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501 - Chapter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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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임서율은 양지우와 함께 자리로 돌아와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그리고 마치 진지하게 업무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한 태도로 하도원에게 말을 건넸다.“하 대표님, 아까는 일 얘기를 하러 오셨다고 하셨죠.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하도원은 잠시 눈썹을 치켜올리며 길고 뚜렷한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느긋하게 두드렸다.“정말 내가 협업 얘기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건가?”임서율은 고개를 갸웃했다.“협업이 아니라면 지금 혹시 졸리세요? 공포 이야기라도 해드릴까요?”하도원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며 말했다.“너희 회사 사정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직 우리 회사랑 손잡을 자격은 안 되지 않나.”임서율은 곁의 양지우에게 눈짓을 보냈고 양지우는 준비해온 서류를 꺼냈다.“일단 계획안을 한 번 보시고, 협력 여부를 판단해 주셔도 늦지 않으실 거예요.”하도원은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손끝으로 대충 서류 모서리를 걸어 당기더니 무심하게 한 장 넘겨보았다.양지우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 프로젝트는 임서율이 직접 준비한 것이긴 하지만 워낙 생소한 분야라 국내에 유사한 사례도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시장을 뚫지 못하면 이후 투자금은 송두리째 사라질 터였다.투자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으니까.그런데도 임서율은 이렇게 정면승부를 택한 것이다. 너무 무모한 건 아닐까?회의실 밖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수군거렸다.“임서율, 너무 우쭐대는 거 아니야? 우리 회사가 어떻게 운성시 넘버원 기업이랑 손을 잡을 수 있겠어?”“그러게, 허세 부리는 거지.”“허세는 그렇다 쳐도, 수습 못 하면 끝장인데...”“차라리 상대가 그냥 뚱뚱한 아저씨나 대머리였다면 어떻게든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문제는 그게 하도원이라는 거야. 하 대표라고!”“맞아. 하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워낙에 차갑고 까다롭기로 유명하잖아. 웬만한 수완 없으면 미인 하나 붙여줘도 꿈쩍도 안 하는 사람이야.”“못 보겠다. 곧 망신당할 텐데...”하도원은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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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하도원은 임서율의 당당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임 대표는 이 프로젝트에 얼마를 투자할 생각이지?”“천억이요.”그것은 해성 그룹이 가진 전 재산이었다.하도원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낮고 허탈한 웃음소리가 텅 빈 회의실에 메아리쳤는데 바깥에 있던 사람들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임 대표, 나더러 이 프로젝트에 투자하라는 건가? 내가 바보 같아 보여?”신사업을 시작하는 데 드는 돈이 천억에 그칠 리 없었다. 최소 이 액수의 네배는 있어야 했다. 그러니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두 회사의 앞날을 통째로 거는 도박이었다.어느 한 고리라도 삐끗한다면 재호 그룹과 해성 그룹 모두 파산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런데도 임서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하 대표님, 이 프로젝트는 제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거예요. 지금 국내의 산업 발전을 보면 아직은 인간 손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고 기계가 일부를 대신하죠.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닌가요?”“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사람들에게 큰 편의를 줄 수 있을 거예요. 이미 해외에선 로봇 산업이 태동하고 있잖아요. 물론 지금 저희가 만드는 이 프로젝트가 두 회사 본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해외 기업들과 꾸준히 교류해 오셨으니 누구보다 잘 아실 거라 생각해요.”하도원의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태연히 담뱃재를 털어내며 입꼬리를 올렸다.“흐음, 결국 날 발판으로 삼겠다는 건가?”임서율은 다시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거예요. 알고리즘만 제대로 돌아가면 충분히 실현 가능합니다.”그러나 하도원은 곧장 일어서더니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무 큰 사안이라 지금 당장은 결론을 내릴 수 없어.”그 역시 속으로는 놀랐다. 어린 여자가 이 정도의 야심을 품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임서율은 그가 회의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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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임서율이 공주희를 향해 말했다.“하 대표님 배웅해 드려요.”“네.”공주희는 커피를 내려놓고 서둘러 하도원을 따라 나섰다.회의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고 양지우가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서율아, 우리 너무 서두른 거 아니야? 조금 더 천천히 가야 하지 않을까?”임서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그럴 시간 없어.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눈 돌리는 순간, 우린 국물조차 못 얻어.”양지우는 임서율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의 눈빛과 기세는 낯설었다. 쉽게 욕심을 내는 성격이 아니었던 임서율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다니.그녀는 무심코 임서율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물었다.“서율아,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갈수록 네 마음을 모르겠어.”임서율은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양지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는 하도원의 거절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더 생기가 돌았다.양지우의 눈에는 마치 임서율의 온몸이 금빛으로 감싸인 듯 보였다.“지우야.”임서율이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너, 우리 회사가 성운 그룹을 뛰어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운성시 전체를 놓고 보자면 재호 그룹이 압도적 1위였고 그다음이 성운 그룹이었다.하지만 임서율의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차주헌을 반드시 무너뜨리는 것.양지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서... 서율아, 너 설마 성운 그룹을 넘어서겠다는 거야?”“넌 원하지 않아? 그동안 가정에 묶여 네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했잖아. 정말 이대로 살고 싶어?”양지우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임서율의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좋아. 앞으로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를게.”임서율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그래야지.”하지만 양지우는 여전히 근심을 떨치지 못했다.“근데... 하 대표님은 어떻게 할 건데?”“조급해하지 마.”임서율이 낮게 속삭였다.“천천히 가면 돼. 하 대표뿐만 아니라 누구에게 가져가도 지금은 거절당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야.”이미 각오한 바였다.양지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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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공주희는 말을 끝낸 뒤에도 조심스레 하도원의 표정을 살폈다.업계에서 떠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하도원은 평소 태연하게 얘기하다가도 다음 순간 돌변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그의 속내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하도원의 눈매는 싸늘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시선이 공주희를 곧장 꿰뚫었다.“말 다 했습니까?”공주희는 잠시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올라가서 사직서 한 장 쓰세요. 손 대표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죠.”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끝낸 그는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 했다.공주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 설명할 수 없는 공포와 혼란이 번졌다.그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현실이 뇌리를 때렸다.“하, 하 대표님, 왜 그러세요. 저는 대표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드린 말씀이에요. 그런 계략 많은 여자에게 속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어요.”하도원은 천천히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눈가에는 짙은 피로와 짜증이 드러났고 입술은 단단히 다물린 채였다.이어 터져 나온 한마디에 공주희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앞에서 임 대표를 깎아내리는 건 누구도 용납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딱, 내 금기를 건드렸군요.”말을 남긴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해성그룹을 빠져나갔고 남겨진 건 멍하니 굳어 서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공주희뿐이었다.‘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그녀는 분명 깊이 고민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도원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걸까. 고마워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잘리지는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얼마 지나지 않아, 손 대표의 전화가 걸려왔다.공주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전화를 받았다.“여, 여보세요, 손 대표님.”휴대폰 너머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싸늘하고 날카로웠다.“주희 씨, 제정신이야? 아무리 회사 오래 다녔다지만 어떻게 그런 저급한 실수를 해? 하 대표님 같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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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임서율은 양지우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지만 고위자의 위압감이 스며 있었다.“회사의 공지, 다들 확인했을 겁니다. 공주희 씨가 이유 없이 사직한 게 아니에요. 뒤에서 우리 회사와 협력사 관계를 흔들고 재호 그룹과 손잡으려는 걸 알면서도 하 대표님 앞에서 일부러 이간질을 했죠.”그녀의 눈빛이 단단히 빛났다.“만약 그 이간질에 넘어가 하 대표님이 제 인품을 오해하고 협력 의지를 접었다면 그 손실을 누가 책임질까요?”단호한 말이 공기를 누르자 사무실은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다.그때, 인파 속에서 임유나가 고개를 떨군 채 손톱을 흘끗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언니, 설마 주희 씨가 내 사람이란 걸 알고 일부러 자른 건 아니지? 그래도 오래 근무한 직원인데, 이렇게 바로 잘라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속상해하지 않겠어?”그 한마디에 조용하던 사무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그러고 보니 부사장님 말도 일리가 있네. 이번엔 주희 씨였지만, 다음은 우리일 수도 있잖아.”“쉿,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벌써부터 불안해지잖아.”“맞아, 괜히 한마디 잘못했다가 잘리면 우리도 금세 실업자 신세 되는 거 아냐.”“역시 새로 온 대표가 부임하자마자 바로 기강을 잡으려 하네.”양지우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임유나를 노려봤다.‘분위기 흐리는 건 선수네.’하지만 임서율은 코웃음을 친 후 단호히 선언했다.“확실히 말씀드리죠. 상사가 분부한 일을 제때 해내고 뒷말이나 유언비어, 상사 험담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해성 그룹에서 은퇴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다니실 수 있습니다.”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준비한 또 하나의 폭탄을 터뜨렸다.“그리고 방금 전, 스카이 그룹 회장이 직접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들의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우리가 맡게 됐어요. 다음 달부터는 여러분 월급은 물론 연말 성과급까지 두 배로 오를 겁니다.”순식간에 사무실은 환호성으로 들끓었다.“세상에, 우리 회사 전성기 온 거 아니야? 한 달 만에 초대형 프로젝트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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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임규한이 있을 때는 회사의 면접 절차를 무척 중시했다. 사실 해성 그룹 직원들 대부분은 업무 능력이 뛰어났다.승진과 인사고과는 결국 입 잘 놀리는 사람에게 유리했다.아무리 실적을 올리고 프로젝트를 성공시켜도 임유나에게 두어 마디 아부하고 자잘한 심부름 몇 개 해주는 편이 더 빨랐다.임서율의 발언이 이어지자 진짜 일 잘하는 직원들의 눈빛이 번쩍이며 살아났다. 죽어 있던 열기가 되살아난 듯 몇몇은 아예 목소리를 높였다.“임 대표님, 안심하세요! 저희가 이 회사에 남은 이유는 똑바로 일해서 성과 내고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예요. 아부 따위 배우러 온 게 아닙니다!”“맞습니다! 일만 제대로 맡겨주신다면 뭐든 해냅니다. 단, 괜한 아첨만 안 시키시면 돼요.”“맞아요, 그게 제일 중요하죠!”임서율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확신을 굳혔다. 반드시 실력으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발전시킬 거라고.그리고 곧장 다음 말을 꺼냈다.“한 가지 더 있습니다. 부사장 건과 관련해 방금 확인한 사실이에요. 얼마 전, 우리 회사에서 적자를 낸 프로젝트 하나 있었죠? 원래라면 이사회 투표에서 통과되지 못했을 사안입니다. 그런데 부사장이 상대에게서 돈 천만을 받고 몰래 사인을 해 프로젝트를 밀어붙였어요. 결국 그 건으로 회사가 100억 손해를 봤습니다.”순식간에 직원들 사이가 술렁였다.“이미 인사부에는 강등 통보서를 준비시켰습니다. 오늘부로 부사장은 직무정지가 아니라 직급 강등, 본부장으로 내려갑니다. 앞으로 부사장이 손댄 프로젝트는 반드시 제 손을 거쳐야만 진행됩니다.”그때 임유나가 서늘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부사장 자리는 아빠가 직접 정해주신 거야. 네 따위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거든. 주주들조차 날 함부로 내칠 수 없어.”그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요즘 임규한은 병원에서 약물과 기계에 의존해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상황이었다. 여러 경로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조차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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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이 말은 곧 임유나를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부사장 자리를 달고 있지만 실권이 하나도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임유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임서율이 굳이 자신을 회사에서 내쫓지 않아도 다 끝났다는 걸. 이제는 프로젝트는 물론, 재무 쪽 일에도 손끝 하나 댈 수 없게 되었으니까.결국 임유나는 손 대표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급히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간청했다.“아저씨, 아빠 당부를 벌써 잊으신 거예요? 예전에도 저를 잘 돌봐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이 저를 괴롭히는데, 설마 가만히 보고만 계실 건가요?”손 대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나야, 네 아버지가 너를 잘 챙겨주라고 하신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전제 조건이 있었어. 네가 착실히 회사를 위해 힘쓰고 회사를 잘 이끌어가려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넌...”말끝을 흐린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홱 털었다.“이 일은 여기서 끝내자. 네가 네 언니처럼 회사에 기여할 만한 성과를 내면 그때 다시 네 권한을 돌려줄지 얘기하도록 하자.”말을 마친 손 대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구경하던 직원들도 이쯤이면 충분하다는 듯 하나둘 흩어졌다.임서율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직원들에게 각자 맡은 바를 챙기게 한 뒤, 자리를 정리했다.양지우가 그녀 뒤를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서율... 아니, 임 대표님. 대표님 사무실은 어디예요?”그제야 임서율은 아직 사무실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두 사람이 임유나의 사무실 앞을 지나고 있었고 임서율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양지우에게 담담히 말했다.“가서 비서한테 전해요. 부사장이 이제 일도 맡지 않는데, 이 사무실은 필요한 사람에게 돌리는 게 맞죠. 부사장은 옆방으로 옮기게 하고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던 직원들 모두가 똑똑히 들을 만큼 분명했다.양지우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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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갑자기 밀어붙이니, 양지우는 며칠 새 나름대로 정리해 둔 해성그룹의 과거 모습과 곧장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임유나가 회사를 쥐고 있을 때는 위아래 모두 출근 도장만 찍고 하루를 때우는 수준이었고 실제 업무는 형편없이 적었다. 말 그대로 과거 성과에 매달려 버티는 중이었다.물론 그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출근은 아홉 시, 퇴근은 여섯 시. 야근은 없었고 실적 압박도 크지 않았다. 부사장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 하니 밑에 직원들에게 대형 프로젝트를 요구할 자격도 없었던 셈이다.하지만 임서율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물었다.“지우야,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양지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없지.”“그럼 끝난 거야. 이거 다 내려보내. 보너스만 제대로 주면 열심히 안 할 이유가 없지. 예전 회사 직원들이 왜 불만이 많았는지 알아? 윗사람들이 프로젝트 수당이니 성과급이니 다 자기들 주머니에만 챙겨 넣었으니까 그렇지.”임서율은 서류를 한 장 더 내밀었다.“그리고 이건 채용 공고야. 이것도 같이 보내.”양지우는 서류를 받아들고 한번 훑어봤다.“아니, 서율아. 숫자 잘못 쓴 거 아니야? 이 연봉이면 시중 기업의 90%는 훌쩍 넘어. 이렇게 공지했다가 찍히는 거 아니야?”임서율은 태연하게 웃었다.“인재를 데려오는데 돈 안 쓰면 어떡해? 우리도 예전에 월급쟁이였잖아. 일은 많은데 월급은 적고, 위에서는 쥐어짜기만 했지. 이제 우리가 사장이 됐으니 바꿔야지. 업계 분위기도 달라져야 하고.”양지우는 감탄이 절로 나와 엄지를 치켜세웠다.“서율아, 네가 성운 그룹에서 팀장직만 했던 게 진짜 아까워. 차주헌이 아니라 네가 대표직 맡아야 했어. 그랬으면 성운 그룹도 지금처럼 안 됐을 텐데.”임서율은 입을 삐죽 내밀며 단칼에 잘라냈다.“차주헌 회사 잘되게 하려고 우리가 죽을 힘을 쓸 필요 없지. 지금은 달라. 이제는 우리 회사니까.”양지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그러네. 맞는 말이야.”마침 그때, 임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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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임서율은 오전 내내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조금 지쳐 있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낮게 말했다.“그럼 장소는 대표님이 정하세요.”“청운각.”“...”또 그 끔찍하게 비싼 곳이라니.임서율이 잠시 말이 없자, 하도원이 비스듬히 웃으며 물었다.“왜, 돈 아까워서 그래?”아깝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속으로는 아무리 아까워도 지금은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가 버리니까.“시간도 대표님이 정하세요. 오늘인가요?”“오늘이 좋겠지. 다음 날로 미룰 필요 없잖아.”“알겠어요. 그럼 퇴근 후에...”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임유나의 메시지였다.[오늘 저녁, 할아버지가 모두 모이라 하셨어. 아빠 병세에 대해 상의하신대.]임서율은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누군가 임규한의 병을 신경은 쓰는 모양이었다.그녀는 하도원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죄송하지만, 방금 임유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오늘 저녁엔 본가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부르셔서요. 아버지 병세에 대해 의논하신다고요.”하도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혹시 내가 비싼 데를 골라서, 슬쩍 핑계 대는 건 아니지?”임서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하도원 씨!”“대표까지 됐으면서 왜 아직도 어린애처럼 감정 하나 못 다스리는 거야.”그녀가 발끈하는 걸 보고도 하도원은 화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만 지었다.예전부터 임서율이 입으로는 ‘하 대표님’ 하고 불러도 그저 건성으로 흘려보내는 호칭일 뿐 그 속엔 존중이란 게 전혀 없었다.그가 원하는 건 그런 가면을 쓴 임서율이 아니라 지금처럼 솔직한 그녀였다.임서율은 억지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왜인지 하도원 앞에서만은 도무지 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일엔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데, 이 남자 앞에만 서면 성냥불처럼 툭 건드리면 바로 타올랐다.“저 정말 약속 있다니까요. 내일 안 돼요? 오늘 밥 한 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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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하나뿐이었다.그땐 양녀라는 이름으로 이 집에 들어섰지만 지금은 임규한의 친딸로 돌아왔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은 곧 사생아라는 낙인이기도 했다.대문 앞을 지키던 고용인들이 그녀를 보자 반색하며 달려왔다.“큰아가씨, 오셨어요?”“큰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안에서 일하던 고용인들까지 우르르 몰려나왔다.임서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속으로는 씁쓸하게 웃었다.‘늘 그렇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고 이익 앞에선 양심도 없는 사람들.’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신분까지 달라졌으니, 저렇게 태도를 바꾸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그녀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고용인이 허둥지둥 대답했다.“벌써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홀에 들어서자, 높은 자리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5년 만의 상봉이었다. 세월은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얼굴 가득 깊게 패인 주름, 조금 굽은 허리, 예전처럼 꼿꼿하던 기개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웠다. 눈빛마저도 옛날의 날카로움은 옅어지고, 대신 한결 부드럽고 온화해져 있었다.임서율은 그 앞에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보양제예요. 할아버지 몸 상태를 정확히 몰라서 그냥 몇 가지 사 왔으니 의사랑 상의하고 드세요.”임태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돌아오면서 선물까지 챙겨오다니. 그런데 그동안 왜 연락 한 번 없었느냐? 네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널 찾았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임서율은 의자에 앉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전 이 집하고는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절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네요.”그녀의 날 선 말에 임태규의 표정이 굳었다.“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넌 어쩜 성격이 하나도 안 변했냐?”임서율은 시선을 돌려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늘 그랬어요.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원한으로 갚죠. 할아버지가 저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아시잖아요.”상처는 고스란히 남겨둔 채, 아무 일 없었던 듯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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