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의 모든 챕터: 챕터 1491 - 챕터 1500

1566 챕터

제1491화

“김단이 슬퍼하겠다고?” 심월의 얼굴에 흐르던 미소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는 그 말을 씹어 삼키듯 중얼거렸고, 눈빛은 순간적으로 깊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애써 억눌러 왔던 뒤틀린 감정이 마치 화산 속 용암처럼 숙희의 순수하고 직설적인 한마디에 폭발하고 말았다.“왜?” 심월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분노가 뒤섞인 외침이 텅 빈 사당을 뒤흔들어 천장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왜 너희는 전부 그 모양이지? 영칠도 그랬지, 너도 그렇고. 왜 모두가 김단을 위해서라면 뭐든 내주나? 그녀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하나? 가진 걸 모조리 바쳐? 김단, 대체 무슨 마력이 있길래?”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오랫동안 스승을 따라다녔다. 혹여 스승이 자신을 둔하다 여기고 재주가 모자라다 여길까 두려워, 눈만 뜨면 의서를 펼쳐 읽었다. 꿈속에서도 약리와 독성을 줄줄 외웠다.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가장 잘해내려 했다. 스승이 자신을 만족스러워한다고 믿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김단이 나타난 걸까.요망서의 혈통이기 때문인가. 얼굴이 요망서와 똑같아서인가.그래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그녀의 마음에는 애초에 약왕곡이 없었다.요망서가 남긴 의서조차 필사하려 들지 않았다.그것은 약왕곡의 것이다.마땅히 약왕곡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었다.심월은 그 생각에 미친 듯이 고개를 쳐들어 허물어진 사당의 지붕 너머 하늘의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스승님, 보이십니까. 약왕곡을 마음에 품은 이는 오직 접니다. 김단은 약왕곡의 그 모든 것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런 자가 어찌 약왕곡의 주인 자리에 앉습니까. 자격이 있습니까.”숙희는 그의 돌연한 광분에 온몸이 덜컥 떨려 단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거대한 두려움에 숨이 막히다시피 했으나, 김단을 모욕하는 말을 듣자 알 수 없는 용기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가까스로 버티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우리 아씨께서 무엇으로 당신을 거슬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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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2화

숙희는 심월의 눈에 어른거리는 광기에 가까운 확신을 보고 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는 이 광인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좋다. 나도 모른다. 그리고 더는 미친 자와 말섞고 싶지 않다. 영칠을 내놓으시오. 분명 약조했지 않습니까. 그를 볼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체 그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심월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끝내 시선을 거두지 않는 숙희의 눈을 바라보며, 얼굴의 광기 어린 빛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거두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깊숙이 한 번 바라본 뒤, 말없이 돌아서서 허물지고 얼룩진 데다 거미줄이 겹겹이 감긴 사당 안쪽의 불상으로 걸음을 옮겼다.숙희는 심장이 목까지 치밀었다. 단검을 더욱 움켜쥐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했다.심월이 불상 받침의 눈에 띄지 않는 오목한 곳을 힘주어 눌렀다.“딸깍… 끼익…”이가 시릴 듯 둔탁한 장치음이 울렸다. 숙희가 경악해 바라보는 사이, 거대한 불상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 나갔다. 받침 아래에서는 검은 구멍이 아래로 이어진 입구를 드러냈다. 그 입구는 심연처럼 깊어 거대한 짐승이 탐욕스레 벌린 아가리 같았고, 남아 있던 미약한 빛마저 삼켜 오로지 오싹한 어둠만 남겼다.“영칠은 바로 아래에 있다.”심월의 목소리는 다시 얼음처럼 가라앉아 미동도 없었다. 그는 몸을 비켜 입구를 터 주고 창백해진 숙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만 잘 생각하라. 네가 내려가면 나는 곧바로 출구를 닫을 것이다.”그의 입꼬리가 잔혹하게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때가 되면 너는 네 영칠과 함께 영영 이 지하에 남게 된다. 벗이 되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응?”영원히 지하에 남는다는 말이 얼음 송곳처럼 숙희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거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그녀를 붙잡아 사지 끝이 싸늘해지고, 몸이 주저앉을 듯 힘이 빠졌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물러서 어둠이 끝없이 내려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스스로가 영원한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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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3화

뒤에서 들려온 묵직히 닫히는 소리가 장송의 종처럼 울려 퍼지며 숙희의 고막을 윙 하고 때렸다. 심장도 차가운 손아귀에 거세게 죄어들었다.당황하지 말자. 흔들리면 안 된다. 영칠은 아래에 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마지막 지푸라기를 붙잡듯 숨을 골랐다.손끝으로 벽을 더듬어 확인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지극히 느린 속도로 아래로 이어지는 비좁고 가파른 석계단을 내려갔다. 발밑은 축축해 미끄러웠고 석벽은 살을 에듯 차가웠다.어둠 속에서는 모든 소리가 부풀어 올랐다. 거칠어진 숨소리, 주체되지 않는 심장 소리,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려 신경을 짓눌렀다.얼마나 내려왔는지 알 수 없을 때쯤, 앞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돌계단이 끝나고 발밑이 비교적 평평해졌다. 앞에서 매우 희미한 노란빛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숙희는 그 빛을 따라 여기가 그리 크지 않은 석실임을 간신히 알아차렸다.가슴이 금세라도 튀어나올 듯 뛰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미약한 불빛을 향해 눈을 모았다.석실 한가운데에는 허술한 돌탁자 하나와, 돌을 쌓아 만든 낮은 침상 하나뿐이었다.그 침상 위에, 과연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영칠 도령.”숙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달려갔다. 작디작은 석실에 목소리가 메아리쳤다.탁자 위에는 초 한 자루가 켜져 있었고, 흔들리는 불빛이 영칠의 얼굴을 드러냈다.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으며,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가슴께에는 미약한 오르내림이 있었다.목에는 깨끗한 천이 한 겹 감겨 있었고, 그 아래로 어둑한 혈흔이 배어 나왔지만 매듭은 비교적 반듯하게 매어져 있었다.영칠은 아직 살아 있었다.숙희는 붙들어 매었던 심장이 절반쯤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돌탁자 위에는 기름종이에 정갈히 싼 꾸러미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안에는 마른 식량과 육포가 들어 있는 듯했다. 곁에는 수통 하나와 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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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4화

영칠은 눈물이 그렁한 숙희의 눈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로 다 못할 복잡한 감정이 거대한 물결처럼 가슴을 덮쳤다.그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사람을 위해, 누군가가 이토록 노골적인 함정 속으로 기꺼이 발을 들일 줄은.그는 그녀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이를 보듯한 눈길이었으나, 그 속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흔들림이 스며 있었다.“너…” 영칠의 목이 잠시 메었다가, 길게 한숨 섞인 꾸지람으로 번졌다. “왜 그리 바보요.”숙희는 허겁지겁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제가 왜 바보입니까. 도령이 어디 계신지 알면서도 구하러 오지 말라는 말씀이세요?”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영칠 도령, 도령을 잡아 온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영칠은 눈을 지그시 감아 요동치는 마음을 누르고 말했다. “그 자는 심월이오. 아씨의 사형이오, 전임 약왕곡의 주인 심묵의 제자요.”숙희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도령을 가둔 겁니까?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영칠은 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돌탁자 위의 먹을거리에 내려앉고, 미간이 더 깊이 찌푸러졌다.원래 그는 심월이 자신을 베어 버릴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때 뻗어 온 장검이 목살을 스치듯 가르고서는 그대로 멈추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 밀실이었다.그와 심월은 함께 약왕곡으로 들어와 한곳에서 자랐다. 그 정이 결국 그의 손을 거두게 했을 것이다.숙희를 이곳까지 데려오게 한 것 또한, 어쩌면 나를 돌보려는 뜻이었을지 모른다.숙희가 말을 마치자 영칠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훌쩍 코를 들이마시며 말했다.“그가 무엇을 노리든, 영칠 도령, 우리는 어떻게든 나갈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반드시 아씨께 알려야 합니다.”영칠은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보았으나, 뼛속까지 스며든 무력감에 허리를 곧추세우는 일조차 되지 않았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식은땀이 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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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5화

계단 어귀에 다다르니, 의관의 대청 한가운데서 우달이 약동 서넛에게 가로막혀 있었다.김단을 보자 우달이 급히 외쳤다.“김 낭자, 소 장군께서 사경에 이르셨소.”김단이 입을 떼기도 전에 손 장로의 목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사경이면 사경대로 두시오!”희끗한 수염이 성이 받아 치켜오를 지경이었다. 그는 김단 앞을 가로막고 차갑게 말했다.“약왕곡의 주인께서는 잊지 마십시오. 지난번 소한의 일격에 거의 염라 앞까지 가실 뻔하셨습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어찌 또 몸을 던지시겠습니까.”만에 하나 소한이 다시 칼을 겨눈다면 어찌한단 말인가.김단이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막 말을 꺼내려는 찰나, 바깥에서 최지습이 급히 들어왔다.“내가 함께 가겠소.”짧은 한마디였으나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손 장로와 김단을 묵직한 눈길로 바라보았고, 그 말투에는 묘한 안심이 깃들어 있었다.“손 장로는 염려 마시오. 단이에게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소.”손 장로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김단을 바라보았다. 더 막을 수 없음을 알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약왕곡의 주인께서는 부디 조심하십시오. 무엇보다 주인님의 생명이 급선무이십니다.”이에 김단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예, 명심하겠습니다.”둘째 황자의 마차가 의관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둘째 황자 관저에 도착했다.넓은 침상 위에 소한은 두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낯빛은 누렇게 질렸고 입술에는 흉한 검푸른 기운이 돌았다. 가슴의 오르내림은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미약했으며, 콩알만 한 땀방울이 이마에서 끊임없이 배어 나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때때로 몸이 자신도 모르게 미세하게 경련하며 큰 고통을 견디는 듯 떨렸다.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성큼 다가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소한의 차고 축축한 손목맥에 올렸다.맥은 가라앉고 탁하며 어지러웠다.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사정없이 휘저어 끌어당기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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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6화

고서에 따르면 금맥술은 독을 주로 하고 침술을 보조로 삼아 인체의 몇몇 요혈을 봉하는 법이라 하여, 천기금쇄라 부르기도 한다.이를 풀려면 정해진 차례로 침을 놓아 막힌 혈을 열거나, 소한의 체내 독을 해소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어긋나도 즉시 금맥술이 폭주한다. 그때는 금맥술에 비틀린 광폭한 내력이 소한의 몸속을 마구 휘몰아, 본디도 위태로운 경맥을 한순간에 갈가리 찢을 것이다. 결국은 경맥이 토막나고 역혈이 심장을 치며 즉사할 따름이다.김단은 손을 거두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고, 등줄기는 이미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흐트러진 맥상과 금맥술이 되돌려 주는 미세한 반응들 속에서 해법의 올바른 순서를 짜내려 애썼다.하지만 그때, 문가에서 비릿한 농과 냉기가 섞인 목소리가 느닷없이 울렸다.“김단, 막히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 천기금쇄, 쉽지 않지요.”김단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한 박자 멎을 뻔했다.어느새 심월이 소리 없이 문에 기대 서 있었다. 달빛 같은 옅은 빛의 장의를 걸친 채, 입가에는 속을 서늘하게 하는 웃음이 맴돌았고 눈빛은 독사처럼 침상 곁의 김단과 최지습을 옭아맸다.“사형.”오늘에 이르러도 김단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부름은 여전히 그 한마디였다.심월의 낯빛이 잠시 굳더니, 약왕곡에서의 지난날이 스친 듯한 기색은 이내 사라졌다. 그는 느긋이 소매 속에서 한 치 남짓한 청옥 작은 병을 꺼냈다. 그 병은 온통 맑아 속이 비쳤고, 먹처럼 끈적이나 기묘한 그윽한 청람빛을 띠는 액체가 그 안에서 은은히 빛났다.“어찌 되었든 저는 사매의 사형입니다. 사매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시지요.”심월의 웃음은 더 커졌으나 온기라곤 없었다. 그는 청옥병을 가볍게 김단 쪽으로 던졌다. “이것이 독우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독을 들이키면 피만 보아도 곧장 숨통이 막혀 신선도 구하지 못합니다.”그러고는 그의 시선이 최지습에게로 옮겨갔다. “대군자께서 이 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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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7화

“스승의 가르침입니까?”심월의 미소는 마치 급소를 찔린 듯 순간 사라졌고, 그 자리를 광기에 가까운 원한과 집착이 뒤덮었다. 그는 성큼 한 걸음 내디디며 목소리를 높였다. 날카롭고 귀를 에는 듯한 목소리였다.“저도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저는 언제까지나 가장 걸출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사매를 만난 뒤로 그의 눈에도 마음에도 저는 없었습니다.”“그는 약왕곡의 주인 자리마저 사매께 주었습니다. 저는 그의 곁에서 이십 년 넘게 공을 들였건만, 그와 함께한 지 반 년도 안 된 어린 낭자인 사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사매께 백독불침의 체질을 친히 길러 주었습니다. 저는 그를 그토록 오래 모셨건만 끝내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가소롭군요. 실로 우습습니다.”그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고, 눈 속에는 시샘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제게 필요한 것은 사매의 시혜가 아닙니다. 저는 당당히 사매를 꺾겠습니다. 스승의 눈앞에서, 그가 택한 계승자가 저 심월의 수단 앞에 어떻게 참패하는지 똑똑히 보게 하겠습니다. 누가 참으로 자격과 능력을 갖추어 약왕곡을 거느릴 사람인지 눈을 부릅뜨고 보도록 하겠습니다.”방 안은 죽음 같은 적막에 잠겼다. 들리는 것이라곤 심월의 거친 숨소리와 소한의 미약한 신음뿐이었다.최지습은 내내 말없이 김단의 곁, 반 발 뒤에 서서 매 같은 눈으로 심월의 일거수일투족을 겨누고 있었다. 온몸의 기세가 모여 활시위처럼 팽팽했다.그 독우 한 병은 융단 위에 고요히 누워 죽음의 기운을 내뿜었다.그때 김단은 방금 심월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심묵이 친히 자신에게 백독불침의 체질을 길러 주었다는 그 말이었다.김단은 마침내 떠올렸다. 처음 아홉 번의 단혼산을 삼킨 뒤 장서각으로 옮겨졌을 때, 심월이 심묵이 친수로 달인 독 한 그릇을 들여왔던 일. 그녀는 그것을 마셨다.그 뒤에도 심묵은 장서각에 수없이 많은 향촉을 보내왔다. 향내가 다소 기이했으나, 그때의 그녀는 오로지 아홉 번의 단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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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8화

심월의 얼굴에 떠오르던 오만과 만사를 틀어쥔 듯한 득의는 순식간에 굳어 붙었다. 한겨울의 찬물을 뒤집어쓴 듯했다.그는 눈을 부릅뜨고 김단을 응시했다. 내 피가 곧 자옥정초라는 그 한마디의 뜻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그러나 김단의 지나치게 침착한 기색을 보는 순간, 심월의 머릿속에 어떤 가능성이 번개처럼 스쳤다."말도 안 돼.”심월은 거의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극도의 경악과 불신으로 목소리가 비틀렸다. “가당치 않습니다. 자옥정초가 얼마나 귀한데 사매가 무엇으로 이를 대신하시겠습니까. 천기금쇄의 순서는 저만 압니다. 사매가 무엇으로 푸시겠습니까. 그깟 피로요?”김단은 그의 경악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옅게 입꼬리를 그었다. 그리고 천천히 몇 자리의 혈을 불렀다.“단중, 구미, 거궐, 신궐, 기해. 차례로 역충하고, 천추와 관원으로 맥을 정합니다. 사형, 제가 한 말이 맞습니까.”혈자리 하나하나가 김단의 입술에서 떨어질 때마다, 심월의 가슴속엔 쇳덩이가 내리꽂히는 듯했다.그의 동공이 급격히 죄어들었고, 안색은 경악에서 믿기지 않는 회색빛 참담함으로 바뀌었다.“말이 될 리 없습니다.”심월의 목소리엔 여전히 불신이 서려 있었다. “사매는 제 침을 놓는 것을 보시지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아셨다는 것입니까.”“맥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형.”김단의 목소리에는 의원의 차갑고도 확고한 믿음이 실려 있었다. “소한이 경련할 때마다, 내기가 광폭히 역류하는 매 흐름마다, 금맥술이 건드려질 때의 미세한 막힘과 되튐까지도 그의 맥상에는 또렷이 적혀 있습니다.”벼락을 맞은 듯 심월은 비틀거리며 반 걸음 물러났다.발끝에서부터 서릿바람이 치솟아 정수리까지 파고들었다.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스승이 말하던 천부란 말인가.그러나 무엇으로.내 수십 년 공력이 어찌 그따위 천부 하나만 못하단 말인가.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심월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무엇을 떠올린 듯 이를 갈았다.“설령 요행으로 순서를 맞추셨다 한들 어찌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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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9화

김단은 모든 것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전광석화 같은 찰나에 그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유일한 활로를 찾아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심월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그는 김단을 보며 문득 천부라는 말의 두려움을 깨달은 듯했다.그러나 김단은 더는 그를 보지 않고 돌아서서 침상 곁으로 걸어갔다. 이를 본 최지습이 곧장 한 걸음 나아가 심월과 김단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심월이 훼방 놓지 못하게 해야 했다.하지만 이때의 심월은 방해할 뜻조차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자석에 붙듯 김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김단이 작은 비수를 꺼내 가늘고 희디흰 손목을 스치듯 그었다. 선혈이 뜨겁게 터져 나왔다. 그녀는 미간을 지그시 모아 고통을 억누르며 다른 손으로 소한이 굳게 다문 이를 힘껏 벌렸다.붉디붉은 피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옥액이라도 되는 듯, 천천히 그의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셨다. 미약한 숨결을 따라 입안 가득 번져 들어가더니, 목구멍을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창밖의 새벽빛은 핏기 없이 창백했으나, 결연한 김단의 옆얼굴을 차갑게 비추었다. 그 빛은 눈을 파고든 상처와 뚝뚝 흐르는 선혈을 드러냈고, 무의식 속 소한이 본능처럼 그 구원의 액을 삼켜내는 모습까지도 비추었다.그 광경은 가장 성스럽고 동시에 가장 참혹한 제의와도 같아, 사람의 심장을 거칠게 뒤흔드는 힘으로 심월의 눈동자 깊숙이 사정없이 꽂혀들었다.심월의 가슴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추에 세차게 얻어맞은 듯 요동쳤다. 그는 비틀거리며 거의 서 있지 못했다. 모든 불복, 원한, 질투와 광기가 이 순간, 염천 아래의 눈처럼 급속히 녹아 무너졌다. 알았다. 천부 앞에서는 그가 수년을 공들여 익힌 학문이 참으로 무용지물임을.소한의 얼굴빛이 누그러지는 것을 본 김단은 재빨리 수건을 꺼내 손목의 상처를 단단히 동여매고, 다시 그의 맥을 짚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박동은 여전히 실오라기처럼 가늘었으나, 방금 전 거의 사그라들던 미약함과는 달리 이제는 분명한 기틀이 잡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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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0화

소한의 의식은 혼미한 암흑 속을 부유하다가 문득 희미한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꿰뚫었다. 그는 무겁게 붙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머리 위로 창백해 거의 투명해 보이는 얼굴이 떠 있었다. 흐릿한 윤곽이 그에게 지극히 익숙한 선을 그렸다. 김단이었다.그녀가 그를 구한 것인가.그 생각이 죽은 물에 돌 하나 던진 듯 그의 혼란한 사유에 미약한 물결을 일으켰다. 왜 그를 구했지. 둘은 원수가 아니던가. 그는 심지어 그녀를 찌르기까지 했는데.소한의 눈동자에는 혼미와 번민이 가득했다. 그는 초점을 맞추어 그녀 눈빛에 담긴 기류를 확인하고 묻고자 했으나, 끝없는 어둠이 밀물처럼 다시 덮쳐와 막 싹튼 한 줄기 맑음을 손쉽게 쓸어가 버렸다. 그는 다시금 무의식의 심연으로 끌려 내려갔다.김단은 소한의 눈꺼풀이 몇 차례 떨리다 이내 잠잠해지는 것을 보고, 긴 속눈썹이 눈두덩 아래로 작은 그늘을 드리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 뒤 몸을 곧추세우고, 무심결에 방금 전 심월이 서 있던 방향을 훑어보았다.텅 비어 있었다. 언제 떠난 것일까.김단의 가슴에는 극히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지나간 정에 대한 아쉬움도, 그의 집착에 대한 체념도 있었다. 마침내 모든 감정은 거의 들리지 않는 가벼운 탄식 한 줄기로 바뀌어, 고요한 공기 속에 스러졌다.“단이!”최지습의 목소리가 짙은 근심을 머금고 울렸다. 그는 줄곧 몇 걸음 떨어져 지키고 있다가 성큼 다가와, 비틀거리는 김단의 몸을 단단히 부축하였다. 시선이 그녀의 붕대로 감은 손목을 스치고, 핏기 사라진 얼굴과 이마의 마르지 않은 땀방울에 머무르더니 미간을 잔뜩 좁혔다.“안색이 너무 좋지 않다. 어서 돌아가 쉬어야 해.”김단은 그의 팔에 기대 선 채 애써 안심시키듯 미소를 그었다.“괜찮습니다. 기력이 좀 빠졌을 뿐입니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면 됩니다.”그러나 목소리에는 분명한 쉼과 피로가 배어 있었다.최지습은 그녀가 끝까지 버티려 드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릿했다.“하룻밤 꼬박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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