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321 - Chapter 1330

1622 Chapters

제1321화

성유리는 1층으로 내려와서야 어젯밤 눈이 밤새 내렸다는 걸 알았다.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온통 은빛으로 뒤덮여 있었고 어딘가 동화 같은 기운마저 풍겨왔다.성유리는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식사를 시작했다.식사 내내 그녀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맞은편에 박한빈이 앉아 있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처럼.하지만 박한빈은 아무렇지 않았다.어차피 그는 접대 자리나 가끔 부 집에 들를 때를 빼고는 늘 혼자 밥을 먹었고 그건 이미 익숙한 일이었으니까.두 사람은 그렇게 한마디 말없이 아침 식사를 끝냈다.그러다 성유리가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물었다.“제 옷은 어디 있어요?”“무슨 옷?”“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어젯밤 제가 입고 있던 옷 말이에요!”“아, 그거? 버렸어.”박한빈의 대답은 너무도 담담했고 당황한 성유리는 동공마저 살짝 흔들렸다.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차갑게 말했다.“그럼 새 옷이라도 구해 오세요.”“성유리, 오늘은 설 연휴야.”“그래서요?”성유리가 따지듯 계속 물었다.“지금 이 시간에 네 옷 팔 가게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너무도 담담한 대답에 성유리는 이를 악물었다.“박한빈 씨는 대표면서 옷 하나 못 구해요?”“응. 설이라 다들 쉬고 있거든. 귀찮아.”“그럼 이 밥은 어디서 구했는데요?”“식당에서 배달시킨 거야.”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지금 제가 이 꼴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에요?”박한빈은 눈썹을 살짝 올리고 그녀의 몸을 한번 훑어보듯 바라봤다.그의 셔츠는 성유리에게 당연히 너무 컸다.지금 성유리는 셔츠의 단추를 위까지 단단히 잠가놓았기에 박한빈의 자리에서는 별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성유리는 마치 그 눈빛이 옷을 꿰뚫고 들어와 살갗에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졌다.“내 생각엔 오늘 하루만 더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그때, 박한빈이 말했다.“내일 눈이
Read more

제1322화

“저 유학 갈 거예요.”박한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뭐라고?”“이미 결정했어요. 유학 하러 가기로.”성유리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그러니까 내년 결혼 얘기는 없던 걸로 해요. 미안해요.”박한빈은 비웃듯 물었다.“네 부모님이 그걸 허락할 것 같아?”“허락 안 하셔도 상관없어요.”성유리가 대답했다.“학비야 제가 알아서 해결할 거고... 어차피 지금 부모님 눈에 저는 결국 거래 수단일 뿐이잖아요. 이 기회에 관계가 끊긴다면 저도 상관없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졌다.처음엔 그저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었지만 이제 성유리는 이미 모든 뒷일까지 다 준비해 둔 듯했다.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건 상의가 아니라 통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마치 엄청나게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고 눈매와 미간에도 웃음기가 가득 번졌다.그러고는 물었다.“네가 정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그러니까 어제부터 계속 절 속였던 거죠?”성유리가 말했다.“처음부터 저한테 선택권 따윈 줄 생각도 없었던 거잖아요. 일주일 뒤에 제가 거절하더라도 어떻게든 절 굴복시키려 했던 거죠. 맞죠?”박한빈은 고개를 들고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맞아.”“비열한 사람!”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손을 번쩍 들어 그의 따귀를 때리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그만해, 성유리. 너 착각하지 마. 내가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박한빈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채, 차디찬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그렇게까지 싫다면 됐어. 네가 정말 내가 너랑 결혼해야만 한다고 생각해?”“당연히 아니죠.”성유리도 질 세라 대답했다.“박한빈 씨 같은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저 저택 대문 밖에서부터 금성 밖까지 줄 서 있겠죠. 저는 뭐... 그
Read more

제1323화

그 순간, 박한빈은 힘없이 내려가 있던 두 주먹을 꽉 쥐었다.그가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확인했을 때, 그곳엔 역시 아무도 없었다.밖은 여전히 눈으로 뒤덮인 세상이었다.성유리는 어깨에 외투 하나를 걸친 채 나갔지만 그런 상태로 밖을 나간다면 결과는 뻔했다. 얼어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유리가 정말 얼어 죽는다 해도 그건 박한빈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길들지 않는 애완동물은 애초에 키울 가치가 없다.그래서 박한빈은 그녀의 끝이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성유리가 세상 밖에 나가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지금 자기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 말이다.그렇게 생각하던 중, 문득 박한빈의 눈에 묘한 흥미가 스쳤다.‘아직은 죽으면 안 돼.’성유리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보고 싶어졌다.곧바로 박한빈은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시켜 성유리를 찾아오게 했고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며칠 뒤, 그의 비서가 보고해 왔다.성유리는 돌아간 뒤 심하게 열이 났고 결국 성씨 가문 사람들이 병원에 데려다 줬다고 했다.그 바람에 그녀는 온 새해 연휴를 병원에서 보냈다.성시원은 직접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얘기를 전하며 돌려 말하는 듯 병문안 한번 가보라고 했지만 박한빈은 바쁘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박한빈은 김서영에게도 성유리와 어떤 식으로든 연락하지 말라고 강하게 당부했다.업무가 재개된 첫날,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씨 가문 쪽과 진행 중이던 자금 지원과 협력 건을 전면 중단한 것이었다.이 일로 성시원이 그를 찾아왔지만 박한빈은 면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 후, 곧장 모풍국으로 출국해 버렸다.에릭은 박한빈에게 물었다.“결혼식은 언제 할 건데? 내가 들러리라도 서줄까?”그 말에 박한빈의 표정이 확 굳었다.“뭐야? 너 전엔 당장이라도 결혼할 기세였잖아?”“네가 언제부터 내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지?”박한빈은 오히려 되
Read more

제1324화

박한빈은 당연히 에릭이 방금 한 말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곧 그는 에릭을 바라보며 단 한 마디만 남겼다.“난 지금 그냥 한 가지가 궁금할 뿐이야.”“뭔데?”“그 여자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그 말에 에릭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에릭이 뭘 더 묻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등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사실 에릭은 끝까지 묻고 싶었다.정말 아무렇지 않다면 그 여자가 어떻게 되든 박한빈이랑 무슨 상관인지도 묻고 싶었다.‘어차피 결혼 따위 둘 다 할 생각 없잖아.’게다가 에릭은 스스로를 꽤 신사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다.물론 그는 여자를 자주 바꾸긴 하지만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굴어본 적은 없었다.더더욱 보복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에릭은 애초에 여자들의 떠나거나, 남는 걸 별로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박한빈의 태도는 명백히 품격을 잃고 있었다.그건 그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에릭이 그걸 꼬집어 비난하려 했지만 박한빈의 모습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결국 에릭은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 채, 술잔을 들어 살짝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한 모금을 넘겼다.성유리는 지금 학교에 있었다.그녀의 유학 신청은 꽤 빠른 속도로 심사 중이었다.그때 성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성유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벨 소리가 끊긴 지 얼마 안 되어 성시원이 다시 두 번째 전화를 걸어왔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쏟아진 건 쉴 새 없는 고함과 비난이었다.성시원은 성유리가 도대체 박한빈에게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났냐고 다그쳤고 당장 가서 사과하라고 소리쳤다.그는 상황의 진실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그저 성유리에게 무조건 박한빈에게 고개를 숙이라고만 했다.“저 이제 박한빈 씨랑 더 이상 할 말 없어요.”성유리는 단호히 말했다.“뭐라고?”“이미 충분히 말했잖아요.”성유리는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저
Read more

제1325화

“무슨 일인데?”“그 추은정 말이야.”현은영은 짐을 캐리어에 넣으면서 말했다.“저번에 나 걔가 박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 거 봤거든. 둘이서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전에 지환 선배랑 있을 때도 걔가 자꾸 주변에서 얼쩡댔잖아? 혹시 또 그 꼴 볼까 봐 좀 그렇더라고.”그 말에 성유리는 멍해져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리고 곧, 전에 추은정이 불쑥 성씨 가문에 찾아와 변명하듯 늘어놓던 얘기가 떠올랐다.그땐 추은정이 그냥 헛소리하는 줄로만 알았다.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성유리는 이내 그런 생각을 마음속 깊이 눌러 담았다.그리고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이제 진짜 상관없어.”...성유리의 유학 허가는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이 사실을 그녀의 부모가 알게 된 것은 거의 마지막이었다.성시원은 이미 성유리의 통장을 반달 넘게 정지시킨 상태였다.설마 성유리가 이렇게까지 홀로 설 줄은 몰랐던 듯, 성시원은 분에 못 이겨 사람을 시켜 성유리에게 전했다.“평생 다시는 성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마라.”심부름 온 사람은 또 조심스레 성유리에게 귀띔하듯 말했다.“그냥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그러면 다 풀릴 거야.”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그대로 도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은 첫 두 달이 특히나 힘들었다.성유리는 이곳의 언어부터 적응해야 했다.수업은 매일 녹음해 두었다가 기숙사로 돌아온 뒤 수십 번씩 다시 들으며 복습했다.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그저 편의점 계산대에서 일할 뿐이었는데도 이상한 사람들을 적잖이 만났다.몇 번이나 무서운 일을 겪어 결국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그렇지만 이곳 경찰은 성유리의 편에 서주려 하지 않았다.그녀의 국적과 신분을 알아낸 경찰은 제일 먼저 성유리의 옷차림부터 쭉 훑어보았다.마치 성유리에게서 무슨 문제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성유리는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고 아래도
Read more

제1326화

“성유리!”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을 때,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곧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무열아...”힘없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진무열은 몇 걸음 만에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그리고 곧장 그녀 앞에 있던 두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당신들 지금 뭐 하려던 겁니까?”두 남자는 진무열과 성유리 손에 들린 전기충격기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결국 미련을 접은 듯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돌아서서 사라졌다.진무열은 그들을 따라가려고 발을 뗐지만 성유리가 급히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손톱이 그의 팔에 파고들 듯했다.진무열은 성유리의 감정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조용히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부드럽게 손등을 토닥였다.“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진무열이 성유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계속 말했다.“근데 왜 또 이렇게 늦게까지 일했어?”“원래 이 시간이 퇴근 시간이야.”성유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답했다.“다만 그 사람들이 편의점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응. 내가 보니까 그 사람들 아직 포기 안 한 눈치더라.”진무열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며칠 동안 내가 네 퇴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너무 번거롭잖아.”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뭐가 번거로워? 거리도 얼마 안 되잖아.”진무열은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잊었어? 우리 고향도 같은데 이런 때 서로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냐?”“하지만 지금까지는 너만 나 챙겨줬잖아.”성유리의 말에 진무열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그래? 저번에 도서관에서 자리 맡아준 것도 있고... 너한테서 밥도 얻어먹었잖아.”“그건 다 별거 아닌 거잖아.”“나한텐 너 데려다주는 것도 별거 아니야.”진무열은 단호하게 말했다.“됐어, 이건 그냥 내가 정한 거야. 오늘부터 매
Read more

제1327화

성유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사실 처음에는 진무열이 구해 준 곳이었다.처음 성유리가 이곳에 왔을 땐, 적응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학교 선배와 집을 공유했었다.그녀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선배가 올린 룸메이트 구인 글을 보았고 처음엔 둘의 사이도 제법 잘 지냈다.하지만 선배가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부터 모든 균형이 깨졌다.성유리는 집 안에 수시로 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남자가 있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남자가 자신에게 은근슬쩍 추근대는 것 또한 견딜 수 없었다.게다가 아마 그 남자가 둘 사이를 이간질했는지 선배와의 관계도 점점 어색하고 팽팽해졌다.그래서 선배가 남자 친구와 동거하겠다며 방을 비우겠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주저 없이 이사 나가겠다고 했다.그 시기엔 이미 진무열을 알고 있었다.마침 진무열이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한 세대가 비게 되었고 덕분에 성유리는 그곳으로 이사 들어오게 되었다.지금 그녀는 위층에, 진무열은 아래층에 살고 있다.“내가 위층까지 데려다줄까?”진무열의 물음에 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 여기까지만 데려다줘도 돼.”“그래.”진무열이 웃으며 말했다.“푹 쉬어. 잘 자.”같이 걸어오며 잔뜩 긴장됐던 성유리의 마음도 한결 풀린 성유리도 미소 지으며 답했다.“응, 잘 자.”진무열은 먼저 모퉁이를 돌아 내려갔고 성유리는 혼자서 계단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리고 다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그곳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성유리는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마도 밤에 그 두 남자에게 겁을 먹어서 그런 걸까?성유리는 아무도 없는 뒤쪽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재촉했다.그렇게 그날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다음 날, 성유리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받은 소식은 친구가 강의를 대신 신청해 달라는 부탁이었다.“이번에 학교에서 초빙한 특강 강사래! 오늘 아침에 공지 뜬 건데 지
Read more

제1328화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앞서 한참 걸어가던 성유리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결국 물었다.하지만 조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사무실.”“왜 사무실에 가요?”성유리는 더욱 의아해졌다.“아, 너도 들었지? 학교에 이번에 특임 강사님이 오셨잖아.”그 말이 떨어지자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조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설마 하는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다시 물었다.“그래서요?”“교수님이 수업 도와줄 사람을 찾는데 너를 지목하셨어.”“그게 무슨 소리예요?”성유리는 이를 악물었다.“그 사람 금융 관리 쪽 교수잖아요. 저랑 아무 상관없는 데요?”“나도 방금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교수님은 그냥 PPT 틀어주고 자잘한 자료 정리 같은 것만 도와주면 된다고 하시더라. 전공은 크게 상관없다고.”“싫어요.”성유리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그리고 곧장 뒤돌아서려 했다.하지만 조교가 재빨리 그녀의 길을 막았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기회는 다들 하고 싶어서 난리야!”“그럼 하고 싶은 사람 시키세요.”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저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학교라고 해서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성유리의 단호한 태도에 조교도 잠깐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설득하듯 말했다.“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 이미 교수님께 약속을 드렸단 말이야. 그리고 박 교수님은 신분도 특별하고 학교에서 모셔 오느라 정말 애 많이 썼어. 근데 네가 이런 식으로 거절해서 일 그르치면 책임...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그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협박이 아니라 그냥 네가 잘 생각해 보라는 거지.”성유리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대신 이를 더욱 세게 깨물었다.“가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곧 조교가 다시 말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결국 조교의 뒤를 따랐
Read more

제1329화

성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렇다면 안나가 교수님께 우리 학교 소개도 시켜 드리고 학교 환경도 좀 익숙하게 해 드려.”조교는 이미 은근히 그렇게 하라는 뜻을 내비쳤다.마침 성유리도 그와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다.그래서 금세 몸을 돌리며 말했다.“이쪽으로 오세요.”그 말에 박한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하지만 거절하지 않고 살짝 웃으며 일어났다.성유리는 바로 그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박한빈에게 물었다.“여기엔 왜 오신 거예요?”박한빈은 원래 길가에 핀 벚꽃나무를 보고 있다가 성유리의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렸다.성유리는 이를 꽉 깨물고 그와 눈을 맞췄고 눈동자엔 분노가 어른거렸다.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그리고 그제야 그녀를 한참 훑어보았다.‘살이 너무 많이 빠졌네.’사무실에서 처음 봤을 때도 눈치챘던 사실이었다.머리도 조금 짧아졌고 허리는 꼿꼿했지만 전체적으로 종잇장처럼 얇아 보였다.그래서 원래 작았던 얼굴은 더욱 작아 보였고 커다란 눈만 선명하게 돋보였다.그 눈이 고정되어 자신을 쳐다볼 때, 박한빈은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에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 시린 듯 아린 감각은 그녀 외엔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솔직히 박한빈은 성유리가 무릎 꿇고 애원할 줄 알았다.어차피 그녀는 성씨 가문의 보호 아래 자란 사람이니까.비록 지금 성씨 가문은 예전만 못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데 걱정 없었다.박한빈이 성리 그룹과의 협력을 끊었을 때, 성시원은 그 뜻을 분명히 알았다.그래서 당연히 성시원도 성유리에게 경제적 압박을 가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성유리가 자신에게 굴복하게 만들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가 학교 밖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성유리가 사는 집은 가장 허름한 곳이고 몸에 걸친 액세서리라곤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그녀는 본래 그러지 말았어야
Read more

제1330화

박한빈은 고개를 숙인 채 눈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이 아직도 성유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한 가지를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성유리는 자신에게 굴복할 생각은커녕 아예 다시 자신과 무슨 관계를 맺어야 할지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그 사실에 박한빈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그는 마치 자신이 이미 성유리에게 버려진 쓰레기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그녀는 이제 자신을 보기도 싫어하는 듯했다.“대표님께서 저희 학교에 오신 이유, 이 일 때문은 아니겠죠?”이내 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나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여기까지 일부러 오신 건, 제가 지금 잘 지내는지 보러 온 거예요?”성유리가 물었다.“맞아.”박한빈은 아주 담담하게 인정했고 이건 성유리가 이미 짐작한 바였다.사무실에서 그가 주변 교수들에게 보인 표정과 시선만 봐도 아무 이유 없이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박한빈이 이렇게 솔직히 인정하자 성유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그래서요? 지금 대표님은 제 모습을 보고 만족하셨나요?”“봤어. 그래서 더 모르겠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곧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 박한빈이 성유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성유리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가까이 다가왔다.“넌 분명 더 쉬운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일부러 고생하려고 하는 거지?”“혼자 여기 와서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비싼 장신구 하나도 없이 매일 쓰레기 같은 음식이나 먹으면서 지내는 그런 삶이 도대체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이런 삶이 네가 원하는 거야?”박한빈은 한 걸음 한 걸음 성유리에게 다가갔다.성유리는 어느새 등 뒤에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그래서 미간을 찌푸린 채, 박한빈을 밀어내려 손을 뻗
Read more
PREV
1
...
131132133134135
...
16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