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Chapter 1111 - Chapter 1120

1188 Chapters

제1111화

강현우의 말이 끝나자 윤하경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온 세상이 멈춘 것처럼,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입술이 떨려 겨우 소리를 짜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강현우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그러니까 누구시냐고.”눈앞의 사람이 분명 익숙한 그 사람이었지만 윤하경은 그 눈빛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차갑고 전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표정...“지금...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거죠?”윤하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저한테 장난치는 거잖아요. 전에 이혼 얘기한 거, 그 일 때문에 화 난 거죠?”강현우는 더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이혼...?”눈앞에 자신보다 한 뼘 작은 여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 끝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강현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분명히 자신이 좋아하던 스타일의 여자임이 분명한데 머릿속에는 온통 백지유의 얼굴만 어른거렸다.‘내가... 결혼한 적이 있던가? 그럼 지금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건 뭐지? 아니면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강현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최근의 일들이 잘 기억이 안 나.”윤하경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거짓말이잖아요. 저한테 화가 났으면 화를 내시든가요. 이런 식으로 농담하는 건 정말 재미없어요.”강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윤하경을 바라봤다.“죄송하지만... 정말 기억이 안 나.”윤하경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정신없이 울고 애타게 달려왔던 긴장과 지친 몸, 그리고 지금 받은 충격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강현우는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이 모습을 본 도연지는 당황해 곧장 달려왔다. 강현우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도연지에게 물었다.“이분 왜 이래?”도연지는 이미 강현우와 윤하경의 대화를 다 들은 터라, 어딘가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바라보았다.“강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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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2화

강현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강현우가 한참을 침묵하자 하석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더는 말을 섞지 않고 곧바로 윤하경이 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하석호가 자리를 비우자 민진혁이 다가와 난감한 표정으로 강현우를 바라봤다.“대표님, 정말 기억이 다 사라지신 겁니까?”강현우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되물었다.“넌 누구야?”강현우가 자기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민진혁은 적잖이 상처를 받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대표님, 저 정말 대표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에요.”“흥, 그건 내가 더 오래됐지.”민진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능청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곧 우지원이 다가와, 강현우 앞에 서서 진지하게 말했다.“형, 저 사람 말 듣지 마. 내가 형의 진짜 오른팔이야.”민진혁은 우지원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강현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들이 분명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이란 걸 짐작했다. 그래도 타고난 경계심 탓에 완전히 신뢰를 보내진 않았다.우지원은 슬쩍 민진혁을 노려봤다.“형님 찾으러 오면서 왜 나한텐 말도 안 하고 혼자 왔어? 설마 형님 기억 잃은 사이에 내 자리 뺏으려고 그런 거 아니야?”민진혁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강현우를 바라봤다.“대표님, 요즘 한동안 경성에 얼굴도 안 비치셔서 많은 사람들이 별별 소문을 내고 있어요. 회사도 온통 뒤숭숭하고 주가도 출렁이고... 사모님도 거의 혼자 힘으로 버티고 계십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돌아가셔야 하지 않을까요?”그동안 민진혁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에는 강현우 실종 소식을 가까스로 감췄지만 시간이 흐르며 회사 안팎으로 소문이 퍼졌고 주가와 투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이상, 강현우의 실종을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었다.내막을 아는 건 민진혁과 한선아, 그리고 소수의 몇 사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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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3화

하병철은 강현우의 말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기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가 진짜 기억을 잃었든 일부러 그런 척을 하든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우리 하경이가 위험할 때 목숨을 구해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언제든 네가 필요하다면 나나 우리 집안에 부탁 한 가지는 꼭 들어주마.”강현우는 잠시 하병철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굳이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하경이를 구했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강현우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하병철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을 곁에서 지켜본 만큼 윤하경에게 왜 이렇게 시련이 끝없이 닥치는지 하병철은 안쓰럽고 마음이 아려왔다.호화로운 개인 비행기 안에서 백지유는 낯선 공간에 몸을 작게 웅크리고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서 강현우는 조용히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하룻밤 사이, 모든 게 달라졌다. 강현우는 더 이상 자신이 사다 준 평범한 옷을 입지 않았고 한눈에 봐도 값비싼 맞춤 정장을 입은 채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 분위기 자체가 달라져, 백지유는 자꾸만 그를 힐끔거리게 됐다.손끝으로 소파를 살짝 쓸며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고 강현우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다가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도대체 날 왜 데려가는 걸까?’비행기 안은 오직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결국 참지 못한 백지유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저, 현우야...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강현우는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천천히 백지유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던 건 민진혁이 급하게 준비해 준, 자신의 과거가 담긴 자료들이었다.원래부터 남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이라,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었고 우지원 역시 별도로 필요한 자료를 챙기고 있었다.강현우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내 여자 친구라며? 그런데 우리가 어디 가는지도 모른다는 게 좀 이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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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4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민진혁은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역시 우리 대표님은 어디를 가든 여자 복이 많구나.’이제 막 윤하경과의 오해가 풀릴 듯했는데 하필 이 시점에 백지유라는 변수가 또 나타나다니.오랜 시간 강현우 곁을 지켜온 만큼 백지유가 강현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강현우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강현우 몰래 내쫓았을지도 모른다.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속마음일 뿐, 감히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없었다. 강현우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말투나 행동 하나하나가 예전과 똑같았으니 함부로 건드렸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비행기에서 내리자 민진혁은 백지유를 따로 다른 곳에 안내하고 자신은 강현우와 함께 공항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강현우는 기자들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강 대표님, 최근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많은 소문이 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조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강현우는 굳은 얼굴로 딱 잘라 대답했다.“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사생활을 굳이 공개하고 싶진 않습니다.”단호한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다들 조용해졌고 추가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강현우는 바로 차에 올라 공항을 빠져나왔다.차 안에서 강현우가 물었다.“이제 어디로 가?”민진혁이 답했다.“사모님이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아직 대표님이 돌아오신 걸 직접 말씀 못 드렸는데 마침 잘됐네요. 먼저 병원에 들르시죠.”강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료에 눈을 떨궜다. 머릿속이 여전히 뒤죽박죽이라 어떻게든 자기 인생을 더 많이 파악하고 싶었다.병원에 도착하자 병실 앞에 서 있던 직원들이 강현우를 발견하고는 잠시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대표님, 어쩐 일이십니까?”강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저하지 않고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직원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대표님, 잠깐만요!”그때 민진혁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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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5화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길게 찢어진 눈매로 한선아의 등 뒤에 서 있는 소년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선아에게 조용히 물었다.“쟤는 누구예요?”한선아는 순간 긴장해 소년을 한 번 돌아보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아, 별거 아니야. 집안에 일하는 분 아들인데 얘 아버지가 잠깐 볼일 있어서 대신 와줬어.”그 말을 마치자마자 한선아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여긴 이제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먼저 들어가렴.”강현우는 그 말을 들으며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정말 그냥 집안 일꾼의 아들일까?’강현우는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바보가 된 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한선아가 보인 긴장과 신경 씀씀이가 도저히 단순히 하인 자식한테 보일 태도 같진 않았다.하지만 강현우는 더 묻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방을 나갔지만 문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고 뒤돌아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강현우 역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소년의 눈빛에서 묘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읽어냈다. 잠시 미간을 좁혔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한선아와는 그다지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원래도 기억을 잃기 전부터 대화가 많지 않은 사이였고 이제는 더욱 어색함만이 남았다.그럼에도 한선아는 이번 기회를 계기로 어쩌면 관계를 조금씩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강현우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얼른 여기 좀 앉아 봐. 네 소식이 끊긴 뒤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혹시 정말 못 돌아오는 건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말하다가 한선아의 두 눈에는 이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강현우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자신이 어떻게 깨어나게 됐는지 간단하게 설명했다.그런데 그 과정에서 백지유 얘기가 나오자 한선아의 손끝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괜찮아. 우리 명의를 다 모아 최고로 좋은 의사에게 진료받게 해 줄 테니 조만간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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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6화

한선아는 겉으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현우가 병실을 나서자 그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 눈빛에는 잠깐이지만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병실을 나오던 강현우는 곁을 따라오던 민진혁을 돌아봤다. 그러자 민진혁은 바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강현우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낮게 물었다.“하경이가 정말 나랑 이혼하고 싶어 했어?”민진혁은 순간 망설였지만 대표에게 솔직히 말하는 게 맞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실입니다.”그 말을 들은 강현우는 입술을 앙다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왜 그렇게 힘들게 날 찾으려고 했지?”민진혁은 말이 막혀 잠시 망설였다.“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대표님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그런데 왜 또 이혼하자고 한 거지?”민진혁은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뜸 들이다, 강현우가 지금 모든 걸 잊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용기 내어 진실을 말했다.“아마... 예전에 대표님과 신인아 씨 사이에서 일이 있었거든요.”“신인아?”강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그게 누구야?”민진혁은 난처하게 코를 만지며 얼버무렸다.“그건...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네요. 이따가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강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 날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윤하경은 꿈속에서 간절하게 강현우를 붙잡았다.그러다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과 약 냄새가 확 퍼지는 병실, 순간 이게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하경아, 깼구나?”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하병철이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현우 씨는요?”윤하경이 일어나면서 급하게 물었다.하병철은 입술을 한 번 다물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현우는 일단 경성으로 돌아갔어. 지금 회사가 엉망이라 현우가 나서서 정리를 해야 하거든.”그러자 윤하경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진짜...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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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7화

속으로는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지만 윤하경은 애써 미소를 지었고 표정은 어떻게든 담담하게 유지하면서 말했다.“외할아버지, 몸이 좀 더 나아지면 곧 경성으로 돌아가서 모든 일은 제가 직접 정리할게요.”하병철은 윤하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가 굳은 의지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그렇게 결심했다면 그걸로 됐다. 어떤 선택을 하든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네 편이야.”자말을 마치며 하병철은 윤하경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는 오랜 세월 쌓인 애틋함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윤하경은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병철이 자신을 유난히 아끼는 것은 어머니에게 미처 다 주지 못한 사랑과 미안함을 자신에게 모두 쏟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 마음이 전해질 때마다 윤하경의 가슴 한구석은 저릿하게 아려왔다.“외할아버지, 저는 정말 괜찮아요. 먼저 들어가서 푹 쉬세요. 저도 퇴원하면 자주 찾아뵐게요.”하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을 나갔고 방 안에는 다시 윤하경 혼자 남았다.윤하경은 힘없이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봄이 한창이라 불과 보름 남짓한 사이에도 나뭇가지에는 푸른 잎이 가득했다.‘정말 시간이란 모든 것을 바꿔놓는구나.’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나뭇잎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병실 문이 꽝 하고 열렸다. 윤하경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문 앞에는 흰 셔츠에 장미꽃다발을 들고 있는 오건우가 서 있었다. 키가 큰 오건우는 문에 기대선 채, 어디선가 익숙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아직도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요.”윤하경은 무심하게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최근 일들이 너무 많아서 오건우의 존재조차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건우는 꼭 이런 때에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오건우는 장미꽃을 들고 다가오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 반기지 않으시면 좀 섭섭한데요? 오랜만에 얼굴 보러 왔는데 말이에요.”윤하경은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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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8화

오건우는 무슨 일을 하든 늘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윤하경에게 자꾸 다가오는 것도 윤하경은 오건우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믿지 않았다.윤하경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저 하씨 집안의 외동딸일 뿐, 집안에서 큰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니 굳이 오건우가 자신에게 신경 쓸 이유는 없다는 걸 말이다.잠시 생각에 잠긴 윤하경은 오건우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했다.“혹시 하씨 집안에 뭔가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오히려 하석호를 찾아가시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저는 그냥 집안의 한 식구일 뿐이고 특별히 힘 있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요. 굳이 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오건우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썹을 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하경 씨는 제가 하씨 집안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윤하경은 눈길만 한 번 주며 대답했다.“아닌가요?”오건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뭐, 맞아요.”윤하경은 그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오건우는 자리에 바짝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그런데 생각해 보셨나요? 저랑 하석호 씨 사이의 인연만으로는 하씨 집안과 제가 오래도록 이해관계를 이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하경 씨가 그 다리가 되어주신다면 우리 사이가 더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말을 마친 오건우는 다시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며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정도면 대답이 된 걸까요?”솔직한 말투에 윤하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답했다.“오건우 씨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나오시니 저도 말씀드릴게요. 하씨 집안에는 저 말고도 다른 분들이 계시고 저는 결코 오건우 씨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한테는 남편이 있습니다.”오건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요즘 이혼 얘기가 나왔다던데 게다가 강 대표가 최근에는 기억까지 잃으셨다고 들었어요. 이럴 때가 바로 제 기회가 아닐까요?”오건우의 가벼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윤하경 귀에는 그저 ‘남의 불행을 즐긴다’는 말로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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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9화

하지만 곧 상처를 줬다면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윤하경은 애초에 오건우에게 큰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니 잠깐 미안했던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병원에 머무는 며칠 동안, 윤하경은 자주 휴대폰만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자고 다짐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강현우와의 메시지 창을 열어보게 됐다.사실 두 사람의 대화도 그리 길지 않았건만 윤하경은 짧은 메시지 몇 줄만 봐도 괜스레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원래는 빨리 퇴원하고 싶었지만 하병철이 완강하게 말렸다. 다친 다리도 무리해서 강현우를 찾으러 다녔던 탓에 제대로 회복이 안 된 상태였으니 이번 기회에 몸도 마음도 푹 쉬고 앞으로의 일도 차분히 생각해 보라며 하병철이 옆에서 강하게 붙잡았다.실제로도 그동안 마음에 품어둔 고민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오건우는 종종 찾아와 예전처럼 너스레를 떨었지만 윤하경은 그저 인사만 건네고 창밖만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오건우도 별말 없이 한 시간쯤 곁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돌아갔다.그렇게 십여 일을 병원에서 보내고 드디어 퇴원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 윤하경은 하병철이 머무는 하씨 저택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화단은 이미 연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병철은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윤하경에게 말했다.“이제 네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필요하면 주저 말고 언제든 나한테 전화해. 강씨 가문에서 누가 너 힘들게 하면 외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줄 거야.”힘 있는 목소리였지만 윤하경은 그 말이 오히려 마음 아팠다.“외할아버지, 저 정말 괜찮아요. 더는 저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나이가 들어서도 자신 때문에 마음 졸이는 걸 보면 늘 미안하고 또 안쓰러웠다. 하병철은 손을 휘저으며 윤하경에게 슬슬 돌아가라고 했다.윤하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저택을 나섰다. 왜인지 이번에 집을 떠나면서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돌을 얹은 듯 답답했다.이번에는 하석호에게 따로 연락해서 비행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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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0화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도 없이 말했다.“지금은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네요.”그러고는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백지유를 힐끔 바라보다가 도우미에게 조용히 물었다.“저분은 누구세요? 새로 온 분인가요?”도우미는 얼른 눈치를 보며 백지유를 힐끗 쳐다봤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백지유는 자신을 새로 온 도우미로 여기는 듯한 말에 순간 당황해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들었다.“저, 그게...”도우미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사모님, 일단 위로 올라가서 씻으시고 조금 쉬세요. 제가 나중에 죽이라도 끓여드릴게요.”윤하경은 백지유를 잠깐 바라보다가 이 여자가 분명 뭔가 사연이 있구나 싶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지만 딱히 기억도 안 났다.사실 누가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든 이제 곧 이 집을 나갈 자신에게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밀려오는 쓸쓸함을 억누른 채 조용히 도우미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거실 한가운데 남겨진 백지유는 윤하경이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골에서는 자신도 꽤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이 큰 집, 이 화려한 공간에서 윤하경을 마주하니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윤하경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정돈된 느낌이었고 말 한마디, 손끝 하나에도 기품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그에 비해 자신은 며칠 전 용기 내 사서 입은 새 원피스마저 갑자기 너무 초라해 보이고 주눅 든 모습으로 손끝만 매만질 뿐이었다. 한편, 2층에 올라오자마자 도우미가 윤하경을 조심스럽게 불렀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아까 아래층에 있던 그 아가씨 있잖아요. 본인 말로는 대표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던데 제가 보기에는 대표님한테 꽤 관심이 있어 보이더라고요.”도우미는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실 이런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인의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않는 게 철칙이었다. 괜히 말을 많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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