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881 - Chapter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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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유하는 마음을 정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했다.W시에 도착한 유하는 ‘대나무숲’ 주택단지로는 가지 않았다.소성란이 남겨 둔 집에서 하룻밤 쉬었다. 원래는 마음을 가다듬고 청산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그런데 밤새 한숨도 못 잤다.그녀는 오전 내내 겨우 눈을 붙이고, 오후가 되어서야 약속한 전통찻집으로 향했다.차에서 내렸다.전통찻집 문을 밀자 익숙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유하의 마음이 작게 흔들렸고,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이 전통찻집은 유하와 청산이 약혼하기 전, 자주 오던 곳이었다.차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곳.지금은...이제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을 떠올리자, 유하가 2층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갈수록 무거워졌다.문 앞에 섰을 때는 손을 들어 노크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가슴도, 손도 같이 내려앉아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청산이 미소를 지으며 유하를 봤다.“왔네.”웃고 있었지만, 유하는 보았다.안경 렌즈 너머로 드러난 남자 눈 밑의 짙은 그늘, 감춰지지 않는 피로. 청산도 이 시간 동안 편하지 않았다는 게 눈에 보였다.유하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전통찻집 안, 익숙한 테이블 앞에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앉았다.청산은 묵묵히 차를 우렸다. 그는 잠시 뒤 유하 앞에 늘 마시던, 맑고 은은하게 단맛이 도는 차 한 잔을 놓고는 유하를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미안해.”청산은 원래 유하에게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그런데 끝내 입 밖으로 나온 건 세 글자뿐이었다.유하도 청산의 ‘미안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유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선배 때문은 아니야. 어떻게 봐도 그때 선배가 맡고 있던 일은 중요했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그것이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그건 정말 불가피한 요인이었다.청산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다시 다물었다.뭐라고 해명할 수 있을지, 어떤 말을 보태도 힘이 없다는 걸 청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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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마음에 들어!”청산이 곧바로 대답했다. 한마디로는 모자란 듯 청산은 붉어진 유하의 눈가를 바라보다가 청산의 눈가도 같이 붉어진 채, 옅게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정말 좋다.”‘그리고 다음은?’청산은 유하에게 묻고 싶었지만 겁이 났다.그는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하지만 청산이 묻지 않아도 됐다.유하가 상자를 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걸 청산이 봤다.그 안에는 청산이 건넸던 그 루비 약혼반지가 들어 있었다.룸 안은 고요했다.먼저 침묵을 깬 건 유하였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나는... 고모할머니가 남겨 준 Splendid를 놓고 살 수 없어. 앞으로도 해외에 자주 머물게 될 거고, 아마 1년에 몇 번도 한국에 못 들어올 수도 있어...”“나도 알아. 선배 일은 특수해서 앞으로는 출국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거... 나중에... 나중에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유하의 말은 갈수록 거칠게 들렸다. 유하는 잠깐 멈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내린 채 다시 말했다.“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제때 선배 곁으로 못 갈 거고, 선배도... 우리는 서로에게 바로 달려갈 수가 없어...”서로의 버팀목으로 서는 일.마지막 한마디는 유하가 끝내 말하지 못했다.그래도 뜻은 분명했다.청산도 알아들었다.사실 청산은 이미 알고 있었다.반지를 꺼내 든 때부터, 아니면 청산이 소성란의 마지막을 보러 가지 못했던 그날부터, 이런 결말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이미 예감했는데도 심장은 천근만근 내려앉았고, 그 무게에 짓눌린 청산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리고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한참이 지나 그는 겨우 숨을 돌렸다.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청산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너는 결국 나를 원망하는 거지. 그때 내가 곁에 없었던 걸...”끝으로 갈수록 말은 울음에 잠겼다.유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붉게 젖은 청산의 눈과 마주친 유하는 굳어 버렸고, 청산은 다급히 시선을 피하며 울먹였다.“보지 마.”청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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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너는 나를 사랑한 적 있어? 유하야...’청산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붉게 충혈된 청산의 눈을 마주한 유하는 심장이 세게 조여 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끝내 말없이 닫았고, 마지막에는 시선을 비켜 냈다.“선배, 나는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선배도 선배 일을 포기하길 바라지 않아. 근데 우리가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또 생겨. 그때는...”유하는 거기서 멈췄다. 더 말하지 않아도 청산이 뜻을 알아들을 거라는 걸 유하도 알고 있었다.앞으로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유하와 청산이 어느 날 갑자기 각자에게 일이 닥쳤는데 서로 다른 곳에 떨어져 있어서 제때 달려가 서로를 지켜 주지 못하면...한 번은 버틸 수 있어도 그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정말 끝까지 아무 원망 없이 갈 수 있을까?정말 마음에 아무 걸림 없이 살 수 있을까?그럴 수 없었다.유하는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예전에 유하는 너무 쉽게 생각했다.둘이 계속 갈 수 있고, 다만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 적을 뿐이라고. 그 정도는 괜찮고, 유하는 배려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청산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소성란이 세상을 떠난 뒤, 유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제대로 알게 됐다.남녀관계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유하가 바라는 삶도 아니었다.그리고 지금의 유하는 거기에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소성란이 남긴 것들을 지키고, 유하가 할 수 있는 만큼 정리하고 돌보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다른 건 이제 접어 두고 싶었다. 유하에게는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지금 유하의 몸 상태로는 결혼해도 청산 곁에 오래 있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러니 더 왜 그래야 하는지 유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짧게 아픈 편이 오래 아픈 것보다 낫다.그래야 짧아도 좋게 기억할 수 있다.청산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자 유하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중에 우리가 서로를 원망하게 되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아. 선배는... 선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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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나를 사랑해?”유하는 울먹이며 대답하려 했다.그런데 심장이 물속에 가라앉은 돌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유하는 떨리는 손으로 청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뜨겁게 흐르는 눈물이 여자의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유하는 청산의 안경을 벗겼다.찻상 위에 내려놓았다.그녀는 손끝으로 청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리고 청산의 이마를 스치고, 눈썹뼈와 눈가와 콧대를 아주 천천히 따라갔다.다정하고 느린 손길이었다.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지금 이때에는 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다 전해지고 있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즈음, 먼저 침묵을 깬 건 유하였고, 손끝은 여전히 청산의 얼굴 위를 따라가고 있었다. 유하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지만, 목소리는 울음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겨우 숨을 고른 듯, 이제는 소리가 나왔다.유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그냥... 낮게 불렀다.“선배.”“선배.”“청산 선배.”“오빠.”“청산 오빠.”유하는 여러 번 불렀고, 분명 웃고 있었는데, 눈물은 계속 떨어졌다.청산도 웃었다.웃고 울고 있는 유하를 바라보던 청산은 대학 시절 유하와 다시 만났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끝내 기억은 더 앞선 처음의 장면에 멈췄다.나무 아래에서 드래곤볼 흉내를 내며 폴짝거리던, 청산을 웃게 만들던 그 바보 같은 여자아이.“바보.”청산이 웃으며, 울먹이며 말했다.“바보.”청산도 손을 들어 유하의 얼굴을 가볍게 따라갔다.사랑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기억에, 영혼에, 몸의 본능에 깊이 새기려는 것처럼.그러면서도 끝내 접지 못한 마음으로 물었다.“날 거절한 거, 오승현 때문이야?”“아니.”유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이건... 선배랑 내 일이야.”“선배랑 나.”청산은 작게 웃었다.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참아 내며 청산이 말했다.“우리...”청산은 ‘우리 앞으로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라고 묻고 싶었다.그런데 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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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미안해.”유하는 청산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흐리게 말했다.“미안해.”‘미안해.’그제야 청산이 정신을 붙잡았다.하지만 청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유하의 가는 허리를 감아 끌어안고 몸을 더 밀착시킨 채, 키스를 깊게 이어 갔다.서로는 입술과 이가 맞물렸다.청산은 마음속으로 빌었다.‘시간이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이대로 끝까지, 아주 오래...’그런데 청산의 마음은 끝없는 황량함으로 번지는 슬픔에 잠겨 들었다. 눈물이 시야를 흐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는 겨우 입술이 닿아 있는 부드러운 온기만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그때 창밖으로 주홍빛 노을이 스며들었다.부드럽고 환한 빛이었다.그래도 전통찻집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유하와 청산보다 선명하지는 않았다....그때, 전통찻집 문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아무 대답도 없었다.곧이어 더 무겁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그제야 안에 있던 유하와 청산이 정신을 차리고 떨어졌다. 유하는 얼굴 가득 번진 눈물을 황급히 닦으며, 살짝 아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무 의자에 기댄 청산 쪽은 감히 보지 못했다.문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점점 커졌다.“나... 내가 문 열게.”유하는 허둥지둥 돌아서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밖 사람과 눈이 마주친 채 그대로 굳었다.승현이었다.승현은 울어서 붓고 붉어진 유하의 눈, 그리고 깨문 자국 때문에 약간 부어오른 붉은 입술을 훑어봤다. 무표정으로 싸늘한 눈빛이 유하를 넘어 전통찻집 안쪽으로 향했다.그때 전통찻집 안에서는 청산이 막 수건을 내려놓은 참이었다. 얼굴의 눈물 흔적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고, 청산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만 선명하게 울었던 흔적이 남은 붉은 눈가만이 승현과 멀리서 마주쳤다.서로는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주변은 차갑게 가라앉았다.유하는 이유 없이 사위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꺼내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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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맞아, 내가 했어.”청산의 질문에 승현은 아주 단호하게 인정했고, 굳이 숨길 일도 아니라고 판단했다.원래 승현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소성란에게서 전화받은 때부터 승현은 청산에게도 연락이 갈 수 있다고 짐작했다. 마침 승현에게는 그걸 막을 능력도, 방법도 있었다.게다가 승현은 코시오 건의 총괄 책임자였다.그는 의심할 만한 지점 하나만 던져도, 말 한마디만 보태도 청산을 충분히 묶어 둘 수 있었다. 출국은 물론이고 W시를 벗어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승현의 시선이 찻상 위로 떨어졌다.약혼반지가 들어 있던 게 분명한 비단 상자.무표정하던 승현의 얼굴 위로, 마침내 옅은 웃음이 올라왔다.“결과는 나쁘지 않네.”유하는 파혼했다.결과만 좋으면 됐다.승현은 유하가 다른 남자 때문에 울었던 일도, 감히 다른 남자에게 입을 맞춘 일도 당분간은 눈감아 줄 생각이었다.괜찮았다.길을 잠깐 잘못 든 것뿐이었다.딱 한 번 이렇게 빗나간 거라고, 승현은 그렇게 생각했다.앞으로는 승현이 유하를 붙들어 둘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승현의 입가에 걸렸던 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옆으로 늘어뜨린 손이 단단히 쥐어졌다.“네가 그렇게 하면 유하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알아? 넌 늘 그런 식으로 유하를 몰아붙이고 상처 입혀.”청산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청산은 감히 다 상상하지도 못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하가 그때 얼마나 무너졌는지, 얼마나 누군가의 곁이 필요했는지.그런데 청산은 W시에 묶여 꼼짝도 못 했다. 어디에도 갈 수 없었고, 유하 곁으로도 갈 수 없었다.청산은 승현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묶어 두고, 빈틈으로 파고들려는 계산이었다.그런데 청산이 더 분명히 아는 것도 있었다.“그때 유하가 보고 싶었던 사람, 곁에 있기를 바랐던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청산은 승현을 똑바로 보며 승현이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알고 있는 사실을 정확히 찔렀다.“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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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아내? 무슨 아내야.”청산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전남편이지. 근데 너는 이것도 확인이 필요하네. 유하가 너한테는 옷을 안 만들어 줬나 봐? 바느질 결만 봐도 유하 솜씨인데, 그것도 못 알아보냐?”승현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예전에 유하가 승현에게 수트 한 벌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예복은... 산산이 찢겨서 붙일 수도 없게 된 그 옷을 떠올리자, 승현의 표정은 더 차가워졌다.그래도 어쨌든.승현에게는 한 벌, 그것도 수트가 전부였는데, 청산에게는 결혼 예복을 만들어 줬다고?결혼 예복?승현은 당장이라도 그 나무 상자째로 안의 옷까지 모조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눈앞의 청산까지 함께.“아, 갑자기 생각났네...”청산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무 상자를 이쪽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러고는 소매 단추를 풀고 소매를 반쯤 접어 올리면서 웃는 낯으로 차분하게 말했다.“맞다. 오승현 대표는 원래 남의 거 뺏는 데 일가견 있었지? 막무가내로 다 뺏고. 남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도 유독 열심이고.”청산은 눈웃음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참고로 나랑 유하는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야. 대학 때도 유하가 먼저 나한테 청혼했어.”“지금도 그래. 우리는 네가 ‘죽은 뒤’ 이혼 처리 끝난 다음에 정식으로 연애했고 약혼한 사이였어.”“그런데 너는 또 이런 더러운 수작으로 남의 관계에 끼어들었지. 승현아, 그렇게 남의 사이 비집고 들어가는 게 재밌냐?”‘진짜...’승현의 관자놀이 핏줄이 크게 뛰었다. 바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대체 누가 끼어든 건데?’‘정작 남의 관계에 끼어든 쪽이 누군데, 저 말이 어떻게 저 입에서 나와?’‘이걸 참으라고?’승현은 이런 모욕을 참아 본 적이 없었다....“대표님, 이 상태는...”태건이 막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통찻집에서 걸어 나오는 승현을 봤다. 승현은 한 손에는 벗어든 재킷, 셔츠 깃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손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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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말 함부로 할 거면 입 다무는 게 낫지.’승현은 더 내려 볼 기분도 아니었다.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짧게 말했다.“유하 있는 데로 가.”“네.”...같은 시각, 유하도 온라인에서 불붙은 이야기들을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확인했다.가치가 오른다는 말은 맞았다.다만 유일본은 아니었다. 청산에게 준 그 한 벌이 더 있으니까.그래도 청산이 그 결혼 예복을 입고 공식 석상에 서기 전까지 그 예복의 존재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왕실에 간 웨딩드레스를 유일본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아쉽다면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유하는 왕실 웨딩드레스로 이름을 알렸고, 그걸 계기로 국제 무대에 정식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유명 인사들이 맞춤 웨딩드레스를 의뢰하러 꾸준히 찾아왔다.유하는 전부 거절했다.그런데 이 시점에서 이 공지까지 공개했으니, 유하의 장래 커리어가 조금 더 천천히 갈 건 분명했다.그래도 유하는 후회하지 않았다.유하는 청산에게 빚이 있었다.결혼 예복 한 벌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그래서 하나를 더 올렸다.오늘부터 유하는 어떤 웨딩 디자인도, 제작도 하지 않는다.이 길을 스스로 막아 두면, 유하 인생의 결혼 예복 관련 작업은 단 두 벌로 끝난다.하나는 영국 왕실에 소장된 웨딩드레스.하나는 청산에게 준 결혼 예복.이런 작품에는 유하만의 개인 마크가 들어간다.작품의 주인을 확정할 수 있다.여성 웨딩드레스 한 벌, 남성 결혼 예복 한 벌.양쪽 모두 단 하나뿐이다.그게 유하가 청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청산에게 ‘유일한 것’을 하나 남겨 주는 일.유하는 겁이 너무 많았다. 마음속 문턱을 끝내 넘지 못했다.그녀는 소중한 것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씩 떠나보내는 일을 이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유하를 떠나보내는 일도 원하지 않았다.누구에게나 잔인한 일이었다.무뎌진 칼로 천천히 베는 잔인함.그래서 유하는 이렇게 생각했다.‘아프기 싫고, 잃기 싫으면... 애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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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승현이 문밖에 있다는 걸 확인한 유하는 망설이지 않았다.초인종 소리를 꺼 버리고, 못 들은 척 귀를 닫았다.유하는 그대로 2층 안방으로 올라갔다.창문을 닫고, 문을 잠그고, 불까지 끈 뒤, 갑자기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늘한 몸을 단단히 감싼 채 고요한 적막 속에서 눈을 감았다.유하는 어젯밤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오전에 보충해서 자긴 했지만, 수면은 턱없이 부족했다.몸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하는 불편한 열감과 함께 그대로 곯아떨어졌다.그 시각, 집 바깥.승현은 한참 동안 초인종을 눌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결국 손을 뗐다.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보니 집 안은 온통 깜깜했다. 사람이 없는 집처럼 꾸며 둔 티가 났다.승현의 입가에 냉기가 번졌다.“나한테 그렇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숨는다고? 소유하, 세상에 그런 식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어.”승현이 뒤를 돌아 태건을 봤다.“이렇게 오래 불러도 안 나오면 안에서 쓰러졌을 수도 있지. 사람 불러. 문 따.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태건이 바로 지시를 이행했다.“네, 이미 호출해 두었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도착했다.몇 사람이 내려 문 주변을 손봤고, 잠시 뒤 승현에게 고개로 신호를 보낸 뒤 떠났다.이제 초인종은 필요 없었다.승현은 아무렇지 않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불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곧장 2층으로 올랐다. 이어서 멈춤 없이 안방 위치를 찾아간 걸 보면, 집 구조에 익숙한 움직임이었다.안방 문을 열었다.달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이불이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승현은 속에 눌린 화를 품은 채 다가갔다. 당장 이불을 들춰 유하를 깨워 따지려다가 손을 뻗던 동작이 중간에서 멈췄다.“고모할머니... 추워요.”이불 속 유하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잠결에 낮게 중얼거렸고, 몸이 작게 떨렸다. 차가워서 떠는 것처럼. 눈가에는 젖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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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또 왜 그래. 어젯밤엔 네가 먼저 매달렸잖아. 왜, 다 썼으니 이제 버리게?”유하는 그 얘기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더 신경 쓰이는 문제는 승현이 대체 어떻게 들어왔냐는 거였다.그런데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승현이 이런 짓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물어봐야 소용없었다.승현은 원래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었다.말해도 바뀔 사람도 아니었다.그렇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이 미친놈...’그 생각이 도화선이 됐다.머릿속의 이성이 한꺼번에 타올라 유하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오승현, 너 진짜 바닥이 없냐? 나 분명히 말했어. 나는 너 용서 안 해! 받아들일 생각도 없어. 네가 그렇게 아내가 필요하면 다른 사람 찾아. 아니면 내가 대신...”“여보!”승현이 목소리를 높여 유하의 말을 끊었다. 조금 전까지 느슨하게 놀리던 톤은 사라지고,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유하는 말을 멈췄고, 눈앞의 승현이 화가 났다는 것이 느껴졌다.그런데 화가 나면 뭐 어쩌라는 건지, 한밤중에 남의 집 문 따고 들어온 일은 아직 말도 못 했는데, 이 ‘미친개’는 또 무슨 일로 화를 내는 건지... 유하는 어이가 없었다.대체 사생활이 있긴 한 건가?유하가 다시 입을 떼려던 찰나, 둔탁한 소리가 났다.언제 일어났는지 승현은 바닥에서 몸을 세우고, 의자 하나를 끌어와 유하 앞에 놓고 앉았다. 침대에서 50cm쯤 떨어진 자리였다. 표정은 따지러 온 사람 같았다.‘지금 누구한테 따지겠다는 거야? 아직 나도...’“여보, 너 진짜 대단하다. 나를 이렇게 빙빙 돌려놓고, 책임은 하나도 안 지려는 거지?”“뭐?”승현의 어둡고 깊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한 유하는 어리둥절했다.‘무슨 소리야?’“여보.”승현은 비웃기라도 하는 듯, 또 자신을 조소하듯 웃었다.“나든, 임청산이든, 너는 처음부터 둘 다 가질 생각이 없었던 거 맞지?”“근데 임청산은 마지막에라도 단맛은 봤더라. 나는? 아무것도 없지. 가지고 놀 만큼 놀고 그냥 버렸어.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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