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자의 배신, 이혼만이 답이다!: Chapter 791 - Chapter 800

811 Chapters

제791화

해리는 알고 있었다.만약 하이현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 이 무대 위에서 자신이 누리는 환호와 존경은 모두 하이현의 그늘에 가려졌을 거라는 사실을.해리는 평생을 다 바쳐도 하이현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자신의 빛과 명성이 아무리 찬란해도, 하이현이 활을 올리는 순간이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하이현을 비추니까 말이다.그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를, 해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다행히도, 하이현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그 소식을 들은 날, 해리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었다.세상이, 운명이, 모두 자기편을 들어 준다고 믿었다.이제는 누구도 해리의 머리 위에 서지 못한다고 확신했다.하이현이 죽은 뒤, 해리의 실력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치솟았다.현성 대가를 제외하면,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 해리는 단연코 일인자였고, 감히 그를 넘어서는 사람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그런 기분은 통쾌했고, 홀가분했다. 심지어는 하이현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고 상상했다.“봐. 나는 이미 당신이 결코 닿을 수 없던 높이에 올라와 있어.”해리는 언제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채 모든 사람을 벌레 보듯 했다.세월이 흐를수록, 해리는 패배라는 감각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서서히 잊어 갔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하지율의 손에 들린 그 악기를 보자마자 해리의 가슴 속에서 익숙한 압박감이 천천히 꿈틀거렸다.멀어져 가는 하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해리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착각이겠지.’지금 하지율의 나이는 그때의 하이현보다도 더 어리다. 그러니 그 어린 나이로 어떻게 해리를 이길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하지율은 강병주보다도 더 타고난 재능을 지녔다.그렇기에 단 1초의 틈도 주어서는 안 된다.해리가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 하이현과 하지율 모녀에게는 영영 빛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무대의 조명이 천천히 켜지고, 하지율의 실루엣이 은은하게 무대 중앙에 나타났다.머리 위 스포트라이트가 하지율을 감싸안았고, 하지율의 손에 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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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2화

‘눈빛’이 ‘극악 3부작’ 가운데서 가장 어렵다고 불리는 까닭은, 곡이 시작되는 초반 선율부터 극악의 난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곡은 난이도를 점차 올려가며, 적어도 연주자가 초반부만큼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게 구성된다.하지만 ‘눈빛’은 다르다. 시작부터 어려운 코드가 훅 치고 들어온다.보통의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첫 소절조차 제대로 켜기 힘들고, 하물며 전곡 완주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그래서 심사 위원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하지율이 시작하자마자 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그런데 예상을 완전히 비껴가듯, 하지율은 놀랄 만큼 가볍게 그 까다로운 도입부를 뚫고 나갔다.너무나 매끈하고 수월해서, 자칫하면 이 곡이 평범하고 쉬운 곡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일 만큼 아주 안정적이었다.하지율의 활 놀림은 전혀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흐름에는 어색한 꺾임이 없었다.관객석에서 무대를 지켜보던 현성 대가와 제자들 또한 잠시 굳어 버렸다.어떤 곡들은 여러 악기로도 연주가 가능하다.레이나 일행은 주로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악기에 능하지만, 그들조차 ‘눈빛’을 연주하려 들면 시작부터 어려움을 느낀다. 설령 그 초반을 넘어간다고 해도 중, 후반의 선율이 더 지독하게 어렵다.그런데 하지율은 왜 이렇게 가뿐하게 나아가는 걸까?아니면 가뿐한 척 연기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여름밤의 별’이란 악기가 너무 강력한 걸까?백스테이지 휴게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던 해리도 순간 멈칫했다.그러다 곧 스스로를 납득시켰다.도입부가 어렵다 해도, 완주자가 적을 뿐, 도입부 연주가 가능한 연주자는 분명 존재한다.이 곡에서 정말 어려운 구간은 따로 있다.바로 중, 후반의 클라이맥스와 엔딩이었다.거기서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기교뿐 아니라 깊은 내공이 필요하다.핑거링과 보잉의 압력, 탄력, 무게가 한 치도 어긋나선 안 된다.느슨해도 안 되고, 과도하게 조여도 안 된다.그런데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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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3화

‘눈빛’을 끝까지 연주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임채아와의 실력 차이가 몇백 배는 난다는 뜻이다. 방금 전까지 훌륭한 인재를 놓친 게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했지만, 지금 흐름을 보니 그건 과한 걱정이었다. 무대 아래서 관객들 사이에서도 아쉬움이 잇달았다.“앞부분은 진짜 완벽했는데... 그래서 혹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했어. 해리와 맞붙을 수 있겠다고 기대까지 했는데...”“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삐끗하다니, 정말 안타깝다.”“그래도 졌지만 잘 싸운 거지.”“문제는 이게 하지율의 커리어 마지막 곡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도 난 이 순간을 기억해 둘 거야.”비록 하지율이 한 번 삐끗했지만 무대는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모두들 이제 선율이 꼬일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 믿기 어렵게도, 하지율은 방금 끌어올린 그 키를 그대로 이어 연주를 계속 밀어붙였다.불협화음은 없었다.왜냐하면 하지율은 뒤의 모든 구간을 통째로 한 키 올려 연주해 버렸기 때문이다.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커다랗게 치켜떴다.“헐, 미친... 하지율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설마 이 상태로 끝까지 가겠다는 거야?”“말도 안 돼! 한 키를 올려 전곡을 완주한 사례는 없었던 것 같은데? 해리조차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어!”“만약 하지율이 정말로 완주한다면... 그건 곧 해리보다 강하다는 뜻 아냐?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서 전설로 남는 거지!”“아직 기뻐하긴 일러. 아마 중간에 키를 잘못 잡은 걸 되돌릴 수 없어서 그냥 강행하는 걸 수도 있어. 두고 봐. 조금 뒤 클라이맥스에서 분명 실수할 거야.”현장 관객뿐만이 아니라 현성 대가와 해리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여유가 맴돌았다. 하지율이 이 무모한 선택으로 완곡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현성 대가의 제자들은 웃으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하지율의 연주를 두고 평을 늘어놓기까지 했다.“비록 완곡은 못 하겠다만, 방금 그 부분 처리는 제법 괜찮군.”레이나도 웃음을 섞어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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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4화

“하지율! 하지율! 하지율!”누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함성이 대회장을 뒤흔들었다.사람들은 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성을 놓은 채 두 손을 흔들며 하지율의 이름을 외쳤다.오늘 그들은 눈앞에서 기적이 탄생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유소린도 주변 열기에 휩싸여 자리에서 일어섰다.무대를 올려다보면서, 유소린은 눈가가 뜨거워져 끝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이게 바로 하지율이 마땅히 누려야 할 찬란함이었다.객석 쪽에서 현성 대가는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경악한 현성 대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이게 어떻게 가능한...”레이나를 비롯한 제자들의 눈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해리 선배보다 더 강하다니, 말이 되나요?!”백스테이지의 해리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방금 전의 여유로운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는 핏기 없는 창백함과 믿기지 않는 공포가 채워졌다.몸속 어딘가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익숙한 두려움이 전신을 덮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한 키 올린 상태에서 ‘눈빛’을 끝까지 연주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 믿을 수 없어!”그러나 해리가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현실은 냉정했다. 하지율은 정말 실수 없이 해냈다.사회자와 심사 위원들이 흥분한 심정을 가라앉히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사회자는 손짓으로 조용히 해 달라 신호를 보냈지만, 설렘 때문에 손끝이 자꾸 떨렸다.마이크를 잡은 사회자 목소리에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잔떨림이 묻어났다.“하지율 씨의 연주는... 정말이지 압권이었습니다. 지금 제 마음도 여러분과 똑같이, 벅차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대결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해리 씨,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그제야 사람들은 지금의 연주가 내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떠올렸다.해리는 잿빛으로 질린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하지율을 바라보는 해리의 눈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원한과 독기가 어려 있었다.프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해리는 잘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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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5화

“그렇게 하는 건 솔직히 좀 지나치긴 하겠지.”하지율이 같은 나라 선수인 만큼 객석의 다수는 하지율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해리를 좋아하는 팬들도 있었기에 여기저기서 엇갈린 의견이 터져 나왔다.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이제 오늘의 승자, 하지율 씨를 모셔 한 말씀 듣겠습니다.”하지율은 마이크를 받아 들고 차분히 미소 지었다.“늘 저를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와 해리 씨 사이의 내기는 이미 다들 아시죠. 제가 졌다면 이 업계를 떠나 앞으로 다시는 바이올린을 손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반대로 해리 씨가 지면, 저의 어머니인 하이현 씨, 그리고 제 선배인 강병주 씨에게 사과하고, 무릎을 꿇은 채 개처럼 짖겠다고 했습니다.”하지율의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까까지는 내기라는 것에 도파민이 솟아, 자세한 얘기를 돌아볼 사이가 없었다.그런데 지금 하지율의 말을 들은 객석이 술렁였다.“뭐라고? 하지율이 엄마와 선배에게 사과하라고 했다는 거야? 그럼 해리가 먼저 어머니를 모욕했다는 뜻이잖아?”“해리 성격으로는 정말 그랬을 것 같은데...”“하지율 어머니가 하이현 아닌가? 고인까지 욕보였다면 그건 정말 인성 파탄자 아니야?”“사과해! 그리고 무릎 꿇고 짖어!”“그래, 짖어 보라고 해!”구경꾼들이 흥분해서 외쳤다.하지율은 시선을 옮겨 자기를 서늘하게 노려보는 해리를 마주했다.“다만, 해리 씨는 어디까지나 현성 대가의 제자이자 업계에서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가끔은 사람의 목숨보다 그 긍지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그러니 해리 씨한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일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해리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오만한 기색을 드러냈다.역시 하지율은 감히 해리를 적으로 돌리진 못한다고, 해리는 그렇게 확신했다.아무리 오늘 해리가 졌다고 해도, 하지율이 해리에게 내기 이행을 강요하진 못하리라.하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다.“그래서 저는 해리 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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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6화

생중계 라이브 채팅창에서도 네티즌들이 댓글을 쏟아냈다.“개처럼 짖어! 개처럼 짖어! 개처럼 짖어! 난 꼭 보고 싶어!”“어디 한번 짖어봐! 왈왈왈왈왈!”소인준은 상황을 보더니 곧장 라이브 투표를 시작했다.해리가 무릎을 꿇고 개처럼 짖는 것에 찬성하는지, 아니면 아예 이 업계에서 퇴출하는 것에 찬성하는지 말이다.다른 선택지는 없었다.애초에 해리도 하지율에게 다른 선택지 따윈 주지 않았다.소인준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외국인이 자국 선수를 마음껏 깔아뭉개도록 두고 볼 생각도 없다.사회자는 이 사실을 전달받고 속으로 중얼거렸다.‘소인준 감독, 드디어 감을 잡았네. 이런 투표를 생각하다니.’요즘 세상에 논란은 곧 화제가 된다.네티즌이 싸울수록 더 뜨겁게 불이 붙는다.사회자가 관객에게 알렸다.“지금 온라인에 실시간 투표가 열렸습니다. 여러분도 참여하셔서 해리 씨에게 보낼 의견을 남겨 보세요.”대회 주최 측은 윗선에서 아랫선까지, 심지어 사회자까지 포함해, 그 누구도 해리를 구해 줄 마음이 없었다.오히려 해리를 소재로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화제성을 끌어모았다.해리와 하지율의 갈등은 이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그러니 그들은 망설임 없이 하지율 편에 섰다.우리나라에서 천재가 나타났는데, 대체 왜 외국인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적어도 그들은 현성 대가처럼 멍청하게 굴지 않았다.눈앞의 천재를 두고 실력을 알 수 없는 임채아를 제자로 들인 것처럼 말이다.관객들은 우르르 핸드폰을 꺼내 투표했다.일부는 투표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이 대회가 이렇게까지 재밌을 줄이야. 안 되겠다, 다음에도 꼭 보러 와야지. 얼른 온라인으로 예매해야겠다. 곧 매진되겠어.”“이제 예매 생각을 해? 5분 전에 벌써 매진됐어! 나도 못 샀다니까.”이 광경을 본 해리는 분통이 터져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해리는 무의식적으로 객석에 앉은 현성 대가 쪽을 바라보며, 자신을 위해 한마디 변호해 주길 바랐다.현성 대가는 입술만 몇 차례 달싹일 뿐 결국 아무 말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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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7화

잠시 뒤, 해리는 굳게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왈! 왈왈!”그 순간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하하하하하 !”중립을 지키던 사람들, 아까까지만 해도 하지율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겼던 이들까지도, 이 장면 앞에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우스워서, 정말로 폭소가 터져 나왔다.대회장은 한순간에 코미디 무대가 된 듯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서로 웃음을 참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다.물론 현성 대가 일행만 빼고 말이다. 그들은 마치 장례식장에 온 듯 표정이 창백하고 처참했고,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지금 자리를 뜨면 더더욱 눈에 띌 게 뻔해 가만히 있을 뿐, 이곳에 1분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보였다.사람들이 현성 대가 쪽으로 쏟아 보내는 시선은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바늘방석 같았다.사람들은 현성 대가의 선택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뻔했다. 그 수많은 시선에 현성 대가는 뺨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화끈거리고 후회되었다.해리마저 하지율에게 졌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소란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나가는 길 내내 오늘 벌어진 막장 드라마를 두고 흥분한 채 수다를 떨었다.가십은 사람의 본능이다.국내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는 이미 해리로 도배가 되었고 해리가 개처럼 짖는 영상은 순식간에 해외로까지 퍼져 나갔다.과거 해리 때문에 결국 바이올린을 접었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이를 보며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불과 몇 시간 사이, 해리의 사진과 영상은 온갖 방식으로 밈화되었다.재주 좋은 누리꾼들은 해리의 얼굴을 개 사진에 합성하고, 중독성 있는 음악을 덧씌워 다시 올렸다. 이 밈을 보는 이들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다.이후 그 패러디 이미지들은 곧 유용한 짤로 돌고 돌았다고 한다.물론 이건 훗날의 이야기다....대회가 마무리되자 하지율은 자신의 바이올린을 메고 유소린 일행을 찾으려 했다.문을 막 나서려는데 커다란 실루엣이 하지율의 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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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8화

주용화가 품에 들고 있던 안개 꽃다발을 내밀었다.“하지율 씨, 오늘 경기 우승,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지율은 주용화가 내민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안개꽃.그건 하지율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아마 유소린이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하지율은 미소를 띠며 꽃을 받아서 들었다. “고마워요.”그때 복도 끝에서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온 고지후는 하지율이 웃으면서 주용화가 주는 꽃을 받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그 미소는 놀랄 만큼 환했고 따뜻했다. 조금 전 고지후를 대하던 차가운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무언가를 감지한 듯, 주용화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고지후 손에 들린 장미꽃다발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눈썹을 올렸다.“고지후 씨도 하지율 씨한테 꽃을 드리러 온 건가요?”고지후의 잘생긴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주용화가 옅게 웃었다.“그래도 한 마디 드린다면, 꽃은 받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고르셔야 하지 않겠나요? 모든 여자가 장미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율 씨가 좋아하시는 건 안개꽃이에요.”고지후는 본능적으로 하지율을 바라보았다.하지율은 고개를 숙인 채 손안의 안개꽃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그 눈빛에 스민 기쁨과 애정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고지후의 눈매가 어둡게 가라앉았고, 목소리도 약간 잠겼다.“지율아, 나...”하지율은 고지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주용화를 향해 말했다.“시간이 꽤 늦었네요. 먼저 가요.”주용화가 하지율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자연스럽게 받아서 들었다.“네. 소린 씨가 레스토랑 예약을 마쳤어요. 가시죠.”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망설임 없이 발을 뗐다.고지후가 뒤따르려는 순간, 주용화가 가볍게 길을 막았다.“고지후 씨. 오늘은 지율 씨에게 아주 좋은 날입니다. 괜히 따라오셔서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를 바라요.”고지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내가 따라가면 분위기를 망치는 거고, 당신이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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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9화

이런 식의 패배와 모욕을 당한 것은 생전 처음이어서 충격이 너무 컸다.지금 해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했다.현성 대가는 레이나 등 몇몇 제자와 함께 해리를 부축해 먼저 자리를 떴다.해리의 몰골을 본 현성 대가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삼켰다.하지율에게 패배한 고통을, 해리가 과연 딛고 일어날 수 있을까. 출구 쪽으로 향하던 현성 대가의 시야에 꽃다발을 든 고지후와 임채아가 들어왔다.임채아가 서둘러 인사했다. “선생님.”그러나 현성 대가의 표정은 싸늘했다. 현성 대가는 임채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임채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곧 깨달았다.현성 대가는 해리와 하지율의 내기를 임채아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하지만 임채아는 억울했다.해리를 부른 사람은 현성 대가였고 내기 얘기를 꺼낸 것도 해리였다.억울함이 치밀었지만 임채아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임채아는 그저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해리 선배는... 괜찮으신가요?”이사키와가 대신 답했다. “큰일은 아닙니다. 돌아가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고지후도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기에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성 대가님.”그제야 현성 대가가 고개를 돌렸다. 맑지만 노련한 눈빛은 매처럼 예리했다.현성 대가가 고지후를 곧게 응시하며 말했다. “고지후 씨. 우리 사이에 원한도, 악연도 없는데 왜 나를 해친 겁니까?”고지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요? 제가 대가님을 해쳤다고요?”현성 대가가 씁쓸한 비웃음을 흘렸다.“내가 원래 찾으려던 사람은 하지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지율을 두고 아무것도 못 하는 가정주부라고 했어요. 그리고 내게 임채아를 추천했죠.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눈빛’을 연주하고, 어떻게 해리를 꺾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하지율을 한낱 보잘것없는 존재로 깎아내리고 결국 임채아를 제자로 받도록 나를 설득했죠. 그리고 그 결과...”현성 대가의 차가운 시선이 임채아에게 꽂혔다.“임채아를 제자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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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0화

현성 대가는 길고 아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만에 10년이 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지금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이 와중에 임채아를 내보낸다면, 저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욕하겠어.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게 아니라, 천천히 상황을 보며 처리해야 한다.”아무도 더 말을 보태지 못했다....초고난도 곡 ‘눈빛’을 완주한 하지율이 이번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리라는 건, 이제 사실상 기정사실이었다.하지율이 해리를 꺾는 장면을 담은 영상은 빠른 속도로 확산 중이었고, 각종 음악 교류회의 초청장이 눈처럼 쏟아졌다. 유소린은 연락을 받다 손이 저릴 지경이었다.하지율의 연주회와 대회는 항상 전석 매진이었다.유소린은 일이 많아졌음에도 힘들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밤늦게 야근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지율아, 우리 진짜 대박 터졌어! 임채아가 아무리 고지후를 배후로 두고, 현성 대가의 손을 빌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이젠 아무도 임채아를 언급하지 않아! 그냥 다들 현성 대가님의 안목이 좋지 않다고 할 뿐이지.”유소린은 하지율의 커리어가 곧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다만, 하지율은 연주회를 준비해야 하기에, 유소린은 불필요한 비즈니스 공연을 모조리 거절하고 하지율이 연주회 준비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유소린이 뉴스를 훑어보며 말했다.“지금 분위기로는 국제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도 너야. 무대에서 ‘눈빛’ 한 번만 연주하면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들 해.”신예인 하지율이 해리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전 세계 음악가의 주목을 받았다.하지율은 담담했다.“이번에는 컨디션이 평소보다 확실히 좋았어. 하지만 이런 컨디션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다시 연주한다고 해도 저번보다 잘 연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유소린이 괜찮다는 듯 얘기했다.“컨디션 난조는 누구나 있어. 키를 올리지 않은 ‘눈빛’이라면 충분히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잖아. 지율아, 너무 스스로를 몰지 마. 넌 이미 충분히 대단해.”하지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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