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901 - Chapter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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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1화

“하, 사랑이라는 게 다 인연이지. 사람마다 타고난 인연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도겸이가 운이 좋아서 만날 때마다 정말 쉽지 않은 좋은 아이를 만났어요.”서영숙은 겸손한 척 말을 이었다.지금에 와서야 서영숙은 정은을 ‘쉽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아이’, ‘좋은 아이’라고 인정했다.예전의 서영숙은 정은을 수도 없이 못마땅해했다.정은의 집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정은이 소심해 보인다고 헐뜯었고, 학벌이 부족하다고 깎아내렸고, 취향이 별로라고 몰아붙였다.나중에 정은이 서비대에 합격해 석사에서 박사까지 밟고, 이제는 이름난 학자로 자리 잡았는데도 서영숙은 정은을 좋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마치 전 여자친구를 바닥까지 끌어내릴수록, 자기 아들이 사랑에서 잘못한 쪽이 아닌 것처럼 보일 거라고 믿는 듯했다.그런데 오늘 도겸의 결혼식장에서 서영숙은 처음으로 정은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있었다.서영숙은 뒤늦게 깨달았다. 전 여자친구가 좋은 사람이어야 자기 아들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을.예전에 서영숙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분명 정은을 겨냥한 말들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해졌다. 그때는 안목이 얕고 비루했다.몇몇 재벌가 사모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세상에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나?’‘이제는 자기들 앞에서 정은이 욕을 안 하네.’정은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이미 기준이 정해진 일에 대해 계속 말을 비틀어 봤자, 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결국 서영숙만 우스운 사람이 될 뿐이었다.예전의 서영숙은 그걸 몰랐고, 그래서 사람들은 서영숙을 웃음거리로 삼았다.그런데 오늘의 서영숙은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이제는 정은을 칭찬하고 있었다.이제 웃을 거리도 사라지니, 다들 흥이 식었다.사람들은 두셋씩 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더는 입구에서 서영숙을 붙잡고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다.인사치레는 핑계였다.서영숙이 뻔뻔하게 떠드는 걸 듣고, 뒤에서 낄낄대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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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2화

서영숙이 낮게 말했다.“한 번 겪어봤으면, 이제는 사람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더 아는 줄 알았는데.”사랑이 아니라, 그저 존중이었다.“그래, 네가 은율이를... 두번째 정은이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사랑하게 됐다가 잃고, 잃었다가 붙잡으려 하고, 붙잡으려 해도 끝내 실패하는 일.서영숙은 도겸을 깊게 바라봤다.“그리고 우리한테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했다고 말하지 마. 맞선 보겠다고 한 것도, 결혼하겠다고 한 것도 다 네가 결정한 거야. 나랑 네 아빠는 그 책임 안 져.”도겸은 시선을 가라앉힌 채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엄마, 알았어요.”“그래. 진짜로 알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결국 미래로 나아가야지.”서영숙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도겸은 그대로 입구에 남아 하객을 맞았다.조기봉과 강서원이 도착했을 때, 마침 이춘재와 봉수진도 함께 도착했다.두 집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조기봉이 먼저 말을 걸었다.“요즘 몸은 어떠세요?”이춘재가 웃으며 답했다.“나쁘지도, 좋지도 않고. 그냥 늘 그렇지.”“그렇다면 됐네요. 지난주에 재석이 편으로 보낸 민물고기 매운탕 재료는 어땠어요?”이춘재의 눈이 반짝였다.“그 얘기 하려고 했지. 어디서 산 거야? 살이 통통하고 부드럽더라.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낫던데.”조기봉이 헛기침을 했다.“제가 직접 잡은 겁니다.”“그래서 그랬구나! 낚시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듣자 하니 자연 낚시 나가면 며칠씩 있다 온다면서?”“응. 보통 차 몰고 나가요. 왕복 이동이 이틀, 중간에 이틀이나 사흘 낚시하고, 가끔 근처 좀 돌아다니면... 계산해 보면 대략 일주일입니다.”두 남자는 세대 차가 있었지만, 그건 대화에 아무 방해가 되지 않았다.봉수진과 강서원은 뒤쪽으로 살짝 떨어져 걸었다.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정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봉수진이 조심스레 말했다.“정은이가 지금 쌍둥이 임신인데도 상태가 괜찮아 보이더라. 몸도 특별히 불편해 보이지 않았고.”강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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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3화

예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의 인사가 이어졌다.도겸은 새로 아내가 된 은율과 함께 테이블을 하나씩 돌며 잔을 올렸다.몇 테이블을 지나자, 은율의 웃음이 조금씩 굳어졌다. 발걸음도 서서히 흐트러졌다.도겸은 잔을 들고 앞에서만 걸었고, 은율의 불편함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은율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묵직해진 머리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리고 속으로 자신을 다잡았다.‘버텨. 어차피 이런 건... 평생 한 번일지도 몰라.’그때 서영숙이 다가와 은율의 팔을 받쳐 들었다.은율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여사님?”서영숙이 곧바로 받아쳤다.“여사님은 무슨. 아직도 여사님이야? 알겠다. 내가 예물을 너무 적게 해줘서 그렇지.”“아니에요, 아니에요... 어머니.” 은율이 급히 말을 고쳤다.그제야 서영숙이 웃었다. 서영숙은 은율 손에서 술잔을 가져가고, 손짓으로 직원 한 명을 불렀다.“물로 바꿔 와. 미지근한 거 말고.”도겸이 뒤늦게 옆을 보며 낮게 말했다.“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손님이 이렇게 많은데...”서영숙은 앞에서 혼자 걸어가는 도겸을 한 번 노려봤다. 이 와중에도 도겸은 은율 쪽 이상을 못 알아차리고 있었다.뒤를 돌아보기라도 하며 ‘왜 그래’ ‘어디 아파’ ‘왜 안 따라와’ 같은 말 한마디가 없었다.서영숙이 은율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오늘 손님이 백 테이블이 넘는데, 테이블마다 한 잔씩 다 마시면 반도 돌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진다.”“그런데...” 은율은 앞쪽의 신랑, 도겸을 바라봤다.도겸은 정말로 테이블마다 돌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자기만 물로 바꾸면, ‘내가 민폐인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서영숙이 말했다.“걔 신경 쓰지 마. 걔가 뭐라고 하겠어. 물어보면, 내 생각이라고 해.”서영숙은 은율이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직원이 가져온 물잔을 거절 못 하게 손에 쥐여줬다.은율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결혼 전, 부모님은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시어머니가 만만한 분은 아닐 수 있다’라고 했었다.그런데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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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4화

은율은 잠깐 멈칫했다. 도겸이 이렇게 반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괜찮아요. 어머니가 직원한테 물로 바꿔 주라고 하셨어요. 다만... 손님들이 혹시 기분 상하지 않을까 걱정돼서요.”도겸이 짧게 말했다.“신경 쓰지 마.”“네.”...오늘 결혼식장에는 심경혜도 와 있었다.심경혜는 예전에 서비대 대학원에 합격했을 때 정은, 민지, 서준과 같은 기수였지만, 지도교수는 달랐던 그 여학생이었다.그때 경혜는 우연히 도겸을 마주쳤다.첫눈에 경혜는 알아챘다. 도겸은 ‘부자가 아니면’ 아예 ‘권력 있는 집안’ 쪽이라는 걸.경혜는 일부러 몇 번이고 가까이 다가갔고, 말을 걸었고, 반응을 살폈다. 그러다 끝내 두 사람은 거래했다.경혜가 도겸의 ‘연기’에 맞춰주며 정은을 자극해, 정은이 다시 만나주도록 만들기.그 대가로 도겸은 경혜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댔다.경혜의 계획은 분명했다. 일단 이 기회를 이용해 도겸의 옆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간을 두고, 함께 지내는 동안 도겸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다.경혜는 자신이 있었다. 외모도, 머리도, 눈치도, 말 센스도.도겸의 마음을 ‘얻는’ 건 시간문제라고 믿었다.‘서연희 같은 애도 올라갔는데, 내가 안 될 리가 없잖아.’하지만 경혜는 한 가지를 잘못 봤다.도겸은 이별로 한 번 크게 흔들린 뒤, 정은에게 더 깊게 매달렸다. 그 집착과 마음은 심경혜가 생각한 수준이 아니었다.정은과 재석이 공식적으로 사귄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경혜는 알았다.‘이제 끝이구나.’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곧 도겸이 거래를 끝내자고 말했다.전 여자친구가 이미 남의 ‘현 여자친구’가 됐는데, 도겸이 굳이 다른 여자를 이용해 정은을 흔들 필요가 있을 리 없었다.경혜는 완전히 쓸모가 없어졌다.협력이 끝난 뒤에도, 경혜는 몇 번 도겸과 ‘우연히’ 마주치는 자리를 만들었다.하지만 도겸은 오래된 빙하 같았다. 경혜가 아무리 열을 올려도 도겸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시간이 지나자 경혜도 자신감과 흥미를 잃었다. 도겸에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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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5화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경혜는 이 거대한 결혼식을 지켜봤다.너무 멀어서 신랑 신부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혜의 속은 질투로 뒤집혔다.‘왜 나는 그렇게 애써도, 위로도 못 가고 아래로도 못 내려가서 걸려 있어야 하지?’‘왜 어떤 사람은 금수저로 태어나서 숨도 안 차게 부자랑 결혼하는 거지?’‘왜 같은 계층끼리는 결국 다시 그 계층으로 돌아가서 서로를 고르는 거야?’경혜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나도 부족한 거 없는데...’“경혜 씨? 왜 그래요?”남자친구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경혜의 시선에는 눈앞의 남자가 너무 평범하게 박혀 있었다.공사장에 섞어 놓아도 시멘트 포대 나를 법한 얼굴, 살이 오른 배, 탈모 티가 나는 정수리.그 모습 위로, 도겸의 잘생긴 이목구비와 ‘강’라는 성이 가진 무게가 겹쳤다.경혜의 마음속 불균형이 끝까지 치솟았다.경혜는 억지로 웃음을 끌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제가 같이 갈까요?”“괜찮아요. 금방 올게요.”...어렵게 테이블 인사를 마친 은율은 대기실로 돌아왔다.하이힐부터 벗으려는 참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은율은 곧바로 허리를 세우고,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문이 열리며 경혜가 들어왔다.경혜는 그저 운을 시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신부가 정말 안에 있었다.경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은율은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예쁘고, 정교하게 꾸민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은율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누구세요?”은율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도겸과 함께 인사 다닐 때, 도겸이 경혜를 따로 소개한 적은 없었다.그러면 중요한 하객은 아니라는 뜻이었다.경혜가 말했다.“저 심경혜라고 합니다.”은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세요?”경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신부님은 오늘이 처음 뵙지만, 강 대표님은 처음 뵙는 게 아니에요.”“그래요?”은율이 눈썹을 살짝 올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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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6화

경혜는 말이 막혔다.‘왜 저 사람은 화가 난 기색이 하나도 없지?’경혜는 방금 자기 입으로 꽤 노골적인 말을 던졌다. 그런데 은율은 흔들리지 않았다.경혜는 다시 한번, 더 직접적으로 밀어붙였다.“그래도 저는 늘 한 말을 믿어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그 여자한테 돈을 써요.”은율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럼 제 남편이 심경혜 씨한테 돈을 썼다는 말씀이세요?”경혜는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상대를 흔들 수 있는 틈을 찾은 것처럼.“제가 대학원 다니는 동안 등록금이랑 생활비, 전부 강 대표님이 내주셨어요.”은율의 미간이 좁아졌다.경혜는 ‘이제 됐지’라는 확신으로 은율의 반응을 기다렸다.몇 초가 지났다.은율이 되물었다.“네? 그런데요?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그걸로 끝이에요?”경혜가 멍해졌다.은율은 계산하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등록금이랑 생활비면... 4년 잡아도 얼마예요? 가장 비싸게 잡아서 M국 유학이었다고 쳐도 합쳐 봐야 몇억 원 수준은 아니고... 그래도 대단한 금액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잖아요. 국내에서 대학원 다닌 거면 더 적었을 테고요.”은율은 시선을 고정했다.“그럼 강 대표가... 집이나 상가 같은 부동산, 아니면 금 같은 걸 따로 준 적은 없어요?”경혜는 대답을 못 했다.은율의 표정에는 의문만 남아 있었다.“그럼 보석이나 가방 같은... 그런 건요?”경혜는 또 입을 다물었다.‘세상에...’은율은 속으로 한 번 생각이 스쳤다.‘강도겸이 그렇게 인색해?’‘그럴 리가 없는데...’은율은 결혼 전에 아버지가 조사해 온 내용이 떠올랐다. 도겸은 통이 큰 편이라고 들었다. 전 연인에게까지 이렇게 계산적으로 굴었을 리가 없다.‘그럼...’은율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더 정확한 단어를 골랐다.“혹시... 심경혜 씨가 강 대표랑 그런 관계였던 건 아니고요? 등록금, 생활비... 그건 좀... 지원에 가깝게 들리는데요.”경혜의 ‘험담’은 그 자리에서 힘을 잃었다.경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제대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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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7화

정은은 사람들 한가운데에 둘러싸인 채 밖으로 밀려나듯 걸어 나왔다.누군가는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자고 했고, 누군가는 노트를 펼쳐 질문을 쏟아냈고, 누군가는 꽃다발을 안고 정은에게 건네려 했다.사람들이 정은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말 그대로 ‘센터’였다.정은은 눈에 띄지 않기가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도겸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조경 장식 너머로 도겸의 시선은 이미 그쪽에 붙어 있었다.“소 교수님, 아까 강연에서 AlphaFold2 같은 도구가 단일 단백질 구조는 고정밀 예측이 가능해졌다고 말씀하셨잖아요.”“그런데 동적 복합체 구조, 예를 들면 단백질-단백질이나 단백질-소분자 상호작용 예측은 아직 오차가 크다고요. 이 병목을 넘기 위한 핵심 방향이 뭐라고 보세요? 실험 데이터랑 AI 모델은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요?”“...”“롱리드 시퀀싱이 게놈 어셈블리 연속성은 확 올려줬는데, 반복서열이 빽빽한 구간이랑 대규모 구조 변이를 정확히 잡아내는 건 여전히 어렵잖아요. 그런 구간을 풀기 위한 핵심 기술이나 알고리즘에서 최근 진전이 뭐가 있을까요?”“...”“게놈, 전사체, 단백질체 같은 멀티오믹스 데이터를 통합하는 게 생물 조절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핵심인데요.”“오믹스마다 스케일이 다르고 노이즈 수준도 제각각이라 통합 결과가 비뚤어지기 쉽잖아요. ‘표준화하고 통합’하는 방식이랑 ‘모델 기반으로 공동 모델링’하는 방식, 두 전략의 장단점을 어떻게 보세요?”“...”전문적인 질문이 연달아 던져졌다.정은은 질문을 하나씩 받아, 차례대로 답했다.질문자가 다시 질문을 정리해 줄 필요도 없었다.정은은 정교하게 조정된 장치처럼 흔들림 없이 핵심을 뽑아내고 안정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시간이 흐를수록 해는 점점 내려갔지만, 사람은 오히려 더 붙었다.정은은 가운데 갇힌 채 공기가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배 쪽을 감싸며, 최대한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여러분이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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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8화

“여보?” 은율이 다시 한번 도겸을 불렀다.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돌려세웠다.“물 드실래요?” 은율이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고마워.”“당신 또 잊었죠?”도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은율이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고맙다’라는 말이 좋아요?”은율은 속으로 한 번 더 생각했다.‘예의는 바르네. 근데 조사 자료엔 이런 스타일이라고 안 써 있었는데...’도겸이 피식 웃었다.“그럼 앞으로는 하지 말까?”“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할 필요는 없어요. 하긴 하되, 너무 자주만 하지 말아요.”“알겠어.”도겸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곧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왔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 그대로 자리를 떴다....밤이 깊어졌다. 신혼집의 안방.은율은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그런데 도겸은 방에 없었다.은율은 거실까지 나가봤다. 도겸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집중한 모습이 원래도 잘생긴 옆선을 더 눈에 띄게 했다.은율은 자기 선택을 더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못생긴 남자랑 결혼해도, 잘생긴 남자랑 결혼해도, 결혼 후에 문제는 터질 수 있다.그렇다면 선택은 간단했다.‘뭐가 됐든 잘생긴 쪽이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으니까.’화가 날 때도, 그 얼굴을 한 번 떠올리면 분노가 절반쯤은 가라앉는다.‘한때라도 내가 가졌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더욱.‘이거 꽤 괜찮은데?’도겸은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도겸의 시선이 은율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은율이 눈을 깜빡였다.“제가 방해했어요?”도겸은 노트북을 덮었다.“아니. 마침 끝났어.”은율은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우유 드실래요?”“뭐?”은율이 태연하게 말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 잔... 건강에 좋잖아요.”도겸은 말이 없었다.은율이 어깨를 으쓱했다.“안 드시면 말고요. 그럼 제가 마실게요.”은율이 주방으로 돌아서려는 순간.“잠깐.” 도겸이 갑자기 불렀다.은율이 뒤돌아보니, 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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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9화

도겸이 눈을 들어 은율을 봤다.“얘기 좀 할까?”은율은 잠깐 멈칫했다가, 웃으며 다가가 도겸 옆에 앉았다.“좋아요.”도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결혼 상대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도겸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피식 웃었다.“뭘 알아?”“당신 입으로 듣고 싶어서요.”“그래.” 도겸은 한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나에겐 아직도 잊지 못하는, 후회가 남는 관계가 있어. 결혼 전에 당신한테 말했던 그대로야. 지금도... 내 마음에서 그 사람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어.”은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동의하듯 말했다.“제 전 연인이 소정은 같은 사람이었으면, 저는 당신보다 더 못 잊었을 것 같아요.”‘가졌다가 잃는 것만큼 잔인한 건 없지.’은율은 자기 말 끝에, 문득 새신랑이 조금 안쓰러워졌다.시작점이 너무 높았다. 그 뒤로 도겸 인생에 들어올 여자들은 비교되는 순간부터 불리할지도 몰랐다.은율은 그 생각이 자기 자신까지 그 ‘비교되는 쪽’에 넣어버렸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도겸은 그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도겸과 정은의 과거는 이 바닥에서 비밀이 아니었다. 은율이 알고 있는 건 이상할 일이 없었다.도겸이 진짜로 놀란 건 은율의 반응이었다. ‘전 연인이 소정은 같은 사람이었으면 더 못 잊는다’라니... 이 말은 어딘가 묘했다.도겸이 물었다.“내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진짜 이해한 거 맞아?”은율이 자연스럽게 답했다.“이해했어요. 당신 마음속에 사람이 있으니까 저한테 전부를 주긴 어렵다는 말이잖아요.”은율은 허리를 조금 더 세우며 말을 이었다.“그럼 저도 질문이 몇 가지 있어요.”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말해.”은율이 차분하게 물었다.“저랑 결혼한 건, 아무나 한 명 필요했는데 제가 마침 나타나서예요? 아니면 제가 괜찮다고 생각해서 저를 아내로 선택한 거예요?”도겸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해?”“당연히 중요하죠.”은율은 생각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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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0화

은율이 말했다.“그게 제 두 번째 질문이에요.”도겸은 흥미가 생긴 듯 몸을 살짝 뒤로 기대었다.“자세히 말해 봐.”은율은 도겸의 자세가 바뀐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진지하게 물었다.“당신은 계약 결혼을 원하세요, 아니면 반 계약 결혼을 원하세요?”“계약 결혼이라는 건 뭐야?”은율이 설명했다.“사람들 앞에서는 부부처럼 보이고, 둘만 있을 때는 친구처럼 지내는 거요. 같이 자는 건 없고요. 사회적 자리에는 서로 맞춰서 다 같이 나가고, 서로 체면을 세워주고, 두 집안에 대한 예의도 지켜요.”“그럼 반 계약 결혼은?” 도겸의 눈썹이 더 느슨하게 올라갔다.은율이 말했다.“일반적인 부부처럼 지내는 거예요. 다른 조건은 방금 말한 거랑 똑같고요.”도겸이 확인하듯 물었다.“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잠자리는 된다는 거지?”“크흠... 그거 말고도요.” 은율이 헛기침을 했다. “결혼에 대한 기본적인 충성은 지켜야죠. 밖에서 막 놀면 안 되고요.”“그럼 그냥 일반 부부랑 똑같은 거 아냐?”“완전히 같진 않아요.” 은율이 고개를 저었다. “일반 부부는 마음도 몸도 전부 서로에게 속하길 바라잖아요. 저는... 몸만 충실하면 돼요. 밖에서 아슬아슬한 선을 밟는 건 몰라도 선은 넘으면 안 돼요. 그건 제 기준이에요.”도겸의 눈이 조금 깊어졌다. 도겸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에서 오래 있었더니 생각이 꽤 열려 있네.”은율이 도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지금 저 비꼬는 거예요?”“전혀 아니야.”“좋아요. 믿을게요.”그 말에 도겸이 오히려 잠깐 멈칫했다.은율이 덧붙였다.“정상적인 부부라면, 기본적인 신뢰는 있어야죠.”‘신뢰...’도겸이 물었다.“나랑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은율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에요. 제가 먼저 신뢰를 주는 거예요. 그게 당신한테서 같은 수준의 신뢰로 돌아오길 바라는 거고요.”도겸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그럼 반계약 결혼이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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