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컨드는 이제 그만! 새 사랑 시작: Chapter 841 - Chapter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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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1화

“너 말이야.”진정우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 낮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내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넌 그 아기를 지우지 않고 계속 품으려고 했잖아.”진정우의 말은 내 결정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뜻이었다.“내가 정말 바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이 아이는 내 아기야. 이 세상에 날 찾아와 준 존재니까 나는 이 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거야.”나는 정말 단 한 번도 배 속의 아이를 다른 누구와 공유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나에게 있어서 지금 내 배속의 생명체는 오직 내 아이였다.“그래. 앞으로는 우리 둘이 함께 이 아이를 사랑하자.”진정우는 다시 한번 내게 입 맞췄다.“고마워, 지원아.”진정우가 내가 자신을 믿어준 걸 고마워하는지 아니면 아이를 지켜준 걸 고마워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폭풍 같은 나날들을 겪고 나니 어느샌가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사랑과 증오, 권력다툼 그 모든 게 지금 와보니 마냥 시시하게만 느껴졌다.살아간다는 건, 그저 내가 편안하면 되는 거다. 그 외의 것들에 마음을 쏟기엔 내 마음이 너무 아깝다.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눈을 떴을 때 진정우는 옆에 없었다.진정우가 또다시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정우 씨!”“일어났어?”그의 대답이 들려오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 부름에 다가온 진정우가 다시 눈을 감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잠이 덜 깬 거야?”나는 진정우의 손을 잡아 얼굴에 가져다 댔다.“난 정우 씨가 또 사라진 줄 알았어.”내 말에 진정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진정우는 손가락으로 내 뺨을 살살 쓸어주며 말했다.“이젠 그럴 일 없어.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게.”나는 눈을 뜨고 진정우의 목에 팔을 감고 말했다.“그럼 앞으로 내가 눈 떴을 때 정우 씨를 제일 먼저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응, 약속할게.”진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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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2화

“솔직하게 말해줘?”진정우는 담담하게 물었다.“나한테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나는 일부러 옛일을 들췄다. 진정우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지만 그는 이미 약속을 어긴 전적이 있다.“지원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이제부터는 절대 거짓말 안 할게.”진정우의 맑은 눈동자 안에 내가 가득 들어찼다.나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사이에 앞으로라는 말은 하지 말자.”그리고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지금만 생각하자.”어릴 적 부모님은 늘 내가 미래를 기대하게 했지만 그들은 결국 나를 남겨두고 먼저 떠났다.강유형은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했지만 같이 걷던 우리의 길에서 이탈해버렸다. 강진혁도 한때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영원히 나를 돌보겠다고 했지만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고 한순간에 변해버린 본질은 그를 갈림길에 들어서게 하였다.그뿐만 아니라 진정우도 나에게 영원히 함께하자고 말했지만 용설아와 약혼할 뻔하기도 했다.나는 그래서 이제 더는 미래를 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미래를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나에게 소중한 건 오직 지금 이 순간 뿐이다.진정우의 눈동자에 잠깐 어둠이 드리웠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진정우가 강유형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유형의 전화가 꺼져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진정우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유형 씨가 연락이 안 돼. 혹시 다른 연락처 알아?”“본가랑 회사 연락처는 있어. 근데 지금 회사는 강진혁 일로 조사 중이라 폐쇄됐고, 본가에도 아마 안 갔을 거야.”강씨 가문 얘기가 나오자 나는 세상을 떠난 강유형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벅차고 가슴 아픈데 강유형은 오죽할까 싶었다.본가엔 더는 강유형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없으니 혼자서 그곳에 갈 일도 없을 것이다.“그럼 유형 씨가 지금 갈 수 있는 데는? 주변 친구 중에는 아는 사람 없어?”진정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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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3화

그동안 강유형과 함께 법운사에서 여러 차례 경전을 들은 적이 있었던 터라 이곳은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직접 경전을 읽는 모습을, 그것도 선사의 신분으로 읽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진정우가 나를 부축해 자리에 앉자 강유형이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반야심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글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강유형이 경전을 읽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요즘 보였던 낯선 태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강유형은 이미 오래전부터 출가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몸은 세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불교를 향하고 있었다.그래서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도 그토록 담담할 수 있었다.그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속을 내려놓고 생사마저 초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법문이 끝나고 강유형이 우리 앞에 와 서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아미타불.”그 순간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강유형,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나는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모습의 강유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었다.“난 이렇게 있는 게 마음이 편해. 행복하고 아무런 부담도 없어.”나를 바라보는 강유형의 눈동자는 마치 설산 꼭대기의 맑은 호수처럼 잡티 하나 없이 투명했다.나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 눈을 보고 나니 차마 할 수 없었다.강유형이 1년 넘게 겪어온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 길을 택한 건 어쩌면 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정우 씨가 절 보러 오신 건 따로 물으실 일이 있어서겠지요?”강유형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진정우를 보며 말했다.“네. 용씨 부자를 어떻게 제압하셨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제가 외국에 있었을 때도 그게 제일 큰 걱정이었거든요.”진정우가 물었다.강유형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말했다.“두 분, 절 따라오시죠.”우리는 강유형이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는지 몰랐지만 굳이 묻지 않고 그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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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4화

나는 내 청춘을 온전히 차지했던 강유형이 승복을 입고 남은 생을 고독하게 경서와 함께 살아갈 선택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강유형은 세속을 내려놓았고 세상의 모든 번뇌를 놓아버렸으며 더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사랑도, 인연도 모두 끊어낸 듯 보였다.법운사에서 돌아온 후 나는 병이 났다. 고열이 계속 떨어지지 않아 의식이 몽롱한 채로 이틀 동안 계속 잠만 잤다. 그 이틀 동안 나는 꿈을 꿨다. 어릴 적 나, 나의 부모님, 그리고 강유형의 부모님, 강유형, 강진혁까지 모두 등장했다.나는 그 꿈속에서 도무지 깨어나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나를 꿈속에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말이다.희미한 의식 속에서 나는 강유형과 진정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강유형이 떠나자 더는 꿈을 꾸지 않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의 햇볕은 너무나 따뜻했다. 하지만 따뜻한 만큼이나 눈이 부시게 찬란하기도 했다. 나는 손을 들어 햇빛을 막으려 했으나 누군가가 내 손을 잡은 탓에 그럴 수 없었다.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에 엎드려 자고 있는 진정우가 보였다. 그의 짙은 흑발은 햇빛 아래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를 비추고 있는 게 정녕 햇빛인지 그의 후광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정우 씨.”나는 조용히 진정우를 불렀다.하지만 진정우는 깨어나지 않았다. 워낙에 잠귀가 밝은 편이라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깨던 진정우였는데 이렇게 불러도 깨지 않는 걸 보면 그만큼 피곤했다는 뜻이기도 했다.나는 더 부르지 않고 그저 햇살과 물아일체가 된 진정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우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더니 눈을 뜨자마자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곧장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말했다.“지원아 깼어?”“응.”오랜 잠에서 깬 탓에 내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서 썩 듣기 좋지 못했다.“물 마실래?”진정우는 내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물었다.눈 밑에 다크서클이 선명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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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5화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아기 상태 아주 좋아. 조금 이따 다시 올게.”안리영은 내 병실을 나와 원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원장과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안리영은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그곳에 구안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안리영은 곧 평정을 되찾고 자연스럽게 인사했다.“저를 찾으신다고요, 원장님. 구 교수님도 계시네요.”안리영이 구 교수님이라는 소리에 구안석은 심장이 섬찟해났다. 그러나 구안석은 차마 영이라는 익숙한 호칭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안 과장, 여기 앉아요.”원장이 반갑게 맞이했다.안리영이 자리에 앉자 원장은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안 과장과 구 교수는 서로 아는 사이니 소개는 생략할게요. 다름이 아니라 구 교수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소개하려고 불렀어요. 그건 바로 태아 심장 기형 교정술인데 구 교수가 이 연구의 임상시험을 우리 병원에서 시범 도입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앞으로 안 과장이 구 교수와 협력해야 할 것 같아요.”이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안리영도 알고 있었다. 구안석이 예전에 안리영에게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도입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런데 지금 갑자기 국내에서 시범 도입을 하겠다고 하는 것도 모자라 콕 집어 안리영과 협력하겠다고 하니 이 모든 게 우연일 리는 없었다. 구안석이 조금의 사심도 없다고 해도 안리영은 믿지 않을 게 뻔했다.하지만 이 연구 성과가 순조롭게 실제로 응용된다면 많은 가족과 태아 심장 기형을 가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만은 사실이었다.비록 지금 둘이 같이 일하기에 적절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고 내뺄 수도 없었다.“네, 구 교수님과 잘 협력해볼게요.”안리영은 그렇게 말하며 구안석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원장은 만족스러운 듯 책상을 탁 치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구 교수는 안 과장한테 맡길게요.”그리고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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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6화

이 세상에서 안리영을 칠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조시언뿐이었다.구안석도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조용히 손을 거두어졌다.“삼촌.”“구 교수님, 이제는 절 시언 씨라고 부르는 게 더 맞는 것 같은데요.”조시언은 구안석에게 더는 그가 안리영과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말을 마친 조시언은 안리영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지금 시간 괜찮으면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그래.”조시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안리영은 구안석에게 짧게 인사하고는 조시언을 따라갔다.조시언보다 키가 훨씬 작은 안리영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삼촌, 무슨 일이야? 혹시 내 부모님에 관한 거야?”안리영이 돌아온 뒤로 안리영의 부모는 매일 그녀에게 집으로 들어와 지내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해오던 상황이었다. 그래야 본인들도 안심할 수 있다고 말이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까지 모두 나서서 그렇게 말했다.“그분들께서 나한테 네 생각이 어떤지 물어봐달라고 부탁했어.”조시언이 꺼낸 말은 안리영이 예상한 그대로였다.“삼촌, 난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싶지 않아. 몇 년 동안 난 쭉 혼자 살아왔고 야근도 밥 먹듯이 해왔어. 어디 그뿐이야? 가끔은 새벽에 불려 나가기도 한다고. 근데 같이 살면 부모님 휴식에 방해가 되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잖아.”안리영은 최대한 부모님을 배려한다는 것을 핑계로 댔다.조시언은 아무 말 없이 안리영을 바라봤다. 조시언의 표정만 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안리영은 이 정도 핑계로는 조시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사실 안리영의 부모는 늘 조시언의 말이라면 수긍해왔다. 특히 안리영의 엄마는 조시언의 말이 곧 법인 것처럼 잘 따랐다. 그래서 안리영이 집에 가서 감시당하며 살고 싶지 않다면 굳이 다른 변명 없이도 조시언만 잘 설득하면 되는 일이었다.“삼촌.”안리영은 조시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알잖아, 이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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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7화

“설마 우리 부모님 부추긴 게 삼촌이었어?”안리영의 합리적인 의심에도 조시언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런 조시언의 태도에 안리영은 조시언이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삼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삼촌을 얼마나 믿었는데.”안리영은 비록 조시언이 자기편을 안 들어줬다는 게 속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항의해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안리영은 만약 이대로 부모님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이 당장이라도 병원에 찾아와 자신을 억지로 데려갈 것만 같아 두려웠다.조시언과 말다툼을 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걸 깨달은 안리영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래, 그럼 말해봐. 무슨 조건을 지키면 부모님이랑 같이 안 살아도 되는 건데?”“우리 집에서 살아.”조시언은 말에 힘을 주어 한마디씩 뱉을 때마다 점점 변해가는 안리영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너무 놀라서였을까, 안리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안리영의 모습은 본 조시언이 다시 한번 덧붙였다.“어디까지나 잠시야. 너희 부모님께서 완전히 시름을 놓을 때까지만이야. 그 뒤엔 네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전처럼 혼자 살아도 돼.”안리영은 조시언과 함께 사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과거의 어색했던 기억들이 거의 잊혀 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써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게 문제였다.“좀 더 생각해볼게.”안리영은 단번에 수락하지 않았다.“너희 부모님께서는 내일까지 네 짐을 집으로 보내라고 나한테 부탁하셨어.”“...”그 말은 곧 오늘 안에 답을 달라는 압박이었다. 즉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과 함께 살든, 조시언의 집으로 가든 오늘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그럼 오후에 답장해줄게.”안리영은 비록 이미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바로 타협하진 않았다.조시언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자리를 떠났다.안리영은 조시언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와 한집에서 지내는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어딘가 불편하고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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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8화

안리영은 말없이 앉아 깔깔 웃고 있는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겨우 웃음을 멈췄을 즈음에야 한마디 했다.“웃을 만큼 웃었으면 이제 나 좀 도와줘.”사실 안리영은 자기 주관이 아주 뚜렷한 사람이다. 그런 안리영이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다.“그럼 일단 이거부터 대답해봐. 안석 씨하고는 아직 가능성 있는 거야?”나는 안리영의 속마음을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안리영은 탁자 위에 있던 귤을 집어 껍질을 까며 말했다.“너는 어떻게 생각해?”안리영은 미련이 남아 과거를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을 바꾸는 사람 또한 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안리영이 구안석과 이별을 결정한 그 날, 이미 구안석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다만 구안석은 아무래도 뒤늦게서야 안리영이 없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이제 와서 다시 안리영을 쫓을 뿐이었다.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점에 안리영의 소꿉친구 조시언이 나타났다.“안석 씨한테 더 기회를 줄 마음이 없으면 그냥 너희 삼촌 집으로 이사해.”나는 안리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조언했다.안리영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이유는?”“안석 씨가 이 병원에 연구 협력으로 들어온 건 딴 게 아니고 네 옆에서 기회를 엿보려는 거야. 낮에 병원에서 계속 마주치면서 너한테 못 해줬던 걸 해주고 다시 잘해보려는 거지. 게다가 너랑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면 낮뿐만이 아니라 밤에도 만날 기회가 있을 거고.”“아, 그리고 그 사람 어디 사는지도 한번 알아봐. 내가 보기엔 거의 틀림없이 너희 집 근처일 거야.”안리영은 귤을 다 까서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맞는 말이야. 이건 잘했으니까 주는 상.”나는 군말 없이 한 조각 집어 먹으며 조언을 이어갔다.“밤에 틈을 안 주면 안석 씨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문제는 내가 삼촌이랑 같은 집에 살기 싫다는 거야.”안리영이 핵심을 짚었다.나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왜? 아직도 예전에 어색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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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9화

“진씨 가문에서 나더러 돌아오래.”나는 진정우가 하는 말의 뜻을 바로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정우가 두 번이나 큰일을 겪었는데도 진씨 가문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정우 씨 생각은 어떤데?”나는 진정우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정우 씨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안 가면 안 되는 거지?”진정우는 내가 말만 하고 밥을 안 먹는 걸 보고는 내게 밥부터 먹으라고 눈짓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정우 씨가 말해주면 먹을게.”진정우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끌어다 가까이에 놓아줬다.“안 가면 안 되는 건 없어.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날 강요 못 해.”“그럼 나 때문이야?”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물었다.진정우가 대답하지 않는 거로 보아 내가 맞춘 듯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설마 진씨 가문에 돌아가면 용씨 가문이랑 다시 정략결혼 해야 하는 거야?”“진씨 가문의 후계자는 반드시 용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야 해. 그건 두 집안이 오래전부터 정한 약속이야.”말을 하는 진정우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그렇게 따지면 진정우가 진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만 포기하면 될 일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그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지만 겉으론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 용씨 가문에 설아 씨와는 원래도 친했잖아. 죽도 잘 맞고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겠네.”“지금 뭐라고 했어?”진정우가 나를 흘겨봤다. 웃음기 없이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그러니까 내 말은...”“다시 생각하고 말해.”진정우가 내 말을 끊으며 싸늘하게 말했다.진정우가 진짜로 화난 걸 보니 나도 모르게 뾰로통해졌다.“진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건 정우 씨잖아. 돌아가면 정략결혼 해야 한다며? 그럼 내가 양보하는 게 맞지. 근데 왜 나한테 화내는데? 내가 얼마나 그릇이 큰 여잔데.”그렇게 말하다 보니 괜히 서러워진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더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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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0화

안리영이 마지막 환자의 진료를 마치고 물을 마시려고 컵을 집어 든 순간, 문밖에서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안리영은 입안에 물을 삼키고 말했다.“들어오세요!”진료실에 들어온 사람을 본 안리영은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진료받으러 왔지.”조민영의 말투는 썩 달갑지 못했다.안리영은 조민영의 뒤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조 미녀님께서 어쩌다 혼자 오셨을까? 아빠는?”“입구에 남성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던데?”조민영의 말에 안리영은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그 팻말에 있는 남성에 아빠는 포함 안 돼.”“왜, 너희 아빠는 남자도 아니라 이거야?”조민영은 제대로 전투모드를 장착하고 안리영을 찾아온 것이었다.아무래도 오늘 좋은 소리를 듣기는 그른 것 같았다.안리영은 조민영이 찾아온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안리영은 요즘 계속 집에 들어와서 살라는 부모님의 성화에도 전화조차 받지 않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참다못한 안리영의 엄마 조민영이 결국 직접 출동한 것이다.“엄마, 나 지금 진료 중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퇴근하고 집에 가서 얘기해.”안리영은 하는 수 없이 아직 업무 중이라고 둘러댔다.그러자 조민영은 접수표를 안리영의 눈앞에 들이밀며 말했다.“잘 봐. 나 정식으로 돈 내고 진료받으러 온 거야. 편법을 쓴 것도 아니고 방해하러 온 것도 아니라고.”안리영은 결국 포기하고 의사 모드로 돌입하며 가볍게 헛기침했다.“그럼 말씀해 보세요. 어디가 불편하셔서 찾아오셨죠?”“다 불편해요.”조민영은 안리영의 물음에 아주 착실히 대답했다.“주 여사님, 여긴 산부인과예요. 산과 질환 아니고 다른 곳이 불편하신 거면 말씀하세요. 제가 다른 과로 예약 잡아드릴게요.”안리영은 슬슬 환자로 위장한 조민영을 쫓아낼 궁리를 시작했다.“전 어디도 안 옮길 거예요. 꼭 여기서 진료받아야겠어요.”조민영이 책상을 탁 치며 말했다.안리영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안리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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