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911 - Chapter 1920

1952 Chapters

제1911화

도겸은 이불을 홱 끌어 올려 은율을 감싸듯 덮었다.은율은 두어 초 멈칫하더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저기... 저 아직 다 안 벗었는데요.”도겸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자.”은율은 어이없다는 듯 잠깐 굳었다.‘무슨 뜻이지?’‘이렇게 끝?’‘끝은 아닌데...’은율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아, 몰라.’은율은 하품을 했다. 결혼식도, 인사도, 하루 종일 너무 피곤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신혼부부는 그렇게 서로에게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새집 안방의 큰 침대 위에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정은의 학술 강연 반응이 워낙 좋아서 요즘 송영한과 한중기는 교육부 장 국장에게 번갈아 불려가 얘기를 듣는 중이었다.장 국장이 말한 요지는 대충 이랬다.“서비대 소 교수, 아주 괜찮더라.”“저런 젊은 교수, 연구자면 강연 한 번으로 끝낼 일이 아니지 않나?”“소 교수 힘든 거 알아. 임신 중인 것도 알고 있고. 그렇다고 대중의 목소리를 무시할 순 없잖아.”“무슨 목소리냐고? 하, 요 며칠 사이에 홈페이지랑 민원 창구가 마비될 뻔했어. 요구는 딱 하나야. 소 교수 강연 더 해달라, 듣고 싶다.”장 국장은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교육 오래 하셨으니까 알겠지만, 실력 있는 학자라고 해서 늘 인기 있는 건 아니고, 인기 있는 교수라고 해서 늘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실력도 있고 사람들에게도 환영받는 젊은 학자는... 정말 드물어.”“그러니까 두 분이 소 교수랑 얘기 좀 해봐. 강연 두 번만 더, 가능하겠나.”송영한은 속으로 바로 감을 잡았다.‘이거 쉽지 않겠는데.’그렇다고 대놓고 어렵다고 할 수도 없었다. 송영한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국장님, 저희한테 지시 내리시는 것보다... 조재석 교수에게 말씀하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장 국장이 재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건, 송영한도 알고 있었다.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들 모를 리도 없었다.다들 한두 번 이런 일을 본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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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2화

이번에는 수용 인원이 첫 강연의 두 배였다.재석은 이번에도 현장에 나와 있었다.진욱이 재석을 보며 웃었다.“야, 이렇게까지 와야 해? 그렇게 아내랑 떨어지는 게 싫어? 남자가 너무 달라붙으면 금방 미움받는다.”재석이 입꼬리를 올렸다.“너도 다를 거 없지.”지난달 미연이 연애 예능을 찍을 때, 미연은 관중석에 앉아 보기만 했지 직접 연애하러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진욱은 쫓아가서 현장에 붙어 있었다.다음 날엔 그게 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언론은 진욱에게 별명까지 붙였다.‘아내 지킴이.’진욱은 말문이 막혔다....오늘은 은율도 왔다.결혼식 날, 정은이 바로 옆 과학기술연구원에서 학술 강연을 했다는 걸 알고 난 뒤, 은율은 내려오자마자 인터넷을 뒤져 영상부터 찾았다.하지만 사람들이 찍어 올린 건 다 조각조각이었다.은율은 여기저기서 주워 붙이듯, 끊기고 끊긴 영상을 겨우 끝까지 봤다. 그런데도 아쉬움이 남았다.얼마 전, 두 번째 학술 강연 예약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되자 은율은 자정까지 잠도 안 자고 대기했다.직접 표를 예약하려고.그리고 은율은 티켓팅에 성공했다.다만 도겸 몫까지는 못 잡았다.은율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저 진짜 노력했어요. 핸드폰 두 대로 동시에 눌렀는데, 다른 한 대는 네트워크가 안 좋았는지, 아니면 용량이 꽉 찼는지... 들어가는 데서 잠깐 멈췄거든요. 그 사이에 표가...”도겸은 영문을 몰랐다.“무슨 표?”은율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소 교수님 학술 강연이요!”도겸의 눈이 묘하게 굳었다가 풀렸다.“내 표까지 구하려고 했다고?”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한 장만 잡혔고, 예매할 때 제 주민등록으로 묶여서요. 저만 갈 수 있어요.”은율은 급히 덧붙였다.“다음엔요! 다음엔 제가 꼭 당신 표도 구해볼게요!”도겸은 잠깐 말을 고르더니, 결국 짧게 받아줬다.“그래.”그래서 은율은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었다.게다가 운 좋게 앞자리였다.정은이 단상 위에서 강연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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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3화

은율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표정도 한층 진지해졌다.“소 교수님께서 아까 학술 강연에서 생물정보학 쪽 최신 알고리즘들, 예를 들면 게놈 변이 검출이나 마이크로바이옴 데이터 분석 같은 부분도 언급하셨잖아요.”“네.”정은이 가볍게 받아, 계속하라는 뜻을 보냈다.은율이 바로 이어 말했다.“제가 여쭙고 싶은 건요, 이런 기술이 상용화된 제품으로 전환될 때, 알고리즘 안정성이나 확장성 같은 기술 장벽이 많이 생기잖아요.”“그 과정에서 학술 연구-기업 개발-임상 검증이 서로 끊기지 않게, 닫힌 고리처럼 돌아가는 협업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전환 기간을 줄이는 게 가능하다고 보세요?”이 질문은 단순히 연구 분야의 질문이 아니었다.생물정보학을 산업에서 어떻게 쓰느냐, 말하자면 ‘수익 구조’에 대한 질문이었다.‘이 기술로 어떻게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나’에 가깝기도 했다.이걸 생각해 낼 정도면, 은율은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었다.정은이 은율을 한 번 더 살폈다.“실례지만... 혹시 기업 쪽에 계세요?”은율이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티가 많이 났나요? 저한테서... 너무 돈 냄새가 나나요?”정은은 그 표현에 웃음이 터졌다. 정은은 손을 내저었다.“그 정도는 아니에요. 보통 상용화 얘기까지 바로 들어가는 분들은 바이오 기업이나 제약사 쪽 임원들이 많아서요. 제가 그렇게 여쭌 건... 말씀하시는 내용에 비해 너무 젊어 보이셔서요.”나이가 ‘임원’처럼 보이진 않는데, 질문은 딱 그 레벨이었다.그러니 정은은 자연스럽게 ‘바이오 쪽 집안’일 가능성을 떠올렸다.그리고 예상은 맞았다.은율이 말했다.“저희 집이 의약품 사업을 해요.”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맞춰진다는 표정이었다.정은은 방금 질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풀어냈다.은율은 서둘러 노트와 펜을 꺼냈다. 듣는 동시에 받아 적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정은이 잠깐 멈칫했다.은율이 설명했다.“저는 손으로 쓰는 걸 좋아해서요.”정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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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4화

도겸은 밖에서 저녁을 먹긴 했다.다만 거의 젓가락을 들지 않은 건 사실이다.몇 번 집어먹은 것도 은율이 시선을 주는 걸 느꼈을 때 억지로 두어 입 함께한 정도였다.그런데 은율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어차피 도겸의 역할은 ‘같이 앉아주기’였다.누군가 맞은편에 있어, 혼자 밥을 먹지 않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래서 은율은 한 입, 또 한 입. 먹는 음식이 다 맛있었다.도겸이 식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반찬이 꽤 다양했다.“이거... 당신이 한 거야?”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제가요? 어떻게요?!”“당연히 도우미 이모님이 해주신 거죠.”“아...”도겸의 목소리에는 아주 옅은 아쉬움이 섞였지만, 은율은 그 뉘앙스를 읽지 못한 듯 계속 먹기만 했다.‘내가 요리까지 배워야 하나?’은율은 속으로 단칼에 잘랐다.‘그건 절대 아니지.’먹고 싶으면 도겸이 하면 되고, 가사도우미가 하면 되고, 안 되면 밖에서 먹으면 된다. 못 할 것도 없는데 굳이 자기 손을 쓰고 싶진 않았다.은율은 손을 아꼈다. ‘네일 한 번 받으면 돈이 얼만데...’밥을 다 먹고 나서 은율은 그릇을 싱크대에 툭 올려놓고는 뒤돌아 안방으로 들어갔다.도겸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이 좁아졌다.은율이 말했다.“걱정 마세요. 내일 아침에 이모님이 오셔서 정리해 주실 거예요.”도겸이 낮게 대답했다.“응.”도겸은 은율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은율은 겉옷을 벗더니, 가볍게 몸을 풀며 러닝머신 위로 올라갔다.속도를 아주 천천히, 거의 걷는 수준으로 맞췄다.도겸이 쳐다보자, 은율이 설명했다.“밥 먹고 바로 눕긴 싫고, 내려가기도 귀찮아서요. 러닝머신에서 좀 걸을게요. 소화 시키려고요.”“응.”도겸은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도겸이 씻고 나왔을 때, 은율은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있었다.은율은 카펫 위에 다리를 접고 앉아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도겸이 말했다.“나 씻었어. 당신도 씻어.”“네.”은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웃으며 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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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5화

그런데 지금은 은율이 같은 말을 꺼내자 도겸은 바로 ‘알겠다’라고 받아줬다.예전에 쏘아 올린 화살이 되돌아와 도겸의 이마 한가운데를 정확히 맞힌 기분이었다.뒤따라 올라온 건...후회.그리고 미안함.‘그때는 왜 지금처럼 못 했지?’‘그때도 이렇게 듣고, 이렇게 받아줬으면 됐잖아.’‘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였으면... 정은이랑 헤어지지 않았을텐데...’도겸은 사실 이런 감정을 꽤 오래 겪지 않았다.몇 년 동안 반복해서 자신을 갈아넣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시간이 이어지면서 도겸의 감각은 어느 순간부터 무뎌졌다. 거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왔다.그런데 오늘 다시 그 감정에 빠지자, 자신이 싫어지는 마음까지 올라왔다.은율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은율이 본 건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도겸의 뒷모습이었다.도겸과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은율은 알 수 있었다.지금 도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은율이 조용히 말했다.“저는 씻었어요.”은율은 그 말만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은율은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끌어당겨 다리를 덮었다. 손에 닿는 베개를 하나 집어 등 뒤에 받쳤다.그리고 이어폰을 끼우고 다시 드라마를 틀었다.화면 속에서는 여주인공이 ‘말로 마음을 풀어주는 사람’처럼 남주인공의 상처를 다독이고 있었다. 햇빛 같은 말로 남주인공의 마음을 건드리고, 남주인공은 그 말에 처음으로 흔들렸다.은율은 그 장면을 보며 괜히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부러워졌다.‘저 여주는 왜 저렇게 말을 잘하지?’‘남주는 왜 저렇게 쉽게 위로받지?’심리 상담 받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여주인공이 몇 마디로 해결해 버리는 듯했다.‘그러니까 요즘 심리학이 인기가 없지.’‘심리상담이 돈이 안 되나 봐.’은율은 혼자 말도 안 되는 결론까지 냈다.절반쯤 봤을 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처음으로 키스하려는 장면이 나왔다.은율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그때 도겸이 갑자기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 들어왔다.은율은 하이라이트 부분이라 도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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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6화

세 번째 학술 강연 날, 은율은 드물게 일찍 일어났다.은율은 예쁜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연한 커피색에 가까운 베이지 부츠를 신었다.도겸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겸은 거울 앞에서 메이크업하고 있는 은율을 보고, 잠깐 멈췄다.은율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대체로 민낯이었다.그런데 오늘은...‘왜 이렇게까지...?’도겸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에 은율이 도겸을 돌아봤다.“여보, 일어났어요? 빨리 서둘러요, 빨리! 늦겠어요!”도겸은 몇 초 멍했다가 오늘이 정은의 학술 강연 날이라는 걸 떠올렸다.은율은 메이크업을 마무리하고 고정 스프레이를 내려놓았다.“오늘 입을 옷은 침대 옆에 다 올려뒀어요. 당신 얼른 갈아입고요. 15분 뒤에 정확히 아침 먹어요. 30분 안에 무조건 출발이에요.”말을 끝내자마자 은율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코디에 맞출 가방을 고르기 시작했다....오전 10시, 도겸과 은율은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입장해 자리에 앉았다.앞줄, 시야가 가장 좋은 구역이었다.은율은 자신의 ‘운’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두 번 연속 표를 잡은 것도 대단한데, 이번엔 두 장을 한 번에 잡았다.게다가 매번 자리도 좋았다.‘이 정도면 진짜 올해 운이 터진 거지.’학술 강연 시작 3분 전, 은율은 가방에서 펜과 노트, 예비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예비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확인했다.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은율은 물건을 가지런히 놓고 조용히 기다렸다.은율은 며칠 전 주최 측에 전화를 걸어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답은 불가였다.다만 사진 촬영과 중간중간 짧은 영상 촬영은 가능하다고 했다.그래서 은율은 차선책으로 예비 핸드폰을 챙겨왔다.도겸은 은율의 일련의 동작을 보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은데.’은율은 큰 시험 전에 수험표와 필기구를 점검하는 학생 같았다.다 확인하고 나면, 시험지 배부만 기다리는 그런 모습.곧 학술 강연이 시작됐다.정은이 등장하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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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7화

지금까지 도겸은 ‘최은율’이라는 여자가 아내로서 한 모든 일을 꽤 마음에 들었다.은율은 선을 지킬 줄 알았고, 분위기를 읽을 줄 알았고, 괜히 사람을 피곤하게 굴지 않았다.무엇보다도 은율은 도겸의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원망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사랑이니 뭐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도 않았다.‘계속 이랬으면 좋겠네.’...“에취...”은율이 재채기하고 코끝을 문질렀다.은율은 녹음을 끝까지 다 들으면서 빠진 내용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꽤 오래 집중했다.마침내 오류나 누락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은율은 차 안에서 장 기사에게 좋아하는 팝송을 틀어 달라고 했다.음악이 흐르자 은율의 몸이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표정도 좋아 보였다.장 기사도 백미러로 은율을 한 번 보고, 덩달아 웃었다.“기사님.”장 기사는 갑자기 이름이 불려 웃음이 얼어붙었다.“사모님, 무슨 일이십니까?”은율이 부드럽게 말했다.“요즘 제가 밖에 나갈 일이 많아서 기사님 고생이 많으시죠. 들었는데 기사님 따님이 올해 대학 졸업하셨다면서요? 그럼 이제 취업해서 일 시작했겠네요?”장 기사는 조금 당황했다. 원래 기사 일이라는 게, 고용주와 이런 개인적인 얘기까지 깊게 나누는 자리는 아니었다.그런데 은율의 말투가 너무 다정했다. 목소리도 편안했다.장 기사는 자기 딸을 떠올리듯, 자신도 모르게 경계를 풀었다.“예, 사모님. 저희 딸이 외국계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출근한 지는 두 달 정도 됐고요.”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트렁크에 클래식 모노그램 미니 백이 하나 있어요. 지난번 매장 들렀다가 같이 맞춰서 사온 건데, 따님께 선물로 드릴게요. 사회 초년생이면 가끔 이런 게 필요하잖아요. 분위기 좀 만들어야 괜히 무시당하지 않죠.”장 기사는 사양하는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은율이 내놓은 이유가 장 기사로서는 쉽게 거절하기 어려운 이유였기 때문이다.장 기사는 명품 가방이 뭔지 정확히 몰랐다.하지만 ‘사람은 옷이 날개’라는 말은 알았다.게다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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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8화

도겸은 회사에 가서도 하루 종일 마음이 딴 데로 가 있었다.도겸은 인정했다.정은에게 흔들리고 있었다.만약 은율이 옆에 있었다면, 분명 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역시... 이게 그 ‘소정은’이라는 대답한 여성의 매력이구나. 파괴력이 다르네.’...같은 시간, 은율은 제약 공장 생산동에 있었다.은율은 방호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라인을 따라 점검하고 있었다.현장 책임자는 옆에 공손하게 서서 익숙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은율이 던지는 질문에도 그때그때 대답했다.그런데 자세히 보면, 책임자의 얼굴에는 어딘가 멍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이 아가씨가 왜 갑자기...?’‘오늘 오는 줄도 몰랐는데.’비서에게서 ‘아가씨가 오셨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을 때, 책임자는 놀라서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어리시고, 웃는 것도 순해 보이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책임자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은율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잠깐만요. 방금 계획이 체외 수용체 결합 실험이랑 세포 기능을 같이 측정해서 단클론 항체 약물의 타깃 특이성을 검증한다는 거였죠? 두 가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합하실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책임자는 침을 삼켰다.“그... 그건 좀 전문적인 영역이라서요. 아래 연구원이 더 정확히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네.”잠시 뒤, 연구원이 급히 달려왔다.“저희가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건 신호전달 경로 활성 확인이랑, 세포 증식 억제 평가를 같이 묶어서...”은율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확답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은율은 다음 라인으로 이동하며 또 물었다.“단클론 항체 계열은 배치 간 ADCC나 CDC 활성 편차가 생길 수 있잖아요. 이런 건 체외 약리 모델로 빠르게 스크리닝하는 방법을 어떻게 잡으셨어요?”책임자의 이마에 땀이 맺혔고, 다시 연구원을 앞으로 밀었다.“설명해 드려, 아가씨께.”연구원이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네. 현재는 NK 세포 기반의 세포독성 실험이랑, 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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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9화

‘‘집에 온 느낌’이라니... 무슨 ‘집에 온 느낌’이야.’도겸은 이 집의 남자 주인이었다. 손님도 아니고, 방문객도 아니었다.은율은 러닝머신 위에서 도겸을 위아래로 훑었다.“밖에서 밥 먹었죠? 오늘은 이모님한테 저녁 남겨달라고 안 했어요.”도겸이 잠깐 멈칫했다가 대답했다.“응.”도겸은 속으로 생각했다.‘회식 자리에 밥은 무슨 밥이야.’응대하고 눈치 보고, 잔 돌리고, 말 맞추느라 젓가락을 제대로 든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은율은 그 정도까지 살뜰히 챙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천천히 걸었다.도겸은 외투를 내려놓고 물었다.“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그럼요. 오늘 아빠가 저한테 용돈 보내주셨어요.”“용돈?”은율은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만큼...”도겸이 눈썹을 올렸다. 의외라는 기색이었다.“돈?”도겸은 보석이나 액세서리 같은 걸 생각했다.이런 집안에선 돈이 가장 쉬운 형태였다. 돈은 손에 쥐는 데 특별할 게 없었다.하지만 은율은 전혀 다른 얼굴로 말했다.“네. 현금이요. 계좌이체로 딱 들어왔어요. 저도 가방이나 액세서리 사는 거 좋아하긴 하는데, 그런 것보다 현금이 훨씬 편하잖아요. 사고 싶은 거 뭐든 살 수 있고, 제한도 없고요.”선택의 폭이 가방이나 액세서리보다 훨씬 넓었다.도겸은 은율의 가치관이 조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은율은 어깨를 으쓱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은율이 좋아하는 걸 도겸이 이해할 필요도 없고,도겸의 취향을 은율이 완전히 동의할 필요도 없었다.그러니까 각자 취향대로.본인이 원하는 대로.서로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그게 더 편했다.은율은 해외에 있을 때 나름의 고생도 해봤다.아르바이트 하고, 설거지하는 것도 경험했다.큰일을 겪은 건 아니지만, 해볼 건 해본 셈이다.그래서 은율은 알았다.‘꽃향기보다 현금이 더 향기롭다’라는 걸.아버지는 은율이 어릴 때부터 말했다.“너는 평생 사랑 때문에만 고생 안 하면, 다른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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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0화

강서원은 이미 훨씬 전부터 전문 산부인과 팀을 병원에 붙여놨다.오직 정은 한 사람을 위한 팀이었다.병원에 도착하자 정은과 재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VIP층으로 올라갔다.오랜 경력의 산과 주임교수는 검사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검사 과정에서 작은 문제가 생겼다.쌍둥이 중 한 명이 엎드린 채로 버티는 바람에, 심장과 얼굴이 끝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주임교수가 말했다.“그럼, 밖에 나가서 단 거 좀 먹고 다시 들어올래?”정은이 되물었다.“그런 것도 돼?”“해보자.”그리고 정은은 검사실에서 사실상 ‘내보내졌다’.재석이 곧장 다가왔다.“끝난 거야? 어땠어?”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재석의 속이 단숨에 가라앉았다.쌍둥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재석은 마음을 제대로 놓아본 적이 없었다.전문 논문도 찾아보고, 의사에게 위험도를 평가받기도 했지만,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단태아도 위험은 있다.쌍둥이는 더 그렇다.게다가 재석은 요즘 가끔 짧은 영상을 보다가 알고리즘에 걸려버렸다.재석의 알고리즘에 걸리는 건 태아 심장 멈춤, 난산, 희귀질환 아기 같은 것뿐이었다.재석은 완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그걸 정은이 알아채고는, 재석 핸드폰에서 숏폼 앱을 강제로 삭제해 버렸다.재석이 물었었다.“당신은? 그런 거 뜬 적 없어?”정은은 바로 말했다.“없어.”“진짜?”재석은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정은이 덧붙였다.“당신이 보던 그런 건 안 뜨는데, 나는 자꾸... 불길한 영상이 떠.”재석이 말문이 막혔다.정은은 그제야 자기 말이 이상했다는 걸 느낀 듯 눈을 깜빡였다.“우리 둘, 알고리즘이 성별을 헷갈린 거 아니야?”...지금 정은이 고개를 젓는 것만으로 재석은 긴장했다.“왜? 뭐가 문제야?”정은이 말했다.“얘가 협조를 안 해. 엎드린 채로 안 움직여. 거의 20분을 기다렸는데도 뒤집질 않아.”재석은 바로 반응했다.“그럼 어떡해? 내가 의사 선생님한테...”재석은 말하면서 검사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정은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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