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1251 - Chapter 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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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1화

이진은 눈을 부릅뜨며 주익선을 노려보았다.“그만해. 이만 경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몸을 홱 돌려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더는 주익선을 보지 않았다.처음엔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주익선은,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설마…’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주익선은 이내 곧 커다란 치아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진아, 그럼… 나랑 같이 있는 걸 허락한 거야?”이진은 콧소리를 흘리듯 말했다.“내가 어떻게 널 간섭하겠어.”주익선은 몇 걸음 다가와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그럼 나 안 돌아갈래. 경성으로.”“안 간다고? 네가 원하면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진 대인 그리고 아바마마, 두 분께서 분명 사람을 보내 널 끌고 가실 거야.”“그건 모를 일이지.”“응?”이진은 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무슨 뜻이야?”주익선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보다시피, 내가 숙부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잖아?”이진은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넌, 넌 그냥 잔꾀만 부리려 하는구나.”주익선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난 정말 널 보러 온 건데, 네 말대로라면 내가 무슨 꾀를 부린 게 되잖아. 진아, 억울해서 가슴이 다 아프다.”그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다.“난 늘 널 내 가족처럼 생각했는데, 넌 어떻게 날 그렇게 볼 수가 있어.”주익선은 속이 상했지만, 감히 공주인 이진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만약 이진이 영영 그를 외면한다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테니까.이진은 그의 다급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는 은근히 기뻤으나,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그만해. 더는 말 안 하고 싶어.”주익선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내가 경성으로 안 돌아가고… 몰래 따라다녀도 괜찮겠어?”“하지만 진 대인께서 곧 눈치채실 텐데. 그럼 널 잡아다 매달아 두들겨 패면 어떡하니?”주익선은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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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2화

“그럼 난 갈게.”주익선은 그렇게 말하고는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왔다.밖은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그가 막 뜰을 벗어나는 순간, 정면에서 진호범과 딱 마주쳤다.주익선의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진 숙부님…”딱 걸렸다. 이제 죽겠구나 생각하였다.진호범은 지체 없이 그의 귀를 낚아채 비틀었다.“이 토끼 같은 놈이 감히 공주마마 창문을 타고 들어가?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하마터면 이 일을 선황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아실 뻔했다. 그랬다간 이놈은 진짜로 내시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숙부님! 아파요, 아파!”주익선은 귀를 잡힌 채 질질 끌려 객잔까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진 숙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진호범은 콧김을 세차게 내뿜으며 노려보았다.주 대인 내외는 침착하고 무게 있는 사람들이건만, 어쩌다 그 둘 사이에서 이런 아들이 태어났단 말인가.“공주마마를 좋아하느냐?”비록 혼인한 경험은 없지만, 그 마음 정도는 뻔히 보였다.주익선의 머릿속은 펑 하고 터진 듯 어질어질했다.그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진호범의 시선이 더 깊어졌다.“공주마마를 맞이하고 싶다면, 실력을 보여야 한다.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쳐라.”주익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아, 아뇨! 숙부님, 괜한 말씀 마세요. 저는, 저는 그저…”울상만 짓던 그가 문득 무언가 번쩍 떠올렸다.그리고는 눈빛이 환해져 진호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뭐냐?”수상쩍은 눈빛이었다.주익선이 잽싸게 말을 꺼냈다.“진 숙부님께서 저를 부하로 키워주시면, 저는 평생 따라다니며 선황 폐하와 태후마마, 그리고 공주마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후계자가 생기는 거잖아요?”진호범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황당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네놈, 고작 그따위 생각밖에 못 하느냐?”과연 주진우가 아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매번 말끝을 흐리던 이유를 알 만했다.정말로 구제불능, 썩은 흙덩이에 불과했다.주익선은 머쓱하게 덧붙였다.“진 숙부님,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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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3화

마굿간에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마굿간 옆 작은 집에서 쉬고 있었다. 주익선은 살금살금 다가가 볏짚더미 속에 숨어 자던 주건을 벌컥 끌어냈다.주건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다 곧 입이 틀어막혔다. 알고 보니 주익선이었던 것이다.“도련님.”주건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는 몸에 주익선이 덮어준 큰 도포를 두르고 있었는데, 볏짚더미에 파묻혀 있어서 춥지는 않았지만 냄새가 고약했다.“도련님, 여긴 너무 냄새가 심합니다.”주익선이 낮게 속삭였다.“너는 얼른 돌아가서 어머니께 전해라. 친필로 태후 마마께 청하는 글을 써달라고, 나도 함께 길에 나서게 허락해달라고.”“그건… 부인께서 쉽게 허락하시지 않을 텐데요.”“그러면 이렇게 전해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내가 곧장 절에 들어가 삭발하고 중이 되겠다고… 출가해버리겠다고 전해다오.”주건은 말없이 바라보다가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아니면 아예 용 대인처럼 도포를 입고 세상을 떠돌며 도사 노릇을 하겠다고 전하거라. 장가들지 않는 그런 도사가 되겠다고 말이야.”주건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주인어른다운 발상이었다. 정확히 부인과 대감마님의 급소를 찔렀다.“엄지 따위는 세우지 말고 빨리 가서 전해라.”주건은 하늘에서 눈송이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몸서리쳤다. 이렇게 추운 날, 참으로 고생은 사람이나 말이나 다 똑같다.주익선은 그의 옷깃을 여며주고 도포도 단정히 챙겨주었다.“좋다, 주건아. 이번 일을 잘 마치면 훗날 네 혼례는 내가 반드시 챙겨주마.”“도련님, 염려 마십시오. 당장 다녀오겠습니다.”주건은 금세 기운을 차렸다.“이 눈이 많이 내린다면 행차가 쉽게 떠나지는 못하실 것이다.”“도련님 안심하십시오. 흔적만 남겨주시면 제가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주건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도련님, 곧 좋은 소식 들려드리겠습니다.”주익선은 마굿간 안에서 말을 한 마리 끌어내 주고, 주건이 몰래 빠져나가도록 도와주었다. 모든 일을 마치자 그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눈이 조금 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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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4화

주익선이 침상 위에 드러누워 신음을 내며 말했다.“아이고, 아이고…”“숙부님, 저… 저 정말 아픕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봐서라도 제가 좀 나아진 다음 길을 떠나게 해주십시오.”진호범이 그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시간을 끌려는 꾀병이겠지, 경성으로 돌아갈 마음 따위는 없는 것이었다.밖에서 사각사각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함향이 문을 두드렸다.“도련님.”그 목소리에 진호범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며칠 전 이육진이 그를 불러 함향과 짝지어 주겠다고 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소우연에게 이 일을 알려 본인이 직접 혼인을 주선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었다.주익선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였다. 어째서 함향이 여기까지 온 것일까? 방금 들린 발소리도 여럿이었는데, 혹시 선황과 태후까지 함께 온 것은 아니겠지?“숙부님…”도와달라고 부르려던 찰나, 진호범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진호범은 말을 더듬거리더니 이내 곧 문을 열었다.주익선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익선이가 병이 났다고?”소우연의 목소리와 함께 함향이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왔다.진호범은 얼른 비켜섰다.“아… 예…”그는 감히 함향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잠시 후 일행이 모두 안으로 들어서자, 주익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소우연과 함향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그저… 몸이 조금 좋지 않을 뿐입니다.”함향이 둥근 걸상을 끌어와 침상 곁에 놓자 소우연이 앉아 손을 내밀었다.“내가 맥을 짚어보마.”주익선은 난처했으나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마마, 저는…”“말하지 말거라.”소우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맥을 짚었다.주익선은 숨조차 죽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지금 정말로 병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잠시 후 소우연은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조용히 주익선이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웅크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병이 난 게 아니라 떠나기 싫어 꾀병을 부리는 것이었다.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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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5화

“고맙습니다, 마마.”주익선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순수해서 보는 이의 마음까지 밝아질 지경이었다.소우연은 그의 머리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괜히 자꾸 무릎 꿇지 마라. 네 어머니도 내 앞에선 무릎을 함부로 꿇지 않거늘.”“예, 마마.”“감사합니다, 마마!”주익선은 너무 기쁜 나머지, 떠나는 소우연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감사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함향이 그 모습을 보며 돌아서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라 그런지 기운이 넘쳐흘러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시선을 거두려던 순간 우연히 진호범과 눈이 마주쳤고, 민망해진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급히 소우연을 따라갔다.진호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방금… 나를 본 것이었나? 아니다. 그냥 주익선을 보다가 시선이 스친 거겠지.'“숙부님?”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익선의 얼굴이 코앞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놀란 진호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깜짝이야! 왜 놀라게 하는 것이냐!”“숙부님, 방금 뭘 생각하신 겁니까? 귀까지 붉어지셨습니다.”“별것 아니다.”“정말입니까?”진호범은 그를 흘겨보았다. 어차피 태후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가 있으니 더는 그를 경성으로 내쫓을 일도 없었다.주익선은 더 이상 말문이 막혔지만, 농장에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는 기뻤다.씻고 난 뒤, 주익선은 곧장 이진을 찾아갔다.이진은 원이와 함께 본채로 가서 이육진과 소우연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려던 참이었다.바로 그때 주익선이 급히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진아.”주익선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방금 태후 마마께서 허락해주셨다. 어머니께서도 동의하신다면, 나도 함께 길을 나설 수 있대.”“정말?”이진은 아직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주익선이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야!”“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지만 만에 하나 네 어머니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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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6화

“아이고, 공주마마와 도련님이 어째서 함께 오셨습니까?”간석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이육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소우연과 주익선, 이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소우연이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자, 이육진이 몸을 숙여 다가왔다.“부군, 좋은 사내란 흔치 않은 법입니다. 설령 있다 한들, 또래라고 해도 우리 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습니까?”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옳은 말이라고 했다.소우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가 되어 주익선이 우리와 함께 다닌다면,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혼인을 못 하게 한다 해도 감히 반항할 수 있겠습니까?”“그야 당연히 못하겠지!”“보아하니 진이를 좋아하는 듯하니, 우리와 함께 다니게 하면 혼인 시기를 정하는 것도 결국 우리 뜻대로, 부군께서 마음대로 정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나중에 그들이 천천히 유람하고 돌아올 즈음이면, 경성의 좋은 집안 사내들은 이미 혼인을 마쳤을지도 모른다.차라리 주익선을 붙잡아두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소우연은 그가 제법 괜찮은 사위라 여겼다. 주진우가 정연을 아끼듯, 주익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그녀의 숨결이 난처럼 은은하게 이육진의 귀를 스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이 소우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좋은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진이를 스물다섯 살까지 묶어두어도 되겠구나.”소우연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이진과 주익선이 함께 본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이육진은 생각했다. ‘주익선 같은 놈 하나쯤 손아귀에 넣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 그렇다면 진이는 우리 곁에서 더 오래 지낼 수 있겠지. 오히려 좋은 일이야.’“아바마마, 어마마마.”이진이 먼저 인사를 올렸고, 주익선도 따라 예를 갖추었다.“선황 폐하, 태후 마마.”이육진이 그를 흘끗 보더니 간석에게 말했다. “아침 수라를 올리거라.“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소우연은 옷을 두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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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7화

이육진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로 올라가면 볼 수 있겠구나?”바라보니 그곳에는 완만한 경사가 펼쳐져 있고, 언덕 위에는 정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 정자로 올라가요!”이진이 말하며 치마를 들고 뛰어갔다. 주익선이 서둘러 뒤쫓으며 소리쳤다. “진아, 조심해!”“빨리 와!”“꼭 잡아줄게!”그렇게 두 사람은 앞뒤로 신나게 뛰어갔다. 소년과 소녀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소우연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렇게 즐거운 시절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문득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민수. 전생에 소녀였던 자신이 좋아했던 것은 바로 이민수가 자신에게 보여준 그 환한 미소였다. 소우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연아?”이육진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 물었다.“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아무것도 아닙니다.”소우연은 걸음을 옮겨 진이를 쫓아갔다.이육진도 빠르게 달려가 소우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호범, 간석, 함향이 그 뒤를 따랐다. 간석이 잠시 걸어가다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아이고, 저렇게 뛰어다니시다간 땀을 흘리실텐데… 농장에는 아무도 없어서 돌아가면 더운물도 제때 준비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돌아가서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함향이 말했다. “농장 관리인이 그 정도 눈치도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누가 알겠어요?”간석이 웃으며 함향을 한 번 보고는 기회를 잡으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함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간석의 그 눈빛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간석이 정말로 돌아서 가는 것을 보고, 함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바로 그때, 발을 헛디뎌 온몸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아!”진호범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받쳤다. 간석이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 아닌가.한 명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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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8화

진호범은 온몸이 허둥거리며 가까스로 일어났다.“죄, 죄송합니다”가슴이 요동치며 숨이 막힐 듯했다. 마치 천리를 거스른 죄인처럼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고, 남은 건 터무니없는 불안감뿐이었다. 감히 함향의 눈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함향 역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며 난처해했다.진호범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폐하께서 원래는 자신을 그에게 하사하려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억지로 혼인을 명하지 않으셨을 뿐이었다.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부끄러움에 발끝까지 시큰거렸다.함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켜,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비탈길을 올라갔다.진호범도 천천히 따라가며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방금 전의 일이 마치 꿈속 한 장면처럼 믿기지 않았다.한편, 진녕공주 이진과 주익선은 가장 먼저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하늘과 땅이 맞닿은 듯 광활했다.이진의 눈이 커진 것은 무엇보다 온 산을 붉고 분홍빛, 흰빛으로 가득 메운 동백꽃 때문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동백꽃의 물결 속에서,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매화도 좋아하시지만, 어머니께서 가장 사랑하신 것이 바로 이 동백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늘 어머니께서 동백꽃을 감상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동백이 만개하는 계절이면 장락궁에는 언제나 동백꽃이 가득했다.“어쩐지, 아바마마께서 훗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시겠다고 하신 게 이해가 되네요.”이진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푸른 하늘 아래 수놓인 동백꽃의 바다를 향해 빛나며, 몇 번이고 외쳤다.“정말 아름다워요, 너무나도 아름다워요.”주익선 또한 그 장관에 압도되었을 뿐 아니라, 이진의 눈 속에 깃든 감동에 덩달아 가슴이 벅차올랐다.처음에는 단순히 충동적으로 그녀를 따라온 것뿐이었으나, 선황께서 태후를 위해 준비한 이 광경을 보니 그 역시 깨달았다. 만약 이진이 원한다면, 자신 또한 일생을 다해 그녀를 위해 이와 같은 것을 해내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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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9화

이육진이 말했다. “눈이 이렇게 깊이 쌓였는데, 아직도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느냐.”소우연이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걱정으로 가득했기에, 그녀는 서둘러 두 손을 입가에 모아 목청껏 외쳤다. “진아, 주익선!”그 목소리는 산 아래로 곧장 울려 퍼져나가며 산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메아리가 닿는 듯했다.산 아래에서는 찻밭을 지나던 이진과 주익선이 걸음을 멈추고 정자 쪽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어머니가 또다시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멀리 가지 말아라.”이진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곧바로 목청껏 소리쳤다. “예!”그 목소리는 매화꽃 숲을 뚫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곧 돌아오겠습니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목이 터질 듯했지만 오히려 가슴속은 시원했다.태어나서 이렇게 큰 소리로 불러본 것은 처음이었다.정자 안.이육진은 여전히 아이 같은 순진한 마음을 지닌 소우연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 고여 있었고, 몸은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목소리가 참으로 곱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부군…”소우연의 목소리에는 이미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녀는 온 산을 가득 메운 매화꽃을 바라보았다. 눈더미에 눌려도 꿋꿋이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피어나는 붉고 분홍빛, 하얗고 노란 꽃송이들이 가득하였다.그 모든 색채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조금 떨렸다. 이육진을 바라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치밀어 올랐다.“응? 연아, 마음에 드느냐?”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물었다.“네, 마음에 듭니다.”“훗날 우리가 늙어 걸을 수 없게 되거든, 여기 와서 노후를 보내자꾸나. 좋으냐?”“네… 좋습니다.”소우연은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이육진이 다시 말했다. “그때가 오면 이 정자로 오르는 길을 다시 다듬고 난간도 세워두자구나. 우리가 천천히 손잡고 기대어 걸을 수 있도록 말이다. 더 늙어 발걸음조차 떼지 못하게 되면… 간석이에게 시켜 가마꾼을 불러오게 해야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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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0화

“지금까지는 신경도 안 쓰시더니, 이제 와서 화를 내시는 건 제가 익선이를 잘못 가르쳤다고 탓하시는 겁니까?”정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 역시 자식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온갖 정성을 다해 타일렀건만, 아들놈이 워낙 고집이 세니 속만 태울 뿐이었다.주진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연이 크게 노한 듯했고,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곁에 서 있던 주건을 돌아보며 말했다.“너는 이만 물러가라.”주건은 먼 길을 달려온 탓에 온몸이 먼지투성이였고,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예, 대감마님.”주건은 구원의 손길을 얻은 듯 물러났다. 하지만 속으로는 도련님 부부가 무슨 의논을 할지, 과연 주인마님이 진녕공주를 따라가도록 허락하실지 알 수가 없었다.주건이 나가자, 주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인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부인, 내가 그 아이를 탓하는 게 아니오. 저 못난 놈은 모두 내 가르침이 부족했던 탓이오.”정연은 주진우의 진심 어린 태도를 보고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다.주진우가 말을 이었다.“다만, 저리 곧바로 선황 폐하와 태후마마를 찾아간다면… 체통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지 않소. 그걸 모를 리야 있겠소.”정연 역시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된 입장에서 아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익선이는… 진녕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주진우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실 그 역시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하지만 선황폐하와, 태후마마께서 예전에 심초운을 시군으로 허락하신 건, 그가 어려서부터 황제 곁에서 충실히 공을 세워왔기 때문이오. 늘 두 분의 눈앞에서 차근차근 신임을 쌓아온 자라는 말이오.”주진우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익선이는? 무예만 조금 익혔을 뿐, 변변히 한 일이라곤 없지 않소.”정연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주진우가 한숨을 내쉬자, 정연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서방님… 익선이는 우리 아들이지 않습니까. 그 아이도 서방님처럼 한번 마음을 정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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