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진 씨.”남설아가 그의 등 뒤에서 입을 열었다.“어르신께 전해주세요. 배건 그룹은 함부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말판 위의 말이 아니며 저 또한 조종당하는 물건이 아닙니다.”주석진은 걸음을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약간 숙인 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남설아는 문이 닫힌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없이 자리로 돌아왔다.주석진의 방문은 마치 냉수를 머리 위에 들이부은 듯, 어렴풋이 느끼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버렸다.책상 위의 서류를 무심코 집어 들었으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그녀는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서류를 내려놓은 그녀의 시선이 책상 구석의 협력 계약서에 닿았다. ‘화승 그룹’ 로고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직감적으로 남설아는 계약서의 서명과 인장을 다시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듯 그녀의 습관적인 신중함이 발동한 것이다.그러던 중 우연히 눈에 띈 하나의 세부 사항, 문서 오른쪽 아래의 서명란에 적힌 직책이 그녀를 멈추게 했다.그곳에는‘대표이사’라고 적혀있었다. 분명히 강연찬은 자신을 ‘기술 고문’이라고 했었는데 말이다.남설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이전의 협약 문서들을 꺼냈다.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쳐보자 하나의 흐름이 또렷이 보였다.강연찬은 계속해서 직책을 바꿔왔지만, 문서상에서 행사한 권한은 단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이게 오빠가 말한 기술 고문이었어?”남설아는 실소를 터뜨렸지만, 가슴이 아팠다.밤이 깊어가던 시각, 남설아는 회사를 나와 근처 카페에 들렀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설아?”고개를 든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비즈니스 친구 임동민을 발견했다.“임동민? 여기서 다 만나네.”남설아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미팅하러 왔다가 우연히. 네 소문 들었어, 배건 그룹을 이끄는 강단 있는 대표라던데? 대단하다, 정말.”임동민은 반가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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