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291 - Chapter 1300

1622 Chapters

제1291화

그 벨 소리는 마치 사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처럼 끊임없이 울려댔다.결국 성유리는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내려와요.”남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내뱉었고 절제된 목소리에는 분명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인데요?”박한빈이 되물었다.“아무 일 없으면 성유리 씨를 볼 수 없는 겁니까?”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내일은 월요일이잖아요.”그 말에 박한빈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냥 밥이나 같이 먹자고 그러는 겁니다.”성유리는 그 웃음이 무슨 뜻인지 물론 잘 알고 있었다.사실 그녀도 그렇게까지 내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 박한빈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니 괜스레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순간, 그녀는 단번에 그곳에 세워진 차를 발견했다.차의 차가우면서도 매끈한 실루엣, 번쩍이는 도장, 그리고 전면에 박힌 눈에 띄는 로고까지.그 하나하나가 캠퍼스 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하지만 성유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차창 옆에 서 있는 추은정이었다.추은정은 팔에 책을 안은 채 차 안의 누군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백지환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지만 추은정은 겨우 경고만 받고 끝났다.그 후로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에서 활발히 지냈다.그리고 지금 추은정 얼굴에 떠 있는 웃음은 더욱 발랄하고 싱그럽기까지 했다.이내 성유리를 발견한 추은정이 먼저 말했다.“성유리 왔네요.”그녀는 곧 성유리 쪽으로 다가왔다.“드디어 왔네. 박 대표님이 너 한참 기다리셨잖아.”성유리는 추은정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차 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은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지만 창문을 내린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즉, 성유리가 오기 전까지도 그는 추은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Read more

제1292화

박한빈의 손가락 힘은 꽤 셌다.원래도 조금 부어 있던 성유리의 볼이 그 순간 더 아프게 욱신거렸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바로 그때, 박한빈이 물었다.“누구랑 싸웠습니까?”“아니요.”“그런데 얼굴은 왜 이 모양이죠?”박한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성유리의 소매 속으로 스쳤다.그러자 곧바로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성유리의 손에는 이미 거즈가 붙어 있었다.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즈 아래 길게 뻗은 상처 자국은 눈에 띄게 섬뜩했다.“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겁니까?”박한빈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꼴이 왜 이렇게 된 거죠?”그 질문에 성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무것도 안 했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박한빈의 손을 밀어냈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한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성유리 씨, 아버지한테 맞았습니까?”그는 묻고 있었지만 말투에는 이미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그리고 성유리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고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더니 바로 휴대폰을 꺼내려 했다.그 순간, 성유리가 물었다.“왜 아버지가 저한테 손을 댔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그 한마디에 박한빈은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네?”박한빈은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혹시 저랑 결혼하기 싫어서 싸운 겁니까?”성유리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하지만 그 침묵은 곧 박한빈의 말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러자 이번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성유리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한빈 씨도 아시잖아요. 왜 부모님이 이 결혼에 이렇게 집착하는지...”“만약 박한빈 씨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면 저희 부모님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예요.”성유리는 숨을 고르며 계속 말했다.“지금 부모님이 박한빈 씨랑 결혼하라고 우기
Read more

제1293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침묵은 점점 길어졌다.고요한 차 안엔 무언가가 서서히 번져 나가는 듯한 숨 막히는 기운이 감돌았다.성유리는 생각했다.아마도 자기가 방금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사실 그녀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막상 지금 그걸 입 밖에 꺼내고 보니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몹시 쓰라렸다.“그러니까 박한빈 씨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박한빈 씨는 그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잖아요.”“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박한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뭐가 문제죠? 어차피 그 사람이 마침 성유리 씨니까 이러면 다 된 거 아닌가요?”“하지만 전 제 결혼 상대가 제가 좋아서 저랑 결혼하는 사람이길 바랐다고요.”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해서?”박한빈은 비웃듯이 웃음을 터뜨렸다.“성유리 씨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도대체 뭘 기준으로 정하는 거죠?”“제가 지금 딱 잘라서 아니라고 부정하더라도 사실 전 상대가 누군지도 상관없고 그냥 성유리 씨가 좋아서 결혼하고 싶은 거라고 말해주면 기뻐하실 건가요?”“성유리 씨가 보기엔 그런 말이 무슨 신빙성이 있고 또 무슨 의미가 있죠?”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녀가 이런 쓸데없는 문제들에 목숨 걸고 집착하는지.그 시간에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맞아요. 아무 의미 없어요.”결국 성유리는 마치 박한빈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듯 힘없이 대답했다.박한빈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의 차는 여전히 길가에 멈춰 있었지만 시동을 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그러자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별일 아니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박한빈은 대답하지도,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성유리는 그렇게 스스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윽고 밤바람이 불자 속에 맴돌던 어지럼증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하지만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가 겨우
Read more

제1294화

“너 요즘 성유리랑 연락 안 하니?”평소처럼 진행되던 모임 중, 김서영이 불쑥 물었다.그 말에 박한빈의 손이 잠시 멈췄고 고개를 돌렸다.김서영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말 마치 별 뜻 없는 가벼운 질문처럼 보였다.하지만 옆에 있던 김난희는 뭔가를 재빨리 눈치챈 듯, 곧장 박한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언제부터 제 사생활까지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습니까?”“너희 둘은 이미 결혼하기로 한 사이잖아.”김서영이 담담히 말했다.“그건 이제 너희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두 집안의 관계 문제이기도 해. 혹시라도 너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도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저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박한빈은 되물으며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놨고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그렇지만 김서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렇게 흥분할 것까지야 있니? 그냥 의례적으로 묻는 것뿐인데.”박한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그러자 김서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문제가 없다면 이번 주말 무도회엔 유리랑 같이 참석할 거야.”그때 김난희가 물었다.“갑자기 웬 무도회냐?”“맹씨 가문에서 여는 거 있잖아요.”김서영이 대답했다.“잊었어요? 맹씨 가문은 매년 무도회를 하잖아요.”“아, 생각났다.”김난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물었다.“근데 매번 너 혼자 가던 거 아니었어?”“전에야 혼자 갔지만 한빈이 결혼 상대도 정해졌으니 당연히 같이...”“죄송하지만 전 시간이 없습니다.”김서영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단호히 끊어버렸다.그러자 김서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그녀도 더 이상 박한빈과 언쟁을 벌이지는 않았다.“그럼 내가 직접 유리를 초대하마.”“그 사람도 시간 없습니다.”“왜? 그날 너랑 약속이라도 있니?”“약속은 없지만 저도 가고 싶지 않고 성유리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박한빈의 말투는 냉정하고 단호하기
Read more

제1295화

애가 원래 저런데 나중에 한빈이 인간관계 정리하는 걸 어떻게 도와주겠니?”“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도 좀 만나고 세상 경험도 더 쌓게 하려는 거예요.”김서영의 말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담겨 있었기에 김난희는 당장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잠시 뒤, 김난희가 입을 열었다.“사람 성격이란 게 정해져 있는 거야. 어떤 애들은 원래부터 돌아다니기 싫어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안 좋아해.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요즘 애들은 마음이 왔다 갔다 하잖아. 한빈이가 꼭 그 아이랑 결혼할 거란 보장도 없어. 나중에 헤어진다고 하면 뭐가 되겠니? 다 웃음거리 되지.”“한빈이 성격을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 애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미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마음은 정해진 거고 약혼녀가 성유리라고 결심한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김서영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마치 김난희와 담담히 의견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김난희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그 말에 김난희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잠깐의 정적 끝에 김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어머님이 옥지나 씨를 더 좋아하시는 건 알아요. 그 애가 좀 더 활발하고 귀엽긴 하죠.”“하지만 어머님께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사람이 한빈이한테도 꼭 맞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게다가... 성유리는 한빈이 아버지가 선택한 아이예요. 어머님은 친아들이 사람 보는 눈도 못 믿으시는 아니죠?”...김서영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성유리는 사실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 중이었다.그녀의 은행카드는 여전히 정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사실 이번 주 내내 성유리는 거의 학교 식당에서 쓰는 학생증 잔액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다 써버리고 만 상태였다.성유리는 휴대폰 친구 목록을 뒤적이며 도대체 누구한테 돈을 빌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바로 그때, 김서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혹시 내가 방해한
Read more

제1296화

솔직히 말해 김서영은 결코 까다로운 어른이 아니었다.오히려 성유리의 부모처럼 늘 신분을 내세우며 성유리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강요하고 그것이 다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되풀이해 이야기하던 사람은 아니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김서영을 마주할 때면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그리고 김서영은 늘 그녀에게 묘하게 멀게만 느껴졌다.마치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액자 안에 갇혀 있는 모델처럼.“이거 어때?”김서영의 목소리가 문득 들리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알고 보니 김서영이 가리킨 것은 치맛자락이 크게 퍼지는 드레스 한 벌이었다.평소 이런 스타일을 즐겨 입지 않기에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옆에 있던 김서영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곧 설명을 덧붙였다.“이번 무도회는 맹씨 저택에서 열릴 거야. 그 집 안주인이 해외에서 자란 분이거든. 그래서 무도회도 좀 더 격식을 차리고 화려하게 치러져.”그렇게 말하며 김서영은 살짝 턱짓을 해 옆에 있는 직원에게 성유리에게 드레스를 입혀보라고 시켰다.김서영의 안목은 훌륭했다.그 드레스는 확실히 성유리에게 잘 어울렸다.짙은 녹색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풍성했고 양옆으로 흘러내리는 리본 장식이 성유리의 완벽한 허리선을 부드럽게 살려주었다.게다가 양쪽 소매는 하얀 레이스 무늬였고 이날 성유리가 마침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온 덕에 드레스의 넓게 파인 목 부분이 그녀의 고운 목선과 하얀 피부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아직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이었는데도 그녀는 마치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공주처럼 보였다.화사하지만 우아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그런 성유리의 모습에 김서영도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곧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옆에 있던 디자이너에게 물었다.“제가 전에 이쪽에 보석 좀 맡겨놨었죠?”“네, 사모님.”디자이너가 곧장 대답했다.“창고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그래요? 그럼 가져와 봐요.”디자이너는 곧바로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잠시
Read more

제1297화

“음... 네.”“한빈이가 좀 바쁘긴 하니까.”김서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그래도 너희 내년이면 결혼할 사이야. 적당히 정을 쌓는 것도 필요하지. 네가 한빈이한테 먼저 전화해 봐.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으면 좋잖아.”그 말을 듣고도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있었다.“무슨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그러자 김서영이 다시 물었다.성유리는 잠깐 멍하니 김서영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김서영은 그런 성유리의 반응을 눈여겨보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성유리를 차에서 내려주면서 김서영이 문득 한마디 덧붙였다.“사실 나는 너랑 한빈이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그 말에 성유리는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저 그 혼약 때문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만약 그게 이유였다면 한빈이가 성인이 되자마자 나서서 결혼 이야기부터 꺼냈겠지.”“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직접 널 보고 또 너랑 한빈이가 같이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야. 정말...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느꼈거든.”...성유리는 곰곰이 생각했다.자신이 박한빈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도 아마 이런 대답이었을 거라고.사실 박한빈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그가 굳이 그런 말을 아끼는 건 단순히 귀찮아서일까?아니면 자신은 박한빈이 마음 써서 신경 쓸 만큼의 가치도 없는 존재일까?성유리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성유리는 약속대로 김서영과 함께 무도회에 갔다.막상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김서영이 한 말은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자신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저택의 장식도 전형적인 영국풍이었고 하얀 긴 테이블 위에는 형형색색의 디저트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보석 왕관을 쓴 여주인을 마주했을 땐 성유리는 마치 동화 속 세계에 잘못 들어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그리고 바로 그때, 성유리는 비로소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차이를 분명
Read more

제1298화

성유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자 발걸음을 뚝 멈추고 말았다.거의 동시에 그녀 머릿속에 단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어차피 이 무도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끌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하지만 성유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혹시라도 자신을 볼까 봐 서둘러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곧장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대부분의 하객이 전부 홀 쪽에 몰려 있던 터라 정원은 비교적 한산했다.성유리는 방금 전까지 한참을 서 있었던 터라 이제 발목 전체가 부르르 떨리는 기분이었고 몸을 가누는 것조차 조금 힘들어졌다.그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그 목소리는 성유리에게 많이 익숙했기에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설마 그 사람이 여기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추은정은 몇 걸음 만에 성유리 앞으로 다가왔다.추은정이 입고 있는 것은 무도회 서빙 스태프 복장이었다.“와, 이런 데서 만나네? 너도 여기 있었구나?”그렇게 말하던 추은정은 곧 뭔가 자기 말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듯, 서둘러 말을 바꿨다.“아, 넌 초대받고 온 거지? 나는... 나는 원래 호텔 쪽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오늘 급히 여기로 파견된 거야.”성유리는 추은정이 왜 굳이 그런 설명을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 입장에선 지난번에 서로 싸운 이후로 더 이상 인사조차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그러나 추은정이 말을 꺼낸 이상 성유리는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라는 뜻만 보였다.추은정은 그런 성유리를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성유리, 사실 나는 계속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추은정을 바라보았다.“나 전에 백지환 일 때문에 너한테 너무 상처 줬잖아.”추은정은 코끝을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그땐 내가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됐었던 것 같아. 우리 분명 훨씬 친한 사
Read more

제1299화

“난 널 무시한 적 없어.”성유리는 그런 말들에 신경 쓸 마음이 없었기에 그냥 담담히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내 일이랑 무슨 상관인데?”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뒷모습에 추은정은 몸서리치듯 부들부들 떨었다.사실 성유리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바로 성유리처럼 아무 일도 아닌 듯 ‘구름 걷힌 하늘’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마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까.하지만 그건 그녀가 사실 이미 모든 걸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추은정은 매일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지만 그 돈조차 성유리의 옷 한 단추 값도 못 되는 수준이었다그렇지만 그건 성유리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었다.그래서 추은정은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느꼈다.왜 하늘은 성유리를 그렇게 편애하는 걸까?도대체 왜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걸까?그래서 성유리 집안 회사에 재정 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추은정은 누구보다도 반가워했다.마침내 성유리가 진흙탕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됐다고 생각했으니까.심지어 그녀가 망하고 모든 걸 잃으면 그때 가서 한 대 제대로 밟아줄 작정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추은정이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오히려 성유리는 박한빈이라는 든든한 큰 나무를 얻었고 지위는 예전보다 더 높아진 듯 보였다.이게 또 무슨 일인가?추은정은 제자리에서 떨며 눈물을 미친 듯 흘렸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둘은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던 사이였고 같은 공간에서 매일을 함께 보내던 사이였다.그런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왜 우는 거예요?”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다.추은정은 멈칫하다가 홱 몸을 돌렸다....성유리도 사실 무도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원에서 추은정과 맞닥뜨려야 했기에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쪽으로 가니 역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엔 역시 박한빈이 있었다.그는 군중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분명 이 무도회는 그의 주최가 아니
Read more

제1300화

성유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이내 고개를 들어 보니 손을 내민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둘은 벌써 일주일째 만나지 못했었고 마지막 만남도 좋지 않은 상태로 끝났었다.그래서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성유리의 심장은 어쩔 수 없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곧 그녀의 손을 조용히 놓아버리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그때 애리얼이 웃으며 제안했다.“그렇다면 오늘 무도회의 분위기를 바꿔볼까요?”“로얀, 약혼녀와 함께 이 오프닝 춤을 추도록 해요.”이 말에 무도회장 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성유리에게 돌렸다.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박한빈이 곧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그리고 성유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몸을 돌려 웃으며 말했다.“그럼 사양 말고 받겠습니다.”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행동에 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남들은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진짜 그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 무도회는 맹씨 가문에서 주최한 행사였다.박한빈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는 동안 성유리는 자신감이 뚝 떨어져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재빠르게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고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쳐다봤다.그리고 그 시선은 마치 성유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뭘 숨기려는 겁니까?”그래서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긴 남의 무도회예요!”그러자 박한빈은 되물었다.“그래서요? 제가 다른 여자와 춤추는 걸 보고 싶은 건가요?”박한빈은 말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겉으로는 웃으며 묻는 듯했지만 눈빛은 명확한 위협이었다.성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순간, 무도회장의 교향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박한빈은 자연스럽게 성유리를 데리고 무도회장 중앙으로 향했다.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레 길을 비켜주었고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는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에서
Read more
PREV
1
...
128129130131132
...
16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