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Chapter 1621 - Chapter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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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1화

사람들은 너도나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어수선하던 기운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최지습이 둘레를 훑어보며 낮게 말했다.“여긴 외진 곳이오. 그래도 당국 땅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오래 머물 수 없소. 오늘 밤은 쉬어 물과 식수를 보충하고, 내일 새벽 곧장 떠나겠소. 예정대로면 길어야 이틀 안에 국경을 넘을 것이오.”눈앞에 희망이 어른거리자, 모두의 기운이 되살아났다.그러나 다음 날 새벽, 하늘이 막 밝아올 무렵이었다.영칠이 사람들을 깨우며 달려왔다.“우문호가 추병을 이끌고 왔습니다!”머리 위에서 찬물이 끼얹힌 듯, 얼굴들이 하얗게 질렸다.짐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사람들은 허둥지둥 마차에 올라, 국경을 향해 내달렸다.아무도 우문호의 추격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하루 종일 내달린 끝에, 둔탁한 말발굽 소리가 뒤쪽에서 천둥처럼 울려왔다.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자, 먼 들판에서 시커먼 먼지가 물결처럼 밀려왔고, 순식간에 새까만 기병대가 쇠통처럼 빽빽하게 포위를 좁혔다.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엔 당국 둘째 황자의 왕기가 박혀 있었고, 그 선두에서 우문호가 검은 갑옷을 걸친 채 말을 몰고 있었다.얼굴은 얼음처럼 굳었고, 매의 눈빛으로 포위 한가운데의 마차를 꿰뚫어 보았다.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잔혹하고, 이미 손에 넣었다는 미소였다.“최지습. 김단.”그가 낮게 웃었다.“찾느라 애를 좀 먹었소.”손짓이 가볍게 떨어졌다.사방의 궁수들이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해지기 직전의 빛에, 쇠촉들이 죽음의 냉기를 번뜩였다.살기 어린 공기가 퍼지며, 숨이 막힐 듯 눌렀다.김단이 우문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우리 사이에는 깊은 원한이 없습니다. 왜 이토록 저희를 물고 늘어지십니까?”우문호가 코웃음을 쳤다.“기회는 주었소. 당국에 남아 내 사람으로 들어오겠다 하면 살려 두려 했소. 아쉽게도…”“우문호.”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소한이었다.그가 마차에서 내려섰다.굳게 굳은 얼굴로 우문호를 꿰뚫어보았다.“내가 남겠소. 그들을 보내시오.”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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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2화

전령의 한마디에, 우문호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공기가 굳어 붙었다. 남은 건 전령의 거친 호흡뿐이었다.우문호는 안장 위에 곧게 앉아 있었다.몸은 쇳덩이처럼 굳고, 단정한 얼굴의 근육은 뜻대로 따라주지 못한 채 가늘게 떨렸다.치밀어 오르는 격노, 깊이 박힌 울분, 운명에 농락당한 듯한 광폭함이 눈동자 속에서 미친 듯 뒤섞여 끓어올랐다.금세라도 터져 나올 기세였다.베어라.지금 당장 모두 쓸어버려라.명령 한 마디면 된다.화살비가 쏟아지면, 최지습과 김단— 한순간에 차디찬 시체로 변할 것이다.하지만… 임학.군보의 글자 하나하나가 달군 인두처럼 가슴에 박혔다.패서가 무너지면 북변의 문이 활짝 열린다.조선의 대군이 곧장 밀고 들어와, 당국의 황도 심부를 겨누게 될 것이다.그건 국본을 뒤흔드는 대재앙이다.그때가 되면, 세자 책봉 다툼은커녕, 그는 당국의 천고의 죄인이 된다.부황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말로는, 이미 폐출되어 유폐된 세자 우문각보다 백배는 비참할 것이다.게다가 지금 이 병력은 최지습 일행을 포위해 베어내기엔 넉넉해도, 임학이 이끄는 철기 오만을 막기에는 어림도 없다.원수를 베자고, 멸국의 위험을 무릅쓸 것인가.아니면 대국을 위해, 자신의 앞날과 목숨을 위해, 즉시 회군해 구원에 나설 것인가.거대한 모순과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우문호를 거의 찢어놓을 듯했다.그는 최지습을 노려보았다.불붙은 원한이 눈빛에 서렸다.단 한 걸음.정말, 마지막 한 걸음이었다.김단은 상상도 못했다.이 목숨이 오가는 때, 임학이 폭풍을 거꾸로 세울 줄은.사방의 살기 어린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김단은 고지운을 꼭 끌어안았다.몸이 미세하게 떨렸다.부정할 수 없었다. 그 소식에, 모두가 안도했다.모두가 손에 쥔 병기를 끝내 놓지 않았다.우문호가 아직 퇴각을 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순간 분노가 앞서면 끝이 어찌될지 알 수 없었다.마침내 최지습이 먼저 입을 열었다.“둘째 황자 전하. 이 정도까지 왔으니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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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3화

다만…소하는 고지운을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지습이 입을 열었다.“아무도 남기지 않겠소. 말했듯이, 간다면 함께 가오.”소한이든 소하든, 아니면 대열의 누구든—그는 누구 하나 버리지 않았다.우문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그가 최지습을 노려보았다.“대군자가, 지나친 탐욕은 길하지 않소.”최지습은 담담히 마주보았다.“능력 있거든, 우릴 모조리 여기 붙잡아 두시오. 대수롭지 않소. 우린 저승에서 석 달쯤 전하를 기다리면 되오.”이는 곧, 그들을 베어도 우문호가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뜻이었다.외가의 뒷배 하나 없는 둘째 황자.그에게 드리운 흠결은 조정이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었다.게다가 그는 세자가 폐위된 일의 장본인이었다.임학이 세 성을 연달아 함락한다면—우문호가 석 달을 버티기 어렵다.시간이 멈춘 듯 고요가 내렸다.우문호의 손이 고삐를 죄어 쥐었다.이성은 물러서라 속삭였지만 입에서는 끝내 물러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분명, 단 한 걸음이면 됐는데.그때, 김단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우문호, 이것과 바꾸시지요.”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약왕곡의 비방, 회혼단입니다. 숨만 붙어 있으면 삼켜 살릴 수 있습니다. 한 알이 천금으로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여기 세 알, 전부 드리겠습니다. 가져가 부황께 올리시면 전하도 명분이 서실 것입니다.”회혼단.이름부터 길했다.이 세상 누구인들 오래 살고 싶지 않겠는가.우문호의 눈이 가늘어졌다.그것을 부황께 올린다면—조정이 아무리 몰아쳐도, 부황은 그를 지킬 것이다.분명,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영칠이 옆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쉰 목소리가 해거름의 공기 속에서 더 서늘하게 번졌다.“전하, 분명히 헤아리시지요. 약왕곡과 사귀실지, 원수가 되실지.”이 자리에서 우리가 죽는 건 쉽다.하지만 약왕곡 전체를 없앤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그때가 되면 약왕곡 사람들은 반드시 복수하러 올 것이다.설령 전하가 끝내 보위에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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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4화

우문호는 차가운 백옥 약병을 움켜쥔 채 김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녀가 던진 말 한 줄기가 가느다란 가시가 되어, 마음속 가장 은밀한 곳을 찌르고 지나갔다. 미세하지만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목몽설에게 잘하라니.우문호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목몽설이 어찌 오늘 이 지경까지 왔겠는가.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그 지점에 닿았을 때, 그윽한 시선은 김단의 뒷모습을 떠나 엄정한 대열의 최지습에게로 향했다. 한 방울의 독을 머금은 칼날처럼 그 눈빛에는, 아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분노와 불만이 짙게 서려 있었다.“최지습.”쉰 목소리에 숨길 뜻도 없는 증오가 실렸다. “오늘은 네놈의 목숨줄이 길었을 뿐이다. 이 빚, 내가 새겨 두겠다. 훗날 변방에서 다시 마주치면, 반드시 네 목을 베겠다.”최지습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독수리처럼 맑고 예리한 눈이 멀찍이 그를 마주했다.“언제든 상대하겠다.”더 말할 것도 없었다. 패자의 거친 말은, 남은 체면을 겨우 부여잡는 허기일 뿐이다.우문호는 성급히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전장을 가르며 울렸다.“철수하라!”군령은 산과 같았다. 최지습 일행을 포위하던 당국의 병사들은 못내 아쉬워도 검을 집어넣고 쇠뇌를 내렸다. 검은 물결 같던 진이 질서 있게 물러났다. 숨 막히던 살기는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마지막 기병대의 그림자가 흙먼지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의 팽팽했던 신경은 풀리지 않았다. 그제야 누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죽는 줄 알았소.”호랑이군 다섯번째 도령이 퉤, 하고 내뱉었다.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치밀어 올랐다.아홉번째 도령도 살아 돌아온 기색으로 중얼거렸다.“임 장군이 제때 도착하여 살았소. 아니었으면 우리, 참으로 고슴도치가 될 뻔했소.”방금 전처럼 쇠뇌수만 쏟아졌다면, 그들이 팔이 셋이고 다리가 여섯이라 한들 피하긴 어려웠다.“나중에 제대로 술 한 잔 대접하겠소.”일곱번째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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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5화

바람이 황야를 훑고 지나가며, 뒤에 남은 피비린내와 살기를 흩뜨렸다.풍상에 닳은 돌기둥 하나가 시야에 또렷이 섰다.‘조선’이라 새긴 국경비였다.그제야 사람들은 목까지 치솟아 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국경비만 넘으면 곧 조선 땅이었다.미리 소식을 접한 조선 변경군이 경계선 맞은편에 정연히 도열해 있었다.군용은 반듯했고, 깃발은 바람에 힘차게 나부꼈다.진열의 맨 앞.임학이 준마 위에 앉아 있었다. 검은 갑옷, 붉은 술 달린 투구.얼굴은 매서웠고, 눈빛은 번개처럼 이쪽을 훑었다.최지습 일행이 비록 남루하나 모두 무사한 것을 보자, 임학의 굳게 굳어 있던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그는 말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대군자!”최지습도 말에서 내렸다.무릎을 꺾으려는 임학을 붙들어 일으키고서야 짧게 말했다.“수고했다.”임학의 목소리에 약간의 격정이 실렸다.“마땅히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대군자께서 무사하신 것이 다행입니다.”그 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최지습을 지나, 부축을 받으며 말에서 내리고 있는 김단에게로 향했다.김단도 그를 보았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주변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듯했다.임학은 기억 속보다 야위어 버린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다 가시지 않은 놀람과 피로, 옷자락의 먼지.가슴 한복판이 움켜잡히듯 아려 왔다.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다가가 확인하고 싶었다. 다친 데는 없는지, 이 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묻고 싶었다.그러나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쌓인 말들이 가슴께에서 막혔다.마침내 겨우, 메마른 한마디만 나왔다.“…무탈하오?”김단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감추려 해도 비칠 수밖에 없는 그의 염려와 미안함, 조심스러움이 눈에 들어왔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녀는 가볍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과한 무게의 눈길을 피하며, 담담하게 마치 곁을 보태 준 동맹을 대하듯 말했다.“모두 무사합니다. 이번 일, 임 장군의 신속한 출병에 감사드립니다.”형식적인 감사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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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6화

밤이 되자 조선 북변의 군영 한복판에서 거대한 모닥불 여러 더미가 타올랐다.마른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불꽃이 튀었다. 불길이 활짝 피어오르며 며칠째 가라앉아있던 음울함을 서서히 물러냈다. 공기에는 짙은 향내가 감돌았다.쇠지레에 걸린 통양은 껍질이 노릇하게 익어 바삭거렸고, 뚝뚝 떨어지는 기름에 불길이 더 높이 치솟으며 지글거렸다. 한편에서는 큰 솥 몇 개가 끓고 있어, 우윳빛 국물 위로 산속 버섯과 알 수 없는 향료가 피어올랐다.피어오르는 김이 허기를 자극했다.병사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검은 토기 사발에 가득 찬 흐리지만 독한 토속주를 마시며 떠들었다.화투를 돌리고 잔을 부딪치며, 전장의 틈새에서 찾아온 느슨함과 흥겨움을 마음껏 누렸다.거친 웃음과 사발 부딪히는 소리.가끔 흘러나오는 변방의 애잔한 가락.밤을 살찌우는 노래가 되었다.최지습 일행은 가장 크고 가장 따뜻한 모닥불 곁에 자리를 받았다.지옥 같은 도주를 건넌 뒤였다.동료의 호위 속에 앉아 뜨거운 음식과 따뜻한 기운을 느끼니, 끝까지 팽팽했던 신경이 비로소 풀렸다. 그제야 깊은 피로가 드러나고,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함께 밀려왔다. 고지운은 도톰한 모피를 깐 나무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소하가 그녀에게 망토를 둘러주었다. 여전히 가냘프긴 했지만, 얼굴빛은 한결 나아 보였다. 소하는 구운 양고기에서 가장 연한 부위를 곱게 발라 내어, 후후 불어 적당히 식힌 뒤 나무접시에 담아 건넸다. 이어서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 한 사발도 정성스레 떠서 내밀었다.“천천히 드시오. 데일 수 있으니 조심하시오.”고지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은 숟가락으로 국을 한 숟갈씩 조심스럽게 떠 넘겼다. 문득 시선을 들어 올리자, 소하의 따뜻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경씨가 젊은 병사 몇과 둘러앉아 자기 ‘기연’을 떠벌리고 있었다.그가 술잔을 흔들 때마다, 빈 소매가 이제는 그의 군공장처럼 여겨졌다. 그가 겪은 소름 끼치는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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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7화

김단은 몸을 풀고 가만히 최지습의 단단한 팔에 기대었다.눈앞에서 뛰놀던 불꽃, 주위의 소란스러우나 안심되는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속이 형언하기 어려운 충만함으로 채워졌다.소한은 모닥불 빛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 쪽에 혼자 앉아 있었다.버려진 군량 수레의 바퀴에 등을 댔다.손엔 사발을 들었지만 무심히 흔들기만 했지, 입에 거의 대지 않았다.않았다. 시선은 불꽃에 오래 머물다 이따금 서로 기대 앉은 둘의 그림자 쪽으로 흘렀다. 찌르듯한 쓰림과 말로 하기 어려운 고적함이 차가운 덩굴처럼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무심결에 가슴께를 눌렀다. 시선을 떨궈 뒤엉킨 속내를 감추고, 사발의 찬 술을 단숨에 비웠다. 살아 있는 불이 목을 타 위장까지 내려갔으나, 마음속 싸늘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임학이 가까이 다가와 모닥불 곁에 앉았다. 무심코 김단을 한 번 훑어본 그는 곧 억지로 눈을 거두고 시선을 최지습에게로 돌렸다.“전갈이 있습니다. 우문호가 북변에 한 부대를 남겨 두고, 자신은 밤을 새워 당국의 황도로 달려갔습니다.”최지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상한 바다.”이미 몇몇과 약조를 맺었으니, 우문호가 북변에 오래 마음 붙일 리 없었다. 그는 회혼단을 바쳐 전하의 총애를 얻고자 마음이 급했다. 지금 그의 급선무는 그것뿐이었다. 임학이 낮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그러니 제 뜻은 이곳에도 병력을 한 부대 남겨 만일에 대비하자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는 그들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갈 셈이었다.임학의 속뜻을 알아차린 김단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은 소하와 고지운을 바라보았다.“소하, 운이. 두 분은 앞으로 임 장군의 부대를 따라 돌아가십시오.”그 말에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모였다.김단이 말을 이었다.“운이는 몸이 많이 불러 있습니다. 이번에 크게 놀라기까지 했으니 더는 먼 길을 버티기 어렵겠습니다. 내일 아침 임 장군의 대군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가 쉬셔야 합니다.”그녀는 경씨와 숙희를 한 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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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8화

“아씨, 제발요!”숙희가 애교를 부리며 매달렸다. 김단이 허락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는 기세였다.김단은 눈꼬리를 가볍게 올렸다.“데려가는 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야. 대신 먼저 내 질문에 답해.”숙희는 곧장 허리를 펴고 앉았다.“물어보세요. 아는 건 다 말씀드릴게요.”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왜 그리 약왕곡에 같이 가고 싶은데?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야, 아니면 영칠 때문이야?”말이 떨어지자마자 숙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멀찍이 있던 호랑이군에서 웃음이 터졌다.다섯번째 도령이 소리쳤다.“거 보오, 둘이 뭔가 있다 하지 않소!”“하하, 눈빛 주고받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아오?”사람들이 와 하고 웃자 영칠의 귀끝까지 붉어졌다. 하물며 숙희는 오죽했을까.숙희는 아예 김단의 어깨에 이마를 툭 얹었다.“아씨…”대답을 못 하겠다는 뜻이었다.고지운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김단을 향해 말했다.“그만 캐묻으시오. 이러다 밤새 숙희 머리가 그대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겠소.”경씨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참, 큰 아가씨는 붙들어 둘 수가 없지.”웃음소리가 북변 하늘로 번졌다.웃고 떠드는 사이 밤 연회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군사들은 배를 채우고 삼삼오오 흩어져 쉬거나 작은 모닥불 둘레에 모여 낮은 소리로 담소를 이었다.고지운은 소하의 부축을 받아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경씨는 술을 과하게 마셨다. 숙희와 영칠이 양쪽에서 부축해 데려갔다.소한도 어느새 막사로 돌아가고 없었다.임학은 그때서야 때가 왔다고 여겼는지, 술 한 사발을 들고 다가왔다.모닥불 아래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검은 갑옷 위로 따스한 빛이 일렁였으나, 미간에 드리운 깊은 그늘을 녹이지는 못했다.그는 먼저 최지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선이 최지습 곁에 기대 앉은 김단에게 옮겨갔다.“단이.”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거칠었다.김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모닥불빛이 맑은 눈동자에 한 번 번져 반짝였으나, 따스함은 스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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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9화

임학의 시선이 김단의 창백한 볼을 스쳤다.미간에 내려앉은 지친 기색이 숨길 수 없었다.방금 전 죽을 고비를 건넜고, 내일은 소한을 살리려 다시 고된 길을 떠나야 했다.그가 품어 온 무겁고 슬픈 말은,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움켜쥔 듯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지금 알려 준다면, 부모님의 부고는 그녀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게다가 그 죽음이 자기 탓이라 알게 되면,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몸과 마음이 다 닳아 있는 이때, 굳이 짐을 더할 이유가 없었다.거대한 무력감과 자기혐오가 밀려왔다.그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가슴속 둑이 터지기 직전의 물살을 억지로 누르듯 삼켰다.목젖이 심하게 오르내리더니 입안에는 쇳맛이 돌았다.끝내 그는 김단의 눈길을 피했다.사발을 들어 올리고, 마른 소리로 말했다.“길이 고되었소. 내일도 서둘러야 하니, 일찍 쉬시오.”메마른 말은 눈빛 속의 거센 파도와 처연한 대비를 이뤘다.김단은 그를 바라보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무엇을 알아챈 듯했지만, 더 알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그녀는 앞의 사발을 들었다.그가 내민 사발과 가볍게 맞부딪쳤다.짤랑—고요한 밤공기에 맑고 짧은 울림이 번졌다.보이지 않는 어떤 기대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염려해 주어 고맙소, 장군.”그녀는 담담히 말하고, 남은 술을 끝까지 비웠다.임학은 그녀가 잔을 기울이는 손놀림을 보았다.눈썹 그늘이 내려앉은 옆얼굴은 차가웠다.심장은 얼음물에 잠긴 듯 깊이 가라앉았다.그 역시 사발을 단숨에 비웠다.독한 술은 오장육부를 태웠지만, 조금의 온기도 주지 못했다.남은 것은 끝없는 쓰라림뿐이었다.그는 마지막으로 김단을 깊게 바라보았다가, 벌떡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등짐이 스며들었다.그 그림자는 유난히 고독하고 무거웠다.최지습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그는 손을 내밀어 차게 식어버린 김단의 손을 다시 잡았다. 말없이 온기를 건네자, 김단은 대답 대신 몸을 기댄 채 그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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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0화

그의 머릿속에 김단이 최지습의 품에 기대던 모습이 제멋대로 떠올랐다.한 장면, 한 장면이 달군 비수처럼 심장을 파고들었다.곡독의 통증보다 잔혹했다.질투가 끓었다.분함이 치밀었다.구해도 얻지 못한 고통이,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차가운 속삭임에 의해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비틀렸다.“그는 그녀를 안을 수 있지. 그녀의 온기와 신뢰를 마음껏 누리며.”속삭임이 독사처럼 스며들었다.“하지만 너는… 여기서 죽어 가는 들개처럼 혼자 이 끝없는 고통을 견딜 뿐이야. 대체 왜 그래야 하지?”소한은 아랫입술을 악물었다.더 날카로운 통증으로 정신의 침식을 이겨 보려 했다.짙은 쇳내가 입안에 퍼졌다.그는 거친 모피 요를 움켜쥐었다.힘줄이 솟고 마디가 하얗게 틀어졌다.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막을 수 없었다.“그를 없애.”속삭임이 돌연 또렷해졌다. 살을 곤두서게 하는 유혹이 섞였다.“그만 사라지면… 더는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해.”그 생각은 가장 사악한 씨앗 같이, 떨어지는 순간 미친 듯 뻗었다.“그래. 그를 죽여.”얼음 같은 살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남은 이성이 잠길 지경이었다.몸이 저절로 들썩였다.시선이 막사 밖을 향해 붉게 물들었다.깊던 눈동자엔 혼란과 고통, 그리고 파괴의 열망만 가득했다.“그를 죽이기만 하면… 모든 고통이 끝난다.”“으아—!”소한이 몸을 움츠렸다.펄펄 끓는 물에 내던져진 새우처럼 온몸이 경련했다. 참아 오던 신음이 낮고 깊은 울부짖음으로 터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자 식은땀이 비처럼 옷을 적셨고, 막 얼음물에서 건져 올린 듯 몸은 싸늘히 식어 이가 부딪쳤다. 남은 이성은 바람 끝의 촛불 같아 끝없는 통증과 광기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그는 알고 있었다.그는 단이가 목숨처럼 여기는 이를 건드릴 수 없었다.정녕 최지습을 죽여 버린다면, 단이는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그녀를 영영 잃게 되리라.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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