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쌍둥이의 백일, 전남편은 눈이 붉어졌다: Chapter 71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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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지금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예전의 나는, 심사언과 소아연이 조금만 가까워져도 가슴이 미어지고, 질투와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진짜... 웃긴다...’심사언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냐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나를 보는 그 눈.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내 머릿속에 뭔가 스쳐가는 게 있었다.“지금 인터넷에 당신 불륜 어쩌고 떠도는 거 봤어. 아마 상대 쪽에서 먼저 터트린 거 같아. 빨리 대응 안 하면 타격 클 것 같아.”나는 심사언이 소아연이랑 잘 되어가는 게 정말 기뻤다.하지만, 두 사람 때문에 내가 뭔가를 잃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심사언이 유부남 신분으로 호텔 방에서 다른 여자와 있다는 게 공개되면... 회사 주가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고, 수천억이 그냥 증발할 수도 있다.‘수천억인데... 그건 내 연구 자금이야. 내 권리라고.’‘그리고 연구는 돈이 정말 많이 들어. 우리나라에서 여성 과학자로 살아남으려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정당한 몫을 무조건 지켜야지.’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금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가 이미 이혼한 사이였다고 인정하는 거고, 소아연이 당신이랑 사귄 건 이혼 이후였고, 소아연은 불륜녀가 아니며, 당신은 나를 기만한 게 아니잖아. 그런 식으로 가야지.”“난 언제든 협조할 수 있어. 당신이 잘 준비하면 돼.”심사언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 남자는 곧 무너져 내릴 듯이 붉어진 눈으로 날 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너무 뜨거운 그 눈빛에, 순간 내가 뭐라도 잘못한 건가 싶었다.그리고 심사언이 왜 이러는지 몰랐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는 앞으로 내가 받게 될 재산만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지금 중요한 건 돈이야. 감정 같은 거, 지금 챙길 겨를 없어.’“지금이 황금 타이밍이고. 언론 대응 부서에 지시해서 바로 움직이게 해. 싫다면 내가 회사 다시 나가서 전부 맡아도 돼.”심사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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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예전에 나는 심사언한테 진심으로 말한 적이 있다. 몇 가지 기억이 정말 안 난다고.그 말에 심사언은 무언가 희망을 본 사람처럼 커다란 걸음을 내디뎠고, 곧장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여보, 진짜였어? 정말 기억을 잃은 거야?”심사언은 지금, 진심으로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잊고, 이혼하자고 그렇게 단호했던 이유가 성립하니까.그래야만, 그가 소아연과 호텔에 있다는 기사가 터졌을 때,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변호하려 한 행동들이 설명되니까.‘심사언이 왜 이러지...?’난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제 와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전에 심사언은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한 번도 믿지 않던 사람이었다.이제 와서 왜 이렇게 내가 기억을 잃었기를 바라는 걸까?‘상관없어. 난 그냥, 이혼만 깔끔하게 하고 싶을 뿐이야.’나는 심사언의 손을 조심히 뿌리치며 말했다.“기억 안 잃었어. 그냥... 잠깐 흔들렸던 거야. 당신이 날 얼마나 신경 쓰는지 보고 싶었을 뿐인데, 당신은 끝까지 나보다 소아연 걱정만 하더라.”“우리가 같이 물에 빠졌을 때도, 당신은 날 두고 소아연부터 구했어. 그 순간, 나도 마음이 식더라고.”그 말에 심사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나는 그가 뭘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내 관심사는 단 하나, 바로 ‘돈’이었다.심사언이 등을 돌리고 나가려 할 때,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던지듯 외쳤다.“지금이야, 언론 대응! 타이밍 놓치지 마!”그 순간 아마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발걸음이 약간 흔들린 것 같았다.심사언이 나가고 나서도, 나는 계속해서 인터넷 반응을 지켜봤다. 주가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일이니, 혹시라도 떨어질 조짐이 보이면 내가 직접 개입할 생각이었다.‘내 몫으로 계산해 둔 돈, 이혼할 때 단 한 푼도 깎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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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심사언과 소아연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심사언은 소아연을 무척 아꼈다. 특히 늘 소아연을 먼저 챙겼고, 나보다도 그녀를 위해 더 많이 움직였다. 위험한 순간에도, 먼저 손 내밀어준 대상은 내가 아닌 소아연이었다. 심사언이 소아연에게 그간 해준 것들은 그냥 친구 사이엔 도저히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해주는 건, 그건... 사랑 아닌가?’‘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답답한 마음에 내 머리를 감싸 쥐던 그때, 해외에 의뢰한 민간 조사기관의 메일이 도착했다. 소아연이 유학 중 겪었던 일들이, 상세한 사진과 기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보고도 믿기 힘든 내용. 처음 몇 장을 본 순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건... 진짜... 막장이 따로 없네.’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자극적인 정보들. 소아연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심사언이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는지... 그 모든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심사언은 정말 소아연을 사랑했지만, 그녀와는 절대 함께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은, 진짜였지만 금기였던 거구나.’모두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심사언은 누구보다 정확히 선을 긋고 있었다. 그게 심사언을 괴롭혔고, 동시에 소아연을 거부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심사언이 그렇게까지 자존심을 내세웠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심사언과 소아연 사이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 절대 아무 일도 있을 수 없는 관계였다.만약 내가 이걸 예전에 알았다면... 아마 당장이라도 울면서 심사언을 찾아가 품에 안겼을 것이다.그리고 말했을 거다. 미안하다고. 당신을 오해했다고.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설령 내가 심사언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 해도, 그게 모든 걸 용서할 이유는 될 수가 없었다. 심사언이 소아연과 육체적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해서, 내게 준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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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아연 씨, 제발 진정해요. 다치면 안 돼요. 이번엔 안 됐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김은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소아연은 더 폭발했다.“다음? 진짜 다음이 있다고 생각해? 진짜?” ‘이 바보야... 내가 심사언이 어떤 사람인 줄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심사언은 같은 실수 두 번은 안 해. 다시는... 그 사람이 술에 취해 나한테 마음의 문을 열 일은 없어...’ 그날 밤처럼, 소아연이 그렇게 쉽게 심사언의 곁으로 갈 기회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심사언과 아무 일도 없었다면... 선을 넘지 않았다면... 난 그 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심사언은 언제나 소아연에게 다정했다. 뭐든지 일단 들어주고, 먼저 감싸주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소아연이 좀 서툴렀을 뿐인데도, 심사언은 아무 말 없이 넘겼다. ‘아무리 나한테 잘해주고, 다정해도 그걸로는 부족해!’‘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난 이 사람 자체를 원해!’‘심사언의 여자가 되고 싶어. 이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단 말이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아연은 심사언과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그 현실의 벽을 떠올릴 때마다, 온몸이 들끓는 듯한 불안과 짜증에 휩싸였다.그 벽은 그녀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마치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만 일으켰다.‘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왜 그때 내가 그런 짓을 했지?’‘왜 하필... 그런 방식이었을까...’‘내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고이설 따윈 없었을 텐데...’ “그냥... 조금 더 기다리면 또 기회가 있을 수도 있어요.” 김은빈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도 알았다. 심사언의 성격상, 이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다음 기회 같은 거 없어. 하지만 다른 방법은 있겠지.” 소아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심 대표님은 아연 씨에게 분명히 마음이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너무 서둘러서 흔적도 많이 남겼는데, 그분은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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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나는 충분히 준비했고, 이제는 마음의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구은호에게 연락했다. 정지호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구은호가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는 길 내내, 나는 너무 긴장해서 심호흡만 벌써 수십 번은 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구은호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까지 긴장 안 해도 돼. 이설 씨는 정 교수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잖아요.”“그래서 더 무서운 거잖아요.” ‘교수님... 날 얼마나 아꼈는데... 난 그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으니까.’ 나는 앞으로는 다시 정지호 교수님 앞에 얼굴을 들고 나설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전, 카페에서 우연히 들은 말. 정지호 교수님이 여전히 내가 연구에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난 끝까지 도망쳤을 거다.내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자, 구은호가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요. 정 교수님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씀이면 충분하잖아요.”나는 그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마치 누군가 외도를 목격하고 들이닥친 듯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심사언이 소아연을 부축한 채 차에서 막 내리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심사언은 나와 구은호를 보자, 금방이라도 뛰어올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팔에 기대 선 소아연의 모습이 너무도 위태로워, 심사언은 차마 쉽게 손을 뗄 수 없었다.그 모습이 참... 우스꽝스러웠다.‘저것 봐. 둘이 사이에 아무 일 없다고 말한들, 그게 뭐가 중요해?’ ‘다른 여자를 그토록 아끼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주면서... 나한텐 늘 날카롭기만 했던 남편...’ ‘그런 남편을, 난 어떻게 그렇게 오래도 견뎠을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는데.’내가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심사언은 소아연을 부축한 채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날 밤, 비틀거리며 떠났던 그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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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심사언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소아연이 자기 배를 손으로 잡고 힘없이 중얼거렸다.“사언 오빠... 나, 배가 너무 아파...”그 한마디에, 심사언은 마치 모든 걸 잊은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곧장 소아연을 두 팔로 안아 들고,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날 노려보았다.“당신, 이혼서류 깔끔하게 받고 싶으면, 다른 남자랑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으로 가서 나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얘기하자.”이 말과 동시에, 그는 소아연을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눈을 굴렸다.‘뭐라고? 진짜, 저게 사람이야?’ ‘기다리라고? 웃기고 있네. 내가 그땐 완전 제정신이 아니었지.’심사언은 늘 그랬다. 내게는 모든 걸 요구하면서, 본인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날 구속하면서 다른 여자에겐 자기 손끝까지 아낌없이 내주는 사람.‘참 잘도 참았다, 그 세월을.’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은호가 조용히 말했다.“이설 씨, 그 사람 말에 휘둘리지 마요. 여긴 법으로 움직이는 사회잖아요.”“네.”이상하게도, 심사언이 나타나 그렇게 난리를 치고 간 뒤로, 조금 전의 그 긴장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이렇게 된 거,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어요.” 구은호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걷히면,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지.’하지만 정지호 교수님 댁 문 앞에 다다르자, 내 발은 저절로 멈췄고,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구은호가 뭔가 말을 하려던 찰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설 씨?”한 중년의 여성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겨우 기억났다.‘서희정의 엄마, 주미선 여사구나.’아무 말도 하기 전, 주 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잘됐다. 나 때마침 이설 씨를 찾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이따가 이설 씨는 우리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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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F학점이 싫으면 공부를 더 해요. 여기 와서 편법 쓰지 말고.”정지호 교수님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한마디에, 나와 구은호는 동시에 눈을 마주보았다. ‘설마... 진짜로 누가 정 교수님한테 로비를 시도한 거야? 간도 크네.’정지호 교수님은 서화대학교에서 냉철하기로 유명한 원칙주의자였다. 누가 어떤 ‘집안’이든, 무슨 대단한 연줄을 대든, 정지호 교수님의 기준 앞에선 전부 무용지물이었다.대체 누가 이런 무모한 짓을...? 혹시 교수님이 잠시 강의 안 하셨을 때 들어온 신입생인가?정지호 교수님은 한동안 강의를 내려놨다가, 최근 학교의 요청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고 신입생 중 교수님을 잘 모르는 학생이 있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그때, 선물을 들고 서 있던 여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숨이 막힌 듯 얼어붙었다. ‘서희정? 이런 우연이 다 있나?’‘아까 서희정 어머니 주 여사를 봤던 게 예고였던 건가?’서희정은 나를 보자마자 한순간 굳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곧 창백해졌다.서희정, 우리 집에서는 ‘서화대 수석 출신’, ‘학벌 좋은 고스펙 예비 새언니’로 포장된 인물. 그런 그녀가 지금, 정지호 교수님에게 선물을 들고 와서 로비하려다 걸린 상황이라니.그 뒤를 따라 문밖에 서 있던 주미선이 재빨리 달려오며 목소리를 높였다.“희정아, 잘 됐다! 네가 이 못된 시누이 혼 좀 내줘라. 내가 네 시누이에게 좋은 혼처 소개해 준다는데 제가 뭔데 거절이야?” “네 외삼촌 아들이 누구야? G국 유학에 복수 전공 박사야! 그런 사람 귀한 줄 모르는 거야!”‘역시 또 시작이네.’주 여사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기가 찼다.그 집안은 정말, 박사 학위 하나면 세상 전부를 다 가졌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내가 이혼녀라는 이유 하나로, 온갖 말을 퍼붓는 주 여사의 태도는 익숙하면서도 역겨웠다.정지호 교수님은 처음엔 서희정을 보며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씁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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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정지호 교수님은, 보기 드물게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2층짜리 단독주택 안은 온통 꽃향기로 가득했다. 거실, 복도, 심지어 계단 아래 구석까지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피어난 꽃들로 가득했다.지금은 겨울인데... 여긴 마치 봄이 한창인 4월 같다.처음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이 공간에 들어서면 ‘지금 다른 시간대로 시간여행을 왔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교수님은 아무 말 없이 들어서자마자 꽃들 사이로 들어갔고, 우리가 뒤따라온 것도 모르는 듯 묵묵히 물을 주기 시작했다.“교수님...”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다가갔다.교수님은 여전히 시선을 주지 않고, 코웃음을 내뱉었다.‘나가라고는 안 했으니까, 아직 기회는 있는 거지.’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며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교수님, 저 진짜 물 주는 거 잘해요! 이래 배도 제 손이 죽어가는 식물도 살리는 손이거든요!”교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도, 내가 교수님의 손에서 물뿌리개를 조심히 받아들자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됐다... 이건 허락이지. 교수님 스타일 내가 알지.’그러자 교수님은 이번엔 차가운 코웃음이 아닌, 짧고 건조한 웃음소리만 남긴 채 구은호를 데리고 거실로 가 버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날 무시했다.‘근데 교수님은... 왜 이렇게 귀엽지. 저 성격... 진짜 고양이 그 자체야.’...며칠 전, 심사언은 분명 나한테 말했었다. ‘기다려. 나중에 얘기하자.’ 나는 그가 정말 뭔가 이야기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 한구석을 비워놨다. 그런데 기다리기는커녕, 뉴스에서는 심사언이 아픈 소아연을 위해 치료차 전세기를 띄워 해외로 출국한다는 기사가 떴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끝없이 울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미칠 듯한 외로움에 잠식당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나는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고, 애초에 다 잊어버리기로 했다....밤이 되자, 오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릴 적 우리 남매 사진이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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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그러니까요, 교수님. 제자의 도덕적 수준이 이 정도로 형편없으면, 교수님의 교육 방식도 한번 점검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사언 형이랑 아연 누나는, 어릴 때부터 서로밖에 모르던 사이였어요.”“중간에 고이설 씨만 없었으면, 둘은 진작 결혼했을 거예요.”“지금도 형이 얼마나 아연 누나를 챙기는데, 고이설 씨는 진짜 양심도 없나 봐요.”“교수님, 어느 학교 소속이신지 모르겠지만, 이런 학생 키우셨으면 저희가 감사패 하나는 보내드려야겠네요?”내 이혼 이야기는 아직 대중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할머니 생신 때, 심사언은 분명 ‘소아연과는 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정리하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소아연과 내가 동시에 물에 빠졌고, 그런 그가 구한 사람은 내가 아닌, 소아연이었다.그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기사며 소문이며... 온통 그 둘 얘기뿐이었으니까.며칠 사이에, ‘심 대표가 소아연 씨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소문이 온 커뮤니티를 뒤덮었다. 연인이라는 공식 발표가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이미 둘을 ‘운명’이라 불렀다.나는 그저 ‘이혼을 못 하는 이유가 재산 때문’이라는 서사 속의 ‘집착녀’로 소비됐다.심사언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그래도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챙기는 건 아니지.”“그러니까... 이혼도 하지 않았잖아. 다른 여자랑 그렇게...”“...”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심사언의 입장을 이해했다.“그렇게 많은 자산을 가진 심사언이, 이혼 한 번에 재산 절반을 내줘야 한다고?” “그렇지? 그 사람 10조 이상의 재산의 반을 뚝 잘라 나눠줘야 하니, 그건 누구라도 쉽게 결정 못 해.” “...”많은 사람은 재산을 지키려는 선택이라며, 현실적인 남자라고, 오히려 심사언의 입장에 섰다.그리하여 내가 끝내 심씨 가문 안주인의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 소아연과 그 무리는 나와 정지호 교수님을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조롱하기 시작했다.정지호 교수님은 자기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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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그 ‘끝장을 본다’는 건...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죽자는 소리야, 아니면 장난이라도 치자는 거야?” 소아연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손끝으로 입을 가렸다. 그 웃음, 너무 가볍고 너무 비웃는 듯했다. ‘저 눈빛... 날 완전히 하찮게 여기네.’ 마치 내가 무슨 한 손으로도 으깨버릴 수 있는 벌레라도 되는 듯, 눈길조차 아깝다는 표정.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소아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 있는 ‘노란 머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노란 머리’는 곧장 다른 사람들을 선동해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게 했다. “이설 누나! 정지호 교수님 이제 연세도 있어서, 살짝만 부딪혀도 몇 달 병상에 누우실걸요?” “치료비야 뭐, 내가 내라면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까...”“근데 누나가 그렇게 분위기 못 읽고 계속 버틴다면, 내가... 약간의 교훈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 순간, 내 눈빛이 칼날처럼 차가워졌다.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인간들이 우리 교수님께 손끝 하나 못 대게 할 거야!’ “소아연, 그렇게 죽고 싶어? 내가 기꺼이 도와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비웃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왜? 아직도 몰랐어? 나, 심사언이랑 이미 이혼합의서 썼고, 이번 달 말이면 공식적으로 끝이야.” 우리를 에워싸려던 그 무리는 그 말에 모두가 굳어버렸다. 누구도 내가 이런 걸 입 밖에 낼 줄 몰랐다는 듯. 소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진짜로 이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녀는 내내 내가 이혼을 미끼로 심사언을 붙잡으려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떠보듯, 협박하듯 이혼 합의서 수정까지 강요했다. 내가 재산이라도 가져갈까 봐, 단 0.01%의 가능성도 없애려 했다. 결국, 그녀는 나를 아예 바닥에 짓밟으려 한 거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직접 공개적으로 이혼을 선언하자, 상황은 대혼란에 빠졌다. 나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이미 끝난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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