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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과 침묵 사이: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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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가서 부엌 일이나 도와

인아는 희도를 기다리지 않고 홀로 택시를 타고 유씨 저택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의 A시는 안개비에 휩싸여, 모든 건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인아는 도착하자마자, 길에서 산 과일을 들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그녀가 무엇을 사든 장희정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 유씨 가문은 유독 분주했다. 정원과 대문 앞에 주차된 차들이 많았다. 유성문은 전처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유희윤이었다. 희윤은 일찍이 정략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렸고, 오늘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저택에 왔다. 희도와 희연은 장희정의 친자식이었고, 막내아들은 유성문이 밖에서 데리고 들어온 아이였다. 막내의 생모는 그를 낳다가 사망했고, 유성문이 그를 데리고 와서 장희정이 양육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희정은 친아들이 아닌 막내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기에 막내는 어릴 때부터 방탕한 삶을 살았다. 인아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소리는 인아의 가슴에 깊게 박히는 바늘처럼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인아는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때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가 달려와 인아의 다리에 부딪혔다. 인아는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벙어리 왔다.” “벙어리 왔다.” 남자아이는 인아의 주위를 빙빙 돌며 큰 소리로 ‘벙어리'라고 외쳤다.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아이의 모습은, 자신이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지조차 모르는 아이의 순수함을 보여주었다. 인아는 아이를 무시한 채 거실로 향했다. 남자아이는 인아의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잡아당겼지만, 인아는 이를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내놔!” 남자 아이는 화난 얼굴로 인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지만, 인아는 차분히 그를 쳐다볼 뿐 넘기지 않았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이 인아의 가슴 속 깊은 곳의 분노를 끌어올렸다. 과일 바구니를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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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괴롭히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인아는 입술을 깨물며 뒤돌아 나갔다. 그녀는 화장실로 향했는데, 수현이 그곳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수현은 그녀를 보며 일회용 타월을 뽑아 손을 닦았다. “들어와요. 전 다 끝났으니까요.” 인아는 억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아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무언가를 잡으려 했고, 손에 잡힌 것은 수현의 팔이었다. 수현은 재빨리 인아를 잡았고 인아는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수현은 허리를 감싼 손에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고, 인아는 그의 팔을 꽉 잡은 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수현은 잠시 멈칫했다. 인아의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지만, 그 안에는 한없이 깊은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전혀 요염하지 않지만, 그 시선에는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마치 귀여운 동물을 보면 만지고 싶은 충동이 생기듯, 누군가는 그 깨끗한 눈빛을 흐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었다. 수현의 완벽한 표정에 잠시 균열이 생겼다. 그 순간, 두 명의 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재빨리 도망쳤다. 수현은 바로 인아를 놓아주며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인아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고마워요.”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화장실 문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수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점점 흐려졌다. ‘이 작은 벙어리가 이제는 날 두려워하지 않네.’ ‘재미있네.’ 이 저택은 작았기에 소문은 금방 퍼졌다. 인아와 수현이 화장실에서 서로 안고 있었다는 소문은 금세 집안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내가 뭐랬어, 분명 벙어리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니까? 역시 무언가 있었어.” “맞아, 둘째 아가씨를 보는 눈빛과 전혀 다르다고. 둘이 진짜 그런 관계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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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총알이 인아의 얼굴에 맞았지만, 그녀가 소리를 내지 않자 사람들은 하준이 혼자 노는 줄만 알았다. “인아야!” 희도는 누구보다 먼저 눈치채고 인아를 재빨리 부축했다. 인아는 눈앞이 아찔해져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희도의 외침에 사람들은 뒤돌아봤고, 그제야 하준이 인아를 쏘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윤은 하준을 품에 끌어안고 화난 척하며 나무랐다. “이 녀석! 장난이 심하잖아.” 하지만 하준은 불만스럽게 몸을 비틀며 또 한 번 인아를 향해 총을 겨누려 했다. 아이의 아빠, 정서원이 재빨리 아이를 막아섰다. “장난 그만하고 총 내놔.” 하준은 강하게 거부하며 총을 끌어안았다. “이건 내 거야!” 희도는 인아의 손을 떼고 그녀의 눈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눈 끝에만 맞았지만, 그 때문에 눈 전체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희도는 고개를 돌려 하준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에 놀란 하준은 순간 얼어붙은 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희윤은 얼른 상황을 수습하려 다가와 인아의 눈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다치진 않았네, 그냥 장난감 총이잖아. 아마 많이 안 아플 거야.” 그러나 인아의 눈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맞은 곳은 살짝 멍들어 있었다. 희도는 희윤을 힐끔 보고 말했다. “어떻게 안 아픈지 알지?” “그냥 플라스틱 총알이잖아. 그게 얼마나 아프겠어? 희도야, 네가 인아 씨를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한테 따질 필요는 없잖아?” “그럼 너한테 따질까?”희도의 눈빛에는 조소가 깃들었다. “그럼 어른인 넌 어떻게 해결할 건데?” 희윤은 말문이 막혔고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냥 장난감 총이잖아. 꼭 이렇게 심각하게 굴어야 해?” “그래.” 희도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 희윤은 더 이상 말다툼을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유성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빠, 우리가 오랜만에 왔는데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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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사랑에 빠질지도 몰라요

갑작스러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하준이 얼굴을 감싸며 땅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그리고 희도는 여전히 장난감 총을 만지작거리며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도는 마치 하준이 울고 있는 걸 보지 못한 듯, 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 총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하준이 그의 총에 맞아 울음을 터뜨렸다는 걸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인아는 그 장면을 보고 본능적으로 소매를 꽉 잡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윤과 서원이 제일 먼저 하준에게 달려갔다. 희윤은 하준을 안아 들고 그의 얼굴을 서둘러 살폈다. “하준아, 어디 다친 거니?” 하준은 흐느끼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나이가 어려 피부가 연약한 탓에 울음 때문에 온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버려, 눈가의 붉음은 더 이상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 끝의 푹 패인 자국은 뚜렷했고, 그걸 본 희윤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유희도, 이게 무슨 짓이야!”희도는 그제야 눈을 돌려 희윤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플라스틱 총알일 뿐인데, 아프진 않잖아.” “너...” 희도는 아까 희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말문이 막힌 희윤은 분노만 가득 차올랐지만, 그걸 토해낼 수는 없었다. 희도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듯 차갑고 냉소적이었다. “아니면 한 번 맞아볼래?” “너, 너무하는 거 아니야?” 희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벌떡 일어났다. “너 서른 살이나 먹은 어른이 겨우 일곱 살짜리 아이한테 이럴 필요가 있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누나, 말 너무 심하게 하지 마. 내가 언제 아이랑 따졌다고 그래? 오히려 누나가 고작 플라스틱 총알 하나로 이렇게 큰일이라도 난 듯 화를 내잖아. 대체 누가 더 따지고 있는 건지 생각해봐.” 희윤은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희도를 말로 이길 수 없었고, 그렇다고 주먹을 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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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실패투성이

희도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희도는 인아가 유씨 가문에서 편안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했다. 인아는 희도가 사라지는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쓴맛이 퍼져 나갔다. ‘난 대체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희도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가 정말 냉정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인아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녁에 벌어진 소란으로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고, 인아도 침실로 돌아가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눈을 감자 여러 가지 일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결론적으로 인아는 유씨 가문에서 보낸 지난 20년이 참으로 실패투성이였다고 느꼈다. 인아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아득한 과거의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그녀 앞에 있던 얼굴은 유정석의 얼굴이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텅 비어 있었다. 유정석은 그녀의 이름이 인아라고 말해주었고 그녀가 고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를 따라 살게 될 거라고 했다. 그렇게 인아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유씨 가문에 들어왔고,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리벙벙하게 20년을 보내버렸다. 운명은 인아에게 한 번도 관대하지 않았다. 유일한 빛마저 점점 더 흐릿해지고 멀어지며, 인아와의 거리는 더욱더 벌어져만 갔다. ... 큐브. 방 안은 시끌벅적했고, 많은 여자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술자리를 즐기던 용국은 마이크를 잡고 여자들 틈으로 뛰어들어 그녀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의 춤은 어딘가 어색하고 뻣뻣해서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서준과 희도는 함께 앉아 조용히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세관 문제는 해결됐어.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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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기분 전환

희도는 서준의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뜨며 서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라고?” 서준은 갑자기 머리끝이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희도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가 방금 한 말이 잘못되었거나, ‘만약’이라는 단어를 빼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준은 서둘러 변명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그런 가정을 하지 마.” 희도는 냉정하게 말하며 그 질문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서준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희도가 정말 인아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알았어,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서준은 억지로 웃으며 생각했다. ‘인아 씨가 임신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자기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인아는 어젯밤 비를 맞아 밤새 열이 나기 시작했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가 유씨 저택에 있는 줄 몰랐다. 오후가 되어서야 아주머니가 방 청소를 하러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인아를 발견했다.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이불을 들추었다. “인, 인아 씨?” 인아는 흐릿하게 눈을 뜨고 아주머니의 놀란 표덜을 보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아주머니를 향해 손짓했다. “어떻게 여기에 계신 거죠?” 인아는 잠시 손짓하다가 아주머니가 당황해 하는 걸 보고 핸드폰을 꺼내 글자를 쳐서 보여주었다. [며칠 여기서 지낼 겁니다.] 아주머니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인아는 계속해서 글자를 쳤다. [해열제 좀 갖다줘요. 고마워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주머니는 서둘러 약을 가지러 방을 나섰다. 인아는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손과 이마 온도가 비슷했기에 열이 난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인아는 곧바로 열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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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인아를 데리고 왔어?

희연은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성큼성큼 걸어와 유모차를 꽉 붙잡았다. “수현 씨, 형님이 방금 아이를 낙태했는데, 어떻게 준영이를 돌보게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뜻은 만약 인아가 앙심을 품고 아이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결국, 희연도 자신들이 인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기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수현은 희연을 힐끗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가봐야 해서, 자긴 먼저 자. 날 기다리지 않아도 돼.” “또 나가? 오늘 밤도 안 들어오는 거야?” 희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매일 새벽같이 나가고 밤늦게 들어왔다. 그가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희연은 수현을 의심해봤지만, 그는 밖에서 여자와 어울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여성 고객과의 만남도 드물었다. 수현은 빈틈이 없었기에 희연은 그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희연은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보냈다. “형님이 나를 찾으셨어.” “그래.” 희연은 수현이 그런 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희도가 수현을 위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기에 그녀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수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인아를 향해 물었다. “형수님,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왜 형수님을 데려가려는 거야?” 희연은 점점 화가 났다. “형수님은 집에 돌아가셔야 하잖아. 형님을 만나고 나면 같이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수현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었고,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희연은 유모차 손잡이를 더 꽉 잡으며 화를 참았다. “형수님이 며칠 동안 여기서 지내신다고 하셨어.” “그래?”수현은 그제야 알아차린 듯 말했다.“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네.” 인아는 서둘러 손짓으로 답했다. “같이 가요.” 희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인아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고, 겉으로 드러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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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왜요? 형님은 형수님이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수현이 되물었다. 희도는 수현을 다시 쳐다보며 눈에 탐색의 기운이 서렸다. 이내 희도는 살짝 웃었다. “잠시 후에 원호더러 주소를 보내라고 할 테니, 늦지 않게 와.” “네, 알겠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희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나오자마자 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이 남았다. 희도가 1층에 내려오자, 인아가 로비 소파에 앉아 땅을 쳐다보며 멍하니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인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 희도가 서 있었다. 희도의 키는 워낙 커서 인아는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빛이 가려져 있었기에 희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희도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인아를 내려다보았다. 인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도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고, 어쩌면 평소보다 더 냉랭해 보였다. “가자.” 희도는 짧게 말한 뒤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인아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들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 희도가 타고 온 차는 검은색 벤츠였다. 인아가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자 희도가 갑자기 말했다. “배수현을 멀리 해.” 인아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희도를 쳐다보았다. 희도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기에 옆얼굴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인아의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돌려 인아의 눈을 마주치며 다시 물었다. “들었어?” 인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안전벨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그녀는 손짓으로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구를 만나면 안 되는지 목록이라도 주실래요?” 인아의 말에는 분명히 반항적인 기색이 담겨 있었고, 희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희도는 인아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가 그딴 유치한 수작으로 누구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인아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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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가서 설거지나 해

인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손발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몰랐다. 마치 제3자가 된 기분이었다. “놔둬.” 희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나왔다. 뒤에서 연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발표회에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절대 늦지 마!] “응.” [어제 라이브 방송 켜서 2,000만 원 넘게 벌었어. 나 대단하지 않아?] “대단해.” 희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게다가 기획사에서 계약하자고 연락도 왔어. 나 진짜 연예계에 도전해 볼까? 어떻게 생각해?] “도전하고 싶으면 해. 내가 투자해 줄게.” 인아는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희도는 연서에게 늘 무조건 지원을 해주었고, 연서는 늘 자유로웠다.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친구도 사귀고, 꿈도 쫓을 수 있었다. 연서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인아는 그저 벙어리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불완전했고, 완전한 삶을 누릴 자격조차 없었다. 인아는 저녁을 대충 먹고 곧바로 침실로 돌아가 누웠다. 그러나 잠들지 못했다. 불면증이 점점 심해져 침대에서 두 시간이나 뒤척였다. 그때 희도가 방으로 들어왔다. 희도는 늘 그랬듯 침대에 누웠지만, 이전처럼 인아를 안아주지는 않았다. 희도와 인아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었고, 둘은 같은 침대에 누웠지만 서로 등을 마주한 채 그 사이에 마치 끝없이 넓은 공간이 있는 듯했다. 인아는 베개를 꽉 쥐었다. 눈을 감고 옆에 있는 그 공허함을 외면하려 애썼다. 머리 위의 불빛이 너무 밝아 눈을 감아도 그 빛이 느껴졌다. 결국 인아는 잠들 수가 없었다. 잠시 뒤, 인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 후, 거실 소파로 나와 몸을 웅크렸다. 인아는 팔에 얼굴을 묻고 모든 빛을 차단하려 했다.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몸 위로 무언가가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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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잘 어울리는 한 쌍

인아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짠맛과 피비린내가 즉시 퍼져나갔다.“야, 게으름 피우지 마! 할 거면 제대로 해! 못 하겠으면 차라리 나가, 남의 귀한 시간 뺏지 말고!”뚱뚱한 아주머니는 마치 인아가 잠깐이라도 멈추기만 하면 알아챌 수 있는 감시자처럼 눈을 번뜩였다. 인아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을 입에 물고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았다.뚱뚱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분명히 희도의 지시를 받은 탓일 것이다. 인아가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그녀는 소리만 질렀을 뿐, 실제로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런 부자들이 무슨 속셈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화해라도 하면 자신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내 말 안 들려? 빨리 일어나서 설거지해!”인아는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아주머니는 순간 말을 잃었다. “너...”아주머니는 인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갑자기 말할 것을 잊은 듯했다.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싱크대에 있는 접시를 들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머리는 무겁고, 정신은 몽롱했다. 손가락이 물에 잠겨 있었기에 상처에 매운 기름과 양념이 스며들어 고통이 밀려왔다. 뚱뚱한 아주머니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인아가 갑자기 쓰러져 죽을까 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방금 인아의 얼굴은 정말로 죽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인아는 계속해서 설거지를 하였고 오후 3시가 되자 가게는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뚱뚱한 아주머니가 인아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됐어, 가서 밥 먹어. 밥 먹고 다시 와서 설거지하면 돼.”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 식당으로 갔다. 식탁에는 이미 남은 음식뿐이었다. 인아는 남아있는 빵을 집어 들어 천천히 씹었다.벽에 걸린 TV에서는 연예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곳에 연서가 나왔다. 이는 SY게임즈의 행사 현장이었고, 연서는 그 행사에서 MC로 등장하고 있었다.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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