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결혼의 끝, 다시 시작된 사랑: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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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그대 마음에 닿기를

신지수의 시점이번엔 그가 내 말을 제대로 들었다."당신이 나한테 청혼했었잖아."나는 다시 손을 들었고, 이번엔 손이 닿기 전에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이제 그만 좀 해, 신지수!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그 거래 말이야…"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목구멍이 마치 칼로 베이는 듯 아파 왔다."다솔에게 필요한 피와 골수, 뭐든 다 주는 대신에… 당신을 수년 동안 혼자 좋아했던 내게 당신의 마음을 얻을 기회를 준다고 했었잖아.""그 제안을 먼저 한 건 너라고, 윤지후. 기억 안 나?"드디어 말하고 말았다. 눈물이 쏟아졌고 내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라고."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나는...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걸 이용했지. 그냥 서류 상의 결혼이라는 미끼를 던지고도 내가 내 몫을 다할 거라는 걸 확신했잖아."나는 힘 없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도대체 누가 누굴 장난감처럼 대한 거지?"화가 날 줄 알았다. 근데 막상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 가벼워졌다."나는... 다솔을 사랑했어...""그래서 내가 허락했잖아. 좋진 않았지만 받아들였다고. 근데 내가 그 사실 때문에 당신이 다솔과 보내고 싶어 했던 시간을 단 1초라도 줄여달라고 한 적 있어?"나는 울고 있었고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내가 요구한 건 단 하나야. 당신의 마음을 얻을 기회. 그리고 지난 5년간 난 미친 사람처럼 당신만을 사랑했어. 그런데 당신은 그걸로 날 괴롭혔고, 다솔과 바람을 피웠고, 거래의 대가를 받으면서도 양심의 가책도 없었어.""...미안해."그는 내 눈도 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내가 사과 받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고!"나는 그의 죄책감 어린 얼굴을 노려보았다.그게 더 나를 화나게 했다. 지난 5년 동안 그 눈빛,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나? 최소한 노력하는 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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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오래된 컵받침

신지수의 시점누가 그랬다더라. 뒷말은 비겁한 것이지만 언제나 고상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나는 고상한 척 참았고, 결국 다시 돌아온 건 굴욕과 상처,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들은 ‘고마워’ 한 마디였다.뒷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그렇게 하고 나니 정말 속이 후련했다.지후에게 쏟아낸 그날 밤 이후, 내 인생에 새로운 빛이 들어왔다. 더 이상 매 순간 가슴이 저릿저릿 아프지도 않았고, 이제는 ‘진짜’ 내 인생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혼 서류에 사인할 때만 하더라도 나도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확실해졌다. 난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처음엔 이혼하고 나면 지후가 다솔과 함께 있는 모습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릴 줄 알았다. 마음이 무뎌질 때까지 아플 줄 알았다.하지만 의외였다. 필요했던 건 단지 입을 열어 내 감정을 말하고, 끝내는 거였다.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끝’ 이라는 건가 보다."지수 씨?"정 코퍼레이션 본사 리셉션 직원이 알랑거리는 미소로 다가왔다."대표님께서 뵙자시네요. 이쪽으로 오시죠."나는 절대 필요하지 않으면 성까지 쓰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건 신강훈이 주먹으로 가르쳐준 교훈 중 하나였다. 그게 더 나았다."네, 감사합니다."손에 쥔 서류 뭉치를 꼭 쥐고, 그녀를 따르기 전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심장이 요동쳤다.그 날 밤, 그 지옥 같았던 밤 바로 다음 날 정기준의 답장이 도착했다.[흥미롭네요. 제 사무실이 어디 있는지는 아시죠?]거절당할 걸 각오하고 준비해 둔 긴 연설도 있었는데, 이렇게 단호한 수락이 올 줄은 몰랐다. 오히려 준비가 안된 건 내 쪽이었다.며칠 동안 대본을 다시 손보고, 진짜 준비가 됐는지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올 수 있었다.이 일, 나한텐 꼭 필요했다.정 코퍼레이션은 미디어 업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 중 하나다.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 빌딩은 높고 무미건조하며, 마치 지난 세기의 조심스러운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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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마음에 남는 이야기

신지수의 시점"죄송해요!"나는 그의 책상에서 시선을 떼며 순간 말해버렸고, 긴장감은 더 커졌다."그게... 그러니까..."귀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런 상황에 정말 약했다. 글로 사람을 상대하는 건 괜찮았지만 실제 사람, 특히 이런 사업가를 상대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진정해요, 그냥 농담한 거예요."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거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요."그 말엔 어딘가 묘한 속뜻이 느껴졌지만 굳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앞선 말에만 답하기로 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는 길은 생각보다 괜찮았어요."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는 가볍게 눈썹을 올렸고,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그래서 일부러 지하철을 탔어요. 운전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요."그가 웃었다.고등학교 시절, 그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아'로 통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따뜻하고 유쾌한 웃음을 보는 게 좀 낯설었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리긴 했다."안 오는 줄 알았어요."그가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나는 자리에 앉았고,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Z 하우스’ 쪽에선 아직 아무 소식 없던데요?"지후의 건물은 독특한 Z자 구조 덕분에 그렇게 불린다."네..."나는 예상했던 질문이라 어색하게 웃었다."아직은 표준 절차들이 남아 있긴 한데... 확실한 특종 하나는 보장해 드릴 수 있어요. 그걸로도 괜찮을까요?"결국 내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혼’이라는 단 하나의 뉴스 덕분이었다. 그가 나를 여기서 만나주는 건 내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난 이 업계에서 아무런 이름도, 경험도 없었다.‘윤지후의 전부인’이라는 타이틀 없이는 기획안조차 펼쳐볼 기회도 못 얻었을 테니까.하지만 빌어먹을 윤지후는 아직도 서류를 보내지 않았다! 내가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었다.‘2~3일’이라더니, 벌써 그 두 번의 기한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혹시 내가 정기준에게 문자를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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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예비 보스

신지수의 시점미팅을 끝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두 시간이나 쉬지 않고 떠들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했다. 충격적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선 채로 나는 얼굴을 감쌌다.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정기준은 내 말을 들으며 격려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중간 간단한 질문도 던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거다.그런데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내 작은 영화 하나 때문에 저 엄청난 사업가의 오전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리다니.그 순간, 나는 차마 정기준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여우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표정으로."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나는 아이패드를 급히 챙기며 문 쪽을 가리켰다."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그 '여우'는 웃음을 터뜨렸다."내 결정을 들을 시간도 없어요?"정기준이 얇은 테의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당신이 단지 열정 넘치는 수다를 떨러 왔다 해도 싫지 않았을 텐데요."“...”아, 맞다. 이 미팅의 목적이 있었지.그는 그 후에도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나에게 그의 제안이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진짜 된 거야? 내 각본이...? 미디어 업계 거물 중 하나한테... 진짜 팔린 거야?!오늘 하루가 완벽했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거울 보며 혼자 히죽대는 거 끝났으면 이제 다른 사람들 시간 좀 아껴줄래?"신다솔.매니저와 경호팀을 대동한 채, 다솔이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오만한 자세와 짜증 섞인 말투와 함께."네가 왜 여기 있어?"나는 짜증보다 충격이 먼저 올라와 그렇게 말해버렸다.다솔은 지후에게 소속된 연예인. 정 코퍼레이션과는 거의 적대 관계인 셈이다. 게다가 지금 이 방문은 개인적인 일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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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그가 건넨 초대

신지수의 시점“정 대표님, 정말 죄송해요!”지후의 도발적인 말에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진 채, 나는 정기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급히 사과했다.얘네 원래 이런 식으로 말했었나?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나 때문이라는 사실보다는 나았다.“왜 대신 사과하는 거예요?”정기준은 규칙 따위는 아예 무시한 듯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이봐, 깜빡했나 본데, 내 아내야!”지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말이 튀어나오는 속도는 마치 이 말을 하기 위해 숨을 참고 있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아니라고!”나는 그를 향해 쏘아붙인 뒤, 한숨을 깊게 내쉬고 다시 정기준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어쨌든, 제가 뭔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정말 죄송해요.”“사과하실 필요 없어요.”정기준의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그의 시선은 지후에게 향해 있었지만 말은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난 두 분을 이미 부부라고 보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저 사람이 한 짓까지 당신 책임으로 볼 이유는 없죠.”지후는 당장이라도 정기준을 땅에 묻어버리고 싶은 표정이었다.그는 아주 큰 인내심으로 겨우 시선을 정기준에게서 떼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결혼했을 땐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내가 이혼을 원하고 나서부터는 그게 그의 단골 대사가 되어버렸다.참 아이러니하지.“무슨 얘기?”나는 팔짱을 낀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뭔가 원하는 게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기다렸던 이혼 서류를 보내지 않은 것일 테다.그게 뭐든, 이번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다. 만약 여전히 다솔과 결혼하고 싶은 거라면 이번엔 지후가 무릎을 꿇어야 할 차례였다.“신지수!”지후가 신경질적으로 나를 불렀다. 정기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지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게 놀란 눈치로 시선을 돌렸다.“왜?”나는 찡그리며 물었다.“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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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연애 쇼타임

신지수의 시점사실... 가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이 결혼을 원한 건 나였고, 끝내려고 한 것도 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 자체에 제대로 들어온 적이 없던 그를 내가 떠난 것이었다.하지만 할머니에게는 빚이 있었다. 할머니는 정말 날 이해하려 애썼고, 한때는 나에게 화를 내기도 하셨지만 결국엔 날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셨다. 한결같이 공정하게 대해 주시던 그런 분을 난 또 다시 실망시키고 있었다.이혼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지후가 할머니 생신 파티 전에는 절대 이혼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서명을 미룬 거겠지. 할머니는 정말로 우리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왜 이렇게 침울해?”한설아가 장난스럽게 내 얼굴을 툭 건드렸다.“생일 파티 가는 사람 얼굴이 아니라 무슨 사형 집행 가는 표정이야.”음… 맞는 말이다. 지후가 있을 거고, 아마도 신다솔도. 그리고 신강훈도.죽음과 차이가 있다면, 죽음은 고통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같이 와줘서 고마워, 설아.”나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나는 택시를 정말 싫어한다. 특히 이 도시에서는. 운전도 험하고, 매번 멀미로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임신한 후엔 그게 더 심해졌다. 배 속 아기도 멀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택시 타게 해서 미안해, 지수…”설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눈을 감고 기대도록 해줬다.“빨간불 무시한 저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직접 태워줬을 텐데...”전직 레이서였던 설아는 운전에 있어선 완벽에 가까웠고, 그녀가 운전할 땐 유일하게 멀미가 없었다. 최근에 작은 사고로 범퍼가 찌그러져 운전을 못 하고 있을 뿐이다.“괜찮아...”나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걱정되는 건 이동 수단이 아니라, 도착지니까.파티는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다. 손님 리스트부터 할머니가 좋아하는 케이터링까지, 모두 내가 준비했다.저녁 7시에 도착했을 땐 호텔 앞 광장이 사람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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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재앙

신지수의 시점다솔은 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물론, 그녀의 군대는 그녀에게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니까.그들 앞에서는 본색을 숨기지도 않고, 그들 역시 감히 뭐라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설아와 연수는 내가 다솔과 사이가 안 좋은 걸 제대로 몰랐던 거다.“괜찮아, 고마워.”지금 내 컨디션은 엉망이었지만, 다솔과 차를 타는 것보단 한 시간을 걷는 게 차라리 나았다. 나는 그녀의 연극 같은 행동이 싫었다.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다정한 척하는 그 연기를 대체 왜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가 날 어떻게 대하는지 신경 쓰지 않을 테고, 나 역시 절대 속지 않는다. 관객도 없는 쇼를 왜 저렇게 진심인 척하는 걸까?차가 멈추고, 지후가 운전석에서 내려 차 너머로 나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한다.“타.”나는 눈을 굴리며 돌아서서 걸었다. 난 더 이상 그를 따라다니던 멍청한 개가 아니었고, 그가 명령한다고 해서 따를 사람도 아니었다.“신지수.”그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성을 넣어서. 그건 그가 진심으로 화났다는 신호다.‘지금부터 진지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는 뜻.나는 그에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보내고 걸음을 더 빠르게 옮겼다.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 중 하나를 건드려봤자 내 인생이 더 편해질 리는 없지만 정기준이 내 편이 된 이상, 지후가 내 커리어를 망치진 못할 거다.“지수, 천천히 좀 걸어.”설아가 따라붙어 내 팔을 잡았다.“몸도 안 좋은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굴 필요 없어. 그게 바로 다솔이 원하는 거잖아.”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설아가 다솔에게 이렇게까지 불편한 감정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그도 그럴 게, 다솔은 설아 앞에선 한 번도 본색을 드러낸 적 없었고, 설아는 늘 사람들의 좋은 면을 먼저 보는 사람이니까.“네가 그동안 다솔한테 얼마나 많이 해줬는지 이제야 알겠어.”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저런 행동만으로도 좋은 언니라고 할 수 없지.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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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뼛속까지 중독됐다

신지수의 시점“지수, 무슨 일이야?”설아가 찡그리며 묻는다. 그러다 뭔가 눈치챈 듯, 그녀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려한 호텔을 바라보며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오늘 파티가... 뭐였더라...?”그리고 그녀는 숨을 들이쉰다.“그래...”내 머리는 얼어붙었고, 내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경찰차 한 대가 도착하는 걸 보았다.그리고 연수가 내렸다.“여기가 맞다고? 우리 같은 사람이 올 곳 같진 않은데?”연수 뒤를 따라 경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아!”“지수!”연수가 나를 와락 껴안으며 외치고는, 경민을 돌아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봐, 내가 주소 제대로 찾았지?”경민은 고개를 내밀며 나와 설아를 향해 말했다.“얘 떠넘겨서 미안해. 지금 사건 처리 중이라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괜찮아요, 우리가 데려갈게요.”설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궜다. 이제 와서 연수 보고 돌아가라고 할 순 없었다. 그건 무례를 넘어 굴욕이었다. 여기가 상류층 파티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에 못지않게 잔인했다.그리고 연수는 청바지를 입고 왔다. 아주 멋지게.설아와 나는 눈빛을 교환하며 당황했다. 차를 타고 왔으면 예비 드레스라도 챙겨왔을 텐데,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연수는 우리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였다.“왜... 뭐야?”“이건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할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다솔이 입술을 내밀며 연수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 찡그렸다. 마치 눈물이라도 떨어질 듯한 얼굴이었다.정말 다솔의 연기력은 인정해야겠다. 지후가 그녀를 도우는 게 순전히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할머니는 예전에 다솔을 집에서 내쫓은 적이 있다는 말을 나에게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천박한 분이 아니시니까. 하지만 다솔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다솔을 할머니 생신 파티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다솔은 지후의 동반자 자격으로 파티에 나타났고, 할머니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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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그의 조건

신지수의 시점진심으로, 가방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 연수와 나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할머니께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 둘의 전쟁이 오늘 같은 날을 망쳐서는 안 되니까.결국 우리는 지후와 다솔이 승리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다솔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연수를 공격했지만,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연수가 청바지를 입고 저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그건 분명 할머니를 속상하게 할 것이다. 드레스만 구할 수 있다면, 파티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할머니가 연수를 못 알아보실 수도 있으니까.“괜찮아, 근처 바에 가서 기다릴게.”나와 설아의 어색한 설명을 들은 연수는 다정한 미소로 우리를 안아줬다.“진짜 괜찮아.”“이건 그냥…”나는 뭔가 더 설명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설아에게 이 파티에 대해 말했더라면... 처음부터 지후와 다솔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나 이런 분위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해해.”연수는 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정말로 상처받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잘 숨기는 건지 모르겠다.“나…”“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낯선 목소리가 입구 구석에서 들려왔고, 우리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낯선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몰래 듣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조차 일부러 과장된 행동으로 보였고 얼굴엔 진짜 같은 미소가 번져 있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그게... 그냥...”나는 연수를 흘끗 쳐다봤다.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다.“드레스 하나로 상황이 나아진다면…”그는 한 손을 등 뒤로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이 숙녀에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대체 누구지, 이 사람?더럽게 멋진 흑색 머리는 손가락 길이 정도로 헝클어져 있지만, 묘하게 세련돼 보였다. 반면 그의 환한 미소와 맑은 눈빛은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급 슈트를 입었지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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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편애하는 사람

윤지후의 시점할머니의 생신은 우리 결혼 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그건 분명하다.잠깐이지만, 예전의 지수를 다시 본 것 같았다. 내 손바닥 사이로 느껴졌던 그녀의 부드러운 몸, 다시 마주한 그 생기 넘치는 눈빛.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예전엔 모든 걸 나한테 이야기했었다. 창밖에 이상한 모양의 구름이 떠 있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고, 거기에 웃는 이모티콘도 붙여 보내던 여자. 그런데 지금은 말하는 모든 게 빌어먹을 이혼 얘기뿐이다. 나는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걸 잃게 된다. 주식, 회사 이미지, 그리고 할머니의 분노. 지수가 누군가의 생명을 협박해 억지로 이 결혼을 성사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할머니가 얼마나 단호했는지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지수가 어떻게 할머니의 마음을 돌려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할머니는 지수를 정말 사랑하신다. 때로는 나보다 더.지수는 계속 다솔을 걸고 넘어지며 내 반응을 떠본다. 이제 내가 다솔과 결혼할 수 있다고. 그걸 보면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그 마음을 꼭꼭 숨겨서 내가 알아볼 수 없게 할 뿐.예전엔 그녀의 사랑 표현에는 늘 달콤한 말과 환한 웃음뿐이었다.그게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난 그녀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게 익숙해졌던 것뿐이었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지수는 가끔은 차갑고, 심술궂고, 냉소적이기도 했지만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내 삶에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나무뿌리처럼 조용히 파고들어 이제 와서 그 뿌리를 뽑아내려 하니 온몸이 아픈 거다.나는, 다솔의 수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전부일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받아들이기도 했었다.하지만 지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 삶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고 지금은 그걸 뽑아내기로 작정한 사람이다.지금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사랑이 아닌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그래,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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