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Chapter 921 - Chapter 930

955 Chapters

제921화

김단은 조심스레 약그릇을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앞에는 의자에 손과 발이 단단히 묶여 있는 육 군의가 있었다. 김단이 들어서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김 의녀께서 여긴 어쩐 일로...?”거칠고 마른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울렸다. 김단은 대답 대신 약그릇을 든 채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숟가락을 떠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김단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대군자가와 병사들이 연병장에 계셔서 그 틈을 타 잠시 들렀습니다. 사정이 좋지 않아 마땅한 음식을 구하기 어려워 몸보신이라도 하시라고 약을 끓여 왔어요. 부디 잘 버텨주시기 바랍니다.”그녀의 말투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김단이 말을 하는 동안 육 군의는 약재의 향을 맡으며 어떤 성분이 들어갔는지 가늠해 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김 의녀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정말 수고 많으셨소.”“드세요.”김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약을 권하며 숟가락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육 군의는 천천히 그녀가 떠준 약을 조금씩 삼켰다. “군의관님 제자분 말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연병장에서 그의 시신이 깃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어요.”그 말을 듣자 육 군의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아이는 고아였소. 세 해 전부터 내 곁에 있었던 아이였는데... 항상 성실하게 일하며 나를 따르던 아이라 김 의녀에게 해를 끼칠 줄은 상상도 못했소.”그의 목소리에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고 눈물 역시 진심에서 비롯된 듯했다. 김단은 말없이 숟가락을 움직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약그릇이 거의 바닥을 들어냈을 무렵, 육 군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김 의녀, 이 약에 특별한 약재가 들어간 것이오? 향은 평범한데 마시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소.”김단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안식향을 넣었습니다.”이 말을 듣자 육 군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방금 전까지 그 향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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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김단의 말에 육 군의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렸다.“김 의녀, 제발 말로 해결하시오. 더 이상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오. 나는 정말 몰랐소. 그 아이가 첩자일 줄 누가 알았겠소? 우리 집안은 삼대째 군의관으로 복무해왔고 그 기록도 전부 남아있소. 나는 조선 사람이요. 그런 내가 간첩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그렇게 외치던 그의 얼굴이 갑작스러운 복통에 일그러졌다. 그녀가 방금 마신 약에 무언가 탄 것이 분명했다. 순간, 과거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예전에 김단이 아무렇지 않게 제조했던 약은 사실 한 방울로도 피를 토하게 만드는 맹독이었다. 그녀는 독을 다룰 줄 아는 여자였다. “3대째 군의관이라면, 군 내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하겠군요. 만약 군의관님께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군 내에 큰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설령 군의관님께서 이 고통으로 죽는다고 해도 급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결론날 겁니다. 누구도 타인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그 사실이 지금 이 고통과 겹쳐지며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눈앞의 여인은 차갑고 침착했다. 그 어떤 감정의 결도 묻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육 군의는 두 손을 벌벌 떨며 애원하기 시작했다.“김 의녀, 제발!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김단은 그 애원이 눈에 차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했다.“진실을 듣고 싶은 겁니다. 어젯밤 병사들이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서 솔직하게 말해주세요.”병사들은 이미 육 군의의 배경을 철저히 조사했기에 그가 첩자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는 독살이나 암살 같은 계획에 연루되지 않았기에 그에게 고문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정보를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육 군의는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묵묵히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복부에선 끊임없이 쥐어짜듯 고통이 밀려오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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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김단은 조용히 품 안을 뒤적이더니 작은 환약 하나를 꺼내 육 군의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작은 알약은 금세 입안에서 녹아들었고 복부를 찌르던 고통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육 군의는 고개를 젖힌 채 깊은 물속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몇 번의 심호흡을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은 그는 김단을 바라보았다.“김 의녀, 왜 나를 살려준 것이오?”김단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군의관님께서는 진정한 사내이십니다. 그러니 경의를 표하지요.”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려 한 것이 단지 자신의 목숨이 아닌 친구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다. 육 군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김단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김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대군자가와 호랑이군은 잔혹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전장이 아무리 참혹하다 하더라도 그분들은 병사를 자신의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형제의 목숨을 빼앗지 않을 겁니다.”그 말에 육 군의는 작게 눈을 내리깔았다. 확답도 부정도 없이 오로지 침묵만이 그의 고민을 대변하고 있었다. 김단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어쩌면 지금 군내에 더 이상 첩자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군의관님께서 하신 침묵이 더 많은 자들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몰라요.”육 군의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의 눈빛은 점점 갈등으로 물들어갔다. 김단은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군의관님께서는 저보다 연배가 높으시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세요.”그녀는 천천히 천막 입구를 향해 걸었다. 막 천막 문을 젖히려는 순간, 뒤에서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확신하시오? 대군자가께서 정말로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을 거란 걸 말이오.”그는 과거에도 전장에 나섰지만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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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임 십장? 김단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임 십장은 바로 임학일 것이다. 그녀는 즉시 천막을 걷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객이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임학은 팔에 부상을 입은 채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 자객은 얼굴을 가린 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멀리서 비추는 횃불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희미하게 드러냈다. 김단은 그 자객의 얼굴을 뚜렷이 볼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객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객은 김단을 알아보고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단아!” 그 목소리에 김단은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거의 자객 가까이에 다가가려는 순간, 임학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단아! 위험해!” 김단은 걸음을 멈추고 임학을 바라본 뒤 다시 자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익숙한 눈매에 낯익은 웃음. 김단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오라버니?”임학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오라버니? 또 어디서 튀어나온 오라버니냐?”그 순간, 자객은 얼굴을 가린 천을 벗고 김단에게 웃으며 말했다.“단이, 빨리 저 병사들을 물리시오. 깜짝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소.”그때 최지습과 다른 병사들도 뒤늦게 달려왔다. 자객의 얼굴을 확인한 최지습은 멈칫하며 김단을 바라보았다. 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왜 목설원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는 눈빛을 보냈다. 최지습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병사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하고는 목설원을 천막 안으로 데려갔다. 김단은 그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오라버니, 차 드세요.” 목설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찌푸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편지만 두고 갈 걸 그랬소.”한편 옆에 있던 임학은 목설원의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쪽은 도대체 누구요?”목설원은 대답하지 않고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단은 임학을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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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임학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확신하십니까?”목설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피부가 검고 체격이 건장하여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목설원은 슬며시 임학에게 물어보았다.“생일이 언제십니까?” 임학은 대답하지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이 복장으로 밤에 병영에 침입한 이유가 뭡니까?”목설원은 그제야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듯 곁에 서 있는 최지습과 김단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아, 중요한 일을 잊었군요. 전갈을 전하러 온 겁니다.”그는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최지습에게 건넸다.“며칠 전, 가주께서 조선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거기서 큰 형님으로부터 고모할머니의 손녀를 찾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삼일 후에 직접 찾아뵙고 싶다는 뜻을 전하셨습니다.”최지습은 편지를 읽고 목설원의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편지를 김단에게 건넸다. 그리고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목 가의 가주께서 김단과 임학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이해 가지만... 나는 왜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이오?”그는 편지에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목설원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야 그쪽은 내 매부이니까. 김단과 혼인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반쯤은 목 가의 사람이니 가주를 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지. 만약 혼인하지 않았다고 해도 김단의 혼처를 살펴보셔야 하니 만나야 하지 않겠소?”목설원의 말에 임학의 두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최지습을 쏘아보았다. 최지습이... 매부라고? 그와 김단이 설마...?임학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최지습이 참으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저렇게 많으면서 어떻게 김단에게 손을 뻗을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김단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평양관저로 데려간 것도 다 이런 속셈이었단 말인가? 그는 지금껏 최지습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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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목설원이 다소 언짢은 기색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목 가에서는 몇 상자나 되는 귀한 약초를 아무 대가 없이 보내준 데다 이번에는 가주께서 직접 먼 길을 달려와 만나고자 하셨는데 정작 이들은 각종 핑계를 대며 만남을 회피하고 있었다. 김단 역시 이러한 상황이 적절치 않다고 느꼈기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오라버니, 노여워 마세요. 대군자가께서는 군의 총령이시라 함부로 자리를 비우실 수 없습니다. 저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니 제가 오라버니를 따라가 뵙는 건 어떻습니까?”그러자 임학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안 된다. 그렇게 쉽게 수락하다니 어찌 그리 경솔할 수 있단 말이냐? 그가 목 가 사람이라 한들 목 가에 나쁜 이가 없다는 보장이 있느냐? 무작정 따라갔다가 일이 생긴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께 설명할 수 있겠느냐?”그 말에 김단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예전에 도련님께서 저를 함정에 빠뜨리셨을 때는 뭐라고 설명하셨나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셨죠.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단아...”임학의 목소리에는 무력감이 스며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목설원은 이 남매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는 중재하듯 말했다.“사실, 임 도련님의 걱정도 이해가 되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대군자가께서 병사 몇 명 붙여주는 건 어떻소?”이 제안은 목 가가 떳떳하다는 것을 더욱 부각시켰다. 최지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내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 김단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하겠소.”그제야 임학은 김단이 목 가의 가주를 만나러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차갑게 말했다.“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그럴 필요가 있습니까?”목설원은 웃으며 말했다.“임 도련님께서는 십장으로서 자리를 비우기 어려우시지 않습니까?”임학은 목설원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던졌다.“당신네 가주께서 저를 꼭 만나고 싶어 하신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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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김단의 그런 모습을 본 최지습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임학이 오늘 낭자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거 알지 않소? 그런데도 말을 너무 심하게 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오?”김단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임학 도련님도, 진산군 댁도... 저는 그들에게 이제 미움만 남아 있는데 지금 저렇게 무너져내린 것을 보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심지어 도련님은 저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계속 이렇게 싫어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최지습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낭자는 항상 생각이 너무 많소. 미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따지는 법은 없소. 오래 묵은 상처도 다시 만져보면 아픈 것처럼 한 번 받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게 정상이오. 그 기억들을 떠올렸을 때 여전히 쓰라리다면 미워해도 꾸짖을 사람은 없소. 그 고통은 낭자가 만든 게 아니고 진산군 댁이 저렇게 된 것도 낭자 탓은 아니오.”미움이란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리하는 것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지습은 담담히 그 사실을 김단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그렇게 찌푸린 미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꾸만 마음을 쓰게 했다. 최지습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김단의 미간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김단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고 최지습 또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자마자 행동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미간에 닿아 있었고 그 온기는 불처럼 뜨거웠다. 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지습을 바라보았다. 최지습은 당황해하더니 그제야 손을 거두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난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낭자는 일찍 쉬시오.”그는 서둘러 등을 돌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김단은 그 자리에 서서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박동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고 빠르게 그녀를 흔들었다.다음 날, 김단은 목설원과 함께 목 가의 가주를 만나러 출발했다. 그들은 며칠 전 약초를 실어 나른 마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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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마차를 타고 이동한 탓에 이전에 최지습과 함께 말을 달렸을 때보다 속도가 느려져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길상진에 도착하였다. 목설하가 직접 여관 앞에 나와 그들을 맞이하자 목설원이 목설하를 가리키며 김단 일행에게 소개했다.“이분이 바로 조모님의 손자십니다.” 그러고는 임학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그리고 김단과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속삭임치고는 제법 큰 목소리였다. 목설하는 물론이고 김단까지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임학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목설하는 이런 목설원의 행동에 익숙한 듯 임학에게 차분히 예를 갖춘 뒤 두 사람을 여관 안으로 안내했다.“가주께서는 내일 도착하실 예정이니 오늘은 편히 쉬시지요. 마침 오늘 길상진에 장이 서서 무척이나 북적거린답니다. 그러니 저녁 무렵에 구경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김단은 목설하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실 그녀도 장터를 걸어보고 싶었다. 한양을 떠날 때 챙겨온 옷가지가 있긴 했지만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나면 본격적인 겨울이 닥칠 테지만 지금 김단과 숙희는 여전히 얇은 옷 몇 벌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장날이라니, 두꺼운 옷을 장만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김단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임학이 따라나섰다. 김단은 그를 보는 순간 눈에 띄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임학은 눈을 돌리며 도적질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쭈뼛거리더니 낮게 말했다.“너는 너대로 구경하거라. 나는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눈에 거슬리지 않을 테니 앞만 보고 가면 되지 않느냐?”임학은 그녀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목 가 사람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오늘처럼 사람들이 붐비는 장터에는 무슨 변수가 도사릴지 모른다. 최지습이 다섯 번째 도령을 붙여주었다곤 했지만 이곳으로 오는 길 위에서 임학은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가 정말 따라온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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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김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 옷을 입은 최지습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가게의 자랑이라던 그 옷은 다소 섬세하고 우아한 느낌이 있었다. 최지습은 무예를 익힌 사람이었지만 관저에 있을 때는 문인의 느낌을 내는 옷차림을 즐겨 입곤 했기에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하만촌에서 그가 사냥꾼 차림을 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거나 부조화스럽지가 않았다. 최지습은 어떤 옷이든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에 김단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럼, 주인장께 가격을 물어봐 주세요.”점소이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점소이가 가격을 알려주자 김단은 한양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느꼈고 결국 그 옷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임학은 이 모든 장면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그녀가 남성 옷을 사는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눈썹이 찌푸러졌다. 단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 그 옷을 사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은 아가씨인데 다른 사내에게 옷을 사주다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호랑이군? 목 가의 형제? 그것도 아니라면 최지습? 그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최지습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 사실에 임학의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게 옥죄어왔다.임학은 최지습을 존경했다. 그는 전장에서 보인 최지습의 결단력과 용맹함을 경외했다. 하지만 오빠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아 김단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학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김단을 따라갔다. 자신은 더 이상 그녀의 삶에 훈수를 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한편 김단은 정작 그 옷을 사자마자 후회했다. 무슨 명목으로 최지습에게 옷을 건네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누이 입장으로 그에게 선물했다고 말한다면 다른 호랑이군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자신들은 제외하고 최지습 것만 준비했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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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임학은 김단을 바라보며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작은 상인의 손에서 진주 비녀를 사는 모습을 보자 가슴 한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혹시 그 밤빛 구슬을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녀에게 준 상처 따위는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일까? 김단이 진주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기억 속에서 그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뜻은 아닐까? 그 순간 임학은 깨달았다. 김단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임학은 김단이 그 진주 비녀를 소중히 품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마치 귀중한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임학은 알 수 없는 마음에 발길을 재촉하며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노점에 진열된 복숭아나무로 만든 비녀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임학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곧장 계산을 마친 뒤 서둘러 김단 앞으로 다가갔다.김단은 갑작스레 다가온 임학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것일까? 임학은 손에 든 비녀를 그녀에게 내밀며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이게... 내가 직접 만든 것보다 더 나은 것 같아서 말이다.”김단은 그가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예전에 임학이 직접 깎아 만든 비녀를 싫다고 외면했는데 왜 그가 사 온 비녀는 흔쾌히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임 도련님, 이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그녀의 차가운 말투와 은근한 분노는 임학의 긴장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는 비녀를 거두며 씁쓸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아니, 그냥… 예전에 너에게 비녀를 만들어줬던 게 생각나서 그랬다.”김단은 대꾸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냉담한 태도와 분노 섞인 말투는 오히려 임학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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