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901 - Chapitre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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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1화

유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낯선 감정을 눌러 넣었다. 그리고 서재 문을 조용히 닫고, 창가 아래 놓인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엄마.”준서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유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하가 자기 옆에 앉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한 번 불렀다. 말끝이 조금 떨렸다.“왜 울어?”“안 울었어요. 엄마... 그냥, 그냥 엄마 보고 싶었어요.”“응.”유하는 대수롭지 않게 한 번 묻고는 준서를 다시 보지 않았다. 시선은 계속 책상 위, 햇빛이 넓게 내려앉은 종이 위에 머물렀다. 종이에는 빼곡한 개념 정리와 계산식이 적혀 있었다.이미 초등 수준이 아니었다.오씨 가문에서 가르치는 방식이었다.그리고 준서는 똑똑했다.‘그래. 정말 똑똑한데, 그래서 더 묻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잘했네. 정말 잘하고 있어.”유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그러고서야 옆의 준서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의 냉담함과는 다른, 칭찬이 섞인 말이었다.준서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엄마, 저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말도 잘 들었고요. 엄마 올 때까지 착하게 기다렸고, 떼도 안 썼어요.”“응, 준서 착하다.”준서의 눈이 더 반짝였다.준서는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유하의 옆으로 내려온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유하가 손을 빼지 않자, 준서는 그제야 말을 꺼냈다.“엄마, 그럼... 그럼 저 언제 집에 데리고 가요?”“집에?” 유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네 집 아니야?”준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준서는 거의 바로 알아차렸다. 감정이 확 올라왔지만, 입을 열어 따지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아빠가 말했었다. 묻지 말라고.그리고 준서는 이제 확신했다. 역시 물으면 안 되는 거였다고.얼마 전, 증조할아버님이 청산 아저씨 집에서 자기를 여기로 데려왔을 때부터 준서는 알고 있었다. 엄마의 고모할머니, 오래 외국에 살던 자기의 고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그 이후로 유하는 준서를 찾지 않았고, 연락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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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2화

준서는 점점 더 아빠인 승현을 닮아 가고 있었다.유하는 준서의 이야기를 마지못해 듣고 있었다. 시선은 이미 종이 위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고, 생각은 책상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어떻게 해야 하지?’유하 마음속 결론은 준서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유하는 준서를 더는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준서를 데리고 자신과 소성란이 함께 살던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예전에는 준서를 데려가려고 했다. 소성란이 원했고, 유하에게 남아 있던 책임감이 버팀목처럼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제 소성란은 없다.유하가 애써 피하려 했던 일들, 그 옥 목걸이에서 시작된 일들 피할 수 없이 마음속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준서가 조금만 더 일찍... 정말 조금만 더 일찍 소성란을 만났더라면...잘못을 인정하고 소성란에게 한마디라도 들었다면, 그걸로 끝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그런데 끝내 그렇게 되지 않았다.사람이 떠나면, 불이 꺼진다. 모든 것은 삶이 멈춘 지점에서 그대로 굳어 버린다. 하고 싶던 말은 더는 꺼낼 수 없고, 인정하고 싶던 잘못은 인정할 수 없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닿을 곳이 없다. 그렇게 틈이 생기고, 그 틈은 커져서 커다란 빚처럼 남는다. 살아 있는 사람을 붙잡아, 앞으로 한 걸음도 못 가게 만든다.“엄마.”유하는 그제야 의식이 돌아왔다. 초점이 모이며 옆을 보니, 바짝 붙어 앉은 준서가 서운한 듯하면서도 불안한 눈으로 유하를 보고 있었다.“엄마, 저 말하는 거 듣고 있어요?”“응.”유하는 책임감처럼 남은 습관으로 대답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야. 다이닝 룸 가서 증조할아버님이랑 밥 먹자.”“네...”준서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유하와 준서는 손을 잡고, 기울어진 햇빛이 길게 드리운 복도를 지나 다이닝 룸 쪽으로 걸어갔다.가까워질수록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할아버님, 아이 데리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어딘가 익숙한 여자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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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3화

오국수의 집안은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자연히 오국수의 생활 리듬을 따라야 했다.시간이 되자 식탁에 앉았고, 원래는 조금 소란스럽던 다이닝 룸도 금세 조용해졌다.유하는 오국수 옆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들었다. 병에서 회복해 퇴원했다는 재윤을 먼저 한 번 더 제대로 보고 싶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식사 중에는 그럴 틈이 없었다. 그건 식사가 끝난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배설아가 아들을 데리고 이 집에 나타난 것도, 그리고 오국수와 꽤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유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명문가 사이에 왕래는 흔했다.결혼 초반 몇 년은 설아가 감옥에 수감돼 있었던 탓에 유하는 이런 자리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야기는 들었다. 설아가 들어가기 전에는 오국수가 꽤 아꼈다고. 이유는 단순했다. 설아는 배짱이 있었다.오국수는 군 출신이었다. 젊을 때부터 험하게 살아온 사람 특유의 기세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기세를 가진 사람을 높게 쳤다. 배씨 가문 사람들 대부분은 오국수 눈에 차지 않았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피가 좀 도는 편인 설아에게는 마음이 조금 더 갔다는 말도, 예전에 오국수가 지나가듯 한 적이 있었다.유하도 그건 알고 있었다.식탁에서는 늘 그랬다. 어른이 먼저 말을 꺼낼 때만 젊은 사람들이 짧게 대답하고, 그 외에는 조용히 밥을 먹는다. 나름대로 굳어진 규칙이었다.그래서 한 끼 식사는 무난하게, 조용하게 흘러갔다.점심이 끝나자 오국수는 낮잠을 잔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이 있을 거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집사 마재한이 옆에 따라붙었고, 오국수는 그대로 뒤쪽으로 향했다.오국수가 나가고 나자 다이닝 룸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갑자기 소리가 살아났다.가장 먼저 재윤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유하에게 달려들었다. 오국수를 부를 때의 또렷한 목소리와 달리 이번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엄마.”유하는 속으로 이상했다.‘병 다 나았다며.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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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4화

‘엄마가 배재윤한테 그림을 가르친 적이 있던가?’준서는 이를 갈았다.‘나한테도 안 가르쳐 줬잖아!’‘내가 그림에 엄청 관심 있는 건 아니지만, 배재윤이 배우면 나도 배워야지!’‘...’그런데 막상 준서 차례가 되니까, 유하는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준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빠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그리고 억지로 차분한 척 입을 열었다.“엄마, 이제 제 거 봐주세요.”“어, 그래...”유하가 정신을 차렸다. 아직 머리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 유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준서의 작은 손을 잡았다. 준서가 쥔 붓을 함께 쥐고,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선을 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습관처럼 설명을 덧붙였다.유하에게 예술은 따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었다. 몸에 새겨진 감각이 먼저 움직였다. 거의 본능이었다.그렇게 한참도 아니고 30초쯤 지났을까?유하는 뒤늦게 또렷하게 돌아왔고,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너무 오래 멍해 있었던 탓인지, 눈앞의 종이가 잠깐 흐릿해 보였다. 선들이 뭉개져 보였다.유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다시 선이 또렷해졌다.‘내가 너무 피곤한가 봐.’요즘은 울고, 버티고,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유하는 눈가를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은근히 시큰했다.바다 풍경 그림을 끝까지 완성하도록 가르친 뒤, 유하는 아이 둘을 낮잠 자러 보내며 달랬다.두 아이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 준서 방 큰 침대에 함께 누워 잠드는 걸 확인하고서야 유하는 밖으로 나왔다.유하는 멀리 가지 않고, 욕실로 가서 물로 얼굴을 한 번 씻었다. 눈이 조금 편해졌고, 어지러움도 살짝 가셨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를 힐끗 봤다. 준서 옆에 재윤도 조용히 누워 있었다.유하는 문밖 복도에 놓인 라탄 의자에 몸을 눕혔다. 작은 담요를 덮었다.햇볕이 부드럽게 내려왔다.눈을 반쯤 감으면, 눈꺼풀 틈으로 빛이 점처럼 스며들었다. 잠깐만 쉬려던 마음이었는데, 의자가 느리게 흔들리는 걸 따라 유하는 그대로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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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5화

두꺼운 서류철 한 뭉치였다. 안에는 이미 표시가 다 되어 있었고, 설아도 애초에 목적이 있는 상태로 서류를 넘기니 읽는 속도가 빨랐다. 금방 끝까지 훑어 내려간 설아는 그중 한 장을 쏙 뽑아 태건에게 건넸다.승현은 태건에게서 종이를 받아 들었지만, 들여다보지도 않았다.“정했어?”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걸로. 언제 보내줄 건데.”“누나가 할 일부터 끝내면.”“좋아. 나 지금 바로 갈게.”원하던 걸 손에 넣자 설아는 더 미적거리지 않았다. 만족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갔고, 승현도 뒤따라 나왔다.두 사람은 함께 준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멀리에서부터 복도 아래가 보였다. 라탄 의자에 누운 유하가 작은 담요를 덮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후 햇살이 복도를 비스듬히 넘어 유하 몸 위로 내려앉아, 얇은 금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가끔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현실감이 거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라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낮췄다. 조용한 걸음이 더 조용해졌다. 저 빛이 깨질까 봐, 눈앞의 장면이 흩어질까 봐.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설아는 속으로 또 생각했다.‘소유하 얼굴에 저 분위기까지 얹히니까... 진짜 과하게 예쁘긴 하네.’‘보기 좋긴 한데, 하필 오승현 눈에 띄어서 문제지.’소성란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배씨 가문이 보석 사업을 하는 쪽이라 두 집안 사이에 완전히 끊긴 왕래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도 연락은 닿았다. 설아도 해외로 가서 얼굴이나 비춰볼까 했다.그런데 승현이 설아보다 더 빨랐다. 장례도 이미 승현이 해외에서 대부분 정리했고, 유하를 따라 시골까지 내려가 붙어 있었으니, 설아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그게 설아는 지금도 짜증 났다.짜증이 올라오면, 설아는 속으로 배남진부터 욕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그리고 옆에서 정신 놓고 유하를 보고 있는 승현도 같이 욕했다.‘이것 봐라. 몇 년을 봤는데도 아직도 못 놔주네.’‘남들도 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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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6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유하는 몸이 먼저 불편함을 느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시야가 다시 또렷해지자 눈앞에 크게 들어온 승현의 얼굴이 보였다. 유하는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아니야. 너 뒤로 가. 나 일어날 거야.”승현은 라탄 의자 양옆을 두 손으로 짚고 있었다. 유하가 몸을 일으킬 틈이 없었다.“안 물러나.”승현이 웃었다.“네가 나한테 뽀뽀해 주기 전까진.”유하의 주먹이 저절로 굳었다.움직이기도 전에 옆에서 길게 늘어지는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야, 오승현. 옆에 사람 있거든? 대낮에 좀 작작 해. 내 속 뒤집힌다.”설아는 진심으로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이 미친놈이 여기서 누구한테 자랑질이야?’설아가 곁에 있다는 걸 알아챈 유하는 더 표정이 굳었다.“일어나!”“다른 사람도 있는데, 왜 이렇게 나한테 사납게 굴어?”승현은 웃는 얼굴로 말끝을 늘렸다. 그 태도에는 어딘가 ‘이것 봐라’ 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유하도 유하였지만, 설아도 참기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팔을 걷어 몇 대 후려치고 싶은 기분이었다.‘저 미친 새끼.’‘내가 지금 저놈한테 부탁할 게 없었으면, 바로 뒤집어엎었지.’어찌 됐든 승현이 자리를 떴고, 마당에 설아와 유하만 남았다.설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 하나 들고나와서 유하랑 ‘남을지 말지’에 대해 이야기를 제대로 해보려는 눈치였다.설아가 안으로 들어가자 방금 전 소리에 깨었던 유하도 뒤따라 들어갔다. 아이 둘이 잘 자는지, 소리에 놀라 깬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했다.유하가 안을 들여다보니, 침실은 말끔했다. 두 아이가 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각자 작은 이불을 덮고, 호흡도 고르게 이어졌다. 잠든 얼굴이 지나치게 평온했다.유하는 아이들 잠버릇에 괜히 감탄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이어서 라탄 의자에 다시 몸을 눕혔다....얼마 지나지 않아 설아가 나무 의자 하나를 들고나와 유하 옆에 턱 앉았다.유하는 라탄 의자에 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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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7화

유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설아는 놀라지 않았다. 오기 전에 이미 다 알아보고 왔다. 소성란을 위해 기도하자는 말은 유하가 쉽게 거절하기 어려운 카드였다.다만 이것만으로 유하를 오래 붙잡을 수는 없었다. 길어야 며칠 더 머무는 정도일 것이다. 설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설아가 원하는 것은 다른 거였다. 이 일로 유하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어 두는 것. 이렇게 한 번 틈을 내고, 그 틈을 발판 삼아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래야 유하가 그다음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줄 테니까.그리고 유하의 반응을 보니, 이런 얘기는 승현이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설아는 승현이 이걸 생각 못 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다만 승현과 소유하 사이가 워낙 엉망이었으니, 승현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겠지. 꺼내면 안 됐겠지.’누구든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승현만은 안 되는 이야기.그게 설아에겐 오히려 편했다.설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럼 정하자. 소 회장님 예전에 보각사 자주 다니셨다며? 우리 거기서 기도할까?”유하는 설아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너 재윤이 일 도와준 거 많잖아. 내가 너한테 개인적으로 고마운 마음도 있고. 너무 부담 갖지 마. 보각사에는 내가 이미 다 연락해놨어.”“며칠은 아예 자리를 빼서, 소 회장님 위해서 기도 자리 따로 잡아놨거든.”유하는 믿지 않았다. 아니, 설아가 보각사에 연락했다는 말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앞부분이 믿기지 않았다. 재윤의 일로 고맙다니.그런 말이 설아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더 낯설었다.“괜찮아요. 제가 직접 연...”“이미 다 됐어.”설아가 유하 말을 끊었고,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다 준비해놨는데, 지금 와서 취소하면 그쪽도 곤란해. 내일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어. 네가 급하면 오늘 당장 가도 되고.”“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가서 네 이름으로 보시도 좀 하고... 기부도 하면 더 좋고. 이맘때는 보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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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8화

“준서랑 같이 재밌게 놀았어?”어쨌든 재윤에게 ‘친구’라는 게 생긴 건 처음이었다. 적어도 유하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친구가 자기 아이의 ‘친구’라 해도, 유하는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재밌어.”재윤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드물게 표정이 조금 살아났다.“준서 좋아. 같이 놀아.”설아는 옆에서 바로 눈을 굴렸다.라탄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유하는 설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유하는 재윤 대답을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네.”‘확실히 이 아이, 많이 좋아졌어.’‘말도 훨씬 자연스럽고, 같이 노는 것도 예전처럼 거부하지 않고.’‘근데... 왜 아직도 사람을 헷갈리지?’“엄마, 내일 절 가서 향 올리면 나도 같이 가도 돼?”재윤은 아까 유하가 준서에게 말한 걸 옆에서 다 들었다.“그건...”유하는 설아를 한번 봤다. 설아는 큰 반응이 없었다. 유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일 갈 때 엄마가 부를게.”“응!”재윤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설아가 말을 던졌다.“그럼 너 지금은 서재 가서 그림 그려. 네 엄마랑 얘기 좀 하고, 이따 갈게.”재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빡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유하가 한숨을 삼켰다.“얌전히 가. 엄마가 조금 있다가 가서 네 그림 볼게.”“알겠어, 엄마.”재윤이 마당 안쪽 서재로 들어간 걸 확인한 뒤에야 유하는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고, 옆의 설아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병 다 나았다며.”“나았지.”“그럼 왜 아직 사람을 헷갈려요?”재윤은 방금도 유하를 붙잡고 엄마라고 불렀다. 게다가 재윤이 서재로 들어갈 때, 설아 쪽으로는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그게 정상인가?“그게 뭐가 중요해?”설아가 눈을 들었다. 표정은 무덤덤했다.“너는 애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해. 나는 친엄마인데도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 너 돈 내서 키우는 것도 아니고, 공짜로 애 하나 주운 건데.”“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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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9화

유하가 서재를 나가면서 문을 조용히 닫아 나서는 걸 지켜본 오국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에는 답답함과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유하 그 애는... 독한 애야.”옆에 서 있던 집사 마재한이, 방금 유하가 우려 놓은 주전자를 들어 오국수 잔에 차를 따른 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며 웃었다.“독한 게 나쁩니까? 밖에 나가서도 쉽게 당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지요.”조금 전 서재에서 유하는 분명히 말했다. 보각사에 들러 향을 올리고 기도를 한 뒤, 원래 계획대로 여러 나라를 오가며 소성란이 남긴 자산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그 과정에서 각국에 흩어진 스플렌디드 지사도 점검하겠다고.그렇게 움직이면 만나는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섞일 것이다. 그럴수록 마음이 단단한 쪽이 덜 다친다. 적어도 허술하게 당하진 않으니까.마재한은 알고 있었다. 오국수는 유하를 진짜로 걱정했고, 진짜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 마음에는 여러 층위가 섞여 있었다. 대학 시절 승현과 유하 사이에서 오국수가 승현을 방치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뒤늦게라도 보상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동안 ‘모른 척’해 온 시간의 무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다 빼고도, 오국수는 유하를 친손녀처럼 여겼다. 유하가 먼 길을 떠난다니, 오국수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오국수가 차를 받으며 낮게 말했다.“나도 알아. 남한테만 독하면 그걸로 됐지. 근데 유하는... 자기랑 싸우고 있어. 그런 애가 이 와중에도 밖으로 나가겠다는 게... 하아.”오국수는 한숨을 다시 내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허리와 등이 조금씩 굽어 보였다.“마 집사. 그때는... 내가 진짜 잘못했어. 어쩌다 승현이 그 난리를 치게 내버려뒀을까...”“결국은 다 망가졌어. 다들 산산조각 나버렸지. 누구 하나 편한 놈이 없어.”마재한은 잠깐 말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답했다.“어르신, 승현 도련님은 원래... 고집이 센 분입니다.”마재한도, 오국수도 안다. 그때는 어찌해도 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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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화

‘참... 지은 죄가 많다.’오국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마재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승현 도련님께 말씀은 드릴까요?”오국수가 얼굴을 굳혔다. 짜증과 분노가 섞인 기색이었다.“승현이가 모를 줄 알아?”오국수는 낮게, 딱딱하게 말했다.“승현이도 다 알고 있어. 네가 승현이 왜 그렇게 바짝 조였는지 알아? 승현이를 너무 잘 아니까 그런 거야.”오국수는 손을 휘휘 저었다.“됐다.”그리고 한숨을 길게 뱉으며 덧붙였다.“준서도... 그 애가 겪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이 며칠 사람 붙여서 조심히 보게 해. 준서가 난리 칠 건 난리 치게 둬. 울 건 울게 두고... 다 하고 나면, 나아질 거야.”오국수도 그 정도로밖에는 자신을 달랠 수 없었다.도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따져 보면 오국수나 승현이나 유하에게 ‘고개 숙여라’ 하고 강요할 자격이 없었다. 준서 역시 애초에 승현이 밀어붙이고 속여서 데려온 아이였다. 그 사실이 오국수 입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마재한이 다시 물었다.“그럼 승현 도련님 쪽은... 가능한 수단을 써서라도 막으시겠습니까?”지금 석현이 이곳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승현을 묶어 둘 수는 있다. 핑계를 하나 만들어 부대로 돌려보내고, 잠시라도 묶어두면 유하가 숨을 돌릴 틈이 생길지도 모른다.하지만 오국수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다.”오국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들었다. 마재한이 다가와 먹을 갈려 하자 오국수가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에 안 되면, 진짜로 끝이야. 그 자식도 알아. 더는 못 밀어붙여. 밀면 유하가 부서져.”유하의 정신은 이미 경계선 끝까지 와 있었다.“원수야.”오국수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붓끝을 내리꽂았다. 종이 위에 ‘원수’ 두 글자가 떨어졌다.그때 먹 한 방울이 종이 한가운데 뚝 떨어졌다. 글자가 퍼져 흐려졌다....서재를 나와 유하는 달빛 아래 긴 복도를 걸었다.유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오국수 말이 남아 있었다. 설도 가까우니, 혼자 두기 걱정돼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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