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281 - Chapter 1290

1622 Chapters

제1281화

그리고 성유리는 가끔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친부모가 사실은 자신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것만 같았으니까.어릴 적 그녀는 몇 번이나 이상한 꿈을 꾸곤 했지만 꿈속에서 부모에게는 늘 또 다른 딸이 있었다.그 딸 앞에서 부모는 늘 다정하게 웃었고 아이의 못된 버릇이나 작은 투정마저도 기꺼이 받아주었다.그런데 꿈속에서도 성유리는 늘 소외된 채, 밖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그저 꿈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말해왔건만 그 꿈이 너무도 현실 같아서 성유리는 지금도 그 속의 장면들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부모와의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늘 뒷순위로 밀려나고 존재감 없이 무심히 지나쳐지는 삶, 성유리는 이제 그런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그런데 지금, 박한빈 앞에서도 똑같았다.옥지나가 말한 것도 틀리지 않았다.그가 자신과 함께 있고 끝내 결혼까지 하겠다고 고집했던 것은 결국 종이에 적힌 혼약 때문일 뿐이었다.그 약혼서가 누구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든 박한빈은 결국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사실 성유리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고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인지 지금 다시 떠올리자니 마음속 어딘가가 쓸쓸하고 시큰해졌다.마치 박한빈이 자신의 부모처럼 언제나 자신을 다른 것들보다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서글펐다.성유리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문이 불쑥 열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그 소리에 놀란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너무 급히 움직인 탓에 자신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박한빈은 손에 컵을 든 채 방으로 들어섰다.곧 시뻘건 성유리의 눈가를 보는 순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우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얼른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쓱 닦아냈다.“어디 불편해서 그래요? 아니면 어디 아프십니까?”박한빈이 다시 물었다.“아니요.”“그럼 방금 누가 다녀갔나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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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2화

성유리는 눈을 피하지 않고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만약 제가 그냥 제가 실수로 빠진 거면 어떡해요?”“그럼 수영장 주변이 미끄러웠던 거겠죠.”박한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주최자더러 사과하라고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보상받길 원하십니까?”그의 말투는 어딘가 너무도 당연했다.마치 이 일이 진무혁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듯한 뉘앙스였다.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올려다보다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지금 가운 하나만 걸친 차림이었다.촉촉한 머리칼은 가지런히 어깨에 흘러내려 있었고 그 미소는 유난히 환하고 눈부셨다.박한빈은 웃는 성유리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웃으십니까?”“아니요. 그냥... 기분이 좀 좋네요.”“물에 빠져서 꼴이 엉망이 됐는데도 좋습니까?”박한빈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기묘한 것이었다.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다 박한빈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 순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박한빈은 곧바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누구십니까?”“박 대표님, 저예요. 유리 엄마요.”윤청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박한빈은 방문을 벌컥 열었다.그 갑작스러운 기세에 윤청하는 깜짝 놀랐지만 곧 다시 환하게 웃었다.“유리는 안에 있나요? 괜찮아요?”“괜찮습니다.”박한빈이 짧게 대답했다.“마침 저는 볼 일이 있었습니다. 저 대신 성유리 씨 옆에 잠깐 같이 있어 주시죠.”“그럼요. 그럼요.”윤청하는 재빨리 대답했다.“일 보러 가세요.”박한빈은 윤청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성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는 원래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아까 성유리가 자신을 못 본다고 눈시울이 붉어진 걸 박한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혹여 자기가 나가버리면 성유리가 또 눈물을 흘릴까 봐 걱정됐다.물론 그렇다고 그게 마음이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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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3화

옆에 있던 윤청하는 바로 물었다.“그럼 그 일, 박 대표한테 말씀은 드렸어?”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까 진 대표님이 다녀갔는데 CCTV에는 딱히 찍힌 게 없대요. 그래서 저도 그냥 의심일 뿐이고 증거가 없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윤청하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 윤청하가 입을 열었다.“증거가 없다면 일단은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네.”“요즘 네 아버지가 마침 원씨 가문 쪽이랑 협력 얘기가 오가고 있어. 네가 원유진이랑 원래 사이가 안 좋은 건 잘 알아. 그래서 나도 두 사람이 굳이 친하게 지내라는 말은 안 하잖아. 하지만 적어도... 정면으로 부딪치면 안 돼.”윤청하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해졌다.이내 윤청하가 딸이 억울해하는 줄 알고 더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성유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네가 속상한 건 안다. 하지만 너랑 원유진 사이 안 좋은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게다가 지금 넌 박 대표 약혼자잖아. 그러니 누가 널 안 부러워하겠니? 당연히 시샘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꼭 원유진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괜히 원유진 잘못으로 몰아가면 우리 두 집안 사이만 더 틀어질 수 있잖아. 그렇지 않니?”성유리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더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윤청하는 그런 성유리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응?”“알겠어요.”성유리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리고 긍정의 대답을 들은 윤청하는 비로소 안도한 듯 살짝 웃었다.하지만 곧, 성유리가 곧바로 물었다.“그러니까 어머니는 이 얘기하려고 오신 거예요?”어쩐지 성유리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윤청하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정하게 대답했다.“아니지. 너 걱정돼서 온 거야. 이렇게 멀쩡한 모습 보니까 마음이 놓이네.”“오늘 밤도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성유리가 문득 물었다.“저는 어머니랑 같이 집에 가고 싶어요.”“그건... 난 네 아버지랑 방 같이 쓰는데 좀 곤란하잖니.”윤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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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4화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지금 다들 두 사람 사이 아는 거 몰라? 결혼 날짜까지 이미 잡혀있는데 갑자기 결혼 안 하겠다고 하는 게 말이 돼?”“그런데 저는 전부터 계속 말씀드렸잖아요.”성유리는 고개를 푹 떨군 채 계속 말했다.“저는 그 사람이랑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잖아요. 어머니랑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정하신 거잖아요.”“박 대표랑 결혼하기 싫다고? 그럼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건데? 백지환이랑?”윤청하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그리고 백지환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성유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혀버렸다.“너 정신 차려.”윤청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지금 밖에 얼마나 많은 눈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는 줄 알아? 박 대표랑 한 번 가까이 해보려고 눈에 불 켜고 달려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은 아니? 지금 네가 앉아 있는 이 자리를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그리고 박 대표가 뭐가 모자라서? 잘생겼고 집안도 좋은 데다가 능력도 있어. 부족할 게 뭐가 있니? 설마 너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성유리, 너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저는 박한빈 씨가 저랑 안 어울린다고 한 적 없어요. 다만...”성유리가 뭔가 더 말하려던 찰나,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그 소리에 윤청하는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성 대표님께서 어머님 찾으십니다.”윤청하는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박한빈이 먼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그제야 정신이 든 윤청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물론, 문을 나서기 직전 성유리에게 눈짓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신호’를 모른 척했다.사실 지금 성유리의 긴장감은 윤청하보다 훨씬 더 심하게 곤두서 있었다.윤청하는 그저 걸어 나가면 그만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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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5화

하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마주 보자 성유리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잠깐의 침묵 끝에야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한테 시간을 조금 주셔야죠. 그리고...”“그리고 뭐요?”“박한빈 씨는 저를 좋아하세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질문에 박한빈은 잠깐 멈칫했다.사실 이건 성유리가 예전부터 계속 생각해 온 문제였다.그런데도 막상 박한빈의 당황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보자 성유리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리고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솔직히 박한빈 씨도 저 안 좋아하시잖아요? 저랑 결혼하려는 것도 결국은 두 집안 사이의 약속 때문이잖아요. 박한빈 씨도 저 안 좋아하면서 왜 저한테만 좋아하라고 강요하세요?”“전 성유리 씨랑 결혼할 겁니다.”박한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런데 성유리 씨는 계속 저를 벗어나려고만 하잖아요.”“제가 그러는 게 잘못이에요? 저는 그냥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할 뿐인걸요?”“그럼 전에 백지환이라는 남자랑 결혼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계속 말했다.“서로 좋아한다고요? 성유리 씨가 좋아했던 게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인간으로서의 자격은 있었습니까?”허를 찌르는 말에 성유리는 얼굴까지 붉어지며 버럭 소리쳤다.“박... 박한빈 씨도 좋은 사람은 아니잖아요!”“네?”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지금 그 말... 무슨 뜻이죠?”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의 말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서둘러 해명하려고 했다.“사실 박한빈 씨도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요.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지...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라고요.”“그래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듣고 천천히 성유리 쪽으로 몇 걸음 더 다가왔다.“그럼 전 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데요?”“저도 백지환 씨처럼 바람을 피웠나요? 아니면 밖에서 성유리 씨를 비하하는 얘기라도 하고 다녔어요?”“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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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6화

박한빈의 태도는 너무도 단호했다.그의 평온한 눈빛 속엔 분명히 광기 어린 집착과 냉혹함이 섞여 있었다.그렇기에 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박한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박한빈은 미처 성유리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꽉 쥐고 있던 손목을 풀어줬다.“저는 해야 할 일이 좀 더 있으니까 성유리 씨는 푹 쉬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바로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남겨진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크루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그날 밤의 파티가 몇 시까지 이어졌는지 성유리는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졌고 꿈결처럼 귓가에는 아직 잔잔한 교향곡 소리가 맴도는 듯했다.그리고 귀 기울이면 사람들이 오가는 인사와 대화도 희미하게 들렸다.어렴풋이 성유리는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성시원을 보았다.그 시각, 성시원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는데 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성시원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역시 성 회장님은 안목이 남다르십니다. 일찍이 박씨 가문과 약혼을 맺다니... 따님이 박 대표님이랑 결혼하면 성리 그룹은 앞으로 탄탄대로 아닙니까?”상대의 칭찬에 성시원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그야 당연하죠. 제가 뭐 유리를 괜히 키웠겠습니까?”“근데 박 대표님이 정말 약속을 지킨 건 좀 의외네요.”“감히 안 지킬 수 있겠습니까?”성시원은 눈을 부릅뜨며 딱 잘라 말했다.“만약 박 대표가 파혼이라도 한다면 제가 당장 언론에 퍼뜨려서 두 번 다시 결혼 같은 거 못 하게 만들어버릴 겁니다.”“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이제 박씨 가문과 같은 배를 탔으니 성 회장님도 더 승승장구하실 겁니다.”“허허, 그건 두말할 것도 없죠!”두 사람은 서로 비위를 맞추며 웃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그저 꿈인데도 가슴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다리는 마치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듯 단 한 걸음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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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7화

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그리고 비웃듯 피식 웃었다.“무슨 생각 하고 계십니까?”“저... 대체 왜 여기 계시는 건데요?”성유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고 돌아오는 박한빈의 대답은 너무도 당당했다.“자려고요.”마치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잠시 후, 이를 꽉 깨물고 있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그럼 다른 방에서 주무시면 되잖아요?”“여기는 제 방인데 제가 왜 나가야 하는 거죠?”박한빈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그럼 왜 갑자기 말 걸어서 저를 놀라게 하신 건데요?”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룻밤 내내 뒤척이질 않나, 자면서 잠꼬대는 또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중엔 손까지 이리저리 휘젓고... 그 정도면 저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 말에 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의 붉어진 눈가를 조심히 바라보았다.그리고 문득 깨달았다.“그래서 저 때문에 박한빈 씨가 못 주무신 거예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게 곧 대답이었기에 성유리는 얼굴이 화끈해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박한빈은 더는 그 화제를 끄집어내지 않았고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해 뜨는 거, 보고 싶어요?”“네?”“곧 해가 뜰 겁니다. 볼래요?”박한빈이 다시 물었다.성유리는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바깥은 아직 새까만 어둠뿐이었다.시간도 확인하지 않았고 해가 뜨려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몰랐다.하지만 박한빈이 말하니 왠지 모르게 믿어야 할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볼래요.”박한빈은 곧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옆에 놓인 담요를 잡아 성유리에게 툭 던져주면서 자기 재킷을 집어 들었다.“갑시다.”그의 동작은 거침없었다.성유리는 잠옷 차림으로는 따라가기 싫었지만 이미 박한빈이 문 앞까지 가버려서 결국 잠옷 위에 담요만 둘러싸고 그를 따라나섰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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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8화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부터 시간을 재고 있었던 건지도 잘 몰랐다.하지만 박한빈의 말에 고개를 돌린 순간 그와 동시에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올랐다.정확히 그때였다.붉은빛이 수면 위로 부드럽게 솟아오르는 찰나, 성유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태어나서 처음 보는 일출이었다.그리고 처음으로 압도적인 경이로움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성유리는 머릿속이 하얘졌다.‘대단하다. 너무 아름다워.’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이내 눈가가 뜨거워졌고 난간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그때 박한빈이 조용히 물었다.“무슨 생각 하십니까?”성유리는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역시 나라가 강해야 한다고요.”그 대답은 아마도 박한빈이 죽어도 예상 못 했을 답변이었다.그래서일까, 그는 잠깐 멍하니 성유리를 바라보다 곧 허리를 살짝 구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마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그 웃음은 시원하고 솔직했는데 그간 성유리가 봐왔던 웃음과는 아예 달랐다.지금껏 성유리는 박한빈이 웃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하지만 그 웃음들은 언제나 아주 잠깐 스칠 뿐이었고 겉으로만 흘려보내는 웃음이었다.오늘처럼 얼어붙었던 얼음산이 봄볕에 녹듯 진심으로 웃고 있는 박한빈의 얼굴은 성유리에게 처음이었다.그 모습이 너무 낯설고 또 이상하게 따뜻해서 성유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그때, 박한빈의 손이 성유리의 머리 위로 툭 올라왔다.그리고 꽤 거칠게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았다.그 손길에 성유리는 금세 정신을 차렸고 재빨리 박한빈의 손을 떼어냈다.“왜 그러세요! 박한빈 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데요?”“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박한빈은 짧게 대답했다.“그냥... 오늘 일정이나 생각했을 뿐입니다.”그의 대답은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기에 성유리는 말문이 막혔고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박한빈 씨는 애국심이 하나도 없어요.”그러자 박한빈은 곧장 받아쳤다.“제가 매년 얼마나 기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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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9화

박한빈이 먼저 차에 올라탄 뒤에야 윤청하는 성유리를 데리고 몸을 돌렸다.그때 성유리는 차 안에 이미 성시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성유리가 차에 오르자마자 성시원은 곧바로 물었다.“어제 너 박 대표님한테 뭐라고 했니?”성유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다가 어머니인 윤청하의 시선을 마주치고 나서야 그녀가 자신이 어젯밤 박한빈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한 것을 깨달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성시원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네가 너무 편하게 살다 보니 자기가 누군지도 잊은 것 같구나.”“그게 무슨 뜻인가요?”성유리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말에 성시원은 더욱 화를 냈다.“너 그게 무슨 태도니?”성유리가 뭔가 더 말하려 하자 윤청하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말렸다.그래서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성시원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지만 차 안이라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어느새 차는 성씨 저택 대문 앞에 멈췄다.집에 막 도착하자마자 성시원은 성유리에게 말했다.“내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너랑 박 대표 결혼은 이미 결정됐단다. 이건 네가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네가 할 일은 결혼을 기다리면서 다른 헛된 생각 하지 않는 거다. 알겠어?”성유리는 되물었다.“왜... 왜 제가 꼭 그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죠?”“왜냐고? 이건 부모님들이 정한 일이잖아.”하지만 성유리는 다시 물었다.“만약 지금 박한빈 씨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해도 아버지는 이렇게 결혼을 고집하실 건가요?”그 한마디에 성시원은 순간 멈칫했다.성유리는 그의 반응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니까 아버지는 제 행복을 위해서이신 건가요... 아니면 회사 앞날 때문인가요? 제가 무슨 물건입니까? 사업상의 이익과 그걸 맞바꾸기 위한 수단이라도 되는 건가요?”성유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시원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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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0화

성시원이 물건을 던졌을 때,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막았다.도자기 꽃병은 그녀의 팔에 세게 부딪혔고 이내 하얀 피부에 깊게 베인 상처가 생겼다.그리고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자 성시원도 순간 멈칫했다.옆에서 지켜보던 윤청하는 비명을 질렀고 성유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유리야, 괜찮아? 내가 병원에 데려다...”“괜찮아요.”성유리는 윤청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며 한 걸음 물러나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성유리는 말을 마치고 단호히 돌아섰고 윤청하는 따라가려 했지만 순간 성시원의 고함이 들려왔다.“따라가면 안 돼! 저거 지금 반항하는 거야! 성씨 가문이 없었으면 지금 저렇게 살 수 있겠어? 내가 아니면 박 대표가 너 같은 걸 봐주겠냐? 네가 대체 뭐라도 된 줄 알아? 굴러들어 오는 복도 제 발로 차버리는 년!”성시원이 뒤에서 뭐라 더 말하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듣지 않고 팔을 감싼 채로 저택을 떠났다.이내 택시에 올라타자 기사는 다친 그녀의 팔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괜찮으세요?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바로 병원으로 모실까요?”성유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그냥 팔이 조금 베였어요. 병원으로 가주세요.”기사는 망설였지만 성유리를 보니 위험한 사람 같지 않아 결국 그대로 따랐다.그렇게 성유리는 혼자서 병원에 갔고 의사는 곧바로 상처를 꿰맸다.그때 윤청하의 전화가 걸려 왔다.“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마. 걱정해서 그런 거고 다 너를 위한 거니까.”비슷한 말은 성유리도 여러 번 들어왔지만 이번만큼은 비꼬는 마음이 더 컸다.사실 그녀와 윤청하 모두 잘 알고 있었다.성시원이 이렇게 분노한 건 그가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가진 자존심이 성유리에게 상처 입은 것뿐이었다는 걸.성시원은 단지 부끄러워서 화가 난 거였다.게다가 성유리는 의심치 않았다.만약 박한빈에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성시원은 분명 약속을 깨고 적당한 딸을 ‘사줄’ 사람을 찾아서 자신을 팔아버렸을 거라고.그 사실이 성유리를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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