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설아는 언제나 뒤에서만 수를 썼다. 누가 못마땅해도 절대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고 꼭 뒤에서 헐뜯었다.그런데 막상 공개석상에 나가면 원수도 자기 딸처럼 대해버리는 사람이다.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임서율은 정설아가 강혜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후배들에게 늘 어른을 공경해야된다고 말하고 강혜수를 마치 친언니 대하듯 행동했다.하지만 임서율이 기억하는 정설아는 예전부터 강혜수를 수도 없이 배신해온 사람이었다. 겉으론 돕는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몰래 임규한을 유혹했었으니까.몇 사람이 막 현관에 도착했을 무렵, 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뒤로 단정하게 넘겼다.평소에도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날이 서 있었고 묘한 긴장감마저 풍겼다.하도원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한 번 훑어본 뒤,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아저씨, 아주머니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임규한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 강혜수가 어린 시절의 하도원을 도운 적이 있다는 걸.이 시점에 굳이 찾아온 걸 보면 정말로 인사만 드리러 온 거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게다가 요즘 임태규가 임유나와 하도원을 엮어보려는 기색도 보이니, 혹시 둘이 잘되기라도 하면 하도원이 사위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래, 고맙구나.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잊지 않고 와줘서.”임유나는 하도원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다가가, 그의 팔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그녀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애교가 섞여 들렸다.“올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죠. 그랬으면 저도 같이 왔을 텐데.”“저도 갑자기 결정해서 온 거예요.”하도원은 말끝을 흐리며 자연스럽게 팔을 슬쩍 빼냈다.임유나는 허공에 붕 떠 있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정설아는 한층 더 적극적으로 다가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도원아, 다음에 집에 올 일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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