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921 - Chapter 1930

1952 Chapters

제1921화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정은과 재석은 주택단지 중앙 정원을 두 바퀴나 돌았다.재석이 먼저 말했다.“이쯤이면 됐어. 들어가자. 이제 춥다.”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경비실 앞을 지날 때, 경비원이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조재석 교수님, 소 교수님, 집에 들어가는 길이세요?”재석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인사를 주고받았다.경비원은 손에 핫팩을 쥔 채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감탄했다.“사이가 진짜 좋네.”열 번 보면 아홉 번은 손을 잡고 있고, 한 번은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마치 아직도 연애 초반처럼 보일 정도였다....샤워를 끝낸 정은은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녀는 배를 살피려고 잠옷 밑단을 살짝 들어 올렸다.재석이 욕실에서 나오자, 본 건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은의 모습이었다.재석이 물었다.“뭐 봐?”정은이 말했다.“튼살 안 생겼어.”재석은 이미 임신 오일을 들고 정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재석은 손바닥에 오일을 덜어 두 손을 맞대고 비볐다.오일은 체온을 타고 서서히 따뜻해졌다.재석은 그제야 정은의 도톰해진 배에 오일을 발랐다.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재석이 자랑하듯 말했다.“그럼. 매번 바르고 나서 내가 확인하잖아.”정은은 재석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남자의 입술에 한 번 입을 맞췄다.그런데 정은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은의 혀끝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재석의 입술 사이를 벌렸다.재석은 잠깐 굳었다가, 겨우 숨을 고르며 상체를 뒤로 뺐다. 두 사람 입술 사이가 아주 조금 멀어졌다.재석이 낮게 말했다.“안 돼...”숨은 가볍게 흐트러져 있었고, 눈에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기가 남아 있었다. 얼굴에는 분명한 욕망이 비쳤다.그런데도 정은의 허리에 얹힌 재석의 손은 참고 버티는 힘으로 굳어 있었다.참는 힘 아래에는 아쉬움과 욕심을 미루는 마음이 같이 얹혀 있었다.그래서 재석은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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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2화

정은이 눈을 깜빡였다.영환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교수님, 진심이세요?”태영도 어렵게 입을 열었다.“마지막 문제는... 문제 자체를 잘 모르겠더라고요.”정은이 되물었다.“하?”정은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왜 못 알아봐? 풀이가 어렵지도 않고, 사고 과정도 되게 명확하게 짰는데...”태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교수님 기준에서만 어렵지 않은 걸 수도 있지 않나요?”정은은 태영을 보고 있다가 영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태영만 그런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런데 영환이 더 과장되게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하는 모양새였다.“저 보지 마세요. 마지막 두 문제 다 모르겠어요. 태영보다 더 못했어요...”...채점할 때, 정은은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그런데도 정은은 손에서 손으로, 빨간 X 표시가 계속 늘어나는 걸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점수도 기대보다 더 낮았다. 하나가 낮으면 다음은 더 낮았다.정은은 화면을 바라보며 잠깐 멍해졌다.그때 재석이 다가왔다. 재석은 모니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채점 중이야?”정은이 대답했다.“응...”재석이 물었다.“근데 왜 그렇게 재미없어 보여?”정은이 말했다.“대부분의 학생 점수를 어떻게든 ‘D’ 위로 끌어올릴지 생각 중이야. 당신은 예전에 이런 거 어떻게 했어? 조재석 교수님, 경험 좀 전수해 줘.”재석이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일단 나는 시험문제를 내가 안 내.”정은이 눈을 크게 떴다.“어? 그럼 누가 내?”재석이 답했다.“비서 아니면, 내가 지도하고 있는 대학원생.”정은은 어색해졌다.‘아...’정은에게는 비서도 없고, 지도하고 있는 대학원생도 없었다.재석이 계속 말했다.“그리고 시험지 나오면 누가 한 번 풀어봐. 난이도 예측하려고.”정은은 그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재석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이미 문제 난이도 못 바꾸는 단계까지 왔으면, 출석 점수랑 필기시험 점수 비율을 바꿔. 어차피 최종 성적은 우리가 시스템에 올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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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3화

영환은 일단 마음먹으면 바로 움직이는 타입이었다.인터넷에서 1인 미디어로 활동하는 법을 알려 주는 영상을 몇 개 훑어본 뒤, 영환은 중고 장터에서 조명, 촬영 거치대 같은 장비를 헐값에 사들였다.다음 날, 태영이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가 늘어난 물건들을 보고 그대로 문가에 멈춰 섰다.“너 진짜로 하는 거야?”영환은 카메라 각도를 이리저리 맞추면서 대꾸했다.“그럼 아니면?”태영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알았어. 열심히 해봐.”하지만 속으로는 영환이 뭘 대단하게 해낼 거라고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요즘은 누구나 뛰어드는 분야가 1인 미디어 시장이었고, 경쟁도 그만큼 치열했다. 시장에는 전문적으로 인플루언서를 만들어 내는 멀티 채널 네트워크 기업도 넘쳐났다.단번에 대박이 나는 일은, 1인 미디어 광고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그래서 태영은 그 일을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그 뒤 며칠 동안도, 태영은 실험실에서 기숙사로 돌아올 때마다 영환이 카메라를 켜 두고 소소하게 촬영을 이어가는 모습을 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있잖아, 내 사생활까지 찍진 마.”태영이 영환에게 한마디했다.남자 기숙사에서는 샤워를 마치고 웃통을 벗은 채 돌아다니거나, 팬티 바람으로 있는 일이 흔했다.영환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걱정 마, 걱정 마. 내가 찍어서 올려도 플랫폼에서 심사 통과도 안 될 테니까.”태영은 요즘 무척 바빴다.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수준이었다.지도교수의 기준이 까다로운 것도 이유였지만, 태영 자신도 이번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그만큼 시간도, 에너지도 더 많이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빠르면 설 전에는 논문 성과가 눈에 보일 것이다...그게 바로 이 시기 내내 태영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이었다.태영은 여전히 정은의 실험실에 들어갈 생각을 접지 않았다.‘성과를 조금이라도 내면, 소 교수님은 내 가치를 보게 되면, 내가 예외를 둘 만큼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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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4화

진일은 최근 2년 동안 실험실의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출장도 가장 많이 다녔고, 각종 보고회나 국가 단위 과제도 거의 진일이 맡아 처리했다.민지가 웃으며 말했다.“진일 선배, 능력 있는 사람이 일이 많은 거죠.”서준도 한마디 보탰다.“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일도 맡는 거죠.”정은은 진일을 보며 짧게 말했다.“선배, 잘 부탁할게요.”진일은 입을 다문 채 정은과 민지, 서준을 차례로 바라봤다.어쩌다 보니 진일은 영문도 모른 채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됐다....정은과 민지, 서준, 재민은 설연휴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쉬게 됐다.올해 설날은 정은이 임신 중이라 몸이 불편한 점을 고려해 소진헌과 이미숙이 J시로 와서 함께 보내기로 했다.마침 이춘재와 봉수진도 정은을 곁에서 돌볼 수 있는 일정이었다.그 소식을 들은 정은은 잠시 멈칫했다.“할아버지, 할머니는 괜찮으세요?”이미숙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몇 말씀 있으셨지. 그런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그 한마디만으로도 정은은 그 과정이 절대 조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정은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차라리... 엄마랑 아빠는 그냥 집에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작년 설날에도 소진헌과 이미숙은 J시에 와서 명절을 보냈다.그때도 정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못마땅한 기색을 여러 번 내비쳤지만, 소진헌이 나서서 다 정리했다.그런데 올해까지 계속 J시에서 설을 보내게 되면...정은은 끝내 걱정을 내비쳤다.“저는 그냥... 아빠가 곤란해지실까 봐요.”그때, 건너편에서 소진헌이 이미숙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바로 넘겨받았다.[정은아, 그런 건 네가 신경 안 써도 돼.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 내가 다 정리할 테니까.]옆에 있던 이미숙도 곧바로 거들었다.[네 아빠 말 들어.]정은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게 답했다.“네.”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정은은 더는 덧붙이지 않았다.부모의 마음이 담긴 일을 정은이 밀어낼 수는 없었다.소진헌이 두 어른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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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5화

설날 당일.정은과 재석은 오전에 본가로 갔다.두 사람 일정에 맞추려고, 강서원이 가족 식사는 점심으로 당기자고 했다.그래서 11시가 가까워질 무렵, 지언과 리아도 도착했고, 지훈과 슬아도 들어왔다.주 요리는 조기봉이 이틀 전에 낚아 올린 5kg짜리 잉어였다. 강서원이 직접 주방에 들어가 매운탕 대신 새콤한 생선 요리를 만들었다.한 해 내내 넉넉하고 풍요롭게 지내라는 뜻도 담았다.그것 말고도 정은을 위해 따로 준비한 메뉴가 하나 더 있었다.탕수 소스를 입힌 농어튀김이었다.요즘 정은은 달고 감칠맛 나는 음식에 자꾸 손이 갔다.그녀는 임신한 뒤로 정은의 입맛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단것이 당기더니, 한동안은 매운 음식만 찾았다.그러다가 이제는 매운맛도 어느 정도 질렸는지, 다시 달콤한 맛을 탐하기 시작했다.어느 날은 한밤중에 꿈꾸고 깨더니, 정은이 재석에게 갑자기 농어튀김에 달콤새콤한 소스를 얹은 요리가 먹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다행히 올해는 봄기운이 일찍 돌아서 생선 살도 제법 올라와 있었다.강서원은 소스를 맞추려고 좋은 조청과 과일청까지 따로 구해 왔고, 달콤새콤한 맛을 섬세하게 잡아냈다. 여기에 향을 더하려고 향긋한 꽃잎도 조금 얹었다.생선은 노릇노릇 바삭하게 튀겨졌고, 그 위로 맑게 윤이 도는 소스가 고루 입혀졌다.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았다.또 다른 주요리는 전복갈비찜이었다.사흘 전부터 전복과 각종 재료를 손질해 두고, 닭과 사골로 오래 우린 육수를 더해 푹 끓여 냈다. 한 숟갈만 떠도 진한 맛이 감돌았고, 부드럽게 풀어졌다.랍스터와 킹크랩 같은 해산물도 식탁에서 빠질 수 없었다.긴 테이블을 넓게 펴 놓고, 가운데에는 붉은빛이 도는 꽃들을 큼직하게 꽂아 장식해 두었다.분위기가 무르익자, 조기봉이 잔을 들었다.“새해 복 많이 받아라. 우리 가족 다 건강하고, 무탈하고, 웃을 일만 많으면 좋겠다.”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특히 강서원이 암을 겪은 뒤로는 더 그랬다.정은은 술을 마실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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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6화

식사를 마치고, 세뱃돈도 나누고, 보석 선물까지 전한 뒤, 조기봉과 강서원은 이미 정은 부모가 J시에 와 있다는 걸 알고 더는 재석과 정은을 붙잡아 두지 않았다.“얼른 들어가 봐라. 가서 사돈께도 안부 전해 드리고.”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나서야, 정은은 트렁크에 큼직한 선물 상자와 봉투들이 한가득 더 실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눈으로 훑어보니, 먹는 것부터 쓰는 것, 몸에 걸치는 옷까지 없는 게 없었다.큰 것만 봐도 모피, 제비집, 녹용, 인삼이 들어 있었고, 작은 것들로는 어느 명품 브로치며 캐시미어 머플러 같은 것까지 담겨 있었다.재석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강서원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엄마가, 이건 가져가서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래.”뒤의 ‘아버님 어머님’은 당연히 소진헌과 이미숙을 뜻했다.정은은 혀를 내둘렀다.“이거... 너무 많지 않아?”재석은 담담하게 말했다.“엄마 마음이잖아. 그냥 받자.”정은은 더 사양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소진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려와서 짐 좀 같이 들어 달라고 했다.집에 돌아와 이 많은 짐은 강서원이 따로 챙겨 보낸 것이라는 말을 들은 소진헌은 눈을 크게 떴다.“이렇게나 많이?!”반응이 정은과 똑같았다.그래서 어쩔 수 없는 부녀인가 보다.곧 소진헌은 재석을 보며 말했다.“사부인도 너무 마음을 쓰셨네. 우리가 다 먹지도 못하고, 다 쓰지도 못할 텐데. 이거 그냥 자네가 도로 가져가...”소진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숙이 다가왔다.“사부인이 좋게 챙겨 주신 건데, 저희가 감사히 받아야죠. 조 서방, 대신 꼭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소진헌이 ‘받기 민망하다’라는 쪽이었다면, 이미숙은 훨씬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소진헌은 이미숙을 주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소리를 낮췄다.“저거 다 비싼 것들 같은데, 우리 이렇게 그냥 받아도 되는 거야?”이미숙은 소진헌을 보고 말했다.“당신은 학생들 가르치느라 너무 책만 봤나 봐요. 책 속에 든 지식만 남고, 사람 사이 오가는 정은 까먹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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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7화

문이 열리자, 현빈의 어깨 위에는 아직 다 녹지 않은 눈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언제부터였는지, 바깥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었다.현빈은 옅게 웃는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발치에는 여행 가방과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고, 먼 길을 달려와 피곤한 기색이 있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현빈아! 왔구나.”봉수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봉수진은 곧장 다가가 늘 마음 한 쪽에 미안함으로 남아 있던 외손자를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았다.현빈도 가볍게 봉수진의 조금 야윈 어깨를 감싸안았다. 현빈 역시 마음이 쉽지 않았다.‘우리 할머니도... 많이 나이 드셨네.’현빈이 낮게 말했다.“네, 저 왔어요...”이춘재도 눈가가 젖은 채 말했다.“왔으면 됐어, 왔으면 됐어!”정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오빠, 얼른 들어와요. 집 안 따뜻해요.”그제야 현빈의 시선이 정은에게 닿았다.2년 만이었다.정은은 예전 그대로였다.여전히 생기가 있었고,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반짝였다.입가에 걸린 웃음은 예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제법 많이 부른 배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정은의 몸 곳곳에는 햇살을 머금은 듯한 평온함이 배어 있었다. 작은 부분마다 행복과 기쁨이 스며 나왔다.누가 봐도 정은은 결혼 후 잘 지내고 있었다.현빈은 이미숙과 소진헌에게 차례로 시선을 돌리며 인사했다.이미숙이 말했다.“조금 전까지도 어머님이 네 얘기 하고 있었어. 그러다 이렇게 네가 문 앞에 딱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새해 선물이 어디 있겠니.”소진헌도 맞장구쳤다.“그러게. 몇 년 동안 호주에 있으면서 설에도 안 들어오고, 두 어른이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이제야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네.”재석은 한쪽으로 몸을 비켜서며 현빈을 맞았다.“오랜만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현빈은 잠깐 멈칫했다.‘그래, 조재석은 늘 이런 사람이야.’‘품위 있고, 여유 넘치는 경쟁자.’정은이 현빈 손에서 여행 가방을 받아 들었고,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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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8화

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다.“고마워요, 오빠.”재석도 현빈의 잔에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그러자 현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정은이는 오빠라고 했는데, 매제는 왜 대답 안 해요?”재석은 잠깐 말을 잃었다.현빈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재석을 바라봤다.재석은 이를 한 번 악물었다. 뭔가를 정리한 건지, 아니면 갑자기 마음을 돌린 건지, 문득 미소를 지었다.‘호칭 하나쯤이야.’‘연애에서 먼저 밀려난 사람한테, 입으로라도 조금 우위 점하는 게 뭐 대수라고.’‘크게 보자.’“고마워요, 형님.”현빈은 웃음이 더 짙어졌다. 게다가 일부러 대답까지 했다.“어, 그래. 나도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놓을게.”재석은 말없이 현빈을 쳐다봤다.술자리가 몇 차례 돌고 나자, 임신한 정은만 과일주스 덕분에 멀쩡했고, 나머지는 저마다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봉수진과 이미숙도 과실주를 제법 마셨다.모녀는 뺨이 발그레했고, 눈가에도 살짝 물기가 감도는 듯했다.그렇다고 아주 취한 건 아니었다.정작 제대로 취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이춘재는 평소 워낙 관리받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특별 허가’를 받은 탓인지 몇 잔 들어가자마자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졌다.소진헌은 원래 오늘 술자리 끝까지 버티며 모두를 이겨 보겠다는 기세였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의욕은 컸지만 몸은 못 따라줬다.뒤로 갈수록 소진헌은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이미숙이 그걸 보고 툭 내뱉었다.“아마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하면서 억지로 술 깨고 있을걸.”막 화장실에서 나온 소진헌은 그 말을 정확히 듣고 말았다.아내가 이렇게 바로 앞에서 무너뜨릴 때는, 조용히 못 들은 척하는 게 답이었다.그게 50세 넘은 남자의 생활 방식이었다.나중에 천천히 사위한테도 전수할 생각이었다.결국 소진헌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춘재를 따라 그대로 식탁에 엎드렸다.그러자 술기운에 필름이 끊긴 소진헌의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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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9화

현빈은 주방 문가까지 걸어와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섰다.“매제, 진짜 살림 잘하네.”재석의 손동작이 잠깐 멈췄다.“칭찬 고마워요.”현빈은 그 말에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이리 봐도 저리 봐도, 잘생긴 남자가 설거지하고 있었다.이 느낌이... 뭐라고 해야 하지?묘했다.“가사도우미 안 써?”재석이 태연하게 답했다.“가사도우미도 설엔 쉬어야죠.”현빈이 곧바로 되물었다.“그럼 평소에는?”재석은 물 묻은 손을 잠깐 털어 내며 말했다.“가사도우미보다 제가 더 잘해요.”현빈은 할 말을 잃었다.재석은 다시 접시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저랑 정은이는 집에서 요리할 일이 많지 않아요.”학교에는 구내식당이 있었다.정은의 실험실 근처도 예전에는 별다른 건물 없이 휑했지만, 이제는 점점 개발이 되면서 식당도 늘었고 배달도 편해졌다.그래서 오히려 집에서 직접 요리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그렇기 때문에 재석은 그런 드문 때일수록 더 손수 요리하고 싶었다.현빈이 낮게 물었다.“너희도 쉴 시간 별로 없잖아. 그럼 그냥 쉬면 되지, 왜 굳이 해?”재석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우리 부부 취향인데, 형님은 이해 못 하죠.”현빈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그때 재석이 문득 돌아서서 현빈을 봤다.“기왕 오신 거, 손 하나 보지 않을래요?”현빈은 코웃음을 쳤다.“진짜 사양이 없네.”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미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재석 옆으로 다가갔다.“뭐 하면 되는데?”재석은 턱으로 현빈 옆에 걸린 마른행주를 가리켰다.“그걸로 그릇의 물기 닦아서, 찬장에 넣어주세요. 어렵진 않죠?”현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누굴 뭘로 보고?”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쾅!물기가 남은 접시가 생각보다 미끄러워서 현빈 손에서 툭 미끄러졌다.다행히 바닥에 떨어진 건 아니었다. 조리대 모서리에 부딪히며 소리만 크게 났고, 깨지지는 않았다.재석은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다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형님, 이런 거 익숙하지 않으면 그냥 둬요. 무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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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0화

거실 소파에는 현빈과 재석이 이미 술에 완전히 취해 뻗어 있었다.둘 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머리를 맞댄 모습이었다.언뜻 보면 목을 맞댄 원앙새 두 마리 같기도 했다.테이블 위에는 비어 버린 와인병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와인잔도 손 닿는 자리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인터넷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었다.잘생긴 애 옆에 또 다른 잘생긴 애가 있었다.지금 이 광경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정말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하필 그 두 얼굴이 술기운까지 올라 살짝 붉어져 있었으니 더 그랬다.정은은 보고만 있어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정은은 망설일 것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찰칵-그렇게 다시 없을 사진이 탄생했다.그때 재석이 몸을 조금 움직였다.정은은 얼른 핸드폰을 내렸지만, 재석은 그저 자세만 바꿨을 뿐이었다. “여보...”재석은 입안으로 중얼거리더니, 곧장 현빈을 끌어안았다.현빈은 재석 어깨에 얼굴을 슬쩍 비비고는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정은은 눈을 크게 떴다.‘이럴 때 안 찍으면 이런 사진 대체 언제 찍겠어?!’“정은아, 뭐 하니?”소진헌이 방에서 나왔다. 막 잠에서 깬 듯 눈이 풀려 있었고, 눈앞 장면이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남자 둘이 소파에 붙어 쓰러져 있고, 자기 딸은 핸드폰까지 들고 서서 아주 신이 난 표정으로 뭔가를 찍고 있었다.“아빠? 왜 나오셨어요?”소진헌이 목을 가다듬었다.“아이고,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입이 바짝 말라. 물 좀 마시려고 나왔지. 근데 너는 그거 뭐 하냐?”정은은 곧바로 핸드폰을 감췄다.‘아마 아빠는 내가 지금 뭘 하는지도 모르실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소진헌은 소파 쪽을 훑어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조 서방이랑 현빈이, 얘네 또 붙었어? 아이고, 진짜!”정은은 소진헌이 화를 내는 줄 알았다.실제로도 화를 낸 건 맞았는데, 이유가 예상과 달랐다.“아니, 이런 걸 왜 나 안 불러! 너무하네, 진짜!”정은은 말문이 막혔다.정말 이 반응은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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