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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과 침묵 사이: Chapter 61 - Chapter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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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내가 씻겨줄게

다가온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희도였다.희도는 차에서 내려 수현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아주 한가한가 보네.”수현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나가는 길에 형수님을 우연히 봤어요. 그래서 그냥 모셔다 드리려고요.”“그래?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같이 가자.”“좋습니다. 타시죠.” 수현은 웃으며 대답했다.희도는 인아를 한 번 보고는 먼저 차에 올라탔다. 인아도 그를 따라 차에 올랐다.수현은 운전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자연스럽게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형님께서 하실 말씀이 뭐였죠?” 수현이 먼저 물었다.희도는 뒤로 기대며 말했다. “CRISPR 프로젝트 말이야, 자네가 제출한 안건에 TS그룹이라는 회사가 있던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지?”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건 회의에서 논의 후 결정한 후보입니다. TS그룹은 전자기술 분야에서 나름 성과를 낸 회사입니다. 하지만 꼭 협력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이전에는 그 회사의 자회사와 협력했기에 이번엔 본사에서 맡는 거라면 기술적으로는 믿으셔도 될 겁니다.”희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수현은 말을 이었다.“형님이 원치 않으시면 내일 회의에서 그 회사를 빼도록 하겠습니다.”희도는 천천히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이 프로젝트는 어느 회사와 협력하든 리스크가 따를 거야. 내 생각엔 차라리 직접 투자하는 게 나아. 지금 유전자 편집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생명공학 회사들이 많지만, 자체 개발하기엔 시간과 자원이 너무 많이 들고 기술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리스크가 커.”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 내일 회의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해 보죠.”희도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희도는 회사에서 이미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대표가 된 이래 회사의 원로들, 특히 유성문의 측근들은 거의 모두 정리되었다.다른 사람들은 모를지 몰라도 수현은 알고 있었다. 유성문이 지분을 분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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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아이를 가지자

인아의 몸이 굳어졌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로 몰려오자 인아는 고개를 돌려 희도의 시선을 피했다.희도는 인아를 안아 욕실로 데려가 욕조에 내려놓았다.인아는 긴장한 나머지 손가락을 꽉 쥐었다. 속이 불편한 탓에 희도를 피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거절이라도 한다면 희도가 더 거칠게 나올 게 분명했다.뜨거운 물이 인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단 몇 초 만에 인아는 물에 젖은 생쥐가 된 듯했다.희도는 정말로 인아를 씻기고 있었다. 하지만 씻겨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일을 벌이고 있었다.인아는 불편함을 참고 그와 함께 한밤중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희도가 인아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던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이를 가지자.”그것이 진짜였는지, 환청이었는지 인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인아는 희미하게 눈을 떠 그의 희미한 얼굴을 바라봤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갔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희도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기에 인아는 피곤해서 환청을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핸드폰을 보니 오전 10시였다. 아랫배가 쑤셨다. 인아는 아픔을 참으며 옷을 갈아입고 진통제를 꺼내 한 알 삼켰다.화장실에서 세수를 마친 뒤 출근 준비를 하려고 했다.장옥순은 이미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려던 찰나 현관 벨이 울렸다.인아가 문을 열었다. 밖에는 중년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 남자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쯤 되었고, 여자는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두 사람은 웃으며 인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 사모님이시죠? 저는 임태성입니다. 장옥순 씨의 아들이에요. 제 어머니가 여기 계시죠?”인아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장옥순의 성이 장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이름에 대해선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손짓으로 말했다. “누구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임태성은 인아가 수화를 하는 걸 보고 잠시 놀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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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인아는 답장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희도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20분이 흐른 뒤에도 아무 소식이 없자, 인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를 본 장옥순은 인아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인아야, 네 마음은 잘 알고 있어. 진심으로 고맙구나.”반면 임태성은 그동안 귤을 한 접시 먹고는 느긋하게 물었다. “아직도 돈 못 구했어? 너희 집이 그렇게 돈이 많다면서 1억조차 없다고?”인아는 장옥순을 쳐다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결국 희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희도가 아니었다. [인아 씨, 희도는 지금 바쁘니까 문자를 보내세요.] 연서의 목소리였다.그 순간 인아의 마지막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연서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희도를 향해 말했다. “그 벙어리가 전화했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희도는 잠깐 핸드폰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의 이런 태도에 연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연서는 희도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 오후에 매니저와 계약하러 갈 거야. 약속한 거 잊지 말아야 해. 내가 대스타 되는 거, 꼭 이루어 줘야지?”희도는 서류를 내려놓고 연서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짐은 다 챙겼어?”연서는 화가 난 눈빛으로 희도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 챙겼어! 넌 더 이상 내가 안 보고 싶나 봐?”희도는 연서의 화려한 손톱을 힐끔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널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여기서 일하는 게 정말 안 어울려서 그래.” 연서는 희도의 말에 투정을 부리듯 팔짱을 풀었다. “역시 날 못마땅해하는 거잖아!”희도는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네가 여기 있는 것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이 많아.”연서는 불만을 늘여 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뭐? 어차피 다 네 직원들이잖아.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건 네 책임도 있어!”희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연서는 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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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나 사랑해?

“아가씨, 괜찮아요?”갑자기 누군가가 인아를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그는 흰색 패딩을 입고 귀에 이어폰을 걸치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인아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다면 다행이네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세요.” 남학생은 활짝 웃어 보이고는 인아를 뒤로하고 떠났다.인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인아는 추위를 느끼게 되었다.인아는 옆에 있던 계단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서영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인아는 그 메시지를 보았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시간이 천천히 흘렀고, 두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인아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택시를 잡아 장옥순이 살았던 쓰레기장으로 향했다.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인아는 허름한 오두막에 들어가 그 안에 놓여 있는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더러워진 침대 시트를 만지작거렸다.이 큰 도시에서 어떻게 임태성 일행을 찾을 수 있을까?인아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이다가 장옥순의 이름을 발견했다. 마침 지난번에 장옥순에게 핸드폰을 사주었던 일이 떠올랐다.서둘러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 연결음이 울리기만 할 뿐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인아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곧 꺼져 있었다.인아는 오두막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장옥순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사실 장옥순은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아니라, 핸드폰을 강가에 던져버렸다. 임태성이 장옥순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하자, 장옥순은 급한 나머지 창문 밖으로 핸드폰을 던져버렸다.임태성은 화가 나서 차를 급정거하고는 강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강물은 이미 빠르게 흐르고 있었고, 핸드폰은 어딘가 떠내려가 사라져버렸다.차로 돌아온 임태성은 장옥순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 “핸드폰을 버린다고 내가 돈을 못 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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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드디어 자리가 생긴 거다

유희도는 인아의 손짓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아는 한참 동안 기다린 후 끝내 고개를 들어 희도의 깊고 어두운 시선과 마주쳤다. 인아는 다시 수화로 같은 질문을 하려 했지만, 희도가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잡았다. 희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말 잊었어?”인아는 속눈썹을 떨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힘없이 손을 내렸다. 희도는 인아한테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었다. 희도는 한숨을 쉬며 인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마. 집에 우리 둘만 있으니 아무도 우릴 방해하지 않고 좋잖아?” 인아는 그의 손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희도는 눈빛을 번뜩이며 강제로 인아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안 그래?” 희도가 다시 물었다. 인아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리워하던 희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인아는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인아의 목에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걸린 것 같았다. 희도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인아를 이 집 안에 개처럼 묶어두었다. 친구도, 자유도,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희도는 인아의 턱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대답을 반드시 들으려는 듯 집요하게 물었다. 인아는 마지못해 그를 바라봤지만,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인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내가 너한테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다른 사람이 필요한 거야?” 희도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인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인아는 희도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쳤다. 그러나 희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억지로 입을 맞췄다. 인아는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희도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그가 인아의 입술을 깨물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키스가 아니라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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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너무 욕심부리면 벌을 받게 될 거야

인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연서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연서가 화가 난 것은 단순히 그 자리에 인아가 앉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회사를 떠나자마자, 인아가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인아는 가만히 연서를 쳐다보며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연서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살펴보더니, 인아를 쏘아보고는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 소동은 곧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서는 회사 내에서 문제아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비록 연서는 하는 일이 없었지만, 희도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다들 어쩔 수 없었다.연서는 더 이상 인아한테 따지지 않고 바로 희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희도를 노려보았다. “유희도, 이게 무슨 뜻이야!” 희도는 서류를 보고 있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연서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연서는 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벙어리 말이야! 왜 회사에 있는 거야? 내가 회사를 떠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내 자리에 저 벙어리를 앉혀놓은 거야? 도대체 왜 그런 거야?” 희도는 연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연서는 압박감을 느꼈다. 인아는 분명 희도의 아내였다. 연서는 자신이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마치 자신의 주제를 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연서는 참을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벙어리여야만 했을까? ‘일부러 날 화나게 하려는 걸까?’“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너는 배우 활동이나 잘해. 회사에서 나갔으니 더 이상 회사의 일에는 신경 쓰지 마.” 희도의 말에 연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억울함이 밀려와 눈물이 나려 했지만, 연서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나는 저 여자가 네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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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물건 주워

“회의하러 가는 거야?” 연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희도는 짧게 대답하며, 회의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가 떠나자마자, 연서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도착해 CCTV가 없는 구역에 다다르자 고개를 돌려 인아를 보았다. 인아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고, 시야가 거의 가려진 상태였다. 연서는 비웃듯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발을 내밀어 인아의 발에 걸었다. 인아는 그 발에 걸려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고, 그녀가 들고 있던 상자는 그대로 날아갔다. 상자 속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지고 말았다.인아는 바닥에 엎어진 채, 손목과 무릎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어머, 참 덤벙대시네. 어쩌다가 넘어지신 거예요!” 연서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비꼬았다. “제 물건 다 망가뜨렸잖아요.” 인아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 겨우 일어섰다. 그녀는 연서를 잠시 쳐다보았고, 연서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뭘 보고 있어요? 물건 줍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인아는 주먹을 꽉 쥐고 연서를 노려보았다. 연서의 그 뻔뻔한 표정을 보자, 그녀와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누군가 인아의 물건을 부딪쳐 떨어뜨렸을 때, 연서는 다가와 물건을 주워주며 인아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때 인아는 너무도 순진해서 자신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믿었었다.하지만 지금의 연서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연서는 인아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자 차갑게 말했다. “벙어리라 말을 못하더니, 귀까지 먹은 거야? 내 물건 주워.” 인아는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돌아서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연서는 그녀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연서는 인아의 팔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어디 가! 누가 가라고 했어?” 인아는 팔을 빼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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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보호자는 없나요?

인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손등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배의 통증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아는 링거병을 올려다보았다. 링거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호출 벨을 눌렀다. 몇 분 후, 젊은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링거를 교체한 뒤 인아를 보며 물었다. “좀 괜찮아지셨나요?” 인아는 의사를 잠시 쳐다보다가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글을 입력했다. [선생님, 어떻게 된 거죠?]의사는 글을 보고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익숙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의 첫 반응은 늘 한결 같았다. 인아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환자분께서 기절하셨어요. 링거가 끝나면 주치의한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시죠.” 그제야 인아는 그가 인턴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침대에 누워 링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구석에는 한 노인이 누워 있었는데, 그도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말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있는 병실은 더 적막하고 쓸쓸했다. 인아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인아는 핸드폰을 끄고, 병실 구석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곧장 할아버지의 침대로 다가가, 익숙하게 대야와 수건을 꺼내 할아버지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몸을 닦아준 후, 할아버지에게 밥을 먹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도 손자가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들이 돈을 얼마나 보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화제가 점점 바뀌며 불만 섞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혼 후 복을 누리지 못했고, 늙어서까지 남편을 돌봐야 한다는 하소연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눈동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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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이혼하고 싶으시잖아요

인아는 잠시 임태성을 쳐다본 후 핸드폰을 꺼내 타자를 했다. “제가 돈을 드리면 할머니를 다시 돌려보내 주실 거죠?” 임태성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어머니를 돌봐줄 사람도 생기고, 제 부담도 줄어드니까요. 사모님과 우리 어머니는 사이가 좋으시잖아요? 그러니 조금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인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타자를 했다. “할머니를 모셔오시면 돈을 드릴게요.” 임태성의 미소가 사라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곧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데, 우선 돈을 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인아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장옥순이 말했던 대로, 임태성은 끝없는 구멍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 돈을 주더라도, 그는 장옥순을 데려오지 않고 계속해서 인아를 협박하며 돈을 요구할 게 분명했다. “할머니를 모셔오시면 돈을 드리죠.” 임태성은 눈에 띄게 화가 났다. 그는 처음부터 1억으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유씨 가문이 엄청난 부자이기에, 1억으로 끝내는 건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적어도 10억은 받아낼 생각이었다.“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10억을 주신다면 바로 어머니를 데려올게요.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이 거래는 없었던 일로 하죠.”인아는 순간 멍하니 임태성을 쳐다보았다. 인아는 그가 이렇게 큰 금액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임태성은 인아의 반응을 보고, 인아가 10억을 당장 구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시간을 얼마 정도 드리면 되죠? 돈이 준비되면 바로 어머니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죠.” 인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1억조차 친구인 서영에게서 빌렸는데, 10억은 어디서 구해야 한다는 말인가. 임태성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5일이면 되죠? 그럼 5일 후 다시 올게요.” [그렇게 많은 돈은 절대 못 구해요.] 임태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굴 속이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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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뜨거운 시선

상대방의 카카오톡 프로필 이름은 ‘N’이었고, 프로필 사진은 검은 슈트였다. 인아는 상대방의 프로필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상대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소송 의뢰하시려는 건가요?] 굳이 프로필을 더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이 사람은 변호사였다. 인아가 바로 답장을 하지 않자, N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아마 누군가의 추천으로 연락하신 거겠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시죠.] 상대의 친절한 말투에 인아는 조금 망설였다. 상대의 열정적인 모습에 인아는 그가 실력 있는 변호사가 맞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인아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제 이름은 양세형입니다. 양 변호사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인아는 그의 이름을 ‘양 변호사'로 저장한 뒤, 다시 메시지를 보내려 했으나,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아는 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문 쪽을 바라보니, 희도가 들어오고 있었다. 인아는 긴장한 채 소파에서 일어나, 희도를 주시했다. 그는 외투를 벗어 아무렇지 않게 소파 위에 던졌다. “오늘 병원에 왜 갔어?” 희도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추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인 후, 인아는 감기라고 답했다. “감기?” 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명함을 보았다. 인아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명함을 재빨리 치우고 싶었지만 희도가 먼저 명함을 집어 들었다. 희도는 명함을 꼼꼼히 살펴본 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인아를 쳐다보았다. 인아는 긴장감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 ‘설마 눈치챈 걸까?’ 다행히 희도는 별다른 말없이 명함을 다시 테이블 위에 던졌다. “감기 걸렸으면 푹 쉬어. 일찍 자.” 희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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