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의 모든 챕터: 챕터 1671 - 챕터 1680

1723 챕터

제1671화

재석과 정은이 L시에 머문 지 사흘 차였다.그동안 소진헌은 마치 요리 대회를 준비하듯, 자신이 할 줄 아는 모든 음식을 만들어냈다.재석은 묵묵히 그 옆에서 주방 보조 역할을 했다.채소를 다듬고, 국물을 저으며...‘이제야 진짜 가족이 된 기분이야.’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로웠다.이미숙과 정은은 그 덕분에 오랜만에 ‘숟가락만 들면 되는 생활’을 했다.밥상 앞에서 모녀가 마주 앉아 웃는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사흘 뒤, 두 사람은 다시 J시로 돌아가야 했다.소진헌은 수업이 있어 배웅하지 못했고, 이미숙이 대신 운전해 KTX역까지 데려다줬다.플랫폼 앞에서, 이미숙이 정은을 꼭 끌어안았다.“정은아, 잘 생각해 봤어? 정말 조 교수야?”정은은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처음부터... 항상 그 사람이었어요.”이미숙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그래, 엄마는 네 선택 믿을게.”그녀는 손끝으로 딸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리고, 천천히 몸을 떼었다.정은이 탑승구를 지나 돌아서자, 이미숙의 입꼬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가는 벌써 촉촉해졌다.‘엄마란 참, 결국 자식을 떠나보내는 사람이구나.’그녀는 늘 딸을 배웅했다.학교에 처음 가던 날,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는 오늘까지.그게 어머니의 사랑이었다.말이 아닌, 오래된 ‘배웅’의 형태로 남는 사랑....J시로 돌아온 다음 날, 정은은 아침 일찍 총장실로부터 호출받았다.“정은아, 우리가 이번에 논의해 봤는데 말이야...”송영한 총장이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이번 포럼은 무한 실험실 쪽에서 서비대를 대표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어. 네 생각은 어때?”그가 말하는 ‘포럼’은 바로 세계 생명과학 포럼이었다.과학기술 협회와 생명과학학회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로, 국내 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장 규모 있고, 가장 권위 있는 학술 교류의 장이었다.지난 회차에는 25개국에서 300여 명의 석학이 참석했고, 그 가운데에는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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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2화

“‘구름’은 우리 실험실에서 일종의 중추 신경 같은 역할을 해.”정은이 노트북 화면을 돌리며 설명을 시작했다.“출입문 제어, 얼굴 인식, 조명 조절 같은 건 전부 구름이 관리하고 있지. 말하자면 실험실의 ‘관리 총책임자’ 같은 거야.”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언니 없을 때도 ‘구름’ 덕분에 시스템은 항상 잘 돌아가잖아요.”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고 화면 속 코드를 가리켰다.“근데 문제는 여기야. 구름이 행정이나 시스템 관리엔 능하지만, 전문적인 생물학 지식은 아예 없어. 그러니까 실험 데이터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건 불가능하지.”‘지금의 구름은 말하자면 ‘내무부 장관’까진 돼도, 정책 결정까지 관여하는 수준은 못 되지.’정은의 머릿속에 비유가 그려졌다.“나는 그걸 바꾸고 싶어. ‘구름’이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연구 주체 중 한 존재로 참여할 수 있게.”민지가 눈을 반짝였다.“그럼 언니 말씀은, 이번 포럼을 계기로 구름을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거예요? 전문 지식을 학습시켜서요?”“응. 정확히는, 그런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회사를 찾으려고.”정은이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두드렸다.“국내에 학술용 로봇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가 있어. 이번 포럼에 그 회사도 초청됐거든. 그쪽 사람들 만나서 직접 얘기해 보려고.”‘그래서 총장님 제안이 오히려 잘 됐지.’‘가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겼잖아.’이미 정은은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맥스 군도 프로젝트 당시 ‘새김, 바람, 이어’ 시스템을 보고, ‘우리 구름도 저렇게 진화할 수 있을까?’라는 아이디어였다.그 후 리아에게 문의도 했지만,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이 직접 설계와 개발한 로봇만 내부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기업마다 구조가 다르고, 코드는 곧 ‘기업 비밀’이었다.그때 리아가 덧붙였다.“외부 로봇 업그레이드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있어요. 국내에 하나뿐인데, 기술력 수준이 상당해요.”정은은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그래, 바로 그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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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3화

세 사람은 결국 그 유명한 ‘왔으면 가야지’ 법칙을 피해 가지 못했다.잠깐 상의 끝에, 산책할 곳은 달빛해안길로 정해졌다.그곳은 해안을 따라 조성된 긴 산책로로, C시에서도 개발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대표적인 관광지였다.총길이 20킬로미터가 넘는 해안 도로 주변에는 ‘청해암’과 ‘운월대’ 같은 명소들이 줄지어 있었다.도착한 시간은 마침 해 질 무렵이었다.금빛 태양이 야자수 사이로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붉은 노을이 바다 위로 번져나갔다.핑크빛 파도가 반짝였고, 그 풍경은 마치 그림 같았다.“와... 인터넷으로 본 것보다 훨씬 예쁘다. 저녁에 오면 분위기 좋다더니, 진짜네!”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잠시 후, 그녀는 ‘핫플’ 표시가 된 포토존을 발견하더니, 바로 포즈를 잡았다.“자기야, 얼른 찍어줘!”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사진을 다 찍고 나자 민지는 후다닥 뛰어왔다.“잠깐! 나 사진 좀 볼게!”서준은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야, 천천히 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괜찮아! 너무 오버하지 마.”민지는 이미 서준 옆에 와서 폰을 낚아챘다. 화면을 확대해 사진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이게 뭐야? 내 발은 왜 잘렸어? 몸은 왜 이렇게 기울었고! 그리고... 이거 너무 뚱뚱해 보이잖아!”서준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미안, 다시 찍을게.”“그래, 다시! 이번엔 발끝까지 전신 다 잡아!”민지는 다시 포토존으로 돌아가 자세를 잡고 손을 허리에 얹었다.“이제 돼?”“잠깐만. 여러 장 찍을게. 나중에 네가 맘에 드는 걸로 골라.”“응, 좋아!”찰칵찰칵-노을빛 속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어졌다.“끝났어?”“응, 이번엔 잘 나온 거 같아.”민지가 서둘러 달려와 폰을 확인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이건 괜찮네. 근데 왜 또 살쪄 보이지...? 조명 때문인가?”“살쪄 보여?”서준이 옆에서 같이 화면을 들여다봤다.“아닌데. 구도도 괜찮고, 색감도 좋아. 풍경까지 들어가서 완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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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4화

엘리베이터는 내부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민지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했다.정은은 제일 안쪽 구석에 서 있었다.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앞이 가려져, 민지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서준이 낮게 말했다.“다음부턴 조심 좀 해. 사람 많으면 그냥 비켜줘.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면 위험하잖아. 넘어지면 어쩔 뻔했어.”“조금 늦게 가면 어때. 시간 1~2분 아끼자고 위험하게 굴 필요 없잖아.”평소 과묵한 서준이 이렇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은 몰랐다.‘진짜 많이 놀랐나 보다...’민지도 겁이 났는지, 평소 같으면 반박했을 말도 꾹 참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혼나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그때 엘리베이터 안에서 들었던 이름, 임시호.그건 민지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그다지 의미 없는 이름이었다.그저 순간의 예의로 던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말이었을 뿐....다음 날 아침, 포럼은 정시에 시작됐다.개막식과 주최 측 인사들의 환영사가 이어지고, 점심 무렵엔 대연회장에서 원탁 오찬이 열렸다.정은, 민지, 서준은 본부석 오른쪽 다섯 번째 테이블에 자리했다.꽤 앞쪽이었고, 주변에는 다른 대학 대표단들이 앉아 있었다.성운대, 국민대, 연성대, 교성대...각 학교 이름이 적힌 명패들이 줄지어 있었다.민지가 몸을 살짝 기울여 정은에게 속삭였다.“언니, 아까 오전에 쭉 돌아봤는데, 언니가 말한 ‘네오젠텍’라는 회사는 못 봤어요. 혹시... 안 온 거 아닐까요?”정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점심 먹고 나서 한 번 연락해 볼게.”“네, 알겠어요.”...식사가 끝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가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오후 세션이 이어지기로 했다.정은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번호를 찾아 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두 번 울리고 바로 연결됐다.[무슨 일이세요, 정은 씨?]“오늘 오전에 포럼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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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5화

민지는 머쓱하게 코끝을 만지며 말했다.“왜 저 안 깨우셨어요? 다 끝나고 나니까 부르시네요...”서준이 옆에서 바로 거들었다.“정은 누나가 증인이야.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넌 안 일어났어.”민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할 말이 없다... 완패야.’...해가 기울었지만 여름의 열기는 여전했다.리조트 밖은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세 사람은 더위를 피해 그냥 안에서 저녁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행사 측에서 제공한 뷔페는 입맛에 맞지 않아, 셋은 리조트 안의 다른 레스토랑을 찾아갔다.코스로 주문하는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다.그런데...“사람 왜 이렇게 많아?”민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 줄을 바라봤다.서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다들 주최측에서 하는 뷔페는 별로인가 봐. 여기로 몰렸네.”민지가 얼굴을 찌푸렸다.“그럼 어떡하지? 딴 데로 갈까?”“다른 후보 있어?”서준의 말에 민지는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저었다.“리조트 안에 식당 다섯 군데 있던데, 그중 여기가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고. 다른 데는... 그냥 그렇대.”“그럼 나가서 먹을까?”“밖까지 나가면 왕복 한 시간은 걸려. 그냥 여기 줄 서는 게 낫지.”둘은 동시에 정은을 바라봤다.정은이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 레스토랑으로 하자. 그냥 줄 서서 기다리자.”요즘 민지가 몸이 불편한 걸 잘 아는 정은은, 서준에게 먼저 민지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 쉬게 하라고 했다.자신이 여기 남아서 줄 서 있다가, 차례가 되면 두 사람을 부르겠다고 했다.민지는 바로 손을 저었다.“안 돼요! 언니 혼자 기다리게 할 수 없어요. 저도 같이 있을게요.”서준이 만류했다.“민지야, 정은이 누나가 괜찮다잖아. 네 몸도 생각해야지.”“싫어. 같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고집은 여전하네...’그렇게 세 사람은 리조트 레스토랑 앞 긴 줄 끝에 나란히 섰다.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민지는 또 몇 번째인지 모를 하품을 터뜨렸다.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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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6화

두 번째 전화는 한중기에게서 걸려 왔다.그는 포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묻는 말로 통화를 시작했다.정은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보고했다.[이틀 뒤에 너희 팀 발표 일정이 있구나. 준비는 잘 되고 있지?]정은은 순간 말을 잃었다.“저희가... 직접 발표해야 하나요?”[어? 총장님이 아직 얘기 안 하셨어?]“네, 처음 듣는 얘기예요.”[원래는 작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자 문제로 못 오게 됐대. 그래서 주최 측이 급하게 플랜B로 학생 연구팀 발표 세션을 추가한 거야.][최근에 무한 실험실이 논문도 잘 나왔고 성과도 괜찮잖아. 그래서 주최 측에서 직접 너희 팀을 지목했어.][우리도 어제 통보받아서 총장님이 아직 전달을 못 하신 모양이야. 시간은 괜찮겠어? 너무 촉박하면 내가 주최 측이랑 얘기해서 발표 일정을 하루 뒤로 미룰 수도 있어.]정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모레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겠지.’‘그래도 일정이 바뀌면 듣고 싶던 세션이랑 겹치겠네.’“괜찮아요. 모레 일정대로 하겠습니다. 충분해요.”[그래.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평소처럼 하면 돼. 학회 발표하듯이만 하면 돼. 단지 질문이 조금 더 많을 뿐이야.]“네, 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정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앞줄의 사람들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이러다 밥 먹기 전에 밤 되겠네...’“정은 언니!”정은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분명 방에 가서 쉬고 있어야 할 민지와 서준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너희들... 왜 다시 돌아왔어?”“언니, 빨리요! 저랑 같이 가요!”민지가 괜히 신나 보이는 얼굴로 손짓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근데 줄은...?”“이제 안 서도 돼요. 얼른 와요.”민지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창가 쪽 자리에 가서 털썩 앉았다.“언니, 여기요! 줄 안 서도 자리 생겼어요!”정은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이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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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7화

“응, 안녕.”그리고 정은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우리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시호는 붙잡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손짓했다.“그래.”정은은 민지의 팔을 가볍게 잡고 식당 밖으로 걸었다.호텔 복도를 걷는 동안, 묘한 정적이 세 사람 사이에 흘렀다.잠시 후, 민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그 임시호 씨... 전에 알던 사람이예요?”“응.”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많은 게 담겨 있었다.몇 초의 침묵 끝에 민지가 다시 물었다.“언니... 그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요?”정은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왜 그렇게 생각해?”민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언니가 그분 볼 때 표정이 달랐어요. 친한 사람 대하는 게 아니라... 약간 조심스러운 느낌이랄까? 그리고 언니가 저를 일부러 멀리 데리고 갔잖아요. 그건 명백히 경계 반응이에요.”정은은 피식 웃었다.“혹시 내가 문제일 수도 있잖아?”“말도 안 돼요! 언니가 문제일 리 없죠! 있다면 분명 그쪽이 문제일 거예요.”그때 옆에서 서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왜 난 너의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한 번도 못 받아봤을까.”“당연하지! 네가 언니만큼 완벽해?”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 부부는 참... 매일 티격태격인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단 말이지.’하지만 정은의 머릿속 한쪽에서는 여전히 시호의 얼굴이 맴돌았다.부드러운 미소, 단정한 말투.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기운.‘이상하게... 불편했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싫었어.’정은은 마음속으로 그 생각을 털어내며 말했다.“민지야, 그 사람하고는 되도록 마주치지 마. 다음에 보게 되면 그냥 피해.”민지는 아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 언니.”민지는 매우 단호하게 대답했다.‘언니가 그런다고 하면, 그냥 그런 거야.’서준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또 한 줄 추가네. ‘남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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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8화

밤이 깊어가자, 하늘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별들이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정은은 방의 발코니에 서서 난간을 잡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역시 5성급 리조트다웠다. 멀리 불빛이 켜진 해변과, 가까이 물빛이 반짝이는 수영장이 한눈에 들어왔다.정은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쓴맛이 혀끝에 번졌다.카페인의 작용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정은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의식은 또렷했다.‘임시호가 왜 갑자기 포럼에 나타난 걸까? 정말 우연일까?’낮에 마주친 장면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됐다.시호의 표정은 놀란 듯했지만, 정은은 그 모습이 ‘연기’라 생각했다.시전에 완벽하게 계산하고 연습한 연극처럼, 시호는 모든 준비를 마친 듯했다.몸짓 하나, 시선 하나까지도 계산되어 있었다.단 한 가지 흠이라면...너무 완벽했다는 것.연극과 다르게 현실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변수와 허점투성이니까.정은은 핸드폰을 꺼내어 번호 하나를 눌렀다.그저 시도해보는 마음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아주 빠르게 전화가 연결됐다.[여보세요? 소정은 씨.]“오랜만이에요, 두리 씨. 잘 지내죠?”[그럭저럭요.]예전에 호주에서 정은은 두리 어머니 소유의 국내에 위치한 폐가를 사들이며, 두리와 ‘서로 만족스러운’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그래서 지금 사람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정은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두리였다.‘아마 나이에 비해 침착해서 그랬던 걸까?’‘아니면... 믿을 만하다고 느껴서일지도...’정은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사람 하나만 찾아줘요.”[죄송하지만, 소정은 씨. 저 지금 휴가 중이라... 국내에 들어와 있어요. 당분간 일은 못 받아요.]“그럼 잘 됐네요. 제가 찾는 사람도 국내에 있거든요.”“왜요? 혹시 그때 집값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두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정은 씨, 돈 욕심을 내자면 끝이 없어요. 저는 지금 부모님이랑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요.]“그래요? 난 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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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9화

“아, 그 사람.”“왜? 아는 사람이야?”“아니. 그냥 싫어.”지언은 순간 멈칫했다.그 뒤로 아무리 이유를 캐물어도 재석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날 이후 지언은 임시호와 다시는 협업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재석의 입에서 ‘싫다’라는 감정이 섞인 단어를 표현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그 정도 신호면 귀 기울일 만한 일일 것이다.[임시호가 널 찾아왔어?]“찾아왔다기보다... 두 번 마주쳤는데, 다 우연인 것 같아요.”‘우연인 것 같다...’재석은 정은의 마지막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정은 본인조차 확신이 없는 말.그렇다면, 정말 단순한 우연일 리 없었다.[그 사람, 포럼 초대 명단에 있었어?]“잘 모르겠어요. 오늘 낮 일정에서는 한 번도 못 봤거든요.”[괜찮아. 주최 측에 알아볼게.]정은은 흘끔 시계를 보며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됐어요. 벌써 늦었잖아요. 내일 물어봐요.”[그래.]...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지만, 재석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뒤척이다가, 결국 재석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 하나를 눌렀다.하지만 수신자는 전화받지 않았다.재석은 곧바로 영상통화로 바꿨다.이번엔 연결됐다.화면 속 진욱은 목욕 가운 차림이었다. 머리는 덜 말라 물방울이 얼굴과 목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야, 조재석. 뭐야, 왜 이렇게 급해? 나 방금 샤워 끝났거든? 물도 안 닦았어. 이거 진짜 중요한 일이어야 돼.]“개인적인 일이 좀 생겨서. 며칠 휴가 낼게. 실험실 좀 봐줘.”[뭐?! 돌아온 지 며칠 됐다고 또 휴가야?! 야, 실험실 담당이 대체 너냐, 나냐? 내가 반년간 너 대신 미친 듯이 이 실험실 굴렸거든? 이제 간신히 너한테 넘기고 좀 쉴까 했는데, 또 이러기야?]‘이게 무슨 상황이야. 돈 빌려줬더니, 갚자마자 또 빌려달라는 격이잖아...’[야, 조재석. 내 얼굴에 ‘호구’라고 쓰여 있어?]“방금 샤워했다며. 쓰여 있어도 이미 씻겨 내려갔겠지.”[뭐?]“걱정 마. 딱 3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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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0화

중간 휴식 시간.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최 측 스태프에게 다가갔다.“네오젠텍이요?”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확인 가능할까요?”“잠시만요, 명단 좀 볼게요.”스태프는 참가자 리스트를 넘기며 눈을 빠르게 움직였다.“아, 여기 있네요! 오늘 참석하셨네요. 세 번째 줄, 다섯 번째 자리입니다.”“감사합니다.”정은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세 번째 줄... 다섯 번째 자리...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본 순간, 정은의 발걸음이 멈췄다.‘하, 진짜 이럴 줄 알았지.’그녀는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찾았어. 네오젠텍 담당자, 임시호래.]“응, 알아요.”잠시 정적.[이미 만났어?]“아니, 아직이요.”마침 그 순간이었다.시호가 고개를 숙인 채 회의 자료를 넘기다 문득 고개를 들었고,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정은은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통화는 끊지 않았다.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또 보네.”그가 말했다.“이 정도면 인연이라 해야 하지 않겠어?”정은은 시선을 고정한 채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혹시 영어 이름 있어?”시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임시호... HO?”“어때? 나쁘지 않지?”시호의 눈에 잠깐 의문이 스쳤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맞장구쳤다.“HO라... 괜찮네. 근데 우리나라엔 그 이름 가진 사람 많잖아. 좀 평범해.”“내 영어 이름은 패트릭이야. 대학교 때 영어 회화 모임에서 같이 팀 됐었지. 그때 네가 지어줬잖아. ‘고결한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라면서.”“그래?”정은이 시호를 바라봤다.“기억 안 나.”“괜찮아.”시호가 부드럽게 웃었다.“나만 기억하면 되니까.”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고, 정은에 대한 감정을 어딘가 오랫동안 숨겨온 것 같았다.전화기 너머의 재석 얼굴은 이미 새까맣게 굳어 있었다.‘패트릭?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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