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191 - Chapter 1200

1281 Chapters

제1191화

성유리는 빠르게 침대 위에 눕혀졌지만 손은 여전히 박한빈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그게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손바닥엔 식은땀이 가득했고 눈동자는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듯,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나 여기 있어.”박한빈이 나지막이 성유리를 안심시키려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막상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놀랄 만큼 떨리고 있었다.곧이어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의료진은 성유리를 바로 분만실로 옮겼다.박한빈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출산 동의 절차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간호사가 그를 막아섰다.문은 이내 굳게 닫혔고 박한빈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붉은 불이 들어온 분만실 표시등을 말없이 바라보며 박한빈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그러자 밀려오는 감정은 단 하나였다.공포.‘내가 오지 말았어야 했어.’애초에 박한빈이 에릭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됐다.이 자리에 오는 것도 에릭이 성유리를 유인할 기회를 주는 것도 전부 하지 말아야 했다.박한빈은 오늘 밤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아니, 성유리를 절대 혼자 있게 해서는 안 됐다.그랬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또다시 성유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지금 이 시점이라면, 출산 예정일까지는 아직 네 주나 남아 있어야 했다.성유리는 원래 다른 도시에 있어야 했고 오늘 밤 이런 일들을 겪을 일도 없었어야 했다.박한빈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그녀가 그 상황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리고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지.그건 짐승들이었고 미친 자들이었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박한빈은 총을 꺼냈고 그 행동은 오히려 성유리의 감정을 더 자극해 버렸다.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녀가 조산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조금 전 통증과 공포로 인해 창백하게 질린 성유리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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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2화

성유리는 예전에도 모풍국의 병원에 와 본 적이 있었다.이곳의 의료진은 늘 차갑고 바쁘기로 유명했다. 특히 그녀처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에릭 일가의 개인 병원이기에 적당히 넘기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렇지만 그런 환경조차도 성유리가 느끼는 공포와 극심한 통증을 덜어주진 못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궁문은 거의 다 열려 있었다.그리고 첫 출산은 벌써 7년 전의 일이었기에 의사는 제왕절개 대신 자연분만을 권했다.그 순간부터 몸이 두 쪽으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성유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고 눈물도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고개를 돌렸지만 어디에도 아는 얼굴은 없었다.눈앞에 있는 건 모두 낯선 사람들뿐.이내 간호사가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힘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아시죠? 한 번에 힘줘야 해요. 끊기면 안 돼요.”다른 말들도 했지만 성유리는 이미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그저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눈빛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러다 갑작스레 옆의 기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리고 또다시 꿈을 꾸었다.꿈속은 어딘가 몽환적인 놀이공원이었고 성유리의 손엔 예쁜 유리구슬이 들려 있었다.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그곳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눈을 떴을 때, 이미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었고 손안엔 그 반짝이는 유리구슬이 있었다.곧 그녀는 고개를 숙여 유리 표면을 들여다봤는데 속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뭔가 달랐다.그건 분명 성유리였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아니었다.훨씬 더 어리고 더 생기 넘치는 눈동자, 그리고 하얀 얼굴과 단단한 눈빛.유리구슬 속에 비친 그녀는 분명 몇 년 전의 성유리였다.성유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손바닥을 유리면에 가볍게 대고 있었다.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금의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듯한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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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3화

“걱정 마세요. 아이는 아주 건강합니다.”의사가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그리고 성유리의 상태를 살피며 이런 말을 보탰다.“조산이긴 했지만 몸무게는 3kg이고 지금 컨디션도 아주 좋습니다.”그제야 성유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다시 물었다.“저... 오래 잤나요?”성유리는 아직도 분만실에 들어갔던 순간이 생생했다.심지어 그날 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도 모두 또렷하게 기억났다.하지만 지금 의사의 말투는 마치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듯했다.그래서 왠지 모를 불안이 스며들었다.“사모님, 오늘이 9일입니다.”의사의 말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내가 이틀 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가?’그때, 옆에 있던 박한빈이 조급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물었다.“지금 환자 상태는 어떤가요?”“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의사는 차분히 대답했다.“회복도 빠르고 상처도 잘 아물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안정을 취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박한빈은 그제야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러자 성유리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기는요? 아이가 보고 싶어요.”“신생아실에 있어. 전문 의료진들이 잘 돌보고 있어.”박한빈은 다시 성유리의 곁에 앉으며 대답했다.“한빈 씨는 아기 봤어요? 성별은 뭐예요?”박한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남자야.”“어떻게 생겼어요? 지금 당장 가서 보고 싶은데...”성유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러자 박한빈이 재빨리 그녀를 눌러 눕혔다.“안 돼. 지금 움직이면 안 돼.”박한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너 산후에 과다 출혈 있었던 거 알아? 응급조치가 제때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깨어 있지도 못했을 거야.”말을 이어가진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끝이 작게 떨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성유리는 몰랐다.지난 이틀 동안 박한빈이 어떤 상태였는지.그는 마치 피를 맛본 맹수처럼 사납게 뒤틀린 채 감옥처럼 답답한 현실 속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출구는 없었기에 박한빈은 울부짖듯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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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4화

이틀 뒤, 성유리는 드디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고 신생아실에 가서 아이를 본 후에야 간호사에게서 한 가지 사실을 들었다.박한빈이 한 번도 아이를 보러 오지 않았다는 거였다.수술실에서 나온 뒤로 그는 줄곧 성유리의 병실에만 머물렀고 아이는 간호사와 산후 도우미에게 맡겨진 채 거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남편분이 진짜... 산모분을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간호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그 눈빛엔 안쓰러움도 담겨 있었다.“아이 낳고 나서 이틀 동안 의식이 없으셨다면서요? 남편분이 그걸 전부 아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아이를 제대로 보려고도 안 하시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설마요.”“그럼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간호사의 말에 성유리는 딱히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하지만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봤다.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표정은 좋지 않았다.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시선은 자꾸만 성유리를 향하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성유리는 간호사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아이 상태 괜찮죠? 병실에 데려와도 될까요?”성유리의 요청에 간호사는 바로 의사에게 물었고 의사도 금방 허락해 주었다.그렇게 성유리가 병실로 돌아온 후, 아이도 함께 옮겨졌다.의사의 말처럼 아이는 조산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피부는 희고 보드랍고 얼굴은 통통하게 올라와 있었다.언뜻 보기엔 성유리나 박한빈 누구를 닮았다고도 할 수 없었다.박한빈은 아이에 대해 정말 뭔가 감정이 있는 듯했다.성유리가 계속 요청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아예 병실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너도 쉬어야 하잖아. 아이 데려오면 방해될 수도 있어.”“전문 도우미도 있고 산후도우미도 있으니까 괜찮아요.”성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저 아이 안아 보고 싶어요.”성유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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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5화

박한빈은 아직 방금 전의 긴장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미간은 여전히 살짝 찌푸려져 있었지만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어땠어요?”성유리가 오히려 먼저 물었다.“뭐가?”“아기를 안았을 때 말이에요.”“아무 느낌도 없었어.”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며 성유리 곁에 앉았다.뭔가 손으로 할 일을 찾으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옆에 있던 사과와 과도를 들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칼질을 시작하지 못했고 그저 손끝만 내려다봤다.그곳에는 아직도 아기의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아기는 포대기로 단단히 감싸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 박한빈은 아이의 피부를 직접 만지지도 못했다.게다가 주변엔 사람들이 있었고 설령 자기가 팔을 놓더라도 누군가가 바로 받아줄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그 아기가 너무도 연약하게 느껴졌다.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깨질 것 같고 행여나 놓치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존재.그래서 박한빈은 힘도 못 줬고 놓을 수도 없었다.그 감정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박한빈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성유리가 갑자기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그리고 반사적으로 과도를 옆으로 내려놓았다.혹시나 성유리가 다칠까 봐.성유리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잡은 손에 살짝 더 힘주어 감쌌다.잠시 시선이 맞닿는 그 순간, 박한빈은 몸을 숙여 그녀를 천천히 안았다.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짧은 포옹 하나로 모든 걸 전할 수 있었다.박한빈의 떨리던 손끝도 점점 진정되었고 며칠간 조급하게만 요동치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그는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오랜 중독자처럼, 또는 겨우 손에 넣은 약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온기를 마시고 있었다.조금 아플 만큼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손을 들어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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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6화

“내가 너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성유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한빈 씨 잘못이 아니에요. 한빈 씨는 정말 잘했어요.”박한빈은 말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들어 성유리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손가락은 길었기에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그 촉감에 성유리는 갑자기 몸이 떨렸다.아이를 막 낳은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이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에 이상한 감각이 일었다.아까 키스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말이다.성유리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하지만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박한빈이 먼저 말했다.“너 얼굴 빨개졌어.”성유리는 순간 당황하며 그의 손을 떨쳐내려 했다.그러자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의 시선은 여전히 성유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그 뜨거운 눈빛에 그녀는 심장이 떨려 결국 시선을 피했다.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까 끊겼던 말을 다시 이어갔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네가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이틀 동안, 난 계속 그 생각만 했어. 그때 에릭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네가 영영 못 깨어난다면 어떡할까. 계속 이런 생각만 했어.”“나는 늘 세상에 되돌릴 수 있는 길 따위는 없다고 믿었어. 후회할 시간에 어떻게든 수습하고 보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근데 그때는 정말 후회했어. 칼로 가슴을 찌르고 싶은 심정이었지.”“그러니까 성유리, 그 결정이 틀렸다고 말하지 마. 나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만약 성유리가 정말 잘못되었다면 박한빈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남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남을 수가 없었다.그는 에릭에게도 말한 적 있었다.성유리는 이미 자신의 몸 일부니 심장을 잃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물론 박한빈도 잘 알고 있었다.그것이 하늘이에게는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지.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마찬가지다.하지만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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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7화

박한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냥 그래.”“그냥 그렇다니? 귀엽다는 거야? 아니면 안 귀엽다는 거야?”“직접 보면 알 거야.”“그럼 동생 이름은 뭐야?”“엄마는 하늘이가 지어주라고 하던데?”“그럼 동생 성은 뭐야? 나랑 엄마처럼 성씨야? 아니면 아빠처럼 박씨야?”둘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박한빈은 위의 숫자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정해. 어떻게 하고 싶어?”하늘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박씨 할래. 나랑 엄마는 성씨니까 동생은 아빠 따라가면 공평하잖아.”박한빈은 아이의 말에 딱히 감정이 없었지만 잠시 하늘이를 바라보다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그럼 바꿔볼래?”“응?”“네가 아빠 성 따르고 동생은 엄마 성 따르라고 하자.”하늘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문득 미소를 지었다.역시 하늘이는 못 들은 게 아니라 못 들은 척한 것뿐이다.전에 하늘이 앞에서 누군가 떠들던 말을 박한빈은 들은 적이 있다.“여자아이는 어차피 상속도 안 되니까 성 바꾸는 건 의미 없어.”“딸은 시집가면 끝이지. 무슨 후계자 타령이야.”그런 말들이 하늘이에게 남긴 흔적은 지금처럼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본인 스스로 양보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박한빈은 그땐 별생각이 없었다.사실 그는 원래부터 후계자 같은 거에는 관심 없었다.지화 그룹도 꼭 세습으로 가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박한빈의 기준은 단 하나였다.그와 성유리의 아이라면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걸 남겨줄 거라고.그래서 성을 바꾸는 문제는 그에게 있어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하늘이에게는 그게 곧 ‘입장’과 ‘태도’였던 것이다.박한빈은 조심스럽게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그러고 싶어?”“뭐가?”“아빠 성 따라가는 거.”하늘이는 고개를 들고 한참 동안 박한빈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왜?”“그냥.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자는 거야.”몇 초의 침묵 후, 하늘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은 곧 동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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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8화

-이 외전은 평행 세계 이야기로 성유리가 실종되지 않고 상가에서 자란 설정이다-“성유리 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박한빈 씨 회의가 곧 끝납니다.”비서가 성유리 앞에 커피를 놓으며 말했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비서는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서야 돌아섰다.문밖에는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어때? 어때?”“생긴 건 꽤 예쁘더라.”트레이를 든 사람이 신중하게 생각하며 말했다.“대표님한테 어울리긴 하는데 저것보다 더 예쁜 사람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맞아. 성씨 가문도 이제 예전 같지 않은데 옛날 얘기 꺼내면서 대표님이 성씨 가문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참 대담하네.”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성유리는 애써 무시했고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점점 더 빠르게 넘겼다.그리고 시간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미 박한빈과 약속한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성유리는 박씨 가문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고 있었다.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반 도시가 다 그 집 재산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게 아닌가?’점점 더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밖에서 누군가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성유리는 다시 앉아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바라봤다.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젊은 얼굴이었다.피부는 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지만 성유리가 뉴스나 사진에서 본 박한빈과는 확실히 달랐다.웃기지만 성유리가 성인이 돼서 약혼자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어릴 때부터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둘은 4살 차이였다.같은 업계에 있었지만 박한빈은 어릴 때부터 이런 모임에 절대 섞이지 않았다.성유리가 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지화 그룹은 한창 전성기였고 성씨 가문은 이미 한 단계 다른 급이었다.박한빈은 그녀가 가는 파티에 관심조차 없었다.그래서 성유리에게 박한빈은 뉴스나 영상 속 이미지일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를 보니 차이가 꽤 컸다.사진 속 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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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9화

박한빈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키가 크고 늘씬했으며 이목구비가 깊고 또렷했다. 그는 성유리가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다.박한빈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또한 일류였다. 차갑고 고귀하며 심지어 약간의 압도감까지 느껴졌다.성유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바로 권력자의 우월감이었다.“박 대표님, 이쪽은 성리 그룹의 성유리 씨입니다.”서훈이 말하자 박한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러자 서훈은 다시 돌아서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곧 성유리가 정신을 차리고 먼저 박한빈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박 대표님.”“성유리 씨, 무슨 일입니까?”박한빈이 물었다.그는 얼굴에는 예의와 공손함을 유지했지만 살짝 찡그린 얼굴에서는 박한빈의 초조함과 귀찮음을 읽을 수 있었다.지금 박씨 가문은 박한빈에게는 마치 달라붙은 수초처럼 귀찮고 불쾌한 존재였다.그의 약혼녀인 성유리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성유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제가 온 이유는 박 대표님께 저희 결혼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해서입니다.”말을 마치자 박한빈은 미간을 더 잔뜩 찌푸렸다. 마치 성유리의 말투가 불쾌하다는 듯.하지만 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이제 21세기이니 박 대표님께서도 구태의연한 분은 아니라고 믿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 약혼 같은 건... 사실 대표님도 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오기 전 이미 마음속으로 준비한 말이었기에 성유리의 말은 매끄러웠다.뜻밖에도 박한빈은 즉답하지 않았고 그냥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냉철하고 깊은 눈빛으로 성유리를 관찰하는 듯했지만 그녀는 갑자기 알 수 없이 마음 한편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마치 자신의 속내가 다 들켜버린 것 같았다.더 말하려던 찰나, 박한빈이 갑자기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서요?”“성유리 씨의 뜻은 뭡니까?”“저는 약혼을 취소하고 싶어요.”성유리의 단호한 대답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내 그는 고개를 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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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0화

“저는 대표님 인물 좋으신 걸 알고 있어요.”성유리가 곧이어 말했다.“대표님같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남자면 분명 좋아하는 여자도 많을 거고 저보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도 얼마든지 찾으실 수 있으니...”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원래 차가웠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하지만 성유리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떨림에 사로잡혀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성유리 씨, 올해 21세 맞죠?”박한빈이 갑자기 묻자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언제 졸업해요?”“내년이요.”“음, 그럼 내년에 결혼식 올립시다.”박한빈의 말투는 너무 가볍고 편안해서 마치 내일 장 보러 가서 배추 한 포기 사는 것처럼 들렸다.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확인하던 성유리의 눈은 점점 커졌고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아니요. 박 대표님, 저는...”“내년까지면 성유리 씨가 개인적인 일을 처리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박한빈이 다시 성유리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일단 정해진 일이니 계약은 지켜주세요.”“물론, 성유리 씨가 혼자 해결 못 하면 제가 도와주는 것도 상관없고요. 어떻습니까?”성유리는 말문이 막혔다.이런 결과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박한빈 역시 어린 시절 약혼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그뿐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사회 전체가 성씨 가문이 박씨 가문에게 빌붙으려 한다고 알고 있었다.박한빈이 직접 약혼을 깨지 않은 건 체면 때문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자신이 먼저 말하면 박한빈도 기꺼이 허락할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은...“성유리 씨, 다른 할 말 더 있습니까?”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며 대답했다.“대표님, 아무 감정도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게 너무 황당하지 않나요?”“제가 이미 말했듯이 이건 아버지의 유언입니다.”박한빈이 단호하게 말했다.연이은 똑같은 대답에 성유리는 화가 났다.이 순간, 그녀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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