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641 - Chapter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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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1화

요양 빌라에서 이조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정은이 제일 먼저 이조화를 의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리고 이후 정은의 모든 행동은 이조화를 겨냥했다.만춘미는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수십 번이나 이조화를 욕했다.‘멍청하긴. 일이 다 끝났는데, 뭐가 급하다고 굳이 그때 섬으로 기어들어 가서 의심만 키우냐.’자신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연기를 해 내며, 오미선 교수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한 뒤, 애도하는 표정으로 장례식장에 나타났을 것이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약물학적 걸작을 확인했을 것이다.그 후 태연히 섬으로 돌아갔겠지.그리고 물론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주안나 간호사를 처리했을 것이다.이조화처럼 몇 달이 지나 정은이 호주까지 나타난 뒤에야 허둥대며 허점을 메우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결국 비밀 훈련소를 번거롭게 끌어들여 마무리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터였다.문서 끝에 적힌 만춘미의 진술은 섬뜩할 정도로 뻔뻔했다.후회도, 반성도 없었다.반대로 이조화는 눈물로 용서를 빌며 모든 걸 털어놓았다.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감형 따윈 없었다.만춘미와 이조화의 결말은 뻔했다.두 사람에게는 다시는 감옥 문을 나서 바깥 공기를 마실 날이 없을 것이다....정은은 이를 악물었다. 억눌러도 억눌러지지 않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손끝은 종이를 움켜쥔 채 떨렸고, 보고서 위엔 깊은 자국이 남았다.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다. 이조화와 만춘미의 잔혹함이 원망스럽고, 피도 눈물도 없는 비밀 훈련소의 냉혈함에 치를 떨었다.하지만 무엇보다... 왜 자신이 그때 오미선 교수를 끝까지 붙잡지 못했을까...‘그때 내가 조금만 더 단호하게 했다면...’‘목숨을 걸고라도 교수님을 말렸다면...’‘교수님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설령 교수님이 날 원망하고, 미워하더라도... 이렇게 교수님을 허망하게 보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야.’정은의 어깨가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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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2화

그건 마치 금이 가득한 금광을 발견한 것과 다름없었다.그냥 줍기만 하면 되는 보물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바보나 거절할 일이다.정은은 그 속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세력의 그림자를 떠올렸다.‘나는... 너무 작아. 이건 내 손에 쥘 수 없는 판이야.’‘그저 한 귀퉁이만 엿본 것도 이미 천군만마가 노니는 곳에 발을 들인 셈이지.’“그럼 내가 협조해야 할 건 뭔가요?”재석이 곧장 대답했다.“다른 건 없어. 주로 훈련소에서 남겨진 연구 성과 쪽이지. 게다가 난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섬에서 PO-X 바이러스가 그렇게 활발하게 변이하고 퍼진 게,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훈련소 실험과 연관돼 있을 거라고.”잠시 뜸을 들이던 재석이 덧붙였다.“조금 더 나아가면... 지하에 생물 실험실이 있을지도 몰라.”바이오 분야라면 정은의 주 전공이었다. 그가 나서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정은은 다시 물었다.“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이 문건, 재석 씨는 언제 받은 겁니까?”재석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이틀 전.”“팩스였습니까?”“위험하지. 그런 건 기밀에 절대 쓰지 않아.”“그럼...”재석이 정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섬 안에 국가에서 파견된 잠입 인력이 있어.”정은은 무심결에 숨을 들이켰다.차가운 공기가 목구멍을 스쳤다.재석이 빙긋 웃었다.“그러니까 앞으로 우린 둘 다 감시를 받게 될 거야. 미리 말해 두지. 예상보다 더 빡세질 수도 있으니까... 자, 소정은 씨. 앞으로 잘 부탁해.”...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맥스 군도는 열대 기후라 사계절 구분이 없었다.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그 아래 반짝이는 파도와 끝없이 이어진 바다만 있을 뿐이었다.반년 동안 풍경은 변함이 없었으나, 사람의 모습과 일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예를 들면, 올리버의 조랑말은 어느새 훌쩍 커 버려 털빛은 반짝이고, 체구도 우람해졌다.올리버의 집도 수리와 단장을 거쳐 이전보다 훨씬 아늑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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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3화

장원주 교수와 우철한 교수가 떠나는 날, 연구팀 전원이 부두로 나갔다.이제는 부두가 있으니 더는 진흙 갯벌을 밟으며 신발을 더럽힐 걱정도 사라졌다.정은이 도균성에게 연락해 배를 따로 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매일 정기 운항선이 드나드니 섬을 출입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배 갑판 위에 선 장원주와 우철한은 연신 손을 흔들었다.“전에는 매일 귀국하는 꿈만 꿨는데, 막상 떠나려니 또 아쉽네.”장원주의 눈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남으셔도 돼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배 금방 돌아옵니다.”우철한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에이, 또 저 놀리는구먼...”장원주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가서 손자 보고 살아야죠.”“손자? 언제 생겼어요? 전 왜 몰랐죠?”“헤헤... 이번 달에 태어났어요.”“이 양반 봐요, 꼭꼭 숨기고 있다가 이제야 말하네요! 전엔 우리 아들한테 여자 소개해 준다고 해놓고선 감감무소식이더니...”“하하하, 장 교수님, 안달 난 거 다 보입니다!”부두에 서 있던 전해산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정말 잘 됐어. 이 나이에, 이제 편히 쉴 수 있으니.”그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이 배어 있었다.이국의 섬, 낯선 땅과 바람... 누구든 결국은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었다.주광빈이 묵묵히 전해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자체로 충분한 위로였다.정은은 곧바로 모두의 아쉬움을 감지했다.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도 귀국할 수 있을 겁니다.”그러나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다들 그저 정은이 분위기를 달래려 던진 말이라 여겼다.“자, 갑시다. 할 일 해야지.”전해산이 말했다.해야 할 일을 서둘러 끝내야, 그만큼 빨리 귀국할 수 있는 법이었다.사람들은 하나둘 발길을 돌렸다.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말했는데도 안 믿어주네. 뭐, 어쩔 수 없지.’정은이 그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지난 반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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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4화

재석은 정은을 잘 먹이고 잘 챙겼다.데이터 해독에 성공한 뒤로 할 일은 산더미였다.정은은 다시 수천 건의 자료를 정리하고, 그중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을 선별해야 했다.어느 아침, 문득 호기심에 체중계 위에 올라섰는데...“헉...”무려 3킬로그램이 늘어나 있었다.‘3키로라니!’정은은 단호하게 선언했다.“오늘부터 저녁 안 먹습니다. 다이어트 시작이에요.”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가에 웃음을 띠었다.하지만 저녁 무렵, 기름에 볶은 마늘 향과 훈제 고기, 게다가 윤기 흐르는 갈비찜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정은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엉덩이 밑에 압정이라도 놓인 듯, 들썩이고 몸을 꼼지락거렸다.결국 정은은 스스로 그릇을 들고 젓가락을 집었다.한 입, 두 입, 그리고 끝없는 세 입...다이어트 계획은 채 하루도 못 가서 처참히 무너졌다....데이터 정리와 분석은 해독에 비해 한결 수월했다.정은은 보름 만에 모든 정리를 끝냈다.하지만 결과를 확인한 순간, 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숨을 삼켰다.맥스 군도에 퍼져 있던 PO-X 바이러스 변종은 모두 비밀 훈련소에서 인위적으로 배양한 뒤, 섬 곳곳에 무작위로 살포된 것이었다.감염된 섬 주민들은 결국 섬에 단 하나뿐인 진료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 진료소야말로, 비밀 훈련소가 인간 감염 데이터를 수집하는 아지트였다.즉, H국은 노골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이 사실을 확인한 정은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역사 속 그 치욕이, 왜 또다시 이렇게 되풀이되는 거야!’재석이 조심스레 정은의 손을 감싸 쥐었다.꽉 움켜쥔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며 낮게 속삭였다.“정은아... 지금 우리나라는 아주 강해.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지.”그 말에 정은의 가슴이 세차게 흔들렸다.‘그래... 뒤처지면 두들겨 맞는 게 세상 이치.’‘다행히 지금의 우리나라는 지킬 힘이 있다.’정은은 다시 자료를 정리해 연구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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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5화

지언이 두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리아는 단번에 알아챘다.지언의 얼굴에 드리워진 먹구름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답은 하나, 지언의 어머니, 강서원이었다.“어머니가 또 자기를 괴롭게 하셨구나?”지언은 손끝으로 미간을 눌렀다가, 억지로 웃으며 손을 저었다.“괜찮아. 자, 현우야, 아빠랑 씻자.”리아는 더 캐묻지 않았다.‘원치 않는데 굳이 파고들어 뭐 하겠어.’그 대신 딸의 손을 잡았다.“현민아, 우리도 씻자. 오늘은 거품 목욕 어때?”“과일 향 샴푸로 하고 싶어요.”“좋아, 상큼한 유자 향으로 해 줄게.”...아이들 씻기는 시간이 분주하게 흘러갔다.현민에게 잠옷을 입히던 순간...“엄마! 엄마! 아빠가 쓰러졌어요!”현우가 알몸 그대로 달려와 울먹이며 소리쳤다....병원.지언은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눈을 떴다.낯선 천장이 한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여기가... 어디지...’그러나 곧 병실임을 알아차렸다.“아빠! 깼어요!”현우가 침대 곁으로 달려와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곧장 다시 뛰어나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엄마! 아빠 안 죽었어요! 아빠 깨어났어요!”지언은 말문이 막혔다.잠시 후, 리아가 걸어 들어왔다. 침대 옆에 서서 잠시 지언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리고 곧, 한마디를 내뱉었다.“조지언, 참 대단하다. 일주일을 밤새우다시피 하고, 아빠 노릇하겠다고 버티는 거야? SP그룹은 당신이 없으면 무너져? 아니면 당신이 먼저 쓰러지면 다른 남자가 와서 자기 자식들 키우게 할 속셈이야?”지언의 눈빛이 벌게졌다.“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리아도 자신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하지만 참았던 진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한 달 전에도 위궤양으로 쓰러져 입원한 사람이, 고작 몇 주 만에 같은 이유로 다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고서야... 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이 와중에 애들 아빠한테 그런 소리 하고 싶어?”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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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6화

“뭐라고?!”강서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뭐라니요? 사모님의 눈이 어두워서 못 알아들으시는 거예요? 비웃은 거 맞습니다. 뭘 비웃냐고요? 대체로 완벽하게 숨어 있다가, 바람만 살짝 불어도 튀어나와서 사람 속 긁는 당신 같은 늙은이요.”리아는 눈을 치켜뜨며 이어갔다.“정말 신기하네요. 사모님은 스스로가 얼마나 반갑지 않은 존재인지 한 번도 생각 안 해보셨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눈뜬장님처럼 살 수 있죠?”“제가 뭐냐고요? 좋아요, 말씀 드릴게요. 제 성은 변, 이름은 리아. 그리고 사모님이 말한 그 ‘마음 씀씀이’? 죄송하지만, 사모님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고요? 사모님은 제 마음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제가 아직 병실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사모님은 자기 아들이랑 두 손자 앞에서 대놓고 저를 헐뜯었죠?”“제가 그냥 나가버리면, 사모님의 입으로 저를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버릴 거잖아요. 근데 제가 사모님한테 뭘 잘못했어요? 설마 제가 화낼 줄 모른다고 생각하신 거예요?”리아는 냉소적으로 웃었다.“사모님은 뭔데요? 좀 기분 나쁘시겠지만, 사모님 아들도 저에게는 한단 수준이에요. 그런 아들 엄마인 사모님을 왜 제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대체 제가 만만해 보이는 건 누가 준 착각이죠?”“됐어요, 할 말 끝났습니다. 사모님은 자기 아들 잘 챙기세요, 전 이만... 가자, 현우, 현민!”“네, 엄마!”현우와 현민이 동시에 대답했다.떠나기 전, 현우가 고개를 돌려 아직 멍하니 서 있는 강서원을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할머니, 그러니까 제가 뭐랬어요? 괜히 우리 엄마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근데 할머니는 제 말 끝까지 안 들으시네요?”현민은 대놓고 눈을 굴리며 말했다.“무슨 할머니야, 너 바보냐? 엄마가 이미 지언 아저씨 버렸잖아. 그러니까 이제 할머니도 아니지.”현민은 지언을 아빠가 아닌 ‘지언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엄마의 결정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 적극적인 행동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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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7화

지언은 새 병실로 옮겨 침상에 누웠다.리아는 지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는 따지지 않았다.강서원만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결국 허탈함만 남았다.어쩔 수 없었다. 지언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회유도 협박도 통하지 않고, 막다른 길에 몰리면 아버지건 어머니건 가리지 않고 맞받아쳤다.다만 이렇게까지 미쳐버린 듯 날을 세우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오늘은 결국...‘변리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강서원은 이를 악물고 가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가버렸다....리아의 감시 아래, 지언은 얌전히 종합 건강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고, 과로로 인한 일시적 실신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다음에도 이럴 거야?”리아는 두 팔을 꼬고 병상 옆에 기대섰다.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지언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이번 한 번뿐이야. 다시는 안 그래. 맹세할게. 요즘 일이 너무 많았고... 게다가 어제 본가에 다녀오면서 내가...”말끝이 뚝 끊겼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 말을 멈춰? 어제 본가에 가서, 당신이 뭘 어쨌다고?”“아무것도 아니야.”리아는 곧장 현민을 불렀다.“현민아, 네가 말해.”현민은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어제 할아버지 집에서 아빠랑 할머니가 서재에서 한 삼십 분 얘기했어요. 근데 나오실 때 아빠 얼굴이 완전 흑빛이 돼서, 저랑 현우만 데리고 인사도 안 하고 그냥 나와버렸어요. 그러면서 다음에 또 본가 오면 돼지라고 했어요.”현민은 발음 또렷하게, 말도 아주 정확했다.게다가 상황에 따라 ‘아빠’와 ‘지언 아저씨’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부르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리아는 다 듣고 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지언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아... 그래서 화병 난 거구나? 내가 말했지, 괜히 본가 드나들지 말라고. 멀쩡하다가 거기만 갔다 오면 꼭 사고가 나잖아.”“이건...”지언이 코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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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8화

지언의 목덜미가 갑자기 서늘해졌다.“크흠! ...이번 일 겪으면서 재석이도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을 거야. 정은이를 다시 붙잡은 건, 곧 노선을 정했다는 뜻이니까.”“무슨 뜻이야?”조지언은 단호하게 말했다.“뜻은 간단해. 재석이 이제 더는 우리 어머니를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거지. 당신이 아까 ‘재석이는 만만하다’고 했잖아?”“아니야. 재석이 절대 만만하지 않아. 한 번 마음먹으면, 팔십 마리 소가 끌어당겨도 못 돌려세워. 한번 믿어봐, 재석이랑 정은이가 귀국하면 우리 어머니가 받는 충격, 오늘 일보다 훨씬 클 거야.”지언의 반항적인 기질 때문에 리아 편만 드는 건 강서원도 예상하고 각오했을 것이다.어릴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으니까.하지만 재석은... 늘 가장 다루기 쉬웠던 아들이 오히려 가장 건드리기 힘든 존재로 변한다니, 이 반전은 강서원의 상상 밖의 일일 것이다.“자기야, 귀국하고 나면 진짜 본경기 시작이야.”...큰 이상이 없다는 진단 덕분에 지언은 다음 날 바로 퇴원했다.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곧장 회사로 향했다.어제 리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몸을 혹사하느냐고?지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내랑 애 둘 먹여 살리려면, 내가 안 뛰고 누가 뛰나.’하지만 진짜 이유는...어느 날 새벽, 지언은 우연히 서재 불빛을 보고 들어갔다가 리아가 화상 회의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상대는 DelveDeeper의 CFO로 보였고, 분기별 자산 증액 보고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 D국을 통째로 사들이겠다는 계획이었다.첫 단계만 해도 무려 12조 원.그 순간, 지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1초, 2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지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2차 투자 예상 금액이 38조 원.‘뭐야, 지금... 진짜 저게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야?’국가 하나를 산다니.아무리 작은 나라이고 최빈국이라 해도, 엄연히 한 국가다!그리고 무엇보다...‘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단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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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9화

내년이나 되어야 끝낼 수 있을 거라던 세 프로젝트가, 예정보다 훨씬 일찍 마무리됐다. 후속 자금도 막힘없이 들어왔다.그 뒤 SP그룹 투자부에서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며, 임원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조지언 대표가 달라진 것이다.예전엔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신중한 스타일이었는데, 이제는 리스크와 리턴을 동시에 겨냥했다.‘이건 뭐지? 대표님이 갑자기 돈을 벌어야겠다는 집착이라도 생긴 건가?’‘아니, 그냥 돈이 아니라, 크게, 아주 크게 벌고 싶어진 거잖아?’사실 이런 변화는 국내 대기업들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SP그룹처럼 오래된 기업은 운영이 길어질수록 사람도, 조직도, 의사결정 방식도 느슨해진다.이건 국내 굴지의 재벌들이 공통으로 앓는 병이었다.결국, 창업자의 공격성과, 그걸 이어가는 후계자의 수성 전략이 맞부딪히는 문제다.지언은 줄곧 자신을 ‘후계자’로 여겨왔다.자신의 역할은 SP그룹의 영광을 지키고, 그 빛을 연장하는 것.중요한 건 확장이나 변신이 아니라 ‘연속성’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리아와 자신을 나란히 놓고 보니, 차이가 너무도 선명했다.‘나는 지금까지 안전한 궤도에 안주해 있었구나.’‘왜 한 번도 SP그룹을 내 손으로 새로운 정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까?’조기봉은 이미 손을 떼고 낚시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조기동은 가문의 철칙을 지키며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말하자면 지금 SP그룹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과 주도권은 지언에게 있었다.조건도, 자본도 충분했다. 문제는 지언 자신이 늘 한발 물러나 ‘상황을 유지하는 사람’으로만 남아 있었다는 것.그리고 누구도 지언의 자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SP그룹은 이미 매우 거대한데, 더 뭘 바라겠어.’다들 그렇게 생각했고, 지언 본인조차 동의해 왔다.그때까지는...리아가 지언의 안일함을 정면으로 찔러 깨우기 전까지는......각 부서 부장이 은근슬쩍 지언의 상황을 떠보기 위해 비서에게 질문했다.“대표님 요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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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0화

리아의 일 처리 능력은 언제나 믿음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J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하린의 학적이 깔끔하게 정리됐다.한 달 전 수능시험이 끝났고, 바로 엊그제 성적이 나왔다.하린은 전교 상위 10위 안에 들 정도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나는 네가 수석할 줄 알았는데.”리아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그건 싫어. 괜히 주목받기 싫어. 서비대 합격할 점수면 충분해.”“그럼, 일부러 점수 조절한 거야?”하린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근데, 넌 왜 그렇게 서비대에 가고 싶어 하는 거야?”“언니가 거기 있잖아.”리아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이런 이유라면, 백 번이고 받아주고 싶네.’“언니, 있잖아. 나 4년 뒤에 대학원 가면, 정은 언니가 내 지도교수 맡을 수 있나?”“뭐라고?”“본교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할 수 있잖아. 그럼 좀 유리하지 않을까 해서...”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리아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하린은 이미 계산을 끝내놓은 듯 진지했다.“시간도 딱 맞아. 정은 언니 지금 박사 과정 2년 차니까, 졸업하면 아마도 학교에 남아서 연구할 거야. 내가 학부 졸업하면, 딱 정은 언니 첫 제자나 두 번째 제자가 되는 거지.”“하린아, 너 정말 서비대 가고 싶은 이유가 나 때문인 거 맞니?”하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개학 전까지, 하린은 대부분 시간을 보육원에서 지냈다.직접 자원봉사를 하며 버려진 아이들을 챙기고, 먹이고, 같이 놀아주며 시간을 보냈다.리아가 챙겨주는 생활비도 거의 전부 이곳 아이들을 위해 썼다.리아는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았다.‘왜 저렇게 보육원에 집착하지? 애들이랑 어울리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리아 자신은, 좋지 않았던 기억 탓인지, 이곳에 올 때마다 온몸이 불편했다.하지만 그 불편함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지금의 행복으로도 충분했다.하린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인사를 받고, 환한 웃음소리 속에 보육원을 나설 때면, 해는 이미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리아는 차 안에서 하린을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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