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931 - Chapter 940

992 Chapters

제931화

시연은 처음 참석해 보는 요트 연회였다.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화려한 조명과 북적거리는 인파에 정신이 아찔했다.낮에 있었던 점심 모임과는 차원이 달랐다.저녁 연회는 초대받은 사람도 훨씬 많았고, 분위기는 뷔페 형식으로 자유로웠다.고상훈 주위엔 이미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기에, 시연은 굳이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식사부터 챙기기로 했다.‘어차피 배고파 죽겠는데.’음식을 담아 한 접시 가득 들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밥에만 집중했다.한편, 멀리서 정기환이 다가와 귀띔했다.“형님, 시연 씨 도착하셨어요. 저쪽에서 식사 중입니다.”유건은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살짝 돌려 시연 쪽을 봤다.“응.”그저 짧게 대답만 하고는 다시 시선을 거뒀다.물론 그런 건 전혀 모른 채, 시연은 지금 눈앞의 떡갈비와 연어샐러드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조심스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저기요.”시연은 잠깐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나... 한테 하는 말인가?’눈앞에 선 한 청년은 시연보다 조금 어린 듯한 인상, 스마트한 정장에 금테 안경을 쓴, 얌전하고 단정한 청년이었다.모르는 사람이었다.“안녕하세요.”그 청년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웃었다.“여기... 앉아도 될까요?”“아, 네.”시연은 음식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뭐, 자리야 원래 자유석이니까.’“감사합니다.”청년은 숨을 고르며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주춤주춤 말을 꺼냈다.“사실... 배 탈 때부터 계속 봤어요. 정말 예쁘시더라고요.”“크흠, 크흠.”시연은 물을 급히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정리했다.‘어... 이거 약간 불편한데.’“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아니에요,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청년은 귀 끝까지 붉어졌다가도, 용기를 내 다시 말했다.“저... 혹시 괜찮으시면,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고대엽이라고 합니다.”‘고대엽... 고?’시연의 눈썹이 아주 살짝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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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2화

대엽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갑자기 발끝이 멈췄다.‘어...?’그 순간, 중심을 잃은 상체가 앞으로 쏠리고, 두 손을 허우적대는 것도 잠시,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꽝!“아악!!”대엽의 비명에 주변이 술렁였다.“헉...”시연은 깜짝 놀라 목을 움켜쥐듯 붙잡고 벌떡 일어났다.“괜찮아요?! 괜찮아요??”쓰러진 대엽은 뺨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세상에... 첫눈에 반한 여자 앞에서 이게 뭐야, 진짜...’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두 손바닥은 긁혀서 빨갛게 벗겨지고 따끔거렸다.대엽은 이를 악물고 웃었다.“괘,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괜찮긴 뭐가...”그때, 유건의 싸늘한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지금 이 꼴로 저 많은 손님 앞에 서 있겠다고? 네 체면만 더럽혀지는 게 아니라, 고씨 집안 얼굴도 같이 더럽혀지는 거야.”“삼촌...”대엽은 머쓱하게 웃으려다, 유건의 매서운 눈빛에 바로 굳어졌다.“안 가?”“아, 네... 네!”결국 어쩔 수 없이 대엽은 시연을 아쉬운 눈빛으로 한 번 더 쳐다보며 말했다.“저... 금방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하...’유건은 지겨운 듯 혀를 차며 손에 든 라이터를 탁 튕겼다.대엽은 억지로 침을 꿀꺽 삼키더니 후다닥 사라졌다.그제야 시연은 숨을 길게 내쉬었고, 곁눈질로 유건을 보며 말했다.“당신... 뭐 하는 거예요?”방금은 시연도 다 봤다.유건이 일부러 다리를 쓱 뻗어 대엽에게 다리를 걸었다는 것을.유건은 못 들은 척, 손을 들어 근처 직원에게 말했다.“물 한 잔, 따뜻한 걸로.”“네, 고 대표님.”곧 건네받은 물잔을 시연 앞에 내밀며 유건이 낮게 말했다.“마셔.”시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아까 목 막혔잖아.”유건은 성가신 듯하면서도 달래는 말투로 툭 덧붙였다.“마셔, 빨리.”시연은 진짜 목이 메어 있었다.지금도 목 안이 까슬까슬했다.그래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유건이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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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3화

‘뭐?’시연은 벼락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겨우 잠깐 말 섞은 거 가지고, 지금 이 난리야?’“진짜 어이없어... 아, 아파요!”유건의 두 팔이 더 강하게 조여왔다. 숨이 턱 막힌 시연은 몸을 뒤로 젖혔다.“미쳤어요?! 난 고대엽이랑 겨우 한 번 본 사이잖아요! 열 마디도 안 했다고요!”“열 마디?”유건의 입가가 비틀렸다.“너무 적어서 서운하다는 거야?”시연은 눈이 커졌다.‘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순간, 유건은 시연의 허리를 꽉 껴안은 채 휙 돌아섰다.그리고 거친 걸음으로 갑판을 내려가더니, 뱃머리에서 뒤편의 객실로 향했다.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유건의 품 안에 고개를 파묻으며 속삭였다.“당신... 미쳤어요?! 사람들 다 보고 있잖아요! 어디 갈 거예요? 어디 데리고 가는데요?!”‘이 사람은 부끄럽지도 않아? 여기 도리슬도 있다고...’‘점심때만 해도 같이 가족 모임 왔던 사람인데...!’“걱정도 많네.”유건은 낮게 웃었다.“애인 주제에 그런 건 왜 신경 써? 너한텐 하나면 돼. 나 기분 좋게 해주는 거.”그러고는 시연의 턱을 움켜쥐며 말했다.“근데 오늘, 넌 날 아주 불쾌하게 했어.”“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객실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문이 닫히자마자 유건은 거침없이 입술을 덮쳤다.“읍...!!”입술이 아닌, 거의 물어뜯는 듯한 격렬함.시연은 팔로 유건을 밀어내며 버둥거렸다.“미, 미친...!”그러나 두 손은 금세 유건에게 붙잡혀 머리 위로 꺾이듯 제압당했다.숨 막히는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 겨우 끝난 입맞춤.“하아, 하아...”시연은 얼굴이 시뻘게져, 눈가까지 붉어진 채 헐떡였다. 입술은 퉁퉁 부었고, 혀끝은 따끔거렸다.“쯧...”들숨에 찬 공기가 닿자, 시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아, 아파요...”유건은 시연의 뺨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말했다.“어디, 봐봐.”“퉤!”시연은 결국 유건한테 침을 튀겼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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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4화

“응...?”시연의 시야가 흐릿했다. 눈앞에 유건이... 여러 명이 보였다.“없어... 없어요... 아!”“없다고?”유건의 눈빛이 깊게 일렁였다.타오르는 불길 같았지만, 뭔가를 끝내 꾹 눌러 삼킨 듯했다.“그럼, 나는 너한테 뭐야?”“당신이요?”시연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당신은... 내 보스잖아요.”‘보스?’‘아, 그렇구나. 틀린 말은 아니네.’“하...”유건은 숨을 들이켰다.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어째서인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래, 내가 이 관계를 이렇게 만들어놨지. 누굴 탓하겠어.’눈을 가늘게 내리깔며 웃는 얼굴 아래, 유건의 속눈썹 아래로 문득 짙은 그늘이 스쳤다.이름 모를 허전함.늘 뭔가를 쥐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그러고는, 다시 시연의 입술을 깊게, 아주 깊게 탐했다....모든 게 끝난 후, 유건은 시연을 안고, 볼을 쓰다듬으며 낮게 물었다.“어때, 기분이?”시연은 눈꼬리를 올리며 그를 째려봤다. 어느새 물기가 도는 눈동자, 뺨은 달아올라 있었고, 그 표정은 본인도 모르게 어딘가 치명적으로 유혹적이었다.“그만해요.”“부끄러워?”유건은 웃음을 터뜨렸다.“별 것도 아닌데? 밖에 나가 떠든 것도 아닌데, 딱 봐도 알겠네. 지금 표정, 정말 상쾌해 보여.” “당신!”깜짝 놀란 시연은 벌떡 일어나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더 이상 떠들면 난 진짜 당신 혀 물어뜯어 버릴 거예요!”그러자 유건은 오히려 눈빛이 반짝이며 웃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그녀를 당겼다.“좋지. 물어. 끊을 수 있으면, 끊어버려.”시연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이 인간은, 진짜 못 말려...’“이제 말 안 할게요. 됐죠?”띠리링.바닥 어딘가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유건의 바지 주머니였다.“아, 시끄러워요! 얼른 받아요!”시연은 성가시다는 듯 발로 유건의 허벅지를 툭 찼다.유건은 웃음을 억누르며 침대에서 내려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화면을 보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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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5화

“그 말, 참...”유건은 얇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리슬 씨, 해외에서 자랐다고 해도... 사람들 눈치 볼 줄은 알잖아? 내가 굳이 거기서 정리 안 한 건, 체면 세워준 거였어.”말인즉슨, 자리에서 굳이 리슬 망신 줄 필요 없어서 넘겼다는 뜻.리슬의 얼굴에서 피가 싹 가셨고,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그럼... 그럼, 유건 씨는... 나한테 그런 감정 없다는 거예요?”유건은 웃음을 거뒀다.“맞아. 없어.”리슬은 예상했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그리고 다급히 말을 이었다.“분명, 분명 나한테 마음 있었잖아요! 나한테도 기회 있었잖아요! 그렇죠? 아니라고 하지 마요! 나도 바보 아니에요...! 적어도 희망은 줬었잖아요!”그 순간, 유건은 짧게 멈칫했다.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있었어.”유건도 인정했다. 분명 한때는... 잠깐 생각해 본 적 있었다.‘내가 다시 연애한다면, 이 사람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막연하고 피상적인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단지 자기 욕망이 터지기 직전의 혼란, 혹은 감정 아닌 계산이었을 뿐.유건은 그 사실까지, 부정하진 않았다....한편, 객실 안.시연은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받으려 수전을 틀었는데, 물이 안 나왔다.“어라?”수전을 두어 번 두드리자, 입가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왜 이래, 물이 안 나오네...”씻지도 못하고 어쩌나 싶어, 일단 유건한테 전화하려다 탁자 위에 무심히 놓인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핸드폰도 안 가져갔네... 그럼 멀리 안 간 건가? 그냥 깜빡한 건가?’시연은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고, 서비스 직원이라도 찾아보려고 방을 나섰다.그리고 복도를 돌아서던 그 순간, 멀지 않은 끝 쪽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을 발견했다.고유건, 그리고 도리슬.‘분위기가 왜 저래?’시연은 무심코 숨을 고르며 그쪽을 힐끔 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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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6화

리슬은 숨이 턱 막혔다.유건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리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유건은 리슬의 팔을 살짝 놓으며 말했다.“댄스 타임이 곧 시작할 거야. 오늘 온 사람 중에 젊고 괜찮은 사람들 많아. 리슬 씨한테 맞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내가 사람 불러서 같이 가줄까?”“됐거든요!”리슬은 입술을 삐죽이며 기어이 한마디 했다.“나 혼자 갈 거예요!”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휙 돌아섰다.몇 걸음 가지도 않아, 발이 딱 멈췄다.리슬은 다시 돌아섰다. 볼이 부풀고 눈에 분한 기색이 번졌다.“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분명 나를 생각해 줬던 것 같은데, 왜... 왜 갑자기 아니게 된 거예요?”유건은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을 피했다.“그건 내 개인적인 이유야.”“혹시, 혹시...”리슬은 망설이다 결국 내뱉었다.“혹시... 시연 씨 때문이에요?”유건의 표정이 순간 굳었고, 말이 없었다.뭐가 더 필요할까...“역시... 시연 씨 때문이구나.”리슬은 갑자기 환히 웃었다.“시연 씨가 예전에 당신 아내였던 거, 분명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겠죠. 당신도 정말 좋아했을 테고요.” “시연 씨한테 진 거면, 억울하지 않아요. 당신의 사과, 받아줄게요. 이제 됐죠? 나 춤추러 갈래요!”돌아서자마자,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망신당할까 봐 리슬은 그대로 뛰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바로 몇 걸음 떨어진 곳, 시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혹시... 시연 씨 때문이에요?’‘역시... 시연 씨 때문이구나.’‘시연 씨한테 진 거면, 억울하지 않아요.’쿵!머릿속이 울렸다.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문득 떠오른 건, 아까 유건의 그 이상한 ‘발작’ 같은 거, 그리고 ‘포옹’하면서 쏟아냈던 질문들.남자 친구 없냐고.그럼 유건은 시연한테 뭐냐고.그때는 그녀가 얼떨떨해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또렷했다.시연의 머릿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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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7화

아침 일찍.유건은 알람 소리에 깨었다.전날 밤, 잔치 준비로 늦게까지 바빴던 유건은 시연을 깨울까 봐 일부러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다.시간을 보니, 지금쯤 시연은 고상훈과 조이랑 같이 아침을 먹고 있을 것 같았다.유건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도착해 보니, 고상훈이 조이를 안고서 다정히 밥을 먹여주고 있었다.“할아버지, 좋은 아침입니다.”유건은 옆에 앉으며 자연스레 시선을 둘러보았다.“찾지 마라.”고상훈은 손자에게 비꼬는 듯한 눈길을 던졌다.“시연이 여기 없어.”“없다고요?”유건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왜요?”“흥.”고상훈은 비웃으며 말했다.“뭘 그리 놀라? 시연이가 여기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어?”“그게 아니라...”유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냈다.‘여기에 안 왔으면 어디 간 거지?’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음만 울릴 뿐 받질 않았다.“왜 안 받아? 무슨 일이지?”“시연이가 네 전화 꼭 받아야 해?”고상훈은 한 치도 봐주는 법 없이 쏘아붙였다.“아직도 시연이가 네 아내인 줄 아나 봐? 어디 가는 것까지 보고해야 돼?”유건은 말문이 막혔다.“할아버지...”“됐다.”고상훈은 더는 애태우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더라.”‘갔다고?’유건의 이마가 더 깊게 찌푸려졌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했지?’“왜 나한텐 말 안 하고...”‘말했으면 내가 더 빨리 해결해 줄 수도 있었잖아.’“이제 와서 걱정되냐?”고상훈은 손자를 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지금 걱정할 자격이나 있냐? 명분도 없는 남자가.”유건이 할 말을 다 잃었다.‘나, 그래도 이 집 친손자 맞지 않나?’“너 말이다.”고상훈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묵직하게 물었다.“너랑 시연이, 지금 이게 도대체 뭔 관계냐? 어떻게 할 생각이냐?”“어떻게 할 생각이냐고요?”유건은 코웃음을 쳤다.“뭘 어떻게 해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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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8화

‘이런 명분 없는 관계도 결국 내가 밀어붙인 거잖아.’유건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데... 그 이상을, 내가 감히 바랄 수 있나?’...시연은 시내로 돌아오자마자 택시를 타고 사설탐정 사무소로 향했다.아침 일찍, 탐정 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장소미 건으로 뭔가 진전이 있다는 말이었다.전화로는 설명이 어렵다며 직접 오라고 해서, 시연은 마음이 급해 서둘러 달려온 것이었다.“지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네.”시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나왔나요? 증거 찾으셨어요?”“그건 아직 좀 조심스럽습니다.”시연의 사건을 맡은 이는 맹방동. 이름만 들으면 투박하지만, 의외로 노련한 탐정이었다.“사실 아시겠지만, 이 사건이 워낙 복잡하고, 실마리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애초에 경찰 쪽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못 냈던 일이다.“네...”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오늘은...?”“약간의 단서를 찾았습니다.”맹방동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철을 꺼내 펼쳤다.“한번 보시죠.”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정리된 내용들.장소미 차량 관련해 그간 확인한 의문점들이었다.“여기는 장소미 씨 차량의 정비 기록입니다. 처음 구입할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입니다.”“아...”시연은 고개를 숙여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어?”“눈에 띄죠?”맹방동은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3년 전, 사고 나기 직전의 정비 기록. 정기 점검 주기가 아닌데 맡겼더라고요.”“맞아요.”시연의 심장이 두근하고 빨라졌다.“혹시... 그때 차량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그것도 확인했습니다. 별다른 문제 없었습니다.”‘수상해.’정기 점검 날짜도 아니고, 차에 문제도 없는데, 왜 굳이 그때 정비소에 맡겼을까?“안타깝게도, 이건 증거로 쓰기엔 부족합니다.”“그렇겠죠...”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장소미 앞에서 캐묻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자기 차, 자기 마음대로 정비 맡기는 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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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9화

“그럼, 하고 싶은 말씀이...”맹방동이 물었다.“계속 진행해 볼까요?”“당연하죠.”시연은 주저도 없었다.‘3년 만에 겨우 잡은 실마리야. 여기서 멈출 순 없어.’“알겠습니다.”맹방동은 확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 방향으로 계속 추적하겠습니다.”“네, 부탁드려요.”‘결국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도 괜찮아.’‘다른 방향으로 다시 시작하면 돼.’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어쨌든 끝까지 파헤쳐볼 거야. 절대로 중간에 멈추지 않아.’사무실을 나서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시연은 진아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했다.‘진아랑 같이 은범이 보러 갈까...’하지만 진아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두 번이나 걸었지만, 결과는 같았다.‘할 수 없지.’결국 시연은 혼자 가기로 했다.며칠 전, 은범은 제남도 요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의식은 여전히 없지만,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능들은 안정되었고, 강수희 입장에서도 집에서 돌보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시연이 사택에 도착하자 강수희가 반갑게 맞이했다.“시연이 왔구나? 어서 들어와.”“사모님.”시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급히 오느라 뭔가 준비를 못 했어요.”“그게 무슨 말이니?”요즘 강수희는 더 이상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네 덕분에 은범이 많이 좋아졌어. 침 치료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시연은 가방에서 침술 세트를 꺼냈다.“효과가 있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오늘도 해볼게요.”“그래, 은범이 방으로 가자.”방 안에는 커튼이 활짝 열려, 따뜻한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강수희는 은범의 담요를 살짝 걷어 팔과 다리를 드러냈다.시연이 침을 놓기 편하도록 옆에서 조심스레 도왔다.한동안 방 안은 고요했다.침 치료가 끝날 즈음, 강수희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그걸 눈치챈 시연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사모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그게...”강수희는 다소 쑥스러운 듯 손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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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0화

강수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나 절대 너한테 짐 안 될게. 난 은범이만 잘 돌볼 거니까.”그러면서도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너 돌아오고 나서 진짜 좋아졌어. 나야말로 네 든든한 후원자가 될 거야. 은범이 해친 사람들이 꼭 벌 받고, 은범이는 눈 뜨고...”“나 그땐 너희 결혼식 꼭 챙겨줄 거야. 너희 아직 젊잖아? 앞으로 좋은 날만 잔뜩 남았지!”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나랑 은범... 좋은 날...?’...진아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던 건 단순히 배터리가 다 돼서였다.막 학부 실험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진아는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고 전원을 켰다.그제야 화면에 잔뜩 쌓인 부재중 전화가 떠올랐다.‘시연이네.’전화를 걸어야겠다 싶던 찰나,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화면을 밀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어디야? 뭐 하고 있어?]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일하죠. 방금 애들 실험 수업 끝냈어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에이, 그 말투 뭐야. 아무 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해? 우리 몇 년 지기인데, 친구 아니었어?]“끊을게요.”[야야, 잠깐만!]부지하가 다급히 말렸다.[오늘 저녁 시간 돼? 밥이나 같이 먹을래? 내가 데리러 갈까?]진아는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무르며, 별생각 없이 잘라 말했다.“미안해요, 시간 없어요.”[거절이 너무 빠른데?]지하가 낮게 웃었다.[너무 대놓고 피하는 거 아냐? 설마 나랑 밥 먹으면 체하냐?]“체할 정도까진 아니고요.”진아는 코끝을 문질렀다.‘눈치 빠르네. 솔직히 그리 친해지고 싶진 않은데.’“그냥... 내가 보기엔 우린 같이 밥 먹을 사이까진 아닌 것 같아서요.”[그럼 어떤 사이여야 같이 밥 먹을 수 있는데?]지하는 장난스레 물었다.[기준 좀 알려주라. 내가 맞춰볼게.]“쳇...”진아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나 놀리면 재밌어요? 부 대표님이랑 밥 먹고 싶은 사람, 줄 섰겠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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