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931 - Chapter 1940

1952 Chapters

제1931화

두리가 손에 든 걸 다시 한번 흔들었다.“그래서 먹을 거야 말 거야?”두리는 턱짓으로 손에 든 땅콩 과자를 가리켰다.이건 두리가 일부러 잠깐 귀국했을 때 환승하는 틈을 쪼개 마트까지 뛰어가 사 온 거였다.윤우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감사합니다, 두리 형.”윤우는 포장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다.바삭했고, 달았고, 고소했다.두리가 말했다.“그만 보고 일어나. 식당 가자. 오늘 진혜가 만두 빚었어. 늦으면 다 떨어진다.”두리는 윤우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큰손으로 윤우를 덥석 잡아 올렸다. 꼭 병아리 한 마리 집어 들 듯 가볍게 들어 옮겼다.윤우는 아무 말도 못 했다.이들이 말하는 식당은 사실 그저 조금 넓은 판잣집 한 채에 가까웠다.그래도 그 안에는 뜨거운 불이 살아 있었고, 냄비에서는 김이 올랐고,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했다.윤우가 먼저 인사했다.“아저씨, 아주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오늘은 부두도 쉬는 날이라, 진혜의 남편도 아내 곁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진혜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두리! 윤우! 왔어?”진혜는 반가운 기색으로 물었다.“어떤 만두 먹을래? 내가 바로 삶아 줄게.”두리가 먼저 답했다.“나는 부추돼지고기 만두 서른 개. 윤우, 너는?”윤우는 잠깐 생각한 뒤 진혜를 올려다봤다.“아주머니, 만두소가 전부 몇 가지예요?”진혜가 손가락을 펴 보였다.“세 가지.”윤우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저는 종류마다 다섯 개씩 주세요. 아주머니가 빚은 만두는 분명 맛있을 것 같아서요. 다 먹어 보고 싶어요.”그 말 한마디에 진혜 입이 귀에 걸렸다.“당연하지! 잠깐만 기다려!”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윤우에게만 슬쩍 속삭였다.“이따가 아주머니가 네 그릇에 고명도 더 많이 올려 줄게.”윤우는 작게 웃었다.“감사합니다, 아주머니.”“아이구.”그 옆에서 두리가 눈을 크게 떴다.‘이게 이렇게 된다고?’‘말만 예쁘게 하면 다야?’하지만 만두가 나왔을 때, 윤우 그릇 위에 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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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2화

현빈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리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그런데도 이미윤은 전화기 너머에서 얼핏 들린 그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방금... 전화에서 애가 아빠라고 부른 것 같은데?”현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핏줄은 속일 수 없었다.이미윤은 단번에 눈치를 챘다.“네 아이야?”이미윤은 눈을 크게 떴다.“설마 진짜 네 아이야?! 너 호주 가서 애까지 낳고 온 거니?!”‘이미 ‘아빠’라고 부를 정도면...’시간을 따져 보면, 현빈이 처음 호주로 갔을 무렵 이미 생긴 셈이었다.이미윤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갑자기 눈빛이 달라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 하나는 생각해 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살아 있는 아이가 하나 튀어나온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이미윤은 감탄하듯 말했다.“역시 내 아들이네! 잘했다!”현빈은 이마를 짚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예요?”현빈은 곧바로 윤우가 어떤 아이인지 설명했다.다만 윤우의 친아빠가 임시호라는 사실만은 빼고 말했다.이미윤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뭐? 친아들은 아니라고?”실망한 기색이 너무도 선명했다.“게다가 원수 쪽 아이라고? 이건... 나중에 문제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니니?”현빈은 담담하게 답했다.“머리를 다쳐서 기억을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회복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했고요.”이미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구나...”그래도 이미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걸리는 게 남아 있었다.그런데도 현빈이 그 아이에게 자기 성까지 붙여 줬다는 건...아무래도 완전히 무심하게만 본 건 아니란 뜻이었다.이미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데? 너랑 같이 살아?”현빈은 고개를 저었다.“부두 쪽 가건물에서 지내요. 얼마 전에 학교에도 보냈고, 평소에는 부두 사람들한테 맡겨 두고 있어요.”이미윤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수긍했다.“그렇게 한 건 잘한 거야.”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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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3화

두리의 부모는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외곽에서 살았다. 그러다 정은이 건넨 그 몇 차례의 ‘집값 보탬’ 덕분에 손에 여윳돈이 생겼고, 그제야 외곽 집을 팔고 시내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옮겨 왔다.두리는 그동안 현빈 밑에서 일하며 적지 않게 벌었다. 마음만 먹으면 J시 핵심 지역에 부모를 위해 더 넓은 집을 마련해 줄 수도 있었다.그런데 두리는 그러지 않았다.하나는, 두리 수입이 크게 뛴 건 어디까지나 최근 몇 년 사이 일이었다. 현빈을 만나기 전의 두리는 그저 평범한 밑바닥 일이 전부인 사람이었고, 호주 현지 조직 밑에서 궂은일과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했다.그런데 두리가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을 꺼내 부모 집을 바꿔 준다면, 부모가 돈 출처를 묻지 않을 리 없었다.두리는 그걸 설명할 수 없었다.그래서 차일피일 미뤘다.그러는 사이에 부모는 정은이 준 그 두 차례의 돈으로 직접 집을 옮겼다.그러니 더는 두리가 나설 필요도 없어졌다.방 두 개짜리 집이 아주 넓진 않아도 위치가 좋았고, 주변 생활 여건도 잘 갖춰져 있었다. 세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했다.그 뒤로 두리는 집을 새로 사 주거나 더 큰 집으로 옮겨 드리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문이 열리자마자, 두리의 부모는 눈앞에 선 아이를 보고 둘 다 얼어붙었다.두리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여보, 여보... 우리 아들이 외국에서 손자를 하나 데리고 온 거야, 지금?”두리 아빠도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이야... 지난번엔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한다고 전화로 그렇게 다그쳤더니, 이번엔 아예 애를 데리고 왔네.”두리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떡해?”두리 아빠는 생각보다 빨리 결론을 내렸다.“이렇게 귀한 큰손자인데, 일단 받고 보자!”두리 엄마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맞아! 일단 들여야지.”그렇게 윤우는 두리 부모 품에 얼떨결에 또 아주 반갑게 안겨 집 안으로 들어갔다.문밖에 서 있던 기사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얼른 설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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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4화

두리 엄마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다급하게 말했다.“두 번이나 걸었는데도 안 받네. 어떡하지?”두리 아빠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됐다. 분명 바쁜 일 있겠지. 윤우 데려다준 기사 있잖아. 그 사람이 연락처 남겨 놓고 갔던 거 같은데, 당신이 한번 찾아봐.”두리 엄마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새벽 3시.윤우는 기사의 도움으로 겨우 병원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의사가 차트를 확인하고 말했다.“A형 독감입니다. 입원해야 해요. 아이 보호자는 누구세요? 수속 밟으셔야 합니다.”두리 부모는 동시에 서로를 한번 쳐다봤다가, 곧장 기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기사는 갑자기 세 사람 시선이 자기한테 꽂히자 당황했다.“저, 저도 그건 결정 못 합니다.”기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두리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받지 않았다.결국 기사는 한참 망설인 끝에 손을 떨며 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리도 미리 말해 둔 적이 있었다.큰일 아니면 보스는 건드리지 말라고.그런데...애가 아픈 데다, 그것도 A형 독감이었다. 요 몇 년 사이 독감으로 크게 앓는 아이들도 많았고,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일이었다.이 정도면 큰일이 맞지 않나?현빈이 전화받았을 때, 현빈은 이미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현빈은 짧게 통화를 이어 갔다.“무슨 일인데요?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현빈의 표정이 즉시 굳었다.전화를 끊자마자 현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미윤이 물었다.“어디 가니? 그렇게 급하게.”현빈이 짧게 답했다.“병원이요.”이미윤이 놀라 되물었다.“왜? 누가 병원에 있는데?”현빈은 잠깐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그 아이요.”이미윤은 몇 초쯤 멈칫했다가, 그제야 어제 현빈이 말했던 그 ‘양아들’을 떠올렸다.이미윤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현빈은 이미 차를 몰고 나간 뒤였다....윤우가 눈을 떴을 때, 눈꺼풀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겨우 힘을 줘서 간신히 눈을 떴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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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5화

윤우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누구세요?”이미윤은 옅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어쩌면, 네가 날 할머니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구나.”“아빠의 어머니요?!”윤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빛에 반가움이 환하게 번졌다.“할머니, 안녕하세요! 아빠가 저 보라고 보내신 거예요?”이미윤은 대답하지 않은 채 보온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자극 없고 소화가 편한 반찬 몇 가지, 너무 묽지도 되지도 않은 달달한 죽, 거기에 돼지 모양으로 만든 팥소가 든 찐빵 하나까지.이미윤은 그것들을 하나씩 가지런히 꺼내 놓고는 병상 곁에 앉아 윤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먹어라.”“감사합니다.”윤우는 작은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이미윤이 잠깐 멈칫했다.“뭐 하니? 여기에 다 올려놨으니까 침대에서 먹어도 돼.”“먼저 손 씻고 올게요.”윤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미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향했다.손을 씻고 돌아온 윤우는 다시 병상 위에 올라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이미윤은 윤우가 제 일은 제법 잘 해내는 걸 보고 물었다.“올해 몇 살이지?”“아마 열 살일 거예요.”윤우의 대답에 이미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아마?”“네. 가족관계등록부에 그렇게 적혀 있는 걸 봤어요.”“자기 나이도 모르고 가족관계등록부를 봐야 한다는 거니?”이미윤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윤우는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예전 일은 다 잊어버려서요. 그래서 제가 몇 살인지도 기억이 안 나요... 죄송해요...”“왜 잊어버렸는데?”“여기를 다쳤어요.”윤우가 제 머리를 가리켰다.이미윤은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구나... 난 기억을 잃는 일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어린애한테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그러다 이미윤은 문득 말의 결을 바꿨다.“그런데 넌 어떻게 현빈이가 네 아빠라고 확신하니?”윤우는 볼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음식을 먹다가 기억을 더듬듯 입을 열었다.“어떤 창고에서요, 많은 사람이 저를 쫓아왔어요... 그런데 아빠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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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6화

현빈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어머니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보통 일은 아니겠군.’“무슨 일이세요?”이미윤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의 힘을 뺀 채 옅게 웃었다.“오늘 병원에 가서 그 아이를 보고 왔다.”“그러세요?”현빈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간병인은 붙여뒀고, 병실도 VIP실이라 돌봐줄 사람은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굳이 오가실 필요는 없으세요.”“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어떤 아이인지 직접 보고 싶었어.”현빈은 가볍게 웃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이었다.“그래서 어머니는 뭘 보신 겁니까?”이미윤의 시선이 흔들렸다. 몇 초 동안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침내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난 그 아이가 꽤 마음에 들더라.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여기 두고 나랑 함께 지내게 하면 어떻겠니.”현빈이 찻잔을 드는 손을 멈췄다.이미윤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너는 호주에 가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 아이까지 챙길 여유가 없잖니. 열 살짜리 아이를 계속 부두에 두고 그곳 험한 바다 사람들 틈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어.”“심이라는 성도 쓰게 했고, 밖에도 이미 그 아이의 존재를 인정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두면 그게 무슨 꼴이니.”이미윤은 현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 아이한테는 보호자가 필요해. 생활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네가 직접 낳은 아이는 아니어도 네가 받아들였으면 그것도 인연이야. 제대로 가르치고 돌봐야지.”“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현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이미윤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네가 호주로 돌아가면 이 넓은 옛집엔 나 혼자만 남게 된다. 네 아버지는...”이미윤은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어갔다.“내 사심도 있다. 아이라도 하나 곁에 있으면 그래도 덜 적적하지 않겠니.”현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생각해 보겠습니다.”“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라. 난 먼저 들어가마.”이미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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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7화

심씨 가문 본가의 대문 앞에 선 윤우는 작은 몸이지만 까치발을 세우고 고개를 한껏 들어 올려야만 했다.“여기가... 아빠 집인가요?”윤우는 고개를 돌려 이미윤을 올려다보았다.현빈은 퇴원 수속을 밟을 때와 병실 문 앞에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였다. 오래 머물지도 못한 채 전화를 한 통 받더니 곧장 자리를 떴다.그래서 어린 윤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이미윤뿐이었다.이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여기가 할머니 집이자 네 아빠 집이야. 네 아빠도 어릴 때 여기서 자랐어.”윤우의 두 눈이 반짝였다.“가자. 들어가자.”이미윤이 손을 내밀었다.윤우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듯했다.“할머니... 저도 여기서 사는 건가요?”“물론이지.”이미윤의 대답에 윤우는 환하게 웃었다....밤, 술집.현빈이 룸 문을 밀고 들어서자 선우와 도겸이 이미 와 있었다.“현빈이 형!”선우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다가왔다.“진짜 오랜만이에요!”현빈은 선우와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쳤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남자들 사이의 정은 그 안에 다 담겨 있었다.“한 3년 넘었지?”선우는 잠깐 시간을 가늠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진짜 그쯤 됐어요. 자, 형, 이쪽에 앉으세요.”선우는 현빈을 데리고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도겸은 이미 그 자리에 앉아 한참 기다리고 있었는지, 입을 여는 말부터 비꼼이 묻어났다.“심 대표님은 역시 바쁘신 귀한 몸이라 맨 마지막에 등장해야 체면이 사나 보지?”현빈은 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와인을 한 잔 따랐다.“나한테 무슨 대단한 체면이 있다고. 오히려 너야말로 축하받아야지. 듣자 하니 얼마 전에 결혼했다며. 남의 남편까지 됐으니, 그게 진짜 신분 상승 아닌가.”“심현빈, 말 돌려서 사람 긁지 마. 나는 결혼했고, 넌 아직도 혼자잖아. 부럽냐?”현빈은 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뭘 부러워해. 사랑할 때는 못 지키고, 붙잡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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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8화

현빈이 잔을 기울이며 비웃듯 말했다.“난 네가 전남친이라는 위치 덕에 누구보다 유리할 줄 알았어. 그런데 막상 보니까... 나보다도 못하더라.”도겸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너는 기세가 하도 대단해서 당연히 정은이랑 끝까지 갈 줄 알았지.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네 위에 또 다른 사람이 있더라. 조재석이 딱 나타났을 때, 어이없었지? 하하...”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한때 오랫동안 형제처럼 붙어 지낸 사이였으니, 어디를 찔러야 가장 아픈지도 너무 잘 알았다.선우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또 시작이네.’“술 한 병 건네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러세요. 제가 할게요, 제가. 자, 두 분 다 뭐 필요하시면 그냥 저 시키세요. 됐죠?”선우는 재빨리 병을 집어 현빈의 잔에 와인을 채워 넣었다.그러고는 잠깐 생각하다가 도겸의 잔에도 와인을 가득 따랐다.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는 쪽을 택한 셈이었다.말 그대로 완벽한 균형 감각이었다.현빈이 낮게 말했다.“두 판만 더 하자.”속으로는 이미 이를 갈고 있었다.‘오늘은 강도겸을 제대로 털어 버린다.’‘속옷만 남을 때까지 이겨 줘야지.’시간은 어느새 밤 열한 시를 넘어 있었다. 세 사람은 갈수록 더 들떠 갔다.현빈은 도겸을 이겨 눌러 버리고 싶었고, 도겸 역시 현빈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선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이미 승부욕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이번엔 무조건 본전 찾아야 해.’‘한 집이 아니라 두 집 몫까지 싹쓸이해야지.’그런데 결국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잠시만요! 여긴 개인 룸이라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직원의 제지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룸 문이 바깥에서 밀려 열렸다.최은율은 단숨에 표정을 바꾸더니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여보!”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로 향했다.현빈과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뜻이 분명했다.‘팝콘각이다.’도겸은 몸이 살짝 굳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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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9화

도겸이 뒤쫓아 나갔을 때는 이미 은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도겸은 곧장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2층 안방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도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도겸조차 알 수 없었다.이 긴장과 불안이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건지.침실 문을 열 때 도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마침 은율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은율은 맨발이었고, 몸에는 목욕타월 하나만 두르고 있었다. 가녀린 쇄골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젖은 머리카락은 어깨를 따라 축 늘어져 있었고, 맑게 맺힌 물방울이 목선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물기는 가슴께까지 이어지다가 목욕타월 끝자락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도겸은 문득 공기가 묘하게 뜨겁다고 느꼈다. 목울대도 제 뜻과 다르게 천천히 움직였다.‘들어오기 전에 외투까지 벗었는데... 왜 이렇게 덥지?’도겸은 무심한 척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셔츠 단추도 두 개 더 풀어 헤쳤다.은율은 도겸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그럼에도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다 알면서 묻는 투로 말했다.“왜 돌아왔어요?”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듯 헛기침을 했다.“미안해. 오늘 약속 어긴 건 내 잘못이야. 다음엔 이런 일 없을 거야.”“네.”은율은 그 일에 매달리지 않았다. 원망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웃으며 가볍게 받아넘겼다.은율의 그 미소 앞에서는 웬만한 잘못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도겸의 마음이 잠깐 느슨해졌다. 그러고 나자 더 짙은 미안함이 뒤따라왔다.그때 은율이 불쑥 물었다.“그래서 땄어요?”“뭐?”도겸이 멍하니 되묻자 은율이 덧붙였다.“당신들 주사위 게임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묻는 거예요. 이겼냐고요.”도겸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앞에서는 좀 땄는데, 뒤에 가서 다시 다 잃었어.”“네? 그럼 왜 따고 나서 오지 않았어요?”은율은 어이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놀 건 다 놀고, 약속은 깨고, 아내 화나게 해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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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0화

은율은 잠깐 멈칫했다.하지만 곧 뜻을 알아들은 듯 눈빛이 달라졌다. 물기를 머금은 듯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었고, 입가에도 옅은 웃음이 걸렸다.“물론이죠.”도겸은 은율을 그대로 가로로 안아 들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은율이 뭔가 말하려 하자, 도겸이 낮게 말을 막았다. “쉿.”“말 안 해도 알아. 지금 바로 씻고 올게.”도겸은 그렇게 말한 뒤 은율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어 은율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기다려.”은율은 도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뒤로 기대듯 침대에 누웠다. 가까이에 있던 쿠션 하나를 끌어와 등을 받쳤다.‘이렇게 기대고 있으면 좀 더 편하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그런데 편하다는 이유였는지, 도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은율은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침대 머리맡 협탁 서랍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도겸이 물었다.“뭐가 있는데?”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겸의 손이 먼저 서랍을 열었다.도겸은 안에 들어 있는 피임 용품을 보고 잠깐 멈췄다.은율이 도겸을 바라보며 물었다.“왜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도겸은 서랍 안을 본 채로 입을 열었다.“당신... 아이 갖기 싫어?”은율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별생각 없는 듯 툭 물었다.“내가 원하지 않으면 안 가져도 돼요?”도겸은 눈살을 약간 좁혔다. 10초쯤 지났을까, 도겸은 꽤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원하지 않으면 안 가져도 돼.”도겸은 아이에 대해 특별한 집착이 없었다.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았다.은율은 그 말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풉.”은율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말했다.“당신 바보예요? 농담한 건데, 그걸 또 진짜로 받아들이셨어요?”“응?”은율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덧붙였다.“나도 아이 좋아해요. 출산도 딱히 싫지 않고요.”도겸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되물었다.“그럼 왜...”은율은 태연하게 답했다.“오늘 당신 술 마셨잖아요. 건강하게 아이 가지는 건 기본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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