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861 - Chapter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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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1화

이건 소성란이 유하를 위해 만든 웨딩드레스였다.몸 상태가 이미 많이 나빠진 뒤였는데도 소성란은 드레스를 끝내 완성해냈다.소성란은 오래전부터 직접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일을 멈춘 상태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단 한 벌을 남겼다. 유하를 위해서였다.이것은 소성란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었고, 더는 이어질 수 없는 작업, 말 그대로 마지막 노래였다.그런데도... 아무리 완성되었다 해도, 아무리 언젠가 유하가 이 드레스를 입게 된다 해도, 그 모습을 소성란은 볼 수 없었다.눈 안에 눈물이 차올라 반짝였다.유하는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흐릿해진 시야를 붙잡으려 애쓰며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소성란이 남긴 마지막 작품을 제대로 보려고 집중하던 중, 마네킹 머리 위의 왕관 안에 무언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종이였다.유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 펼쳤다.안에는 두 문장뿐이었다. 소성란의 필체였다.[작품명: 왕을 위하여][너는 이 드레스를 평생 입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입어도 된다]눈물이 뚝 떨어졌다.종이 위로 번졌다.유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조심히 움켜쥐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허리를 굽혀 옆에 놓인 상자를 짚고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오래 눌러두고 감춰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소리를 죽인 울음이었지만, 이내 숨이 막히듯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바뀌었다.유하의 머릿속에 조금 전 서재에서 집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사실 회장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오승현 대표님께만 전화하신 게 아닙니다. 임 대표님께도 연락하셨습니다.”“하지만 마지막에 병원으로 오신 분은 오승현 대표님뿐이었죠. 그래서 오승현 대표님이 회장님을 마지막으로 뵐 수 있었던 겁니다.”소성란.‘이제 알겠어.’유하는 마침내 이해했다.소성란이 자신에게 남긴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소성란이 줄 수 있는 전부였다.사랑이었다.모든 사랑.텅 비어 있던 마음이 한꺼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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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2화

유하가 누구도 만나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유하는 모든 연락을 끊었고, 핸드폰 전원까지 꺼 두었지만, 승현을 전혀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간격을 두고 종종...유하는 작업으로 지칠 때면 로즈 가든 안을 산책했는데, 그때마다 이곳을 찾은 승현을 멀리서 마주치곤 했다.늘 그렇게, 멀리서였다.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모든 작업을 끝낸 뒤에야 유하는 알았다. 승현은 유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주 로즈 가든을 찾고 있었다는 걸. 병원과 관련된 일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승현은 정식 방문객 자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집사 역시 특별히 승현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고 했다.승현은 와서 딱히 하는 일도 없었다.1층에 앉아 차를 마시고, 찻주전자가 비면 조용히 일어나 돌아갔다.몇 달 내내 그랬다.왜 그랬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그래...’유하는 알고 있었다.“소 대표님, 웨딩드레스는 제 약혼자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합니다. 큰 수정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접견실에서 금발의 왕자는 승마복 차림으로, 막 피팅을 마친 예비 왕비의 손을 잡은 채 유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중국어 발음도 상당히 유창했다.“그리고 이 드레스를 대회에 출품하고 싶다는 요청도, 저희는 문제없습니다.”말을 마친 왕자는 웃으며 덧붙였다.“사실 이 이야기는 이미 예전에 소 선생님께서 저희와 상의하셨고, 그때 약속이 된 일이기도 합니다.”소성란이 이미 다 정리해 두었단 말이었다.유하의 가슴이 조용히 울렸다.그때 왕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제 어머니께서도 소 선생님의 작품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선 꼭 도와주라고 하셨어요. 이후 대회에도 윈나가 이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습니다.”윈나는 그 예비 왕비의 이름이었다.유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왕실이 이렇게까지 흔쾌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비 왕비가 직접 이 드레스를 입고 국제 대회에 참석한다는 건, 그 자체로도 상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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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3화

이대로 버티는 건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유하는 이를 악물고 결국 운전석에 올라탔다.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어디 살아?”승현이 주소 하나를 말했다.유하는 바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로즈 가든이었다.자기 집을 말하는 그 뻔뻔함에 속이 뒤집혔다.유하는 다시 물었다.“어디 사는지 제대로 말해. 안 그러면 아무 데나 세워서 너 내려놓고 간다.”“그럼 내려.”승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안전벨트를 당겨 매고 좌석을 뒤로 눕혔다. 살짝 취기가 오른 눈을 감고는, 그대로 잘 생각인 모양이었다.유하는 이를 갈며 차를 몰았다.결국 로즈 가든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승현을 차에서 끌어내지 못했다.이유는 단순했다.도저히 내리게 할 수가 없었다.너무 무거웠다.쓸데없이.차가 로즈 가든 안으로 들어오자 유하는 세게 문을 닫았다. 차 안에서 깊이 잠든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중 나온 집사를 그대로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씻고, 몸에 밴 피로를 씻어낸 뒤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작업 기간 동안 유하는 거의 쉬지 않고 일했다.정말로 지쳐 있었다.가을이 시작되면서 이불을 덮고 중앙난방도 틀어두었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유하는 새벽녘, 반쯤 잠든 상태에서 추위에 몸을 떨었다. 눈은 감은 채로 불안하게 뒤척이며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나서야 겨우 잠잠해졌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있는 남자의 가슴을 보고서야 잠이 덜 깬 머리가 한참을 지나 상황을 인식했다.반사적으로 발이 먼저 나갔다.승현은 그대로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승현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피곤한 듯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또 왜?”“그 말은 내가 해야지. 너 어떻게 들어왔어?!”유하는 얼굴을 굳힌 채 소리쳤다.대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자기 옷차림부터 확인했다.괜찮았다.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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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4화

“집사가 아니야.”승현이 웃으며 말했다.“담 넘어오고 창문으로 들어왔지.”이런 말을 저렇게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승현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잘못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태도였다.유하의 속에서 바로 불이 치밀어 올랐다.막 화를 내려고 했는데, 문득 시선이 멈췄다.유하의 방 창은 해가 잘 드는 방향이었다. 기울어진 햇빛이 스며들어, 그녀 앞에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웃고 있는 남자를 감쌌다. 몸 위로 금빛이 얇게 내려앉았다.아무리 봐도 열받는 인간인데도 유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승현은 누구든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정말로 그 얼굴만큼은...그리고 그 사실이 유하의 화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는 않았다.짝!경쾌한 소리가 울렸다.승현은 뺨을 감싸 쥐었다. 속눈썹이 아래로 떨어지며 가볍게 떨렸다. 억울한 표정을 가장한 채 낮게 말했다.“왜 또 때려?”“창문 넘어와서 사람 괴롭혔잖아.”유하는 차갑게 말했다.“이유로 부족해?”“괴롭힘?”승현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갑자기 일어나 유하 쪽으로 다가왔다.유하는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그와 동시에 입술 위에 촉촉한 감각이 스쳤다. 혀가 가볍게 닿았다. 유하의 눈이 커졌다.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뻔뻔했다.“여보, 이게 괴롭힘이지.”...로즈 가든.1층, 다이닝 룸.집사가 사람들에게 식사를 올리라고 지시하던 중, 밖에서 들어오는 승현을 보았다. 시선이 얼굴에 닿자 잠시 멈칫했다.남자의 뺨은 살짝 붉어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맺혀 있었으며 목에는 분명하게 손자국처럼 남은 자국이 둘러 있었다.“오승현 대표님, 이건... 약을...”“필요 없습니다!”그보다 먼저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유하가 얼굴을 굳힌 채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앞으로 성이 ‘오’ 씨인 인간 오면 바로 끌어내요. 로즈 가든은 개 출입 금지예요.”집사는 좀 난감했다.“아가씨, 이건 좀...”승현은 입술 옆에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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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5화

가을, 흐린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작업실에서 왕실에 납품할 웨딩드레스의 세부를 조금 더 손본 뒤, 유하는 작품을 L-FDA 공식 측에 제출했다. 이제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여기까지 마치고 나서야 유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런데도 유하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곧장 본사로 이동해, 반드시 본인이 직접 서명해야 하는 계약 몇 건을 처리했고, 그렇게 하루가 훌쩍 지나서야 저녁 무렵 건물을 나섰다.오랜만에 시간이 났다 싶어, 일을 마친 뒤 이솔에게 연락해 볼까 했지만, 이솔 쪽이 오히려 더 바빴다. 관련 고객들의 법률 자문 일정이 꽉 차 있었다. 결국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본사 정문을 나서자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이미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있었다.공기는 눅눅하고 서늘했다. 바람을 타고 얼굴로 스치는 습한 기운에 잔비가 섞여 있었고, 귀 옆의 머리카락도 가볍게 흔들렸다.유하는 문득 생각이 났다.비가 이렇게 오래 내렸는데, 집에 있는 장미들은 괜찮을까?소성란이 남긴 로즈 가든에는 직접 심은 장미가 많았다. 품종도 다양했고, 그중에는 늦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었다. 여름부터 지금까지 시들지 않고 함께해 온 꽃들이었다.이 비로 다 떨어진 건 아닐까?그렇게 생각하자 유하도 마음이 조급해졌다.막 핸드폰을 꺼내 집의 기사에게 연락하려던 찰나, 차 한 대가 눈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 창이 내려가며 보기만 해도 신경을 긁는 얼굴이 나타났다.승현이었다.“가자.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나 기다릴...”“아, 로즈 가든 기사 오늘 못 와.”승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타. 마침 전에 태워준 거 답례도 해야지.”유하는 말이 없어졌다.잠시 그렇게 서 있었는데, 곧 유하를 태우러 오기로 했던 기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고장 나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었다.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있었다.유하는 입술을 살짝 눌렀다. 아무 말 없이 뒷좌석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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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6화

다만... 승현과 유하가 결혼했던 그 몇 년 동안, 유하는 승현의 옷에 직접 향을 입혀준 적도 있었고, 그 향이 좋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승현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그런데 이제 와서 싫다고?‘그럼 유하가 좋아하는 향기는 뭔데?’‘아니,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비 오잖아.’승현은 정신을 차리고 우산을 집어 들어 차에서 내려 유하를 쫓아갔다....장미 화원.정원 안의 꽃들이 마음에 걸려, 유하는 우산도 펴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그대로 달려 들어갔다.로즈 가든 안쪽에는 이미 철이 지난 장미들이 대거 시들어 있었다. 가을까지 버텨온 몇몇 장미들도 낮 동안 쏟아진 비에 견디지 못한 듯했다.꽃잎이 여기저기 흩어져 바닥을 덮고 있었고, 남은 건 축 처진 가지와 힘없이 매달린 잔화뿐이었다.유하는 빗속에서 멈춰 섰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한 그루의 장미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비에 눌려 휘어진 초록빛 가지 끝, 간신히 매달린 핑크장미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유하는 기억하고 있었다.소성란이 예전에 말해준 그 나무였다.이 품종의 이름은 ‘가을의 꿈’.귓가에 그날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유하야, 이 아이 좀 봐. 가지는 작고 여려 보여도 가을의 찬 기운을 이기고 깊은 가을까지 꽃을 피워.”“와, 대단해요. 고모할머니, 이름도 있어요?”“가을의 꿈.”“가을... 꿈?”“그래. 낙엽 지고 모두 시들어가는 가을에도 피어 있는 핑크장미야. 꿈처럼 예쁘지. 피었을 때 보면 알 거야. 정말 아름다워.”정말 아름다웠다.그런데 끝내 깊은 가을까지는 가지 못했다.단 한 번의 비로 가을 초입에서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유하에게 밀려왔다. 묵직한 무언가가 유하의 가슴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조여 오는 목을 지나 코끝을 찔렀다. 시큰하고, 쓰라렸다.유하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강하게, 울고 싶어졌다.왜인지 유하 자신도 알 수 없었다.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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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7화

비를 더 맞다가 열이라도 나면 어떡하냐고 해도 유하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승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우산을 든 채 유하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깨 한쪽과 옷자락이 빗물에 젖어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그러다 서서히 비가 잦아들었고 하늘은 어두워졌다.로즈 가든 안에는 하나둘 불이 켜졌다.유하는 가지 끝에 매달린 핑크장미를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이건 고모할머니가 심으신 꽃이야. 원래는 늦은 가을까지 피는 종류야.”“그럼 대단한데.”승현도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름은 뭐야?”“가을의 꿈.”“이름도 참 예쁘다.”“응...”...“에취!”방 안에 들어왔지만 유하는 보송한 담요를 둘러쓰고 연달아 재채기했다.결국 감기에 걸렸다.“자, 약 먹어.”승현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색이 진한 약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표정에는 답답함이 묻어 있었다.“들어가자고 해도 안 듣더니 결국 이렇게 됐잖아. 몇 번을 말해, 몸 좀 챙기라고.”유하는 약을 받아 들고 말없이 마셨다.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약은 몹시 썼다.그릇을 내려놓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졌는데, 다음 순간 입안으로 사탕 하나가 쏙 들어왔다. 달콤한 맛이 퍼지며 혀에 남은 쓴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자 승현이 웃고 있었다.“달지?”“봐,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유하는 입안의 사탕을 ‘아작’ 소리 나게 깨물어 삼키고는, 아무 표정 없이 베개 하나를 집어 던졌다.“나가!”정말로 조금이라도 봐주면 안 되는 인간이었다.하지만 유하는 승현을 내쫓지 못했다.승현은 또다시 아주 능숙하게 귀를 틀어막은 사람처럼 유하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유하를 안아 들어 그대로 이불 속에 밀어 넣고, 뜨거운 품에 끌어안았다.유하의 몸이 난로 안에 들어온 것처럼 따뜻해졌고, 가을밤의 냉기가 금세 사라졌다.여전히 화가 나 있었지만, 약기운 때문인지 몇 마디 더 내뱉지도 못하고, 유하는 뜨겁고 단단한 품 안에서 서서히 잠들었다.하지만 한밤중.천둥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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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8화

“뭐라고요?”폭우가 쏟아지는 소리 속, 캄캄한 침실에서 유하는 한순간 자신이 고열 때문에 환청을 듣는 건 아닐까 싶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있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집사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목소리가 몹시 다급했다.[오승현 대표님이 아가씨께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계속 저러다간 큰일 날 것 같아서요. 아가씨, 나가서 말려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알겠어요.”유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해열제를 가져다 달라는 말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유하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한참이 지난 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도 모른 채 유하는 축 늘어진 몸을 추슬러 겨우 일어섰다. 벽을 짚고 한 걸음씩 옮겨 창가로 갔다. 창틀에 몸을 기대고, 뜨거운 숨을 낮게 내쉬며 어지러운 머리를 버티고 밖을 내려다봤다.유하의 방 창문에서는 정원이 보였다.폭우 속.번개가 하늘을 가르던 찰나, 유하는 보았다.낮에 마음에 걸려서 떠나지 못했던, 그 장미나무 아래.검은 우산 하나가 펴져 있었다.시선을 더 낮추자 의자가 보였고, 그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검은 우산을 든 채, 장미나무 위를 가려 주고 있었다.꼼짝도 하지 않은 채.승현이었다.낮에 유하에게 우산을 씌워 주던 것처럼.이번에는 그 꽃을 위해서였다.유하가 신경 쓰던, 그 꽃을 위해서.‘왜?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야?’이렇게 하면, 자기가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일들이... 속이고 이용했던 것들이... 유하가 견뎌야 했던 그 답답하고 아픈 시간이... 다 지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유하의 얼굴은 열로 달아올라 있었고 눈도 붉어졌고, 머리는 더 심하게 어지러워졌다.‘상관없어.’유하는 고개를 돌렸다. 다시 창밖을 보지 않았다.비 맞다 죽든 말든... 고작 비 한 번일 뿐이었다.자기가 겪은 건...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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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9화

승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거의 반사적으로 승현은 우산을 내던졌다. 더는 그 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성큼성큼 달려가 막 복도 아래로 두 발짝 내디딘 유하를 그대로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 다시 복도로 돌아왔다. 그대로 침실까지 뛰어가면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몸도 안 좋은데 비 맞으면 어떡하려고!”“먼저 나를 무시한 건 너잖아!”유하도 이미 화가 나 있었다. 열이 올라 정신이 흐릿한 상태라 감정이 더 거칠었다. 승현이 소리를 치자 유하도 있는 힘을 다해 맞받아쳤다. 목소리는 작게 떨렸지만,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계속 소리를 냈다.“그렇게 불렀는데도 안 돌아오잖아! 안 그랬으면 내가 나갔겠어?!”“비 맞고 쓰러질 거면 남의 집에서 그러지 마!”“내려놔!”승현이 침대에 유하를 눌러 앉히고 젖은 잠옷을 벗기려 하자 유하는 바로 몸부림쳤다. 화와 열기가 뒤섞여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목소리도 떨렸다.“내가 돌아오라고 했는데, 너는 끝까지...”‘차라리 그냥 비 맞고 쓰러지게 놔둘걸.’“아니야.”유하가 우는 걸 보자, 승현의 마음이 바로 풀렸다. 손길도 한결 조심스러워졌다.“옷 다 젖었잖아. 이대로 자면 더 힘들어...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뜨거워?”이상함을 느낀 승현이 이마를 짚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이쯤 되자 더는 유하의 의사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달래는 것도 뒤로 미뤘다. 승현은 먼저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가져오라고 한 뒤, 젖은 옷을 전부 벗기고 이불로 유하를 단단히 감쌌다. 그대로 안아 욕실로 들어갔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집사가 가져온 따뜻한 물과 약을 받아 들고, 마른 새 이불 하나를 더 가져오라고 한 뒤, 승현은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약을 먹이고, 열 때문에 뒤척이는 유하를 붙잡고 몸을 닦고, 마침내 데워 둔 이불 속에 밀어 넣고 나서야 모든 게 끝났다.승현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시 욕실로 가 간단히 샤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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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0화

‘열이 그렇게 쉽게 떨어질 리가 없지!’유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이불 속으로 파묻었던 머리를 다시 빼냈다. 머리칼이 잔뜩 헝클어져 엉망이 된 채,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을 깜빡이며 자기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왜 그런 짓을 한 거야?”“뭐?”질문이 나오자마자, 승현은 바로 알아들었다.조금 전, 정원에서의 일이었다.“별거 아니야.”“말해.”유하는 눈을 부릅떴다. 모호하게 말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 게다가 열이 오른 상태라 인내심은 더 바닥이었다. 화가 나면 바로 터뜨렸다.사실, 요즘은 승현을 상대로 늘 그랬다.어쩔 수 없었다.저 얼굴만 보면 화가 났다.게다가 이 인간은 가만있질 않고 계속 사람을 긁었다.“와, 진짜 성격 대단하네.”승현이 웃으며 말했다.“간단해. 너 원래 잘 우는 편이잖아. 낮에도 그 꽃 지키겠다고 비 맞고 서 있다가 열까지 올랐고. 네가 깼는데 꽃이 져서 떨어지면, 또 울 것 같아서.”“나 안 울어!”유하는 발끈했다.“그래 그래.”승현은 일부러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여보는 절대 안 울지. 떨어지는 건 눈물이 아니라 비고.”“너 날 무시해!”“무시라니, 내가 감히...”승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표정이 조금 달라졌고, 말투도 함께 가라앉았다.“네가 그 꽃을 아끼잖아. 네가 아끼는 건, 나도 신경 쓰여. 그래서 꽃이 떨어지는 게 싫었어. 그리고 난 몸도 튼튼해서, 비 한밤중 맞는다고 쓰러질 사람도 아니고.”그러다 말을 잇는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다.“근데 이젠 어쩔 수 없겠다. 내일이면 그 꽃도 아마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너 울면 안 된다.”“나 원래 안 울어.”유하는 그 이유가 나올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소리를 질렀을 텐데, 말이 이상하게 낮게 나왔다. 말을 끝내자마자 얼굴을 푹신한 흰 베개에 묻어 버렸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그렇게 파묻고 있으면 숨 막혀.”승현이 가까이 다가왔다.유하는 급히 고개를 들며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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