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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쓰레기의 모든 챕터: 챕터 991 - 챕터 1000

1008 챕터

제991화

배건 그룹 회의실의 공기는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배서준이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그 어떤 말도 임원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자리한 임원들은 그룹의 핵심 인원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고개만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대답은커녕 눈길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배서준의 가슴속에서는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대표로서의 위엄을 지켜냈다.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흩어진 민심은 몇 마디 말로는 다시 모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 번거롭게 느껴지던 넥타이를 잡아 풀어 던졌다.창밖 하늘은 잔뜩 흐렸고 그의 마음 또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곧 휴대폰 화면이 번쩍이며 메시지가 도착했다.배건 그룹의 일부 프로젝트 협력사들이 경쟁사로 넘어갔다는 보고였다.그리고 그 배후에는 다름 아닌 강연찬이 이끄는 자회사가 있었다.“강연찬...”배서준은 이를 악물며 이름을 내뱉었다. 눈빛이 차가웠다.바깥에선 마틴이 노리고 안에서는 강연찬이 칼을 꽂는다.이건 그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겠다는 뜻이었다.그는 결심했다. 강연찬을 직접 만나야 한다.약속 장소는 은밀한 다실이었다.몇 분 먼저 도착한 그는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방 안은 은은한 차향으로 가득했지만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진 못했다.정시에 들어선 강연찬은 몸에 딱 맞는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가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단번에 무겁게 바뀌었다.“배 대표님,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반박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배서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별말씀을. 오늘 자리는 마틴 그 늙은 여우를 어떻게 상대할지 상의하려 마련한 겁니다. 대책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얘기 아니겠습니까.”강연찬은 자리에 앉아 찻잔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더니 한 모금 가볍게 넘기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배 대표님께서 좋은 묘안이라도 있으신가요?”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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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뭐라고 대답했어?”남설아의 손끝이 강연찬의 따뜻한 손바닥 안에서 살짝 움직였다.“협력하려면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했지.”강연찬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날 이용해 칼을 휘두르려거든, 그 칼이 움직일 마음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할 테니까.”남설아는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따뜻한 체온과 안정적인 심장 박동을 느꼈다.“배서준이라는 사람, 목적만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아. 조심해야 해. 괜히 배건 그룹 문제를 당신 쪽으로 떠넘길지도 몰라.”강연찬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으며 낮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설아야. 배건 그룹이 이설 그룹에 짐을 지우게 두진 않을 거야. 마틴 쪽은 유 비서가 이미 해외 라인을 통해 세탁 자금의 핵심 증거를 잡아냈어. 머지않아 누가 진짜 힘을 쥐고 있는지 알게 되겠지.”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칼 위로 코끝을 스치듯 닿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이런 더러운 일은 내가 맡을게. 넌 이설 그룹만 잘 지켜.”“응.”남설아가 짧게 대답했다. 배서준과 마틴 때문에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졌다.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배씨 가문의 저택.서도현은 정갈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누나 보러 왔어.”집사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지만 눈빛은 자꾸 흔들렸다.거실에서 꽃가지를 다듬던 서유라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네가 웬일이야?”“그냥 누나 보고 싶어서 왔지.”서도현은 과일 바구니를 건네며 시선을 재빨리 저택 안쪽으로 굴렸다.“매형은? 회사 일?”“응, 회사 일이 바쁘잖아. 몰라?”서유라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아, 그럼 나 옛날에 쓰던 방 좀 보고 올게. 그대로 뒀지?”서도현은 말끝을 흐리며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갔다.“도현아, 너...”서유라가 불렀지만 이미 그는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배서준의 서재는 평소 잠겨 있었지만, 서도현은 준비가 돼 있었다.주머니에서 가느다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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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문자는 아주 짧은 단 한마디였다.“마틴을 조심해.”남설아가 믿어줄지, 아니면 이게 배서준을 배신하는 짓인지, 서유라는 알 수 없었다.다만 분명한 건, 자신에게도 퇴로가 필요하다는 사실뿐이었다.강연찬의 사무실.기술 책임자가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강 대표님, 이거 꽤 까다롭습니다. 역추적해서 출처를 찾기 힘들더군요. 그런데 해킹해서 빼낸 데이터 중에 암호화된 지시 코드가 있었습니다. 그게 배서준 개인 PC에 숨겨둔 폴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강연찬은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시선이 멈춘 곳엔 해외 익명 계좌들 사이의 거액 자금 거래 명세가 있었다. 시기도 공교로웠다.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낮게 말했다.“배서준, 생각보다 배짱이 크군. 이 자료들은 전부 백업하고 최고 단계로 암호화해. 회사 내부뿐 아니라 이설 그룹 쪽 보안 체계도 전부 최고 수준으로 올려.”“알겠습니다.”책임자가 나간 뒤, 강연찬은 전화를 들어 남설아에게 걸었다.“설아야, 배서준 쪽에서 새로운 걸 건졌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해.”간단히 자금 문제를 설명했다.잠시 정적 후, 남설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건 제 발등에 불붙이는 거야. 마틴이 자기 뜻대로 휘둘릴 인물이라고 착각한 거지.”“그 화를 결국 누가 입을지는 곧 알게 되겠지.”강연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묵직한 압박이 담겨 있었다.배서준의 저택 역시 긴장감이 감돌았다.내선으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이설 그룹 사람들이 유럽에서 마틴의 옛 거래처를 접촉하고 있었다.“강연찬!”배서준의 손에 쥔 만년필이 두 동강 났다.며칠 전 그가 내뱉던 협력이 가능하다는 태도는 지금 생각하면 모두 계산된 연기였다.강연찬은 애초에 배서준을 밀어내고 혼자 신재생에너지 판을 삼키려 한 게 아니었을까? 심지어 마틴의 네트워크까지 가로채려 한다니!협력 따위는 이제 없다. 남은 건 노골적인 힘겨루기와 쟁탈뿐이었다.배씨 가문 저택.며칠째 서유라는 이유 모를 불안에 시달렸다. 그날 서도현이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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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배서준은 밤늦게 집에 돌아왔고 거실엔 창백한 얼굴의 서유라가 기다리고 있었다.“배서준,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그녀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USB를 내밀었다.“이거 좀 봐.”배서준은 무심히 받아들고 컴퓨터에 꽂았다.파일이 하나둘 열리자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거실 공기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서유라는 조마조마하게 두 손을 움켜쥔 채 그를 바라봤다.“오늘 서재에서 찾은 거야. 서도현이 남긴 거 같아. 서준아, 마틴은 우리 배건 그룹을 이용하려고...”“서도현이 남겼다고?”배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서도현이 내 서재에 들어온 게 언제야? 넌 어떻게 알았어?”목소리엔 한 치의 온기도 없었다.“며칠 전, 도현이 집에 왔을 때... 난 그때까진 눈치 못 챘어.”서유라는 기가 눌린 듯 더듬었다.“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배서준, 제발 봐. 마틴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안 돼!”배서준의 입가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웃음을 짓는 게 아니었다.“내가 보기에는... 너랑 네 동생이 짜고 날 속이려는 것 같은데? 아니면 벌써 남설아 쪽에 얘기 다 해두고 이걸로 조건을 걸 생각인 거야?”서유라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얼어붙었다. 그녀는 배서준을 멍하니 바라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그렇게 의심해? 난 오직 너를 위해, 배씨 가문을 위해 움직였어. 그런데 날 이렇게 몰아붙여?”눈물이 금세 차올랐다.“날 위해서?”배서준의 말투엔 가시가 박혀 있었다.“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너 서유라는 깨끗할 수 있어? 서도현은 네 친동생이고 마틴의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전혀 몰랐다고? 지금 이걸 내놓은 건 네 꼬리가 밟힐까 두려워서 미리 발 빼려는 거 아니야? 아니면 남설아한테 팔아넘겨서 살길을 열어두려는 거야?”그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서유라의 불안,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붙들고 싶었던 희망조차 그의 눈엔 모두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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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집에 들어선 강연찬의 눈에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던 서유라가 들어왔다.남설아가 곧장 강연찬을 향해 눈짓했다.“배서준 의심이 너무 심해. 지금 저 사람을 다시 돌려보내면 더 안 좋아질 거야. 게다가 USB 얘기가 마틴 귀에 들어가면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거고.”남설아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다.강연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여기 두는 건 위험해. 강씨 가문 본가 쪽이 조용하고 보안도 확실하니까, 당분간 거기 머무르게 하는 게 낫겠어.”남설아가 서유라 쪽을 바라봤다. 이미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한 서유라는 그저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서유라를 안전하게 보내놓은 뒤, 남설아와 강연찬은 차를 몰고 나왔다.“이번엔 배서준이 제대로 화를 입을지도 몰라.”남설아가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어둑한 조명이 차체 위로 흘렀다.막 차를 세운 순간, 옆에 있던 검은 승용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얼굴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곧장 이쪽 차 창가로 다가왔다.강연찬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정면만 응시했다.남자가 차창을 두드리자 남설아가 유리창을 조금 내렸다. 낮고 느린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마틴이 서쪽 구역에서 굴리는 사업... 그게 가장 큰 약점이자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된다고 여기는 구역이지.”그 말과 함께 남자는 명함 한 장을 내밀고 곧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남설아는 명함을 들여다봤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송우민. “송우민은 바닥부터 올라온 인물이고 정보력은 확실해. 송우민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서쪽 구역은 분명 우리가 발을 들여야 할 곳이야.”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차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엔진 소음만이 낮게 들려왔다.“서쪽 구역의 사업이 마틴의 급소라는 걸 아무 근거 없이 말했을 리 없지. 우리 쪽 사람들이 여기에 발을 들여야 해.”남설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송우민이 손을 내민 만큼 도움을 받는 게 맞아. 마틴의 밑천은 하루라도 빨리 드러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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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마지막 사진은 한 문서의 일부가 확대된 것이었다. 글씨는 또렷하지 않았지만,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암시장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 순간, 배서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더 불안한 건 발신자의 IP 주소였다. 보안 프로그램이 추적한 결과, 출처는 이설 그룹 산하 서버였다.‘남설아? 서투른 조작일까, 아니면 경고일까? 혹은 마틴이 일부러 자신을 떠보는 건가?’확신할 수 없는 의심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마치 누군가 손아귀로 심장을 움켜쥔 듯 답답하게 죄어왔다.책상 위, 최종 계약에 서명하려고 준비해둔 만년필은 말없이 놓여 있었다.며칠 뒤, 한 업계 포럼.강연찬은 다른 기업인과 담담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하던 배서준의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마틴의 사업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강연찬의 말투는 차분했다.“서쪽 구역 투자 명세를 확인해봤는데, 꽤 흥미로운 파트너들이 보이더군요. 정상적인 사업가라면 곱씹어볼 만한 기록들이죠.”상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렇습니까? 이번엔 정말 제대로 투자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겉모습은 언제든 다르게 포장할 수 있죠.”강연찬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멀리서 지켜보던 배서준은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그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강연찬은 분명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익명의 메일, 그리고 지금 이 대사...남설아를 겨냥해 세운 계획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강연찬의 말은 명백한 신호였다.“배서준이 흔들리고 있어.”그날 밤, 강연찬이 말했다. 시선은 남설아에게 고정돼 있었다.“메일에다 내가 던진 말까지 더하면 이제 더는 마틴을 전처럼 신뢰하지 못해. 서유라 얘기를 핑계로 배서준을 만나. 마틴에 대한 속내를 떠볼 수 있을 거야.”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옷가지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의 말대로 배서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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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남설아의 손가락이 차가운 서류철 위에서 멈췄다.‘바로 이거야!’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거칠게 뛰었다.“독점 협력 계약 초안”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혔다.숨을 죽이고 최대한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애써가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휴대폰 셔터는 쉴 새 없이 눌렸다.협력 범위, 일정표, 자금 흐름... 그리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페이지, 마틴이 배건 그룹의 이설 그룹 지분 확보를 지원한다는 약속까지 찍었다.그 순간, 팔꿈치가 책상 모서리를 스치며 얹혀 있던 문진을 건드렸다.“쾅!”옥으로 된 문진이 책상 위에서 떨어지며 조용한 서재 안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남설아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손에 쥔 서류가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대표님? 안에 계세요?”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발걸음이 문 앞에 멈추어 섰다.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본능적으로 서류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대충 펴놓았다.집사는 몇 초간 기다리다가 대답이 없자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발걸음을 옮겼다.남설아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황급히 문진을 제자리에 올려놓았다.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곧장 서재에서 나가는 건 위험했다. 너무 티가 났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은 듯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막 복도 모퉁이를 돌자 배서준이 커피잔을 들고 계단을 오르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부딪칠 뻔했다.“너...”그의 미간이 곧바로 좁혀졌다. 시선은 남설아의 얼굴과 그녀 뒤쪽 열린 서재 문을 번갈아 훑었다.가슴이 철렁했지만, 남설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왜요? 서준 씨가 안 보이는 데 자리를 비우면 실례일까 봐 그냥 있었어요.”배서준은 낮게 대답하고는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남설아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어 얼굴을 적셨다.거울 속 얼굴은 창백했다.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꾸민 뒤에야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복도에는 이미 배서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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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검은 차량 세 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뒤를 따랐다.처음엔 우연이라 자신을 스스로 안심시켰지만, 그 차량까지 터널로 함께 들어서자 의도가 뻔히 드러났다.남설아는 두 손의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어쩌지? 무조건 뚫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던 찰나, 터널 출구 쪽에서 불빛이 번쩍이며 통제선이 보였다.거기에는 ‘터널 점검, 임시 폐쇄’라는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었다.‘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뒤따르던 검은 차량도 속도를 줄이며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그때, 제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차창을 두드렸다.“남설아 씨 맞으시죠? 강연찬 대표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남설아가 영문을 파악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몇 명이 빠른 동작으로 그녀를 반짝이는 방탄차 안으로 안내했다.손발이 척척 맞는 움직임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자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니 짙은 선팅 너머로 강한 빛줄기들이 어지럽게 스쳐 갔다. 몇몇 인물이 바닥에 제압당하는 모습이 보였다.그중 한 사람은 서도현이었다.‘저 사람이 왜 거기에...?’강연찬이 그물을 참 넓게도 친 모양이었다. 경찰의 적외선 카메라 장비가 밤하늘을 가르며 휙 스쳤다.일부 인물들의 손에 든 위험한 물체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경적과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고 방탄 차량은 매끄럽게 터널을 빠져나왔다.차 안에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남설아는 긴 숨을 내쉬며 가방 속을 더듬다 작은 USB 하나를 발견했다. 차량 내 비치된 노트북에 꽂아보니 하나의 음성 파일만 들어 있었다.클릭하니 잡음 섞인 배경음 속에서 들려온 두 남자의 목소리는 또렷했다.“배서준 씨, 이설 그룹 그 큰 덩어리, 우리 어떻게 나눌까요?”마틴의 목소리였고 특유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난 남설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어요.”배서준의 목소리는 살얼음처럼 차가웠다.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충격적이었다.이설 그룹을 어떻게 뜯어 삼킬지, 방해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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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배서준은 어떻게든 해명하려 했다.“오해라니?”차갑디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회의실 구석에서 있던 주원 그룹 파견 대표, 평소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젊은 인사가 천천히 일어섰다.그는 휴대폰 화면을 배서준 쪽으로 내밀었다.“배 대표님, 방금 익명으로 받은 메일입니다. 여기 보시죠. 마틴 씨와 함께 클럽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사진, 시점이 딱 기술 협력 비용이 승인된 직후입니다. 아직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요?”그는 말을 이어가며 곧장 메일 내용을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사진 속 배서준과 마틴은 환하게 웃으며 건배하고 있었고 배경만 봐도 정식 비즈니스 미팅 장소가 아님은 분명했다.첨부된 장부 기록 몇 장은 얼핏 애매하게 작성돼 있었지만, 여기에 모인 이사진들은 모두 잔뼈가 굵은 원로들이기에 한눈에 문제를 알아챘다.배서준은 화면 속 사진을 똑바로 보며 핏기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듯 꽉 막혔다.모든 게 끝났다. 머릿속엔 오직 그 말만 맴돌았다.옆자리에 있던 문영도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름투성이 얼굴에 실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쉰 목소리로 무게감 있게 말했다.“나는 즉각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배서준 대표의 CEO직을 해임할 것을 제안하네. 동시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철저히 규명해야 해. 배씨 가문의 백 년 명성을 이렇게 무너뜨릴 수는 없어!”“문 이사님 제안에 동의합니다!”“동의합니다. 반드시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순식간에 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배서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평소에는 그에게 굽실거리며 아첨하던 이사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노골적인 분노와 의혹으로만 가득 찬 얼굴이었다.그리고 이 소식은 날개라도 단 듯 재계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회사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위 임원들은 사방으로 전화를 돌리며 진화하려 애썼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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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강연찬은 서도현의 뒷모습이 철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조용히 다가온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강 대표님, 기술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도현 쪽 변호사가 제출한 녹음 파일, 감정 결과 조작 흔적 전혀 없습니다. 그 안에 배서준 대표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어 있습니다. 전화 통화에서 직접 말했습니다. ‘자금이 어떻게 오가든, 뒤처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난 이설 그룹의 지분만 원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손에 넣어라.’ 성문 대조도 끝났습니다. 본인 목소리 맞습니다.”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치소 밖으로 걸어 나왔다.밖은 어느새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희뿌옇게 뒤덮였다.차에 올라타자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히며 시야를 더 희미하게 만들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남설아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남설아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여전히 단단했다.“여보세요?”“설아야.”강연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야.”“응, 알아. 무슨 일이야?”“배서준 쪽, 이사회가 방금 끝났어.”강연찬은 회의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간략히 전했다.“이제 진짜 막이 오른 거지. 그 사람도 이제 무너지는 게 얼마나 가혹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작게 떨리는 숨결과 함께 남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 마땅한 벌을 받는 거야.”“서도현도 잡혔어. 일부 얘기해줬어.”강연찬이 덧붙였다.“증거가 이제 거의 완벽하게 나왔어.”“마틴은?”“아직 행방이 안 잡혔어. 하지만 배서준은 무너지기 시작했어.”강연찬은 내리는 비를 응시하며 물었다.“너, 준비됐어?”남설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언제든지.”“좋아.”이설 그룹 공식 홈페이지에는 장문의 공지가 게시되었다. 시간은 기가 막히게도 주식시장이 열리기 직전이었다.“배건 그룹이 상업적 협력 과정에서 부정 경쟁 및 불법 행위에 연루되어 당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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