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921 - Chapter 930

992 Chapters

제921화

“그래요.”하은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지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별말씀을요.”오전 내내 정신없이 배우느라 바빴지만, 시연은 금세 손에 익혔다.점심시간이 되어 그녀는 같은 팀 동료들과 식당으로 향했다.첫 출근인 시연은 카드를 꺼내 계산대에 찍었다.“오?”동료들이 웃으며 놀렸다.“지 선생님, 설마 이걸 입사 기념으로 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럼 우리 안 먹어요.”“맞아요, 그 정도론 선생님 체면에 안 맞죠!”“하하.”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아니에요, 입사 기념은 따로 준비할게요. 오늘은 그냥 제가 사는 거니까 다들 얼른 밥 받아요.”“예이!”“지 선생님, 최고다!”“...”공짜 밥 두 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게다가 1년 전 외주업체가 바뀌고 난 뒤 강울대병원 직원 식당은 맛있기로 유명했다.하지만 즐거운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밥을 먹고 화장실에 들른 시연.칸 안에 앉아 있는데, 바깥 세면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까지 같이 밥 먹던 동료들이었다.그중 하나, 하은.“지 선생님이 무슨 특채래요. 진짜예요?”희미한 코웃음 소리.“그건 잘 모르겠고, 빽 있는 건 확실하죠.”“진짜예요? 어디서 들었는데, 예전에 이유 없이 퇴사했다가 복귀했다면서요? 그 정도면 빽 맞네요. 뭔가 아는 거 있어요?”“그만 물어요.”하은은 말을 흐리며 덧붙였다.“알 거 없고, 지 선생님 뒤에 있는 사람, 장난 아니에요. 여기선 그냥 ‘왕’이라 보면 돼요.”“헐, 대박...”동료 오수현이 감탄했다.수현은 신입이라 시연의 과거를 몰랐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다가, 갑자기 말이 뚝 끊겼다.수현의 시선이 하은 뒤쪽에 고정됐다.“지... 지 선생님...”뒷담화의 주인공을 정면에서 마주한 순간.순간 굳어버린 하은도 잽싸게 뒤를 돌아봤다.“지시연 선생님...?”“네.”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옆으로 가 손을 씻었다.나가는 길에 시연은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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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저도 알아요. 이 환자, 지방 병원으로 옮겨서 계속 치료하면...”“말도 안 돼요.”하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이 잘랐다.“지방 병원으로 보냈다가 합병증이라도 생기면, 그게 환자 책임일 것 같아요, 우리 책임일 것 같아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하은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말했다.“이미 환자랑 보호자한테 설명했고, 동의서도 받았어요. 자진 퇴원, 책임은 본인 쪽으로...”“주하은 선생님.”시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지금 나랑 장난하는 겁니까? 한쪽에선 환자 딱하다고 말하면서, 다른 쪽에선 책임 전가하자는 거예요?”“그... 그게...”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복도 쪽에서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하지만 누구도 끼어들 용기는 없었다.“무슨 일이에요?”이경민 교수가 소란을 듣고 들어왔다. 상황을 대충 말한 시연이 나섰다.“이런 상황입니다. 심장 수술까지 받고 나서, 이제 돈 아끼겠다고 퇴원이라뇨... 아직 버틸 때가 아닙니다.”“네, 맞아요.”이경민 교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하은을 다독였다.“주 선생님, 지 선생님 말이 맞아요. 아직은...”“쳇.”하은이 작게 비웃었다.“왜 그래야 하죠?”그녀는 시연을 곧게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퇴원 기준을 누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세요? 최소한 지 선생님보다 제가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이 환자는 제 환자예요. 지 선생님은 오늘 첫날이잖아요. 그런 분이 저보다 환자 상태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세요?” “주 선생님...”시연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하은은 멈추지 않았다.“게다가, 주치의는 저예요. 퇴원 여부는 제가 결정할 권한이 있어요. 지 선생님 사인은 병원 규정상 필요한 거고요.”솔직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환자의 상태는 주치의 재량이 크다.원칙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같은 팀 선배라도 쉽게 간섭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지 선생님.”하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 선생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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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신입 직원들은 숨을 죽였다.‘고 대표님이... 지 선생님이랑 저렇게 친하다고? 주 선생님이 아니고?’‘...’반면, 오래된 직원들은 더 놀랐다.‘3년이나 지났는데... 고유건이랑 지시연, 아직도 같이 있다고?’‘지시연만 돌아오면, 주하은은 끝인 건가.’‘근데, 두 사람 이혼한 거 아니었어?’‘...’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무시하듯, 시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게으른 미소를 지었다.“웬일이에요? 어떻게 왔어요?”“일 일찍 끝내고, 널 데리러.”유건이 말했다.“첫 출근이잖아, 오늘.”그러다 시선이 주위를 한번 훑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봐라.’하은은 숨을 삼켰다.‘묻지도 않고, 당연히 지시연이 피해자래. 저 태도, 진짜...’입 안에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수년간 눌러온 질투심이 속에서 부글부글 올라왔다.“허.”하은은 결국 참지 못했다.“누가 지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다는 거예요? 지 선생님이 오히려 제 일에 간섭하고, 상급자랍시고 권한 남용한 거죠! 고 대표님, 지 선생님이...”“그쪽한테 물은 거 아니고.”하은의 입이 딱 다물어졌고, 숨이 턱 막혔다.유건은 단 한 번도 하은 쪽을 보지 않았다. 오직 시연에게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말해 봐, 무슨 일이야?”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이런 데서까지 이렇게 감싸주면, 곤란한데.’작게 한숨을 삼키며, 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환자 하나가 있었어요. 아직 퇴원 기준이 안 돼서 주 선생님한테 사인 못 해줬어요. 근데 주 선생님은 내가 괜히 태클 거는 줄 아셨나 봐요.”“아, 그게 다야?”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곤 이경민 교수에게 시선을 옮겼다.“교수님, 지 선생님이 처리한 거 문제 있습니까?”“아, 전혀요!”이경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지 선생님은 상급자로서 당연히 판단할 자격 있으십니다.”“그럼 문제 될 거 없네.”유건은 시연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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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그렇게 좋아한다고?’아까 하은은 똑똑히 봤다.유건이 시연을 바라보는 눈빛.3년 전, 그때랑 하나도 변하지 않은 눈빛이었다.“아직도 미련 못 버렸어요?”“그만해. 그건 그쪽이 물을 일이 아니야.”유건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짧게 말했다.“더 할 말 없으면 가봐.”“유건 씨...”바로 그때, 탈의실 문이 열렸다.시연이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나왔다.하은과 유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대화 중이었어요? 내가 좀 일찍 나왔나요? 다시 들어갈까요?”“가지 마.”유건은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또 화났어?’“됐어, 가자.”그는 시연의 어깨에서 가방을 자연스럽게 벗겨 메고, 손을 끌어 잡았다.“고 대표님!”뒤에서 하은의 목소리가 터졌다.“시연이는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 환자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저를 괴롭히려고요! 그 환자, 진짜 돈이 없다고요! 의사라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죠! 시연이한테, 그런 게 있기나 해요?”그러나 앞서 걷던 두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차에 올라타자, 유건은 옆자리의 시연 얼굴을 힐끔 봤다.뭔가 표정이 묘했다.“왜?”“주하은 말 생각하고 있었어요.”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그 환자, 사실 사정이 좀 어려운 건 맞거든요.”그러나 끝내 고개를 저었다.“그래도... 살다 보면, 절대 아끼면 안 되는 돈이 있잖아요. 이미 쓴 치료비도 적지 않은데, 다 날릴 순 없으니까.”“그래, 맞아.”유건은 속으로 웃으며 한숨을 삼켰다.‘참,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마음 약한 여자.’지금도 찡그린 미간은 그대로였다....SKY 전원주택단지로 돌아온 밤.시연이 샤워실로 들어가자, 유건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지한아.”[네, 형님.]“오늘 그 환자, 좀 챙겨. 지원금 붙여서 치료 계속할 수 있게 해.”[알겠습니다.]다음 날.시연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건 다름 아닌 하은이었다.어제와는 딴판이었다.오늘의 하은은 어딘가 당당하고, 심지어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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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응?’유건은 잠깐 멍해졌다. 손끝이 멈칫, 움직임까지 느려졌다.“따로 가자고?”“원래 그래야 하지 않아요?”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날 사람 많을 텐데, 나랑 조이가 같이 갔다가... 혹시라도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나랑 같이 다니는 게 창피해?”“그럴 리가요...”‘조금은 그렇지만.’애인으로서 태도를 지켜야 한다는 건, 시연도 잘 알았다.시연은 웃으며 말했다.“나는 정은희 씨랑은 달라요. 그분은 얼굴 비치면 인지도도 올라가고 홍보도 되겠지만, 난 그냥 병원 다니는 평범한 의사예요. 지나친 관심은 불편해요.”조금 웃으며 입술을 내밀었다.“게다가, 조이 이제 말귀를 좀 알아들어요. 어른들이 말실수라도 하면... 설명하기 애매하잖아요. 그러니까 따로 가요, 네?”그 말을 들은 유건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손놀림도 잠깐 멈췄다.“왜 멍하니 있어요?”시연은 고개를 살짝 젖히며 말했다.“머리 안 감겨줄 거예요? 거품 오래 올려두면 두피 상한다고요.”“아...”유건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조심스레 머리를 문질렀다.“간지러워?”“아니요, 이제 괜찮아요.”“린스 쓸까?”“아니요, 머리 말릴 때 오일만 발라줘요.”“알겠어.”조심스러운 손길 사이로, 유건은 마지막으로 낮게 말했다.“좋아, 네 말대로 할게. 나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너랑 조이는 기환이가 데리러 올 거야.”금요일.시연은 밤샘 근무를 마치자마자 SKY 전원주택단지로 달려갔다.조이는 오늘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 미리 사정 얘기하고 하루 결석을 허락받은 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시연은 샤워부터 하고 나왔다.도경미가 미리 준비해 둔 짐들을 하나하나 건넸다.“다 챙겼어요. 두 번이나 체크했으니까 빠진 거 없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만 더 봐주세요.”“됐어요.”시연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이모님은 워낙 꼼꼼하잖아요. 내가 뭘 더 걱정해요.”그렇게 말하며 시연은 몸을 숙여 조이를 품에 안았다.“우리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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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괜히 대답 잘못했다가 둘 사이에 금이라도 가면, 그땐 내가 죄인이지.’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도리슬은 정은희나 주하은이랑은 다르니까.’‘고씨 가문에서 사실상 ‘예비 사모님’ 취급받는 사람인데.’하지만 정작 리슬은 유건에게 직접 묻지 못했다. 자격도 없었고, 무엇보다 괜히 잘못 건드려 자기 입지만 좁아질까 봐 두려웠다.“그럼...”리슬은 살짝 숨을 고르고 질문을 바꿨다.“시연 씨, 이것만 대답해 줄래요? 두 분... 다시 만날 생각 있으신가요?”이건, 시연도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없어요.”단호한 목소리였다.“정말요?”리슬의 눈에 순간 빛이 돌았다.‘희망이 있구나.’“거짓말 아니죠?”“그럼요.”시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그럼 됐어요. 안 물어볼게요, 더는...”리슬은 환하게 웃었다.시연은 조금 놀란 얼굴로 리슬을 바라봤다.“이걸로 정말 괜찮은 거예요?”“그럼요.”리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저, 아직 유건 씨랑 결혼도 안 했잖아요. 사모님도 아닌데, 너무 나서면 싫어할까 봐요. 유건 씨 결혼 전 과거까지 따지는 건 제 욕심이고, 그럴 자격도 없고요. 나중에 혹시 부부가 되더라도, 서로 숨 쉴 공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젊은 얼굴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저, 유건 씨 마음 얻고 싶어요. 오래,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요.”시연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맞아. 도리슬, 정은희한테도 꽤 관대했던 것 같은데.’‘하지만 나는... 정은희가 아닌데.’리슬 앞에서, 시연이는 어쩐지 묘한 죄책감이 목덜미를 눌렀다....부두에 도착했을 땐, 조이는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했다.시연은 조이를 품에 꼭 안고 조심스레 배에서 내렸다.기환은 먼저 내려 짐과 차를 챙기러 갔다.“유건 씨!”사람들 틈에서 리슬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발돋움까지 해가며 반가운 얼굴로.시연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건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도리슬을 데리러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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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제남도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고상훈 쪽에서 사람을 보냈다.조이를 데리러 온 건 도경미와 함께 일하는 아이 돌보미 중 한 명이었다.“지 선생님, 어르신께서 조이 보고 싶어 하세요.”길에서 푹 자고 일어난 조이는 증조할아버지 댁에 간다는 말에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었다.“조이, 가서 증조할아버지한테 장난치지 않기. 알았지?”“알아요! 엄마는 잘 자면 돼요.”조이도 안다. 엄마는 밤새워 일하고 온몸이 파김치라는 걸.조이가 아이 돌보미 손에 이끌려 나간 후, 시연은 방문을 잠그고 커튼을 치고, 바로 파자마로 갈아입어 침대에 몸을 던졌다.‘이제야 살겠다.’눈 감자마자 깊은 잠.시연이 얼마나 잤을까...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올 무렵, 몸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민트향.‘안 봐도 안다. 그 인간이지.’“쯧.”따가운 입맞춤이 볼을 간질이자, 시연은 손으로 대충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당신... 진짜 귀찮아요.”“내가 귀찮아?”남자의 낮고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어젯밤 나 혼자 잤거든.”“그게 나 때문이에요?”“너 때문은 아니고.”유건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그냥... 불쌍하다 생각해주면 안 돼?”“나 잘 거예요.”시연은 눈을 꾹 감은 채 항의했다.“해 지겠다. 하루 종일 잤는데 아직 부족해?”“배고파요.”그 말이 떨어지자, 마침 시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유건은 웃으며 두 손으로 시연을 번쩍 안아 올렸다.“그럼 먼저 밥부터. 룸서비스 부를까?”“네.”시연은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나며 욕실로 걸어갔다.가는 길에 잊지 않고 말했다.“옷 좀 챙겨줘요.”“네, 알겠습니다! 여왕님!”...시연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룸서비스가 도착해 있었다.하루 종일 굶은 배는 한계에 다다른 듯, 그녀는 제대로 앉자마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유건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물컵을 내밀었다.“천천히 좀 먹어. 물도 좀 마시고.”“음...”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자 그제야 시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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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여자 친구?’유건은 그제야 알아챘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네가 말하는 게... 도리슬?”“네.”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유건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진심으로 도리슬이 내 여자 친구라고 믿는 거야?’‘내가 한 번도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명확해 보였나?’‘전부 도리슬 쪽의 일방적인 감정일 뿐인데...’‘아니, 그보단... 어쩌면 도리슬이 내 여자 친구라고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유건은 얇은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도리슬 생각해서 뭘 어쩌라고. 계속해.”시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나야 그냥 애인 신분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선은 지켜요. 유부남한테 애인 자리는 안 준다고요.”“그래?”“그래요.”시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랬으면 차라리 그때 오대민을 따라가지 않았겠어요?” “지시연.”순간, 유건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었다.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시연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툭.손에 들고 있던 떡볶이 떡이 국물 속으로 떨어졌다.“너한텐...”유건의 손이 갑자기 시연의 턱을 움켜쥐었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은 여자를 응시했다. “오대민이든, 나든, 상관없다는 거야? 그때 누가 널 구했든, 따라갔을 거란 거지?”시연은 잠깐 눈을 내리깔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그러곤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네.”유건의 눈동자가 순간 아찔한 듯 흔들렸다.놀라움과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 같은 게 스쳤지만, 그 감정은 너무도 빨라서 본인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시연은 코웃음을 쳤다.“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에요? 어차피 똑같잖아요, 권력으로 사람 쥐고 흔드는 거.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권력으로 흔든다, 그 말...”유건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틀리진 않네.”“그러니까요.”시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사이는, 당신이 결혼하는 날까지로 정해요. 그렇게 정하자고요.” “허, 허허.”예상치 못한 말에, 유건은 웃음이 터졌다.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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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아, 바쁘구나.’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스르르 밀려드는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전날 낮잠을 너무 오래 잔 탓일까...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고상훈 회장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고상훈은 이미 마당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원래 잠이 적은 사람이니까.“할아버지.”시연은 살짝 웃으며 다가갔다.“좋은 아침이에요.”“그래, 그래.”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조이 데리러 왔구나? 그 애는 나보다 늦잠인데, 깨우지 마.”그리고 손짓으로 시연을 옆자리로 부르며 말했다.“와서 잠깐 앉아.”“네.”시연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고상훈은 손수 차를 우리는 중이었다.“차 마실 줄 아나?”“잘 몰라요. 그냥 아무렇게나 마셔요.”“하하하.”고상훈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거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나도 그래.”그는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조금만 마셔봐.”“감사합니다.”잠시 후, 하나둘씩 고상훈한테 인사를 드리러 어른들이 모여들었다.대부분 고씨 집안 어른들이었는데, 시연은 민망해서 자리를 살짝 피해 섰다.그때 마침 조이가 깨어났다.시연은 조이의 방으로 가 아이의 매무새를 정리해 줬고, 머리를 다 묶어주고 나니, 아이 돌보미 오수자가 방으로 들어왔다.“지 선생님, 어르신께서 조이 데리고 오라 하세요. 식사하시겠대요.”“네, 곧 갈게요.”조이를 안고 거실로 나서자, 왁자지껄하던 대화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모든 시선이 시연과 조이에게 쏠렸다.어떤 이들은 시연을 알아보았고, 어떤 이들은 잠깐 머뭇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걸지는 않았다.“시연, 이리 오너라.”고상훈이 손짓했다.“증조할아버지!”조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팔을 뻗었다.통통한 두 팔이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쏠렸다.“배고파요! 밥!”“그래, 그래.”고상훈은 눈이 사라지도록 웃으며 말했다.“다 준비해 뒀지. 증조할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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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어휴,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 밥상 한 번 보려고 온 건데, 어딜 가겠어요?” “맞아요, 맞아.”와글와글 웃음소리로 가득한 가운데, 도리슬이 선물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할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집안 분위기 엄청 좋네요. 저 혹시 늦은 거예요?”‘응...?’고상훈은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소리야. 너야 언제 와도 환영이지.”“어머, 리슬 아가씨 왔네?”분위기가 술렁였다.몇몇은 눈빛까지 번쩍이며 살짝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리슬 아가씨, 오늘 온 사람들은 고씨 집안 가까운 친척들이에요!”“맞아요, 어르신께서 그러셨거든요. 한 가족끼리 화목하게 밥 한 끼 하자고.”분명 농담 같으면서도 미묘한 뉘앙스가 담긴 목소리였다.“아유, 왜들 그래요? 리슬 아가씨야, 곧 우리 집 식구나 다름없는데요.”“그러게요, 리슬 아가씨, 본인 생각은 어때요? 맞죠?”“...”도리슬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작게 웃으며, 민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아휴, 무슨 말씀이세요... 저, 그런...”“어머나, 쑥스러워하시네요?”“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고 대표님한테 물어보면 금방 알겠죠!”“맞다, 고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 같이 안 오셨어요?”“...”“저, 그게...”리슬은 입술을 꾹 깨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저도... 몰라요...”“어머, 커플인데 서로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아이쿠, 고 대표님 오신다!”“아이고, 말하니까 오시네!”“...”시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현관 너머로 유건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단 하룻밤 못 봤을 뿐인데, 왠지 오래 못 본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와, 시끌시끌하네.”유건은 웃으며 들어섰고, 곧장 친척들 사이에 둘러싸였다.“고 대표님, 오늘 리슬 아가씨 혼자 보냈다면서요? 어디 계셨어요?”유건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제야 리슬 쪽을 보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런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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