 가사도우미, 그리고 강서원뿐이었다.가사도우미는 강서원만 보면 슬그머니 피했다.집사 역시 함부로 2층으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래서 아무도 강서원의 이상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날도, 하루종일... 아니, 밤까지 강서원이 내려오지 않았다.주방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는 밥을 데우다가 식으면, 다시 데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가사도우미의 보고를 들은 집사는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서 강서원의 방문을 두드렸다.그리고 문을 열자, 강서원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집사는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운전기사를 불러 강서원을 병원으로 이송했다.그러는 동안 조기봉, 조지언, 조지훈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다.조기봉과 조지언은 지방에 있었지만, 둘 다 바로 올라오겠다고 연락이 왔다.다행히 조지훈은 D시에 있었다. 재판을 마치자마자 전화받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저희 어머니 상태가 어떻습니까? 큰 문제는 아니죠?”조지훈이 병실 앞에서 의사를 붙잡았다.주치의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강서원이 자주 오는 환자였으니까.“조 변호사님, 걱정 마세요. 강서원 여사님 검사 결과엔 이상이 없습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실신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의식도 돌아오셨고, 이틀 정도만 더 쉬면서 상태를 관찰하시면 됩니다.”“네, 감사합니다.”지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의사의 말을 정리하자면, 강서원의 상태는 현재 별일은 없고 그냥 스스로 화를 이기지 못해 기절한 셈이었다.‘어머니답다...’지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뭘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시나? 병도 다 나았다면서... 이제는 좀 내려놓아도 될 텐데.’병실 문 앞에서 지훈은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마음을 추슬렀다.“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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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2화

“실례합니다. 강 여사님 병실이 어디인가요?”야간 근무 중이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눈앞의 남자를 본 순간 말이 턱 막혔다.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인상은 부드럽지만,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를 지닌 사람이었다.온화한 미소 뒤에 감춰진 냉기,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경계하게 만드는 분위기.‘이 사람... 뭐지? 마치 안개 속에 서 있는 느낌이야.’‘다 보이는 듯하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어.’“Hello?”“아, 네! 죄송합니다. 강서원 여사님 말씀하시는 거죠?”“네, 맞습니다.”“실례지만, 어떤 분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병원 규정상, 방문객 신원 확인은 필수라서요.”“괜찮습니다. 당연한 절차죠.”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웃었다.“강 여사님... 예전 지인의 아들입니다.”“지인의... 아드님이세요?”남자는 아주 미세하게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럼 여기에 성함과 연락처를 적어주세요.”그는 차분하게 펜을 들어 이름과 번호를 적었다.간호사는 강서원이 있는 병실 번호를 알려주며 가볍게 목례했다.남자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그리고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간호사실엔 금세 호들갑을 떠는 수다가 이어졌다.“야, 방금 그 사람 누구야? 완전 잘생겼던데.”“이름 뭐래?”“잠깐만, 내가 적은 거 볼게.”한 간호사가 등록부를 슬쩍 가져와 읽었다.“호...? HO? 외국인인가?”“글씨체 보니까 약간 M국식이던데. 우리나라 출신 교포 같지 않아?”“근데 강서원 여사님이랑 무슨 사이래? 조카인가? 근데 묘하게 닮았어... 턱선이랑 눈매가...”“근데, 잠깐만. 그 사람 손에 있던 꽃...”“꽃이 왜?”“나... 잘못 본 거 아니면, 그거... 국화였어.”“국화? 설마. 병문안 가는데 국화를 왜 들고 와? 그건... 장례식장에 놓는 꽃이잖아.”“그러니까 나도 이상해서. 근데 진짜 그렇게 보였어.”“야, 말도 안 돼. 아마 착각했겠지.”간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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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3화

“이 이름, 뭐가 특별한 거야? 발음이... HO? 우리나라 사람이야?”재석이 고개를 갸웃했다.“재석 씨, 우리 전에 조사했던 그 호텔 투숙객 명단 기억하시죠?”“기억나. 근데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그 명단에서 우리나라 사람만 추려냈을 때, 총 178명이었어요. 그중에 이 ‘HO’가 있었어요. ‘HO’만 적혀 있어서 이름인지, 성인지 구분이 안 됐거든요. 그래서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설마... 그때 서연희 도왔던 사람? 성형시켜서 H국으로 보낸 다음, 유하린으로 위장시켜서 다시 잠입하게 만든 그 인간이랑 동일 인물이라는 거야? 게다가 비밀 훈련기지와도 연결돼 있다고?”“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뿐 아니라, 서연희가 재석 씨 실험실에서 탈출할 때도 그 사람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리고... 서연희의 교통사고 역시 그 사람이 계획한 일일지도 몰라요.”‘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어...’‘비밀 훈련소... H국의 유씨 가문... 유하린... 그리고 서연희까지.’“결국, 이 ‘HO’가 우리가 찾는 배후일 수도 있다는 거네요.” 정은이는 명단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 성, 혹은 이름을 천천히 눌러 가리켰다.“성이 ‘HO’?”재석이 중얼거렸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둘 중 누구의 주변에도 그런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성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발음이 비슷한 이름일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전선우 같은?”“에취! 에취!”멀리 D시의 한 바에서, 전선우가 두 번 연속 재채기를 했다.잔을 들고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렸다.“누가 어디서 내 욕을 하나...”그는 아직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어디선가 거대한 오해가 시작되고 있다는걸......다음 날 아침.정은이는 복구된 출입자 명단과 완성된 바이러스 데이터를 들고, 바람섬을 떠났다.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새로 만든 부두 덕분에 배가 부두로 접근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불과 두 시간 만에 바이러스 연구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전해산 교수가 제일 먼저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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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4화

오늘이 연구팀이 창설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가장 짜릿한 건 ‘끝’이 아니라, 끝이 다가오기 직전, 긴 어둠 끝에 아스라이 빛이 시작되는 그 찰나였다.그날 밤,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연구팀 전원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새로운 일정 조율이 필요했다.“먼저, 제가 바람섬에서 가져온 바이러스 데이터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릴게요.”그 데이터는 섬의 지하 비밀 연구소에서 직접 복사해 온 것이었다.이미 1차적으로 대조를 마친 결과, 내용은 기존 데이터베이스와 대부분 일치했다.“다만...” 정은은 말을 이어갔다.“아직은 표면적인 일치만 확인된 상태예요. 정밀 분석을 거쳐야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번째는 논문이에요.”연구 결과를 세상에 알릴 최종 단계.논문은 연구팀의 수년간의 노력을 세상에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다.“이 논문이 얼마나 완성도 있게, 그리고 얼마나 우리 연구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애썼던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겠죠.”정은은 조용히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는 정은이 밤새 작성한 업무분장표가 떠 있었다.“각자 맡으실 파트를 나눠봤어요. 완성 예상 일정도 함께 표시해 놨습니다. 한 번씩 보시고, 의견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표가 교수들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다.짧은 정적.누군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이견 없어.”“나도.”“...”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세 번째로...”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서류 한 장을 더 꺼냈다.“논문 완성과 함께 섬에 남아 있는 모든 연구 흔적을 정리할 겁니다. 파일, 장비, 실험체, 데이터 서버 전부요. 우리가 있었던 기록은 모두 깨끗하게 지워야 합니다...”“이상입니다. 완료까지 약 3개월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회의실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하지만 곧 전해산 교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정리까지 포함해도,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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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5화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사람 잘못 봤으면 어쩌려고요?”재석이 피식 웃었다.“내가 내 여자도 못 알아보겠어?”그 말에 정은이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 사람은 가끔, 말 참 쉽게 하네.’이번에 정은은 바람섬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그동안 재석과 정은이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스파이인 비밀 훈련소의 남은 흔적을 모두 정리했다.연구 기록, 장비, 그리고 이름 없는 실험체들까지.모두 사라져야 했다.해상 화산이 폭발한 그날, 두 사람은 마지막 기폭선을 연결했다.꽈르릉!굉음과 함께 불길이 지하 시설을 삽시간에 삼켜버렸다.섬은 잠시 흔들렸고, 그 진동은 화산에서 자주 일어나는 여진으로 둔갑해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마지막 흔적을 정리한 재석과 정은이 배에 올랐다.멀어지는 바람섬이 시야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조금씩, 더 작아지더니, 마침내 하나의 검은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그제야 정은은 시선을 거두었다.“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모든 비밀과 죄악은 화약과 잿더미 속에 묻혔다.그리고 맥스 군도에서 재석이 맡았던 임무도 완벽히 마무리되었다.두 사람이 바이러스 연구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질 녘이었다.전해산 교수와 주광빈 교수가 부두 끝에서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이후 데이터 분석은 순조로웠다. 업그레이드된 로봇 석 대 덕분에 작업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마침내 결과가 도출됐다.지하 비밀 연구소의 바이러스 데이터는 연구팀이 기존에 수집한 PO-X 바이러스 변이 데이터와 완벽하게 일치했다.“완전히... 똑같네.”누군가 중얼거렸다.순간 방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전해산 교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미친 놈들...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체로 썼단 말이야. 짐승만도 못한 것들.”주광빈 교수는 더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손바닥이 붉게 부풀었지만, 그 분노는 그보다 훨씬 뜨거웠다.‘이건 단순한 연구가 아니었어. 학살이지.’피해자는 맥스 군도의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지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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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6화

현빈은 늘 믿었다. 어떤 사랑에도 틈이 있다고.모든 건 결국 바뀔 수 있는 거라고.시간과 노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현빈의 믿음으로 쌓아 올린 성이 무너져 내렸다.재가 되어 흩어졌다.알고 보니...‘늘 믿는다’는 말은, 실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툰 변명’에 불과했다.‘이제... 그 믿음을 깰 때가 됐네.’그날 밤, 현빈은 맥스 군도를 떠났다.오는 길도 조용했듯, 가는 길도 소리 없이.배에 오르기 전, 정은이 물었다.“오빠, 언제 돌아올 거예요?”현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눈가에 스치는 그 미묘한 떨림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모르겠어. 아마... 2년후쯤? 아니면... 다시는 안 돌아갈 수도 있지.”이제 회사의 핵심 사업은 호주로 옮겨왔다.국내 사업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겼다.앞으로 현빈은 대부분의 시간을 호주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현빈이 배에 오르려는 순간 조용히 불렀다.“오빠!”현빈이 돌아보자, 정은이 말을 이었다.“국내에도 오빠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오빠가 설엔 꼭 돌아오길 바라시니까.”현빈은 미소 지었다.그 눈웃음 속에 지난 아픔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그래... 하나님은 아직 날 버린 건 아니구나.’비록 연인은 되지 못했지만,정은의 입에서 ‘오빠’라는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그건 미련이자, 작은 위로였다.“그래.”현빈은 그렇게 웃으며 대답했다....연구팀이 귀국하던 날 밤, 드물게 비가 내렸다.다음 날은 흐릴 줄 알았다.그런데 아침에 문을 열자, 햇살이 바다 위를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언제나처럼, 그 바다는 살아 있었다.올리버가 말을 끌고 나와 부두에서 연구원들을 배웅했다.연구팀 한 사람, 한 사람을 꼭 안아주며 행운을 빌어줬다.재석도 예외는 아니었다.올리버는 정은을 바라보며 말했다.“행복하세요.”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하린 씨처럼요.”‘아직 포기 못 했구나, 올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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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7화

비행기가 J시 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비행기에서 내려 도착 게이트 앞에서 잠깐 멈춘 사람들은 짧게 인사만 나누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모여 있을 땐 한 덩어리 불꽃 같았고, 헤어지고 나니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졌다.모두 무사히,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가장 아름다운 결말이었다.정은은 입국장을 빠져나와 멈춰 섰다.멀리 보이는 빌딩 숲과 가까이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그제야 ‘이제야 정말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밀려왔다.‘드디어... 집이다.’그때, 정은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재석 씨, 우리 같이 가야 할 데가 있어요.”마침 한 대의 검은색 벤츠가 두 사람 앞에 멈췄다.“좋아. 타.”재석이 정은을 위해 뒷좌석 문을 열었다.정은이 고개를 숙여 차에 타고, 그 뒤를 재석이 따랐다.“출발해.”“예.”검은 벤츠는 곧 도심의 차들 사이로 섞였다.차창 밖의 풍경이 조용히 뒤로 흘러갔다.잠시 후, 정은이 옆을 보며 물었다.“어디 가는지 안 물어봐요?”재석은 웃었다.“물어볼 필요 없지. 알아.”약 사십 분 뒤, 차는 순국선열 묘역 앞에 멈췄다.검은 차체와 대문 양옆의 흑색 비석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정은과 재석은 오미선 교수의 묘 앞에 섰다.재석이 몸을 굽혀 꽃 두 다발을 놓았다.“교수님, 저랑 정은이 왔어요.”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부드럽고 따뜻한, 마치 좋은 어른의 손길 같은 바람이었다.정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교수님, 저 약속 지켰어요. 그때 떠나기 전에 교수님 앞에서 했던 말들, 다 해냈습니다.”“이조화랑 만춘미, 두 사람도 다 대가를 치렀고, 비밀 훈련소도 완전히 폐쇄됐어요. 연구팀도 과제 마무리 잘했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어요.”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교수님. 우리 정은이 대단하죠. 교수님 해친 사람들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어요. 솔직히... 저보다 훨씬 낫죠.”그는 잠시 웃었다가, 묘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전에 정은이를 몰랐을 때요, 교수님이 자주 그 이름을 꺼냈잖아요. 그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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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8화

“좋아요.”정은이 담담히 말했다.“마음은 감사히 받을게요. 근데 조금 궁금하네요. 제가 국내에 없었는데 어떻게 제 이름으로 집을 올린 거예요?”재석이 헛기침했다.“그게... 좀 알아보니까, 전액 현금으로 결제하면 절차가 그렇게 복잡하진 않더라. 다른 사람 손 좀 빌린 것도 있고.”정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 말투가 어딘가 익숙했다.‘이 사람, 이런 일에는 진짜 치밀하다니까...’그녀는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 곧장 안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이 티테이블... 설마 예전에 쓰던 거 아니에요?”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전에 월세 살던 집에 두고 왔는데요? 다음 세입자 쓰라고 놔뒀잖아요.”“응. 그래서 내가 다시 데려왔지.”정은이 눈을 크게 떴다.“그걸 그냥 준 거예요?”“아니. 그 집 내가 새로 계약했어.”“언제요?”“네가 호주 간 다음에.”재석은 정은의 손을 잡고 발코니로 이끌었다.그곳엔 익숙한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다.“이것들도 그때 그 집에서 데려온 애들이야.”햇빛 아래, 초록빛 잎들이 고요히 흔들렸다.정은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이 화분들, 그대로네요. 근데... 내가 없을 때 누가 관리했는데요?”재석이 머리를 긁적였다.“음... 가끔 아주머니 불러서 물 주고, 본가 집사님도 한 달에 한 번쯤 들렀지. 그분이 아주머니 급여도 챙겨주고.”정은이 잠시 말이 없었다. 재석의 세심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이 사람... 나 없는 동안에도, 내 흔적을 이렇게 지켜왔구나.’사실 이 집은, 정은이 호주로 떠난 직후 재석이 산 것이었다.인테리어 설계부터 가구, 자재, 색감 하나까지 모두 직접 고른 집.정은이 좋아하던 미니멀한 구조와 모노톤, 그리고 실용적인 동선까지 세심하게 반영되어 있었다.거실의 가구 배치, 커튼의 질감, 주방의 타일 색감까지... 하나도 그냥 된 것은 없었다.정은은 주방으로 들어서자 숨을 삼켰다. 눈에 띄게 커진 통창, 조리대 아래 맞춤 설계된 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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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9화

아침 햇살이 창문을 타고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하얀 커튼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렸다.정은이 눈을 떴을 때, 옆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이어서 베개에 손을 댔지만, 온기가 없었다.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언제 일어났지?’정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잠옷 상의를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그 순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일어났어?”오픈형 주방에서 고개를 숙이고 요리에 열중하던 재석이 고개를 들었다.따뜻한 햇살 아래, 그의 어깨와 팔에 은은한 빛이 비쳤다.정은이 다가가 냄비 속을 들여다봤다.“아침 메뉴가 죽이에요?”“응. 조용하게 시작하려고.”정은이 미소를 지었다.‘이 사람답네. 첫날 아침부터 이렇게 정리돼 있는 거 보면.’...아침 식사를 마친 뒤, 재석이 싱크대를 정리하는 동안 정은은 거울 앞에서 간단히 화장을 마쳤다.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단지 입구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한 사람은 북쪽에 있는 서비대로.다른 한 사람은 서쪽 방향의 교외로.정은은 출국 전에 차를 실험실 주차장에 두고 갔었다.정은의 차 키는 민지가 보관중이었다.민지랑 서준이 필요할 땐 번갈아 쓰라고 했다.정기 점검은 서비스센터에 이미 등록해놨고, 주행거리나 기간이 되면 민지에게 연락이 간다.그럼 민지가 차를 맡기고, 끝나면 다시 주차장에 두는 식이었다.그래서 오늘은 택시를 타야 했다....정은이가 무한 실험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택시가 정문 앞에 멈추자, 정은은 요금을 결제하고 실험실 문을 열었다.그때, 눈에 익은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멀리서 걸어오는 민지와 서준이었다.시간상으로 보면,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같았다.하지만...‘분위기가 좀 이상한데?’민지가 먼저 성큼성큼 앞장서고 있었고, 서준은 그 뒤에서 뭐라 말하며 따라붙고 있었다.민지의 얼굴은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었다.서준은 당황한 듯 손짓을 하며 해명하고 있었다.그런데 민지는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발걸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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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0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정은 언니!”민지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다음 순간,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그러고는 서준의 손을 확 뿌리치더니, 그대로 정은에게 달려들었다.그야말로 ‘달려들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조금의 망설임도, 체면도 없었다.정은은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민지가 그대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흐윽... 언니... 흐흑... 정은 언니이이이...”민지는 말 대신 엉엉 울었다. 그야말로 밥이 다 된 밥솥에서 김빠지듯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은 뒤늦게 몸을 돌려 그 광경을 보았다.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정은 누나... 진짜... 진짜 오셨어요?”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 얼굴엔 금세 환한 기쁨이 번져갔다.그러나 민지가 아무 생각 없이 언니 품에 안겨 있는 걸 보자, 서준의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야, 여보... 좀 살살 해라. 배...’정은은 민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손끝이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그래, 그래. 울지 마.”하지만 그런 말이 오히려 민지의 서러움을 부추겼는지, 민지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결국 서준이 다가와 중간에서 말했다.“저... 입구에서 이러면 눈에 다 띄어요. 안으로 들어가서 우는 게 낫지 않을까요?”민지가 돌아서서 째려봤다.“진짜, 말 많다. 너는 그냥 가만히 좀 있어!”그 말 한마디에 서준은 입을 닫았다.그리고 곧 민지가 정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언니, 안으로 들어가요. 안쪽에 에어컨 켜놨어요. 시원해요!”“그래, 가자.”정은이 웃으며 대답했다.민지가 정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행복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두 사람은 나란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지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정은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반면 서준은 혼자 멍하니 남았다.‘나 빼고 둘이 세상 제일 즐겁네.’...정은이 실험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익숙한 음성이 공간을 채웠다.“주인님, 환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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