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Chapter 1531 - Chapter 1540

1613 Chapters

제1531화

하지만 그 순간 민진혁은 더 이상 이성으로 자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오래 참고 눌러 둔 본능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고, 백지유는 숨을 고르기도 벅찼다.백지유와 함께 한 시간은 꽤 오래되었지만 오늘의 민진혁은 평소보다 훨씬 격했고,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남김없이 갉아먹을 듯 집요했다. 백지유는 그에게 휘말려 끝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고, 결국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의 리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백지유는 몇 번이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을 정도로 두 눈이 뒤집힐 뻔했고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 순간, 모든 주도권은 민진혁에게 있었다. 백지유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민진혁의 리듬에 자기 몸을 맡기는 것뿐었다.백지유는 내내 민진혁의 두 팔을 꼭 잡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거칠던 숨이 가라앉고 방 안에 고요가 내려앉았지만, 민진혁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소파 위에서 서로를 꼭 껴안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백지유의 하얀 피부는 민진혁의 온몸에 밴 구릿빛 피부와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있었다.백지유는 이미 기진맥진해 움직일 힘도 없었고 민진혁을 밀쳐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한참이 흐른 뒤에야, 겨우 숨을 고르고 조금씩 힘이 돌아왔다. 백지유는 애써 목소리를 찾으며 두 손으로 민진혁의 얼굴을 감싸 쥐고 물었다.“진혁 씨... 오늘 왜 이래요? 미쳤어요?”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민진혁의 눈빛은 여전히 뜨겁고 날카로웠다.“나 버릴 거야?”그 말에 깜짝 놀란 백지유가 민진혁을 바라보면서 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민진혁이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너, 해외로 나갈 생각이라며. 한 번 떠나면 돌아올 마음도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랑 헤어지겠다는 거야?”민진혁은 따지고 드는 말투였지만, 귀 기울이면 서운함이 묻어났다. 버림받기 직전의 사람처럼 불쌍해 보였다.백지유가 결국 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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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2화

백지유는 또다시 민진혁에게 휘둘릴까 봐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했다.“알았어요. 그만 말할게요.”사과는 늘 빠른 편이었다.그제야 민진혁이 손을 놓았고, 다시 손목을 눌러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게 한 뒤, 물었다.“정말 나랑 헤어지지 않는 거지?”백지유는 민진혁 눈 속에 번진 감정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당연하죠. 진혁 씨가 얼마나 좋은데, 내가 어떻게 진혁 씨를 놓겠어요.”그건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할아버지 말고는 누구도 민진혁처럼 잘 대해 준 사람이 없었다. 부모는 어릴 때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해했고, 엄마는 사사건건 때리거나 야단치며 집안일을 잔뜩 맡겼다.지난번 강현우를 구해 준 일은 백지유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았고, 그 덕분에 민진혁을 만났다. 백지유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믿었다. 예전에는 강현우에게 은혜를 내세워 뭘 요구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윤하경을 본 순간 그 생각을 싹 접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 어리석지 않은 선택을 했기에 민진혁을 만날 수 있었다.민진혁은 그 말을 듣자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백지유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불안하면... 우리 결혼해요.”민진혁은 멈칫하며 아래에 누운 백지유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봤다.“결혼?”“네.”백지유가 웃다가도 그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물었다.“설마... 저랑 결혼하기 싫어요?”민진혁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말도 안 돼.”“그럼 아까 그 표정은 뭐에요?”백지유가 입술을 삐죽였다.“싫으면 됐어요.”백지유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내가 해외 나가면 헤어질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마침 구실이 필요했던 거지? 좋아. 그럼 헤어지자!”말을 끝내자마자 백지유가 화를 내며 민진혁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다.하지만 두 사람 힘의 차이는 너무 컸다. 백지유가 한참을 밀어도 민진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팔에 힘을 더 주어 백지유를 꼭 붙들었다.“놔요.”백지유의 눈빛이 금세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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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3화

백지유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투정을 부릴 때면 소녀 특유의 앙큼함이 살짝 묻어났다.민진혁은 한숨을 내쉬며 백지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결혼 얘기를 네가 먼저 꺼내면 어떡해. 청혼은 내가 해야지.”민진혁이 머쓱했는지 코끝을 문지르며 말했다.“반지도 이미 가게에 주문해 뒀어. 아직 찾으러 못 갔을 뿐이지.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네가 오늘 먼저 말할 줄은...”백지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그 말은... 이미 저한테 청혼할 생각이 있었다는 거예요?”백지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민진혁을 바라보면서 물었다.백지유는 시골에서 올라온 자신과 함께하는 게 민진혁에게는 어쩌면 손해일지도 모른다고 여겼기에 늘 더 나아지려고 이를 악물고 버텨 왔다. 민진혁 곁에 서 있을 때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는 마음도 컸다.백지유는 원하는 건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믿었다.그래서 방금 그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큰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이었다.백지유는 늘 자신이 먼저 움직이고, 민진혁은 받아 주는 쪽이라고 여겨 왔다.그런데 민진혁이 이미 반지를 준비해 두었다니, 갑작스러운 행복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깜빡이며 물었다.“정말이에요? 저... 꿈꾸는 거 아니죠?”민진혁이 투박하게 웃었다.“당연히 진짜지. 필요하면 반지 주문 서류라도 가져와서 보여 줄까?”백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눈물 사이로 웃음이 터졌다.“그럼 왜 진작 말은 안 했어요.”민진혁도 난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사실 반지를 찾아온 다음에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오늘 밤 네가 해외에 나가겠다고 해서...”뒤의 말은 아까 이미 했던 이야기였다.그러자 백지유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그럼... 지금 저한테 청혼해요.”민진혁이 멈칫했다.“하지만 반지가 아직….”백지유는 휴지로 작은 종이 반지를 접어 민진혁에게 내밀었다.“이걸로 해요.”민진혁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목욕가운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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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4화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강현우는 침상 앞에 앉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윤하경이 문을 밀고 들어왔지만 강현우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문이 열리자 묵직한 담배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강현우는 원래 담배를 즐겨 피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면 한두 개비씩 물었다. 이 정도의 냄새라면 오늘은 아마도 담배를 꽤 많이 피운 모양이었다.윤하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그제야 강현우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 강현우의 눈빛이 한 번 흔들렸다.“아니야.”강현우가 윤하경의 어깨에 올려진 손을 가볍게 잡으며 물었다.“왜 나왔어? 안 자고?”윤하경은 입술을 적시고 몸을 숙여 턱을 강현우의 어깨에 살짝 얹었다.“잠자리가 바뀌고... 현우 씨가 없이는 잠이 잘 안 와요.”그러자 강현우의 눈매가 미세하게 누그러졌다.“그럼 가자.”강현우는 휠체어를 밀어 앞으로 나아갔다. 윤하경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사이에 두고, 서재를 나서는 강현우의 등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는 모든 오해가 풀리고 예전처럼 돌아온 것 같지만,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 때문에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잠시 서 있던 윤하경이 뒤따라 나갔을 때, 강현우는 이미 침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문턱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왜요?”윤하경이 다가가 물었다.복도에는 은은한 노란 불빛이 가만히 번지고 있었다. 강현우가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올려다봤다.오래 깨어 있었던 탓일까.강현우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피로가 스쳤다. 밤이 깊어지면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연약함처럼 지금 휠체어에 앉아 있는 강현우에게서는 예전의 거침없는 기세 대신 조용한 고단함이 배어 나왔다.“하경아, 나는 아직도... 이렇게 온전치 않은 내 몸으로 떳떳하게 너를 마주할 수가 없어.”강현우의 말에 윤하경은 단번에 말뜻을 알아챘다.아마도 또 한 번 물러서겠다는 뜻이었다.윤하경은 낮게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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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5화

“게다가...” 윤하경은 말끝을 삼켰다. 애초에 강현우가 이렇게 된 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까지 입 밖에 내기 전에, 강현우가 말을 잘랐다.“하지만 난 그게 많이 신경이 쓰여.”강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네 앞에서 침대에 오르는 것부터 누가 안아 올려 줘야 하고, 씻으러 가려면 밀어 줘야 하고, 심지어 화장실도 부축받아야 하는... 그런 쓸모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 그럴 바엔, 차라리 그때... 살아남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어.”마지막 한마디에 윤하경의 손이 축 처졌다.길게 기른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고 선홍색 피가 손끝을 타고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윤하경은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눈앞의 강현우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차라리 그때 살아남지 않았으면...’강현우가 이토록 괴로웠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윤하경은 숨이 막힌 듯 가벼운 호흡조차 버거웠고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린 듯 옥죄어 왔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눈물이 한 알 두 알, 조용히 떨어지는 걸 참아 보려 했지만 끝내 막을 수 없었다.강현우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넋을 잃은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비어 있었고 마치 돌로 빚은 조각상처럼 조용했다.오랜 침묵 끝에야 윤하경이, 심장이 쪼개지는 고통을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알겠어요. 정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윤하경은 옅게 웃고는 돌아섰다.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운 척했지만 어딘가 휘청였다.멀리 가지도 못해, 뒤에서 강현우의 목소리가 불렀다.“사람을 붙여 보낼게. 아니면 날 밝으면 가도 돼.”“괜찮아요.”윤하경은 애써 미소를 띠고 고개만 돌렸다.“제가 여기 있으면 잠도 못 주무실 텐데요. 푹 쉬세요.”말을 남기고 윤하경은 걸어 나갔다.강현우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휠체어 팔걸이를 움켜쥐었다.도드라진 손등의 핏줄이 지금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윤하경은 아래층 거실로 내려가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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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6화

밤길은 어두웠다.게다가 산길은 몇 번이나 굽이쳐 내려가야 했다.차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 소지연은 윤하경에게 전화를 걸었고 잠시 뒤 윤하경이 위층에서 내려왔다.소지연은 조수석에서 내려 윤하경을 꽉 안았다.“하경아, 괜찮아?”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소지연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지하 주차장의 희미한 조명 아래서 금세 울었던 윤하경의 눈이 붉게 부어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윤하경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유호천까지 함께 온 걸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이 밤중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유호천이 가볍게 웃었다.“우리끼리 뭘 그렇게 예의 차려. 게다가...”유호천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원래 형이 하경 씨를 화나게 한 거잖아. 나중에 내가 꼭 한마디 할게.”의례적인 말일 뿐이라 윤하경은 굳이 마음에 담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자 유호천이 문을 닫아 주었고 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소지연이 뒷좌석으로 가서 윤하경의 옆에 앉으려다 문을 잡은 손을 멈췄다.“넌 그냥 앞에 앉아.”윤하경이 낮게 말했다.“밤길이 어두우니까 호천 씨가 운전할 때 길 좀 봐 줘.”소지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석에 올랐다. 지금 윤하경에게는 혼자 숨 돌릴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엔진이 켜지자 차는 별장을 빠져나갔다.짙은 안개 속을 달리자 노란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흩어졌다.그 흐릿한 빛 사이로, 윤하경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뒤엉킨 생각을 가만히 정리했다.산길을 벗어나자 도시의 네온 불빛이 눈부시게 번졌다. 그야말로 과하게 화려했다.차 안도 순식간에 밝어졌다.그 순간, 윤하경의 가슴도 탁 트이는 듯했다. 여러 가지 색깔의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인생은 한 가지 모양으로 굳어 있는 것도, 한 길만 있는 것도 아니구나.’“하경아, 오늘 밤은 내가 같이 있을게.”소지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윤하경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 위층에 침대가 하나뿐이라 너랑 호천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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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7화

방숙희의 손맛은 믿을 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물 국수 한 그릇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윤하경의 앞에 놓였다.“드셔 보세요. 입맛에 맞으실지...”윤하경이 웃으면서 대답했다.“분명 맛있을 거예요.”예상대로였다. 국물은 맛이 깊었고 면은 탱탱했다. 윤하경은 젓가락을 멈출 틈도 없이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그릇을 내려놓은 윤하경이 맞은편의 방숙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아주머니, 내일 일 보신 뒤에는 그만두셔도 돼요. 급여는 반년치를 더 챙겨 드릴게요. 그동안 잘 돌봐 주셔서 고마웠어요. 다시 현우 씨네 집에서 일하고 싶으시면 민진혁 씨에게 이야기해 둘게요. 그대로 돌아가시면 됩니다.”그 말에 방숙희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아가씨,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저를 내보내세요?”윤하경은 방숙희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아니에요. 아주머니는 늘 잘해 주셨어요. 다만 제가...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여긴 다시 못 올 수도 있어요.”“너무 갑작스럽네요.”방숙희는 이를 꼭 다물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살짝 불룩해진 윤하경의 배를 한번 보고는 코끝을 훌쩍이며 말했다.“사모님은 지금 혼자 계시기 어려운 때잖아요. 어디로 가시든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사모님에게 살을 포동포동하게 붙여 드릴 자신 있어요. 곧 태어날 아기도 손이 많이 갈 텐데요.”윤하경의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무 멀어요. 언제 돌아올지도 몰라요. 아주머니는 여기 가족도 있으시잖아요. 그냥... 여기 남으세요.”사실 윤하경이 데려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방숙희는 애초에 강현우 쪽에서 건너온 사람이었다.윤하경은 과거와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미련 없이 단번에 끊어내고 싶었다.방숙희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하경의 말이 맞았다. 방숙희도 가족이 있으니 너무 멀리 따라나서기에는 여건이 쉽지 않았다.“이제 주무세요.”윤하경은 방숙희와 인사를 건네고 바로 침실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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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8화

방숙희가 문을 열자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윤하경 씨.”남자는 안으로 들어와 윤하경 앞에 서더니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건넸다.첫 장에 큼직하게 찍힌 ‘이혼 협의서’라는 제목을 본 소지연과 방숙희가 동시에 윤하경을 바라봤다.윤하경은 담담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 마지막 장을 넘겼다. 굵고 힘 있는 강현우의 서명이 보이자, 윤하경은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펜 좀 줘요.”윤하경이 손을 내밀자 변호사가 곧바로 펜을 건넸다. 윤하경이 서명하려는 순간, 소지연이 손을 눌러 막았고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나를 말릴 거야?”윤하경은 흔들림 하나 없는 눈빛으로 소지연을 바라봤다. 그런 차분함이 오히려 소지연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소지연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냥... 정말로 다 생각이 끝난 거냐고 묻고 싶었어.”윤하경이 조용히 웃었다.소지연은 윤하경의 미모에야 오래전부터 면역이었지만 지금 이 미소를 보는 순간 한 가지 확신이 스쳤다.윤하경은 정말로 강현우를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응. 끝났어.”그러자 소지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나는 네 결정을 전부 지지할게.”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임 없이 서류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마치 이혼 서류가 아니라 이익이 큰 계약서에 사인하는 사람처럼 윤하경의 동작은 빠르고 깔끔했다.사인을 마친 윤하경이 서류를 변호사에게 내밀었다.“여기요. 전달해 주세요. 나머지는 하 대표님한테 맡기겠다고 전해주세요.”변호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윤하경 씨.”변호사가 이혼 서류를 챙겨 나가자 소지연은 한동안 윤하경의 얼굴에서 미세한 흔들림 하나라도 찾으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하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마치 방금의 서명은 윤하경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은 일 같았다.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렇게 빤히 보면 내가 어쩌겠어? 일단 밥부터 먹자. 내가 좀 움직이는 게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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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9화

이게 강현우가 원하는 길이라면 윤하경도 더는 붙잡지 않기로 했다. 서로를 놓아 주는 편이 두 사람 모두에게 낫다고 믿었다.그 말에 소지연이 하려던 말이 목구멍에서 멎었다.한참을 더듬거리다 결국 가늘게 한숨만 내쉬었다.“알겠어. 대신... 무슨 일이든 나한테는 꼭 말해. 숨기지 말고.”윤하경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소지연의 그릇에 얹으며 미소 지었다.“응.”아침을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짐을 쌌다.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새로 마련할 수 있었기에 윤하경이 챙긴 건 오직 몇 가지, 의미가 깃든 물건들이었다.그때 부엌에서 방숙희가 짐을 들고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윤하경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이 가득했다.“사모님...”윤하경이 미소로 답하고 휴대전화를 꺼내 송금했다.잠시 후, 방숙희의 휴대전화 화면에 거액의 입금 메시지가 떠올랐다. 방숙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사모님, 이건 너무 많아요...”“미안해요. 아주머니, 원래는 더 오래 같이 지내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윤하경이 차분히 말했다.“지금 보낸 돈은 제 몫의 보상이에요. 그리고 혹시 다시 강씨 가문이나 하씨 가문 쪽으로 옮기고 싶으시면 제가 연결해 드릴게요.”윤하경과 강현우의 인연은 끝났지만, 민진혁과 쌓인 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정도 도움은 얼마든지 가능했다.짧지 않았던 시간을 떠올리며 방숙희의 눈가가 붉어졌다.윤하경은 까다롭지 않았고 누구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별이 더 마음이 아팠다.방숙희가 훌쩍이며 말했다.“사모님, 꼭... 몸을 잘 돌보셔야 해요.”그러자 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방숙희가 캐리어를 끌고 문을 나서자, 윤하경이 소지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공항까지 데려다줄래?”“이렇게 빨리?”소지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비행기는 몇 시인데?”“두 시간 뒤.”윤하경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현관으로 가 편한 신발을 골라 신었다. 윤하경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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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0화

소지연이 유호천을 힐끗 째려보더니 한참 있다가 코끝을 훌쩍이며 말했다.“하경이야. 이미 떠났어.”“뭐?”유호천이 막 액셀을 밟았다가, 그 말에 바로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끼익!”불쾌한 제동음이 터졌지만 유호천이 귀가 먹을 만큼 크게 외친 소리가 더 컸다.“뭐라고? 떠났다니? 어디로?”“몰라.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갔어. 근데 분명 해외일 거야. 어디인지는... 나도 몰라.”“난 강현우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게 참...”소지연은 나오려던 욕을 삼켰다.아무래도 강현우는 유호천의 사촌 형이었다.결국 소지연은 유호천을 한 번 더 매섭게 노려보기만 했다.유호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속도를 올렸다.집으로 가지도 않고 두 사람은 새벽에 다녀왔던 남산 별장으로 곧장 향했다.낮의 남산 별장은 밤과는 달리 공기가 훨씬 좋았다.유호천과 소지연이 도착했을 때, 어제 윤하경에게 이혼 서류를 전달했던 변호사가 마침 강현우의 별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변호사는 두 사람을 보자 가볍게 고개로 인사하고는 발길을 돌렸다.“형은 어딨어요?”유호천이 문 앞에서 손님을 배웅하던 민진혁에게 물었다.그러자 민진혁이 위층을 가리켰다.“서재요.”유호천이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서 서재 문을 열자, 통유리 앞에 휠체어를 세운 강현우가 보였다.바닥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모여 있었다. 이미 꽤 오래 피운 게 분명했다.기척에 고개를 돌린 강현우는 유호천을 힐끗 보기만 하고 다시 담배를 물었다.긴 손가락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강현우의 등에는 어쩐지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유호천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다가가, 내려다보듯 강현우를 보면서 말했다.“형, 아직도 여기서 담배만 피울 거야? 하경 씨가 떠난 거 알아?”강현우의 손이 잠깐 멈추더니 담담한 목소리가 떨어졌다.“응.”유호천은 앞머리 사이로 비치는 강현우의 눈을 보았다. 파문 하나 없는,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강현우가 낮게 말했다.“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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