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661 - Chapter 1670

1723 Chapters

제1661화

정은이 말을 끝내자마자, 민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아까보다 훨씬 심하고, 훨씬 거세게 울었다.“흑흑흑... 언니, 저... 저 너무 억울해요!”“다 서준 때문이에요! 분명히 당분간 애는 안 가지기로 했잖아요. 저 진짜 꿈에서도 언니한테 빨리 가고 싶었단 말이에요, 호주로!”“근데 서준이는 진짜 너무해요! 맨날 뭐 안정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느니, 그래야 좀 더 자유롭다느니... 그렇게 아기 물건 많이 사놓고선... 읍읍읍!”서준은 듣는 내내 관자놀이가 움찔거렸다. 점점 민지의 말이 도를 넘어서자, 결국 참지 못하고 직접 민지의 입을 막아 ‘입틀막’을 시전했다.“읍읍읍!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말던가!”민지가 몸부림쳤다.서준이 계속 민지를 달랬다.“여보, 제발... 나 좀 살려줘. 벼룩도 낯짝이 있어.”그제야 민지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정은은 속으로 이 두 사람이 너무 웃겼다.‘들으나 마나 똑같네.’오랜만의 재회였으니, 민지는 꼭 어린애처럼 정은 손을 붙잡고 놓질 않았다.자신이 놓는 순간 정은이... 또 사라질까 봐...서준은 민지한테 쫓겨 실험실로 들어갔고, 민지와 정은은 밖에 남았다.마주 앉은 두 여자는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말이 끊이지 않았다.물론, 말하는 건 거의 민지였고 듣는 것은 정은의 몫이었다.민지의 그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치 기관총처럼.그 덕에 정은은 지난 2년 동안 민지와 서준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은이 호주로 먼저 떠난 뒤 민지와 서준도 연구원에 같이 가겠다고 신청서를 냈다고 했다.하지만 학교는 ‘신청 조건 미달’이라는 이유로 바로 절차를 막아버렸다.이미 정은 하나로 예외를 인정해 준 것도 이미 무리이고, 또 두 사람을 보내면 학교가 서준과 민지의 개인 사업장이 되는 거냐는 눈치였다.민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미달하는 조건이 뭐냐고 학교 측에 따졌고, 학교측도 민지에게 조건 미달 항목을 조목조목 내놓았다.그 후 2년 동안 민지는 이를 악물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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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2화

민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정은이 그렇게까지 호주로 가려했던 이유,그건 아마 오미선 교수와 관련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직접 정은의 입으로 모든 과정을 듣게 되자 민지는 충격을 받았다.가슴이 벅차오르고, 손끝이 떨릴 정도였다.그리고... 결국 또 한바탕 눈물을 쏟았었다.이번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오미선 교수를 위해, 또 무모할 만큼 용감했던 정은을 위해.안쪽 실험실에서 서준이 몇 번이나 고개를 내밀었다.그 눈빛에는 민지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그만 울어.”정은이 휴지를 뽑아 들고, 민지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엄마가 이렇게 계속 울면, 네 뱃속의 우리 리틀 민지가 항의하겠다.”민지는 훌쩍이며 작게 웃었다.‘언니는 언제나 이렇게... 따뜻하다.’잠시 후, 정은이 조용히 물었다.“진일 선배랑 재민은?”“진일 선배는 재민이랑 같이 G시에 세미나 참석차 나갔어요. 언니 안 계신 동안, 크고 작은 세미나는 거의 그 둘이 다 다녔죠. 저는 뭐... 아시잖아요, 게으르고 돌아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줄 알았지.’최근 2년 동안, 민지의 학문적 성장은 눈부셨다.하지만 진일의 성과는 그보다 더했다.국가 프로젝트만 네 개.게다가 모두 핵심 과제였고, 논문은 거의 매달 하나씩 새로 발표했다.실험실은 사실상 진일의 집이나 다름없었고, 재민은 그런 진일의 밑에서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고 있었다.“학교에서 진일 선배한테는 벌써 남아 있을 자리를 보장했어요. 혹시라도 거절할까 봐, 조건도 엄청 걸었대요. 숙소 배정, 정착비 지원 뭐 그런 거까지요.”‘‘숙소 배정’이라는 단어를 이 시대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정은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민지는 그 얘길 듣고 나서 서준에게 몰래 물었다.“자기야, 왜 학교는 나한텐 그런 제안 안 해주는 걸까? 내가... 부족해서 그래?”서준은 잠시 고민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민지가 상처받을 게 뻔했다.그래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그런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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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3화

정은은 문득 생각했다. ‘나... 좀 취했나 보다.’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다.재석이 부축하자 몸이 저절로 그쪽으로 기울었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그는 아예 정은을 두 팔로 안아 올렸다.새집은 층당 한 세대짜리 복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바로 현관으로 연결돼 있어서 이 모습을 누가 볼 일은 없었다.다행이었다.재석은 조심스레 정은을 소파에 눕히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잠시 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해장차 한 잔이 재석의 손에 들려 있었다.“아 해봐.”정은은 재석의 말을 듣고 순순히 따랐다.차가 입 안으로 들어오자, 강한 생강 향이 혀끝을 파고들었다.“읍...”정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재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마치 감정이란 게 없는 ‘해장차 급식기’처럼.“입 더 벌려봐요.”“인제 그만 마시고 싶어요.”정은이 고개를 돌렸다.재석은 피식 웃었다.“술 마실 땐 왜 이런 생각 안 했지?”“괜찮을 줄 알았어요. 두 캔밖에 안 마셨는데...”“취한 사람들 전부 그렇게 말해. 자기 술 잘 마신다고.”“다음에 또 이렇게 마실 거야?”정은이 잠시 생각하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그건... 분위기 봐서요. 분위기 좋으면 한 잔쯤은 해야죠.”재석은 이를 악물었다. 단순한 그 동작 하나에 ‘애증’이란 단어가 그대로 묻어났다.그런데 정은은 그런 재석을 아무 죄의식도 없는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화났어요?”‘알면서 왜 묻냐고...’재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정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너무 오랜만에 애들 만났잖아요.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요. 내가 아무 자리에서나 술 마시는 사람으로 보여요? 재석 씨 눈엔 내가 그렇게 보이나 봐요?”정은의 말투엔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재석은 피식 웃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숟가락을 들이밀었다.“말은 또 왜 이렇게 많아. 내가 한마디 하면 열 마디가 돌아와.”“컥, 콜록...”정은은 차에서 나는 생강 향에 기침했다.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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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4화

송영한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뭐, 솔직히 말해서 이런 케이스는 내가 총장 된 이후로 처음 봐. 그래서 말인데, 이번 사안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 며칠 뒤에 다시 올래?”정은은 가볍게 웃었다.‘2년이 지나도 이 사람은 여전히... 참, 좋아하려야 좋아하기 힘들군.’“알겠습니다.”정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총장님 천천히 고민해 보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송영한의 입가에 순간적인 미소가 스쳤다.‘흐흐, 이번엔 소정은이 나한테 꼼짝 못 하네?’“어이, 서류 두고 가!”기분이 한껏 좋아진 송영한이 장난스레 불렀다.정은은 손을 휘저으며 무심하게 말했다.“괜찮습니다. 가지고 계세요. 버리셔도 돼요.”“버리라고?”송영한의 웃음이 잠시 멎었다.“왜 버려?”“이제 사인 안 받아도 되니까요.”“뭐? 왜 필요 없는데?”정은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어제 연성대 교무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생명과학 학부 새 학부장님이 제 연구 주제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국가 지정 연구 프로젝트에 합류해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송영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정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제가 원래 게으른 편이라 웬만하면 자리를 안 옮기는데요, 굳이 누가 제 자리 흔들거나 들쑤시면... 뭐, 옮길 수도 있죠. 옛말 있잖아요. 낡은 게 가야 새것이 온다고요.”정은은 미소를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야, 잠깐만!”불과 2초도 안 되어, 송영한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송영한은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정은 앞에 섰다.“아이 참, 내가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해. 사인? 그게 뭐 대수야. 간단한 일인데, 그걸로 또 오라 가라 하게 만든 교무처 놈들이 문제지. 참 눈치가 없어, 그 사람들...”송영한은 허겁지겁 펜을 집어 들고 서류를 쓱쓱 몇 번에 서명해 버렸다.“자, 여기. 됐다. 이러면 됐지?”정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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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5화

재석이 아침 식사를 절반쯤 먹고 있을 때였다.갑자기 현관 인터폰이 울렸다.화면에는 경비실 표시가 떴다.[조 교수님, 강서원 여사님이라고 하시는데요. 출입 허가해 드릴까요?]이 아파트를 고를 때, 재석에게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위치, 환경, 시설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사생활 보호’가 확실했다.한 층에 한 세대뿐이고, 출입구는 얼굴 인식으로만 통과 가능했다.엘리베이터도 지문 인식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았다.외부 방문자는 반드시 경비실의 확인을 거친 뒤, 입주자의 동의를 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괜찮습니다. 들어오시게 하지 마시고요.”재석은 짧게 말했다.“기다리신다고 하시면, 1층 휴게실에 모시고 계세요. 제가 10분, 아니 15분 뒤에 내려가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경비실.통화를 마친 경비원이 미소를 지으며 안내실 밖으로 나왔다.“여사님, 조 교수님께서 1층 휴게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곧 내려오신답니다.”“뭐라고?”강서원의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목소리엔 노골적인 불쾌함이 배어 있었다.경비원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한 번 더 설명했다.“조 교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신답니다. 편하게 기다리시라고요.”“내가 조재석 친엄마야! 아들이 자기 엄마를 집에 들이지도 않고, 무슨 휴게실에서 기다리라는 거야?”“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사님. 전 그냥 전달만 해드리는 처지라...”“하... 참나.”강서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억눌린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눌렀다.‘지훈이한테 어렵게 물어봐서 주소도 겨우 알아냈는데...’‘여기서 소리라도 지르면, 또 마음 닫아버리겠지.’‘그럼 또 떠날 거야. 다시는 안 돌아올 수도 있어.’“됐어. 휴게실이 어디야?”결국 강서원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휴게실에 도착하자 직원이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5분도 지나지 않아 조용히 문이 열리고, 재석이 들어섰다.“어머니.”정중히 인사하고, 어머니의 맞은편 자리에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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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6화

물음표가 공기를 가른다.‘입장?’‘무슨 입장?’강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다음 재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폭탄이었다.“정은이 돌아왔습니다. 저희 같이 왔어요.”“정은이가 돌아왔기 때문에, 저도 돌아왔습니다.”“저희,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예전의 불편했던 일들을 생각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앞으로는 어머니와 정은이가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강서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뭐라고?”재석은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내뱉었다.“제가 말씀드리는 건, 어머니와 정은이는 안 보셔도 됩니다. 만약 굳이 불편한 일을 만드신다면, 저희는 어머니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남쪽 정은이 고향으로, 아니면... 더 멀리, 호주로요.”이 말은 재석이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수십 번 했던 거다.예전에도 재석은 비슷한 말을 했다.그는 강서원에게 정은을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서로 각자의 삶을 살자고.하지만 강서원은 그 부탁을 한 번도 진심으로 들은 적이 없었다.그 무시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렸다.재석은 한 번 잃은 건 두 번 다시 견딜 수 없으니, 이번엔 반드시 결심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내가 얼마나 결심했는지...’그리고 이번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재석은 정말로 L시에 정착하는 걸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도 대학이 있고, 정은 부모님 집과도 가깝다.‘정은이라면 분명 좋아할 거야.’강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늘 부드럽고 조용했던 아들의 입에서 이토록 단호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지금 엄마한테 협박하는 거야?”“아닙니다. 충고예요. 어머니, 저 진심입니다.”“...”떠나는 강서원의 뒷모습은 어딘가 비틀리고 불안했다.처음 들어올 때의 그 거만함과 자신감은 어디에도 없었다.경비실 옆에서 경비원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히 가세요.”이 아파트 단지의 경비원은 서비스라는 말의 끝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SP그룹 회의가 막 끝나고 대표이사실을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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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7화

아들의 집을 나서는 강서원의 걸음이 흔들거렸다.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세 아들 중 두 녀석은 이제 대놓고 등을 돌렸고, 남은 하나 역시 다를 게 없었다.거기에 반쯤 세상과 단절한 채 낚시에만 빠져 사는 남편 조기봉까지.‘이젠 정말 혼자구나.’강서원은 그렇게 생각했다.그 말에 뼈가 시렸다.건널목을 건너던 중,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빵!귀를 찢는 엄청난 경적에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늦었다.커다란 화물트럭이 쏜살같이 달려왔다.강서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움직여야 해...’하지만 다리는 땅에 박힌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그때, 어디선가 한 손이 확 뻗어와 강서원의 팔을 꽉 잡았다.순간, 강서원의 몸이 뒤로 확 당겨졌다.“괜찮으세요?”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강서원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고마워. 자네 아니었으면, 난 이미...”“길에서는 정신 놓으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어도,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젊은 남자는 맑고 단정한 인상이었다.차분한 눈빛, 고운 미소.옷차림도 품위 있었고, 손목의 시계는 은근히 고급스러웠다.‘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강서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니?”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반짝 깨달은 듯 미소 지었다.“혹시... 강서원 여사님 아니세요?”“날 알아보네?”“예전에 연회장에서 뵌 적 있습니다. 물론 여사님께선 절 기억 못 하시겠지만요.”강서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연회장이라... 그럼 재계 쪽 인물이네.’남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임시호라고 합니다.”‘임... 시호.’강서원의 머릿속이 순간 번쩍였다.“혹시 JF그룹, 그 ‘임’ 씨?”시호는 손을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아, 거긴 본가고요. 저흰 한참 떨어진 방계입니다.”“그래...”강서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오늘 정말 고마웠어. 이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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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8화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다. 떠도는 구름이 저녁 햇살에 물들어, 밝은 주황빛으로 타올랐다.정은과 재석은 택시에 말없이 올라 곧 정은의 집 앞에 도착했다.철제 대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시간이 멈춘 듯,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수국은 여전히 크고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노랑, 하늘색, 분홍색 꽃들이 뒤섞인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물감으로 덧칠한 수채화 같았다.한쪽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텃밭이 보였다.칸마다 구획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었고, 쪽파, 배추, 그리고 담벼락 옆에는 길게 뻗은 수세미 넝쿨이 그늘막처럼 얽혀 있었다.초록빛 덩굴들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이건 아빠 솜씨지... 틀림없다.’정은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재석이 옆에서 물었다.“왜요? 집 앞이라 긴장돼?”“그게 아니라요... 이렇게 말도 없이 오면, 아빠 엄마 깜짝 놀라실까 봐요.”“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서 말씀드릴까?”그가 말하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은이?”귀에 익은 음성이었다.정은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진헌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확인했다.“나... 나 헛것 보는 거 아니지?”정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 순간, 아버지의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아빠...’모든 걱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정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소진헌은 두 팔을 벌려 딸을 받아 안았다. 하지만 그 손은 한동안 정은의 등에 닿지 못했다.‘이 손이 닿으면, 혹시라도 사라질까 봐...’그는 그렇게 믿기 어려운 현실을 조심스레 확인하듯 있었다.“아빠... 정말 보고 싶었어요...”딸의 한마디에 소진헌은 비로소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게 믿어졌다.소진헌의 거친 손이 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어릴 적처럼, 천천히, 다정하게.그때 현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 누구랑 그렇게 오래...”이미숙은 소리를 따라 나왔다가, 정은의 등만 보이는 광경에 잠시 얼어붙었다.남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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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9화

집은 넓었다.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정은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소진헌과 이미숙 단둘이 이 공간을 지켜왔다.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집 안이 너무 조용했다.식탁 의자 두 개는 늘 비어 있었고, 주방에는 요리 대신 침묵이 쌓여갔다.하지만 오늘 딸이 돌아왔을 뿐 아니라 재석까지 함께했다.집 안 공기가 달라졌다.말 그대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소진헌은 기다렸다는 듯 주방으로 직행했다.“이럴 땐 직접 솜씨 한번 보여줘야지.”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재석이 자연스럽게 소매를 걷어 따라 들어섰다.‘참, 눈치 빠른 것도 여전하네.’소진헌은 속으로 웃었다.둘은 별다른 말이 없어도 호흡이 잘 맞았다. 손이 척척 맞아 떨어지며 금세 식탁 위엔 네 사람을 위한 반찬이 가지런히 올랐다.냄비에 김이 오르고, 냄새가 퍼졌다.이 집의 오랜 정적이 깨졌다.저녁 식사를 위해 네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았다.이미숙은 딸에게 반찬을 챙겨주며 말했다.“이건 네가 좋아하던 거야. 맛 좀 봐.”소진헌은 재석 쪽으로 잔을 밀며 말했다.“한잔해야지. 긴장 풀게.”이 ‘풍경’은 어쩐지 2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그때 정은과 재석은 서로에게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소진헌은 겉으론 ‘그놈은 어딘가 마음에 안 들어’라며 투덜거렸지만, 속으론 이미 사위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리고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서도 애정이 묻어났다.그때 비록 이미숙은 조금 다르게 느꼈다. 딸의 사랑이 순탄치 않을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딸과 딸이 선택한 사람을 믿었다.‘이 아이들이라면 결국 잘될 거야.’그게 어머니의 낙관이자, 바람이었다.그리고 지금, 2년이 흘렀지만, 모든 게 변한 듯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웃음소리, 식탁 위의 온기, 그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소진헌은 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입을 열려다 이내 닫았다.한참 뒤, 그는 낮게 말했다.“너희... 둘이 그냥 잘 지내면 됐다.”그 한마디에 정은의 눈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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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0화

“예?”소진헌이 눈을 껌뻑였다.서원철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니, 이 작가님이랑 따님이 나란히 서 계시니까 말이에요. 진짜 친자매 같아요. 어쩜 이렇게 닮았대?”이미숙이 웃음을 터뜨렸다.정은도 따라 웃었다.오직 소진헌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아니, 나만 손해 보는 분위기네...’그야말로 ‘나 혼자만 상처받는 세계’가 완성된 순간이었다.“저기, 소 선생님...”서원철이 수상쩍게 손짓했다.“잠깐만 이리 좀 와보세요.”“왜 그러십니까?”소진헌이 두 걸음 다가서자, 서원철이 목소리를 낮췄다.“따님 혹시 남자친구 있나요? 우리 아들 어때요? 소 선생님도 본 적 있잖아요. 잘생겼다고는 못 해도 인상은 반듯하고, 성실하고... 혹시 가능성 있을까요?”‘또 시작이네, 이분...’소진헌이 말문을 열려는 순간, 재석이 나타났다.정은이 핸드폰을 두고 나가서, 재석이 대신 가지러 잠깐 들어온 참이었다.그런데 운이 나빴다. 정확히 그 타이밍에 서원철의 “우리 아들 어때요?”가 귀에 꽂혔다.재석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하지만 걸음을 멈춘 재석은 자연스럽게 정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았다.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한 동작이 모든 걸 설명했다.‘명확하네.’서원철의 눈이 동그래졌다.소진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보다시피, 이미 임자 있습니다.”“아이, 한발 늦었네...”서원철은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아들놈이 조금만 서둘렀어도 말이지.’‘이참에 소 선생님이랑 사돈 맺고, 매일 같이 밭일도 하고, 꽃도 가꾸고...’‘이 그림이 딱인데.’상상만으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하지만 곧 현실을 떠올리고, 한숨이 나왔다.“다 제 아들이 문제예요. 소 선생님, 따님은 이분 한 분뿐이시죠? 혹시 다른 따님은... 없으세요? 아니면, 뭐... 아드님이라도...”“예?”소진헌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하, 알겠습니다. 한 분뿐이군요.”서원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뜸을 들이고 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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