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381 - Chapter 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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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1화

“괜찮아.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하늘이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조금만 더 크면 그 사람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아이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는 둘 다 잘 알고 있었다.남현호는 조금 놀란 눈으로 하늘이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데...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괜찮아. 느리더라도 결국 오게 되어 있어.”하늘이는 턱을 괸 채 부드럽게 말했다.“그리고 지금 아무리 조급해도 소용없잖아. 차라리 그냥 기다리는 게 나아. 어차피 결과는 나쁠 리 없고 기다릴 만한 가치도 있으니까.”아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남현호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그는 다시금 멍하니 하늘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너도 그래?”“응?”“뭔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있어?”“아니.”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나는 우리 집이 정말 좋아. 도망치고 싶지도 않아.”“그런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간 어른이 될 거잖아. 언제까지고 엄마 아빠한테 보호만 받을 순 없지.”하늘이가 계속 말했다.“나도 더 이상 계속 보호받고만 싶진 않아.”남현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렸다.“그렇구나.”“그때가 되면 우리 같이 가자.”하늘이의 말에 남현호는 살짝 움찔하더니 아이를 다시 바라봤다.“나도 궁금해.”그러자 하늘이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부모님 없이 내가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궁금해.”남현호는 하늘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했고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또다시 밤이 찾아왔다.남현호의 열은 낮에 이미 다 가라앉았기에 성유리는 약속대로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가 남우미를 만나게 해주었다.남우미의 안색은 어제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고 남현호도 그제야 안도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음도 많아졌다.밤이 되어 또다시 열이 오르는 걸 걱정한 성유리는 남현호가 잠들기 전, 아이의 방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그 모습을 문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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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2화

“그런 상황도 이해는 됩니다. 요즘은 단속이 워낙 심하잖아요. 백 대표님 프로젝트가 수익률이 높으면 그만큼 위험 부담도 따라오는 거고요.”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백지환의 얼굴이 확 변했다.그는 책상을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 안에 얼마를 넣은 줄 알아요? 이 몇 년 동안 제 모든 시간을 그 프로젝트에 쏟아부었다고요! 심지어 지금 집도 담보로 맡겼어요! 프로젝트가 멈추기라도 하면 저희 가족 전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고요!”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비록 박한빈이 서재 문을 닫아놓긴 했지만 백지환의 목소리는 성유리를 깨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래서일까, 박한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그는 무표정한 눈으로 백지환을 바라봤고 그제야 백지환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다.잠시 숨을 고른 뒤, 그는 손을 거두며 서둘러 말을 바꿨다.“아니, 박 대표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제가 너무 급해서... 아시잖아요, 저 사람 보는 눈도 없고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지금 이거마저 무너지면 진짜 전 끝입니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말하면 할수록 백지환의 눈가가 붉어졌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듯 애원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백지환의 입술은 떨림이 심해졌고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떼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아직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그게 무슨 뜻이죠?”“지금 이 단계에서 백 대표님이 돈을 더 붓는다고 해도 결국 헛짓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따로 신탁 기금을 하나 마련해 뒀고요. 그쪽으로 자금을 옮기고 수익자 이름도 바꾸시죠. 물론 초반에 넣은 돈을 다 건질 순 없겠지만 적어도 손해는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그렇게 말하며 박한빈은 미리 출력해 둔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너무 철저한 박한빈의 준비성에 백지환의 얼굴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던 그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입을 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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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3화

“당신 회사는 제가 대신 관리할 겁니다. 물론 겉보기엔 대표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 같을 겁니다. 저는 주주일 뿐, 경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거니까.”박한빈의 목소리는 너무도 평온했다.그의 셔츠는 구김 하나 없었고 얼굴은 여전히 잘생김의 정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백지환에게 그는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그에게 인간이 아니었다.차라리 피를 빨아먹는 맹수, 아니면 강도 같았다.이게 얼마 만에 벌어진 일인가?정말 순식간이었다.그는 원시 우림 속에 숨어 있던 독거미였다.박한빈은 아름다운 거미줄을 정성껏 엮어 그 위에 유혹의 먹이를 올려두었다.백지환은 그가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말에 마음을 놓았고 그를 철석같이 믿어버렸다.기꺼이 발을 들이민 순간, 그 거미줄은 아무 망설임 없이 백지환을 감싸며 조여왔다.그리고 지금 그는 꿈틀거릴 힘조차 없다.더 웃긴 건 아직 서명도 안 했는지만 박한빈은 벌써 모든 걸 손안에 넣은 듯한 태도였다.눈앞에서 드러나는 그 잔혹한 민낯은 본인이 일부로 그랬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백지환은 깊게 숨을 들이키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만약 제가 서명을 안 하면요?”그 말에 박한빈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그 미묘한 표정은 마치 이 상황에서 아직도 반항을 할 생각이 있다는 거냐고 묻는 듯했다.박한빈의 표정을 알아차린 백지환은 속으로 잠시나마 그를 비웃었다.‘박 대표님도 이런 표정을 짓긴 하는구나.’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사실 안 해도 됩니다.”그는 백지환에게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탁자 위의 서류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이내 들리는 서류가 갈려 나가는 소리에 백지환의 심장도 함께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멍해진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쯤 됐으면 더 얘기할 것도 없겠네요.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뭐... 뭐라고요?”백지환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물었다.곧 박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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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4화

박한빈의 목소리에는 감정도, 가식도, 그 어떤 불안함도 없었다.그의 눈에 백지환은 그저 손끝으로 눌러 죽이면 되는 작은 개미 한 마리에 불과했다.그리고 백지환이 던진 그 어설픈 협박들조차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그제야 백지환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고 동시에 깨달았다.자신이 박한빈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하고 무모한 착각이었는지를.그들은 학교 다닐 때도 늘 존재했던 1등과 그냥 공부 잘하는 아이의 차이 같았다.만약 90점을 맞는다면 그건 백지환의 최대치였다.재능도, 능력도 딱 거기까지다.하지만 박한빈은?그는 늘 100점을 맞는다.왜냐하면 시험지의 최고점은 100점이기 때문이다.자신은 그 차이가 ‘10점’이라 믿었지만 그건 단순한 숫자의 간격이 아니라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아무리 노력해도 100점은 영영 손에 닿지 않는다.그게 바로 그들 사이의 진짜 ‘차이’였다.기회도, 자원 때문도 아니다.그저 사람과 사람의 격차일 뿐이었다.“더 할 말 있으세요?”박한빈은 더는 흥미조차 없는 듯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사실 이제 더는 시간 낭비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백지환도 알았다.지금 이 순간이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서명할게요.”그는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말은 분명히 굴욕적이었다.박한빈 또한 그 감정을 알아챘지만 그조차도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서류를 출력해 탁자 위에 던졌다.백지환은 눈앞에 놓인 문서를 바라보다 천천히 펜을 들었다.분명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써왔던 자신의 이름 두 글자였지만 오늘만큼은 손끝이 그렇게도 무거웠다.겨우 서명을 마친 서류를 백지환은 떨리는 손으로 박한빈에게 건넸다.그러나 박한빈은 그 종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가보셔도 됩니다.”백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그야말로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이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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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5화

남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살짝 저었다.“어쨌든 네가 알아둬야 할 건 하나야.”박한빈이 조용히 말했다.“이 돈이 있으면 나중에 네 어머니가 세상에 없어도 네 아버지는 널 끝까지 키워야 해. 적어도 네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는.”그 말과 함께 박한빈은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이건 네 거야. 잘 보관해.”“저는...”남현호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이 아이의 말을 뚝 끊었다.“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다음은 네가 알아서 선택해야 해. 어떤 길로 갈지는 네가 정하는 거고.”남현호는 조용히 박한빈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신중하게 그 서류를 두 손으로 받아서 들었다.“이제 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자.”박한빈의 말에 남현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몇 걸음 걷던 그는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아저씨.”“왜?”“왜 절 도와주시는 거예요?”박한빈은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이내 남현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도와달라고 한 사람이 있어서. 그러니까 진짜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그 사람이야.”그 사람이 누군지 박한빈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남현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래서 굳이 이름을 듣지 않아도 됐다.“네. 고맙다고 꼭 전할게요.”그 말에 박한빈은 더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로 돌아가 쉬라는 뜻을 보였다.남현호는 정중히 인사하고 나서야 조용히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박한빈은 그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뒤, 비로소 안방으로 향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침대 위에 앉아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박한빈이 보기엔 내용은 한 마디도 안 듣고 있는 것 같았다.눈이 거의 감길 듯 말 듯 하다가 어느 순간엔 억지로 다시 뜨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쏟아지는 잠을 애써 참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태블릿을 받아냈다.“졸리면 그냥 자.”“어제도 제대로 못 잤잖아.”“네.”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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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6화

꿈속에서 성유리는 어느새 백지환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심지어는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까지 해버렸다.그렇게 남우미에게 벌어졌던 그 끔찍한 일들이 이번엔 그녀에게 닥쳐왔다.백지환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성유리가 어떤 ‘자원’을 차지하자 그는 그녀를 가차 없이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병상에 누워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그녀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그 인물의 얼굴은 흐릿했고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실루엣이 아래로 내려다볼 때, 성유리는 압도적인 기운을 느꼈다.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뭐랬어? 내 말 안 믿더니 결국 이렇게 됐잖아.”“넌 참... 그럴 만했어.”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 목소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 순간, 성유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박한빈 역시 깨어 있었고 바로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어딘가 서로를 떠보는 듯한 침묵 속의 시선이었다.그러다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꿈 꿨어?”성유리는 눈을 깜빡였다.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 눈치였다.박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응?”“어떻게 제가 꿈꿨다는 걸 알아요?”성유리가 되물었다.“누구 이름을 부르더라고.”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그 반응을 본 박한빈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그리고 그녀가 방금 부른 이름을 떠올리며 문득 후회가 밀려왔다.‘그때 백지환을 그냥 없애버려야 했는데.’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뭔가 껄끄러운 기분이 있었고 얼마 전 성유리 앞에서 백지환이 했던 말들은 아예 선을 넘은 모욕이었다.물론, 성유리가 백지환을 좋아할 리는 없었다.그 시기엔 성유리와 자신이 결혼 얘기를 공공연히 할 정도였고 그녀도 박한빈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지금도 마찬가지다.그때도, 지금도 그녀의 마음은 자신에게 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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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7화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물 좀 마시고 싶어요.”“내가 따라줄게.”그 말을 뱉은 동시에 박한빈은 벌써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직접 물을 따라 건넨 후, 그는 조용히 그녀가 다 마실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물을 다 마셨다.“더 마실래?”“괜찮아요.”“그래. 이제 자.”박한빈이 그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모든 게 이렇게 끝난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너는 백지환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성유리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딱히... 생각할 것도 없어요.”그 대답에 박한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그러자 성유리는 고개를 들고 그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그녀의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한참 동안 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그제야 성유리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백지환이라는 사람에 대해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남우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만약 그가 백지환을 구속한다면 남현호는 사실상 고아가 된다.물론, 백지환에게도 부모는 있지만 그들이 손자를 기를지는 의문이고 설령 기른다 해도 분명 시골로 데려갈 것이다.그리고 성유리 그런 상황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분명 마음 아파할 거고 힘들어할 것이다.박한빈은 그걸 보고 싶지 않았기에 결심했다.지금 상황에서는 백지환을 당장 없애버릴 수 없다고.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그는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속에서 터질 듯한 감정을 쏟아낼 수도 없고 억누르자니 가슴이 답답했다.그저 옆에 누운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는데 그녀는 어느새 다시 잠이 들어 있었다.정말 가능하다면 그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내용이 뭐든 상관없었다.성유리의 꿈 안에 있는 백지환을 그냥 걷어차고 내쫓고 싶었다.박한빈은 문득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난 들어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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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8화

성유리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끝없이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꿈들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얽히고설켜 마치 틈 하나 없는 그물처럼 그녀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필사적으로 눈을 떠보려 했지만 눈꺼풀은 너무 무겁고, 정신은 자꾸 가라앉을 뿐이었다.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리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렸다.그 목소리는 박한빈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눈앞에 떠오른 얼굴은 어머니였다.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갑자기 작아졌다.깜짝 놀란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어머니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그런데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거친 힘이 성유리를 뒤로 끌어당겼고 곧이어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이 온몸에 내리꽂혔다.“엄마, 살려줘요.”성유리는 아주 작게 어린아이처럼 말했다.그녀의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고 입술은 창백했지만 볼은 고열로 인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현실에서 박한빈은 한참 동안 성유리를 바라보다 곁에 서 있는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지금까지도 원인을 못 찾았다고요? 그럼 이 상태로 놔두자는 겁니까?”“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사모님께서 감염된 바이러스의 종류가 아직 파악되지 않아서 현재로선 수액 치료로 면역 반응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분노로 인해 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등과 팔에는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이빨을 악물고 있었다.박한빈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생각해 보면 정말 방법이 있었다면 벌써 했을 것이다.그래서 아무리 분노해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박한빈도 잘 알고 있었다.결국, 그는 손을 풀며 낮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황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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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9화

성노을은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뒀다.곧 하늘이가 박한빈에게 말했다.“서훈 삼촌이 그러던데... 아빠 며칠째 회사에 안 갔다며? 거기 아직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대.”박한빈은 대답도 하지 않았고 하늘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러자 하늘이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불렀다.“아빠.”그제야 박한빈은 아이를 바라봤다.“엄마는 괜찮을 거야.”하늘이는 담담하게 말했다.“엄마가 깨어나면 아빠의 도움이 더 필요할 거니까 아빠는 지금 일을 하러 가야 해.”하늘이의 말투는 이성적이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말하는 동안 아이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다.박한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다 고개를 돌렸다.“아빠도 알아.”하늘이는 아무 말 없이 성노을의 손을 꼭 잡고 침대 위의 사람을 바라봤다.그녀는 한때 ‘죽음’이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당시 할머니는 부모님 외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고 대부분의 주말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꽃꽂이도 배우고 그림도 감상하며 말도 타고 펜싱도 배웠다.하고 싶은 말도 할머니에게 마음껏 할 수 있었다.그녀가 무조건 들어줄 거란 걸 알았으니까.할머니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는 조용히 떠났다.사람들은 할머니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했지만 하늘이가 점점 자라면서 그건 아름다운 거짓말임을 알게 됐다.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냥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마치 우주 속에 먼지 한 점처럼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남는 건 자신의 기억뿐이었다.그 이후 하늘이는 자신이 ‘성숙해져서’ 죽음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또 한 사람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그제야 하늘이는 자신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더구나 이번에는 슬픔과 불안이 마치 쓰나미처럼 몰려와 자신을 통째로 삼켜버렸다.사실 하늘이는 버티려고 애썼다.평소처럼 학교도 다니고 집에 와서는 평소처럼 성노을을 돌보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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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0화

어느덧 성유리가 일반 병실로 옮겨진 지도 사흘이 지나버렸다.의사가 새 약을 썼고 효과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고 체온은 미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박한빈은 저녁에 회사에 잠깐 다녀와서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돌아왔다.이 기간 거의 병원에 살다시피 했다.필요한 전화 받고 메시지 답하는 것 말고는 거의 항상 성유리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가끔 그녀에게 말을 걸고 마사지를 해주기도 했고 손등에 손을 얹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이미 박한빈은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을 때 박한빈은 잠시 반응하지 못했다.하지만 사실 이상할 것도 없었다.그전에도 그녀가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처음엔 박한빈도 크게 기뻐했지만 의사는 그저 정상 반응일 뿐이라고 했다.그래서 기쁨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지금도 박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성유리의 손가락이 살짝 들리자 박한빈도 멍하니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손에 든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곧 이상함을 느꼈다.성유리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에는 약간의 혼란이 섞여 있었다.그걸 발견한 박한빈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그는 믿기 힘들다는 듯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원영아?”며칠간 잠든 사람이 바로 성유리였다.그렇지만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터질 듯 거칠고 떨리고 있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옆에 있던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빨리 의사 좀 불러주세요!”머릿속이 하얘져 제대로 말도 못 하던 박한빈은 몇 초 지나 겨우 의사를 부르라고 했다.그 사이에도 계속 성유리를 쳐다봤다.자신이 한 눈이라도 팔면 그녀가 다시 눈을 감을까 봐 두려워서였다.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성유리는 여전히 누워 있었고 처음 혼란스러웠던 눈빛은 점점 또렷해졌다.의사들이 도착하자 박한빈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나야, 기억나? 유리야, 어디 불편한 데 있어? 말할 수 있어?”박한빈은 성유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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