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1091 - Chapter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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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1화

이천이 자신이 지은 '운유’라는 도호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용강한의 마음 한켠에 알 수 없는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만일 이육진과 소우연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지만 때로는 하늘의 뜻이란 그런 법이다. 예상과 달리,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용강한이 잔잔한 미소를 짓며 옆을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황자마마.”이천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도포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제자 운유, 사부님을 뵙습니다.”그러고는 절을 세 번, 이마를 세 번 조아리며 큰 예를 올렸다.용강한이 몸을 일으켜 그를 일으켜 세웠다.“황자마마, 제게 그런 예는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하지만 이천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번에 돌아온 것은 사부님께 가르침을 구하는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부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자 함입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세 번,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조아렸다.“그리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용강한이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이번에는 이천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일어났다. 그는 용강한의 은빛 머리카락과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정 도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 도사는 종종 그에게 용강한이 반작용을 어찌 감당했는지 얘기해주었다. 그 순간, 두 여동생이 그에게 친근하게 '외삼촌'이라 부르는 장면을 떠올렸다.그 순간 이천도 진심으로 그 마음을 이해했고, 그리하여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외삼촌…”용강한의 손이 문득 멈췄다. 고개를 돌려 이천을 바라보았고,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떼려 했지만, 이내 그 기억은 스쳐 지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것을 붙잡지 않았다.잠시 후, 용강한이 다시 한번 바둑판 반대편을 가리켰다.“황자마마, 편히 앉으십시오.”이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단정히 앉은 그의 모습은 맑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속세와는 다른 기운이 서려 있었다.“바둑은 둘 줄 아십니까?”“조금은 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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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2화

“사부님, 저는 알고 있습니다.”과거 정 도사는 그에게 도교의 길을 택하게 하려고 한두 번이 아닌, 서너 번씩이나 이 이야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진호범 역시 그가 대황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게 하려 수시로 이 이야기를 들려줬었다.용강한은 바둑알을 집으며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속이 탈 정도로 걱정을 쏟아낸 것이었다. “황자마마께서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불과 반 시진도 되기 전, 바둑판 위는 이미 빼곡했다. 승부가 나지 않은 한 판이었다.이천이 말했다. “사부님께서 이기셨습니다.”그는 알고 있었다.용강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승부'를 염두에 두고 바둑을 두었다는 것을 말이다.용강한이 말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제자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사부와 함께 바둑을 두고, 짧은 말을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그는 사부에게서 깊고 여유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이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강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사부님, 제자는 앞으로 어디서 머무르면 되겠습니까?”용강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흠천감에서 살겠다는 것입니까?”“예, 그렇습니다.”“우선 식사를 마친 뒤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아닙니다. 제자는 이미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그는 다시금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용강한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바둑알들을 천천히 바둑통에 담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저와 함께 지내도록 하죠.”“예.”용강한이 앞장서 걸었고, 이천이 그 뒤를 따랐다.잠시 후 그들은 영은각에 도착했다. 용강한이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 황자마마의 거처는 여깁니다.”이천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강한은 다시 앞서 걸었다. 그들은 여러 개의 궁문을 지나 넓게 트인 공간에 이르렀다. 높이 솟은 건물 위, 큼직하게 새겨진 현명루라는 글자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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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3화

이천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사부님, 아니 외삼촌께서도 함께 식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어마마마께서 외삼촌을 꼭 모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그가 ‘외삼촌’이라고 부르자, 용강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천이 생각보다 도가의 길에 깊게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미세한 기대가 그의 마음을 스쳐지나갔다.용강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장공 스님은 이천을 불문으로 이끌고자 했고, 정도사는 그를 도가의 길로 인도하려 했다.하지만 정작 그는 도가의 길이 그리 훌륭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전생에 그는 반쯤 마비된 마음으로 살아갔고, 현생에서는 정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죽지 않았을 뿐, 사는 것도 아니었다.그래서, 그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좋습니다. 그럼 거처를 정리하고, 이따 함께 가도록 하죠.”“예, 사부님.”이천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뒤, 용강한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배웅했다.그리고 영은각으로 향했다.문을 밀고 들어서자. 안은 이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오롯이 갖춰져 있었다.탁자와 의자, 침상과 서재까지.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그는 용강한이 건넨 책들을 조심스레 탁자 위에 놓고, 손끝으로 책상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한 점 티끌조차 없는 청결함이었다.본래는 직접 쓸고 닦을 요량이었지만, 이 방은 그럴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히 정돈되어 있었다.안쪽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청빛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침대 위 이불은 모서리마저 정확하게 접혀 있었다.옷장 안에는 세탁이 끝난 듯한 도포가 여러 벌 정리되어 걸려 있었다.‘이건… 처음부터 준비해두었던 건가?’하지만 그가 경성으로 돌아온 소식은 오늘 아침에서야 황궁에 전달된 일이었다.황제와 황후에게 더욱 큰 기쁨을 안겨다 주기 위해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이다.그런데 용강한은 대체 어떻게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었을까?이천은 방 안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았다.이상하게도, 전혀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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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4화

“진아, 나는 외삼촌께 도술을 배우고 싶다.”이천의 목소리는 맑고도 또렷했다.“정 도사께서도 외삼촌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진 대인께서도 마찬가지셨어.”경성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용강한'이라는 이름은 사람들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렸다.이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럼, 오라버니는 이미 마음을 정하신 거예요?”“그래.”“정말 너무하셔요. 저도, 언니도, 모두 오라버니께서 저희 곁에 머물러 주길 바랐는데... 누가 알았겠어요. 오라버니께서 외삼촌과 함께 지내시겠다고 하실 줄은...”이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이 결정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거란 예감을 어렴풋이 느꼈다.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 하늘 아래, 세 사람은 흠천감을 나서 문덕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이번 가족 연회는 문덕전에 준비되었고, 이육진은 덕망 높은 대신 몇몇을 따로 초청해 함께 자리를 빛냈다.“황자마마와 공주마마, 용 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태감의 우렁찬 외침이 대전에 울려 퍼지자, 앞자리의 스무 명 남짓한 대신들이 일제히 일어섰다.한때 어사대부였던 경성세, 지금은 좌승상이 된 그는 수십 명의 관료를 이끌고 맨 먼저 일어났다.이천이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도포를 입고 오다니... 황자마마께서 정말 도가에 뜻을 두신다면...’그렇다면 황태자 자리는 어떻게 될까.복잡한 생각이 교차했지만, 우선은 예를 다해야 했다. 그는 맨 앞에 나서 가장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신, 황자마마와 공주마마를 뵙습니다!”어차피 오늘은 황제가 자식들의 태도를 눈여겨보려 마련한 자리였다.이천이 도가에 뜻이 없다면, 자연스레 행동으로 드러날 터였다. 지금은 예를 갖춰두는 편이 나았다.경성세가 무릎을 꿇자, 뒤이어 모든 관료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자마마, 공주마마 만세!”잠시 후, 대전 안은 그 외침이 천장을 울리며 웅장하게 메아리쳤다.상석에는 이육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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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5화

황제가 아직 젊으니, 언젠가는 다시 후사를 볼 줄 알았다. 그런데... 십수 년이 흘렀건만 황후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였고, 황제는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명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다. 신하들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친 상태였다.정말이지, 황제는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보통의 사내라면? 당연히 후궁을 들여 후사를 잇고자 했을 것이다. 대신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황태녀를 세우고자 마음을 굳힌 듯했으나, 황자만 돌아온다면 다시 판단하겠다는 의지도 보였으니 말이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보다는 황태녀가 부족한 법이었다. 황제와 황후뿐만 아니라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황자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그리고 오늘 황자가 입은 도포 한 벌이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단숨에 식게 만들었다. 최소한 경성세는 가슴을 치며 탄식했을 것이다.이번 연회는 겉보기엔 화기애애했지만 각자의 속내는 누구보다도 분명했다.연회가 끝나자 대신들은 흩어졌다.이육진, 소우연, 이천, 이영, 그리고 이진은 함께 영화궁으로 돌아왔다.“천아, 너 머무를 곳은 정했느냐?”이육진이 감정을 눌러가며 물었다.이천이 공손히 손을 모으며 답했다. “아바마마, 저는 흠천감에서 머물 예정입니다. 조용한 곳이 도술을 수련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그가 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방 안을 조용히 울렸고, 그 누구도 말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아직도 도를 닦으실 생각이신가요?”이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그 모습을 보며 이육진은 놀라움과 체념이 뒤섞인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이천은 어릴 적부터 장공 스님 곁에서 자라왔고, 정 도사 또한 도가 사람이었다. 그런 사부들에게 영향을 받은 이천이 세속을 멀리하고자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오늘 그토록 많은 신하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외쳤지만, 이천의 눈빛에는 아무런 동요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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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6화

달빛이 세상을 씻어낸 듯 환하게 내려앉고, 저녁바람에는 은은한 서늘함이 감돌았다. 이진이 이천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오라버니, 흠천감에 계신다 해도 태극궁에서 지내실 수 있잖아요. 태극... 도가에 뜻이 있으시니, 도가 사상과도 꼭 어울리고요.”이천은 살며시 웃으며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그 말도 맞긴 하지. 하지만 이제 막 경성으로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사부님께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사부님... 외삼촌 말씀하시는 거죠?”“그래.”이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외삼촌께서 직접 가르치신다니, 참 힘드실 거예요. 외삼촌은 어마마마를 제일 아끼시잖아요. 당연히 어마마마의 아들이 환속해서 태자가 되고, 훌륭한 군주가 되기를 바라셨을 텐데요.”이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래서였을까. 사부는 언제나 자상하면서도,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선이 느껴졌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셋째야.”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언니, 셋째라는 말은 아무래도 좀 그래요. '진이'나 '진녕공주'라고 해주세요.”이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진아. 오라버니와 긴히 나눌 얘기가 있어. 넌 먼저 돌아가 있거라.”“싫어요.”“대신 근사한 선물을 주마. 네가 원하던 순금 비녀를 주마.”“너무 적어요.”“십이지 동물 장식구까지 함께 주마.”이진이 깊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뭐, 그 정도면 괜찮죠. 오라버니, 그럼 전 이만 돌아갈게요. 내일 또 놀러 올게요.”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그렇게 이진은 궁인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영이 이천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예를 올렸다.“오라버니,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어째서... 왜 모든 걸 마다하시나요? 이 세상의 사내들이라면 황제가 될 기회가 있다면 누구든 탐낼 텐데요.”이천이 담담히 말했다.“나는 원하지 않으니까.”“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한평생 오라버니를 기다려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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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7화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더…”심초운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더 무엇입니까?”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초운을 바라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 자신의 처지… 그는 분명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묻고 있는 것이었다.“이미 아시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으시다면, 어찌해서 지금이라도 돌아서지 않으십니까?”“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시는 공주마마를 보면, 신도 가슴이 아픕니다.”심초운의 눈빛에는 온통 걱정이 가득했다.“신은 공주마마께서 이토록 힘들어하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이영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넌 아직 어려서 모를 거야.”그 말만 남긴 채, 그녀는 궁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이 궁궐에는 후궁이 없고 두 명의 공주만 있었다. 심초운은 줄곧 금융궁에서 자라다가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심부로 돌아갔다. 그래서인지 그는 궁 안을 드나드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고, 대부분의 시간을 이영 곁에서 그녀를 지키며 보냈다.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정… 그가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가슴 한편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전 공주마마보다 겨우 반년 정도 늦게 태어났는 걸요…”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영화궁.소우연과 이육진은 방금 막 뜨거운 정사를 나눈 후였다.소우연은 한참을 누워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육진은 그녀가 옷을 갖춰 입도록 도와주고, 침구까지 새것으로 바꿔주었다.그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하느냐?”소우연이 조용히 말했다.“천이가 돌아왔습니다. 제 마음속 병도 그만큼 나아진 듯합니다. 하지만… 천이는 오직 도를 좇으니,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이육진이 부드럽게 말했다.“우리가 그 아이를 낳은 것은 그저 무탈하게 잘 살아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몸이 건강하고, 삶이 평안하며,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만 하면 돼.”“그렇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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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8화

“너무 좋아요! 언니 고마워요.”이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외친 뒤, 금세 몸을 돌려 이육진과 소우연을 향해 달려갔다.그 모습을 본 이육진은 말리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녀오너라.”너무 순순한 허락에, 이진은 눈을 껌뻑였다.이렇게 쉽게?하지만 곧 이어지는 말에 이진의 표정이 굳어졌다.“다만…”다만?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이지.“아바마마, 말씀하세요.”이진은 곧바로 허리를 숙여 공손히 물었다.이육진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건 네 어미가 말씀해 줄 것이다.”“……”이육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진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소우연이 손을 내밀었다.“진아, 이리 오너라.”이진은 조용히 다가가 어머니 무릎에 살포시 앉았다.“어마마마, 무슨 일이신가요?”소우연은 딸의 머리칼을 곱게 정리해주고, 옷매무새도 매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이번에 언니와 함께 지내는 동안, 언니에게 양보하고 언니를 잘 챙겨줘야 한다. 알겠느냐?”이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소우연을 올려다봤다.왜?왜 동생인 그녀가 언니한테 양보해야 하는 걸까?게다가… 이영은 이제 남제의 주인이 아니던가.“어마마마, 왜 제가 언니에게 양보해야 하죠?”이진은 솔직하게 물었다. 그녀는 모르는 건 곧장 묻는 성격이었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었다.“혹여 네 언니가 여왕이 되는 걸 그리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단다.”“아니에요, 언니는 분명 여왕이 되고 싶어했어요.”“하지만 뭔가 다른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 보였어요. 여왕이 되면 이제 그 일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그게 무슨 일이냐?”이진은 어깨를 으쓱하고 두 손을 내저었다.“어마마마, 저도 알았으면 굳이 수수께끼처럼 말 안 하죠.”소우연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일단 그 이야기는 접어두자. 네 언니도 어느덧 열여덟이니, 8월이면 열아홉이 되는구나. 슬슬 혼사를 정해야 할 때다.”“맞아요. 다른 집 규수들은 열다섯, 열여섯에도 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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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9화

군신의 관계란 바로 이런 걸까?늦은 저녁.이진은 원래 언니 이영과 더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하지만 이영은 저녁 식사 후 상소문들을 검토하기 위해 곧장 서고로 들어가, 얼굴조차 보이질 않았다.하는 수 없이, 이진의 시선은 서고 바깥을 지키고 서 있는 심초운에게 향했다.“공주 마마?”심초운은 느꼈다. 저녁 식사 때부터 진녕공주가 자꾸 자신을 힐끔거리며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이진은 해맑게 웃으며 옆의 정자 쪽을 가리켰다. “초운 오라버니, 잠깐 저기 가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심초운은 서고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이진은 말했다. “언니는 상소문을 검토하시느라 바쁘세요. 저기서 잠깐 이야기만 할 거니까 괜찮아요.”“예, 마마.”너무도 진지하게 응답하는 그의 태도에, 이진은 살짝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정자에 도착하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심초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마음에 둔 이가 있으세요?”“마음에... 두는 이요?”심초운은 순간 얼어붙은 듯 굳어졌고, 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마마, 대체 무슨 뜻입니까?”진녕공주는 이제 열넷도 되지 않았고, 혹시라도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당황스러웠다.그의 표정을 단박에 읽어낸 이진은 손사래를 치며 급히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전 그냥… 남의 부탁을 대신해서 물어보는 거예요.”심초운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없습니다.”“정말요?”이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그럼 저희 언니는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셨잖아요. 언니에게 아무 감정도 없으세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그녀는 분명히 여러 번 심초운이 언니를 바라보는 시선을 본 적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님께서도 두 사람의 인연을 좋게 보시는 듯했고, 그녀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이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심초운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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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0화

심초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주마마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뭐가요?”그는 고개를 다시 저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이영은 항상 자신을 동생처럼, 마음 터놓는 벗처럼 대해왔다. 그런 그녀가 어찌 자신을 택하겠는가.이진은 아직 열네 살도 되지 않았지만, 결코 순진무구한 규수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얼마나 금슬이 좋은지 보아왔고,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좋아하게 되고,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는 것을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그런데 아까 오라버니께서는 마음에 둔 이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다른 낭자를 마음에 두고 계신 건가요?”심초운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시 침묵했다. 황제와 황후께서 어찌하여 이진을 황태녀부로 보냈는지도 의아했다. 그것도 이런 시점에 말이다.결국 그는 고개를 저었다.이진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혹 우리 언니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건가요?”“아닙니다. 저…”“좋아하시죠?”심초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침묵하는 것도, 어쩌면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이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알겠어요. 오라버니는 언니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런데 혹시 언니가 오라버니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시는 거죠?”심초운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진녕공주는 정말 영민했다.어릴 적부터 줄곧 이영의 곁을 따르며 자라온 그였다. 어찌 마음이 없겠는가.이진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요, 오라버니. 하나는 미리 알고 계셔야 해요.”“무엇입니까?”“언니가 나중에 이 나라의 여왕이 되신다면, 다른 남자들도 곁에 둘 수 있어요. 감당하실 수 있으세요?”심초운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그때, 이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언니가 나왔나 봐요. 전 이만 가볼게요.”심초운은 놀란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이영이 서고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토록 오랜 세월, 조용히 바라만 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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