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Chapter 271 - Chapter 280

290 Chapters

제271화 이제 편히 자도 돼

“여보.”지호가 급히 다가와 시아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외할머니 일로 복수하고 싶다면 내가...”지호는 시아가 자신이 두 사람을 내쫓은 걸 불만스러워한다고 여겼다.“외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아.”시아가 낮게 중얼거렸다.아무리 두 사람이 참회하고, 아무리 심하게 벌을 줘도 외할머니의 죽음은 바뀌지 않는다.더구나 원수는 원수에게 있는 법.문제의 뿌리는 두 사람의 험담이 아니라, 유포된 사진이었다.그 사진이 노하숙의 생명을 더 빨리 끊어놓은 치명적인 부적이었다.“시아야, 미안하다, 우리...”두 사람이 급히 다가와 사과를 하자 지호가 단칼에 내쳤다.“나가요!”둘은 시아와 지호가 떠나기도 전에 요양원에서 강제로 쫓겨났다.차가 요양원을 빠져나올 때 시아가 말했다.“향장원으로 가요.”지호가 그런 시아를 한번 바라보고 짧게 답했다.“알았어.”내내 말이 없었다.원래 말이 적은 시아였지만, 노하숙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더욱 침묵이 길었다.차가 멈추자 시아는 지호의 손에서 유품을 받아들었는데, 그건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다.정리하다 보니, 노하숙이 이미 속옷 두 벌과 몇 가지 꼭 필요한 생활용품만 남겨둔 채, 자신의 물건을 다 정리해 두었다는 걸 알았다.노하숙은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내셨던 것이고 시아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배려한 것이다.지호는 그런 시아의 뜻을 알아챘다.시아는 여전히 혼자 있고 싶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손 놓을 수는 없었다.“내가 곁에 있을게. 대신 방해는 안 할 거야. 하지만 밥은 먹어야 해.”지호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먹을 거고 잘 살아갈 거예요. 다만 잠깐 푹 자고 싶어요. 너무 피곤해서요.”시아가 담담히 대답했다.짧은 몇 마디 속에는 지친 숨결과 드문드문 드러나는 약함이 배어 있었다.은근히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 혼자서 마음을 정리할 공간을 달라고 말하는 셈이었다.며칠 동안 지호가 억지로라도 곁에 있어 주었지만, 노하숙이 제대로 편히 눈을 감기 전까지 결코 안정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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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언니를 너무 몰라요

[지호야, 나 지금 마침...]진오가 전화를 받았지만 지호는 남자의 말을 끊었다.“열쇠 수리공 불러. 당장, 바로 지금.”[어?] 진오가 멍하니 되물었다.[누구 집 문을 따라는 거야?]지호는 눈앞의 문을 노려보았다. 머릿속에는 시아가 아픔의 끝에 서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아무런 파동조차 없는 모습이 스쳐 갔다.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이었고 지금 지호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마음이 죽어버릴 정도의 절망이었다.실로 노하숙과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고 그녀는 곧 시아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그런데 이제 노하숙이 없자 지호는 시아가 순간적으로 모든 걸 놓아버릴까 봐 두려웠다.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끓는 기름 위에서 지지는 듯했다. 차라리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건 소설 속의 재벌 사장이 하는 짓이지, 지금의 지호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향장원 쪽, 당장 사람 보내. 최대한 빨리.”지호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진오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너 언제 향장원에 집을 샀어? 나는 왜...]그리고 지호는 진오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쓸데없는 소리 한 마디라도 더 해봐.”그러자 진오는 코끝을 긁으며 중얼거렸다.[알았어, 기다려.]전화를 끊고 나서도 진오는 투덜댔다.“한밤중에 뭔 난리야. 대체 누구 집 문을 따려는 거야?”궁금했지만 결국 사람을 부르며 명령했다.“당장 가. 늦으면 목 날아갈 거니까 살 생각은 하지 말고.”그러고는 휴대폰을 손끝으로 돌리며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진오 오빠.”등 뒤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오자 남자는 발을 멈추고 무겁게 눈을 감았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던 작은 폭탄이 따라붙어 있었다.오늘, 진오는 단지 학교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부진서가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봤다. 아는 얼굴이든 아니든 그런 걸 모른 척할 성격은 아니었다.영웅처럼 나서서 구해냈고, 그 순간부터 진서는 그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고 결국 집까지 따라온 것이다.진서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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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똑같이 당하게 하면 되지

“전화를 안 받잖아. 받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했겠어?”지호의 미간의 주름은 날아다니는 파리도 눌러 죽일 만큼 깊게 팼다.벌써 시아에게 열 번은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뿐이었다. 그게 지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별별 상상을 다 하게 했다.그런데 말이 끝나자마자 진서가 방긋 웃으며 전화를 들고 말했다.“시아 언니, 지금 어디예요? 우리 언니 집 앞이거든요.”이에 지호와 진오가 동시에 진서를 바라봤다.“아, 언니 집에 없구나. 지호 오빠가 걱정돼 죽을 지경이에요. 언니가 잘못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열쇠 수리공까지 불렀다니까요.”진서는 일부러 지호를 흘끔 보며 혀를 쏙 내밀고는 바로 스피커폰을 켰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시아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매서웠다.[누가 내 집 문 다시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니까 알아서 하라고 전해줘.]그 한마디에 현장은 얼어붙었다.진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지호의 표정을 훔쳐봤다.지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웃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여보, 지금 어디야?” 지호가 물었다.[연구소요. 이미아 보러 왔어요.]말은 짧았지만,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했다.지호는 그제야 모든 게 연결되는 듯 고개를 떨궜다.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통화는 거기서 끊겼고, 진오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그래서, 이 문은 따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이번엔 지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서가 나섰다.“따긴 뭘 따요.”결국 자물쇠는 그대로 두었지만 유진오는 수리공에게 수고비를 챙겨주고, 지호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네 빚, 오늘 또 하나 늘었어.”그러곤 덧붙였다.“시아 찾았으니 안심이지? 안 가볼 거야?”지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낮게 답했다.“안 가. 내가 가면 오히려 방해돼.”“방해? 뭘 방해한다는 거예요?”진서가 고개를 갸웃하자 진오가 대신 웃으며 말했다. “그야, 지호의 오빠 미를 발산하는 걸 방해하지 말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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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이혼해요

“너 갑자기 관리소장은 왜 부르는데?”진오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묻자 지호는 시선을 들지도 않고 짧게 잘랐다.“넌 이제 가 봐라.”이건 사실상 내쫓는 말이었다.그러나 진오는 버티듯 팔짱을 꼈다.“진서가 아직 구경도 다 못 했는데?”그러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진서를 향해 소리쳤다.“야, 너 지금 집에 갈래? 내가 데려다줄까?”“안 갈래요. 조금 더 놀다 갈래요.”진서가 밝게 대답하자, 진오는 다시 지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봐, 내가 버티는 게 아니라 얘가 안 가겠다는 거다’는 표정이었다.지호의 눈빛이 좁혀졌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관리소장이 땀을 닦으며 문을 두드렸다.“하 대표님, 부르셨습니까?”“여기 아파트, 입주민 집 문을 그렇게 아무 때나 따도 되는 건가요?”낮게 깔린 목소리에 관리소장은 식은땀을 흘렸다.“그게 절대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죠.”“그럼 잘 떠올려봐요. 내 집 맞은편 문이 언제, 누구 손에 따여졌는지요.”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에 관리소장의 등골이 서늘해졌다.“이건 저희 관리 부주의예요. 죄송해요.”지호의 눈매에 점점 더 서늘한 기운이 드리우자, 옆에서 지켜보던 진오조차 불편하게 몸을 꼼지락거렸다.한편, 시아는 연구소 VIP 병실 앞에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 미아가 힘겹게 노수한이 건넨 따뜻한 물을 조금씩 삼키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연약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노수한은 옆에서 차트를 들고 뇌파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었다.문이 열리자 시아가 들어왔고 노수한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사모님?”시아는 노수한을 보지 않고, 곧장 침대 앞으로 다가서서 미아를 내려다봤다.“외할머니 돌아가셨어.”차갑게 내뱉은 목소리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미아의 속눈썹이 크게 떨렸고 손에 든 컵마저 부르르 흔들렸다.“왜 돌아가셨는지 알아?”시아가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그러나 날 선 어조로 말했다.“네가 찍은 그 사진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말을 들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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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호의 손가락이 운전대 위에서 서서히 조여지면서 흰 뼈마디가 도드라졌다.계단 위에 서 있는 시아를 바라보는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이혼이라고?]그는 코웃음을 치며 차 문을 열고 성큼 다가왔다.“당신 뭘 좀 잊었나 봐?”그러나 시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바람이 흩날린 머리카락이 창백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그러고는 차분히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이혼 합의서예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지호는 받지 않았고 오히려 시아의 피 맺힌 손가락을 보고 눈빛이 짙어졌다.“손은 왜 그래?”“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시아는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문제없으면 그냥 사인해요.”지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난 외할머니께 당신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 석 달이 지나기 전까지는 못 사인해.”시아는 눈을 들어 지호를 바라봤는데 차갑게 식은 눈빛이었다.“외할머니는 이제 안 계셔요.”“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끊어내는 거야?”지호가 성큼 다가서며 낮게 쏘아붙였다.“외할머니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혼 타령이야? 그분이 알면 기뻐하시겠어?”그 말은 칼날처럼 시아의 가슴을 찔렀다.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시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지호 씨, 이 결혼은 본래 외할머니 보여드리기 위한 연극이었잖아요. 관객이 떠났으니 배우들도 흩어지는 게 맞죠.”지호는 한참 동안 시아를 똑바로 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좋아, 네 말이 맞아.”지호는 합의서를 받아 들었지만, 사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접어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조건이 있어.”시아의 눈이 좁혀졌다.“뭐죠?”“넌 내가 가장 아끼는 걸 빼앗아 갔어.”그러고는 몸을 숙여 시아의 귓가에 숨결을 흘리며 속삭였다.“그걸 돌려주는 날, 그때 사인하지.”시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지호는 이미 돌아서 차로 향했다.남긴 말은 단 하나.“저녁에 집에서 밥 먹자. 엄마가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시거든.”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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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완전히 미쳤네

보르주 클럽 VIP 룸.희미한 조명 아래, 와인잔 속 붉은 액체가 어둠을 반사하며 묘한 빛을 흘렸다.지호는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손끝은 유리잔을 가볍게 두드렸고, 표정은 나른해 보였지만 눈빛은 한없이 음울했다.진오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보인 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이에 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능글맞게 다가갔다.“어이, 지호야. 한밤중에 날 불러내선 혼자 술이나 들이켜고 있네? 무슨 심통이야?”지호는 눈꺼풀조차 들지 않았다.“마시기 싫으면 나가.”“오, 기세 보소?”진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맞은편에 앉아 잔을 채웠다.“내가 맞춰볼까?”진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짐짓 웃었다.“시아 씨랑 싸운 거지?”지호의 차가운 시선이 곧장 꽂혔다.“너 요즘 말이 많아졌어.”“아, 정답인가 보네?”진오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잔을 흔들었다.“우리 지호도 별 수 없네. 아내한테 까이고 혼자 술이나 마시다니.”지호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아내도 없는 놈이 뭘 안다고.”“그래, 난 모를 수 있지.”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알아. 딱 지금 너처럼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론 미칠 듯 조급한 사람.”지호의 시선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사진 건은?”진오는 잔을 내려놓고 손뼉을 가볍게 쳤다.곧 문이 열리고, 보디가드 두 명이 야윈 사내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몇 달 새 몰골이 엉망이 된, 눈에 띄게 상처투성이의 얼굴이었다.“마왕?”지호의 눈이 가늘어졌고, 이내 위험한 기운이 번졌다.그 남자, 마왕은 피멍투성이 얼굴을 들더니 피 섞인 웃음을 흘렸다.“하 대표님, 오랜만이네요.”진오가 미왕의 무릎 뒤를 걷어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닥치고 있어요.”“사진 흘린 놈 이 사람이야.”진오가 지호를 보며 차갑게 덧붙였다.“이 새끼가 일을 받았더라고.”지호는 천천히 일어나 마왕 앞에 섰다.“누가 시켰어요?”마왕은 비죽 웃으며 피 묻은 이를 드러냈다.“룰 아시잖아요. 돈만 받고 의뢰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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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나한테서 떠나고 싶어?

새벽 5시 12분.시아의 이혼 선언문은 폭탄처럼 구영시 상공에 퍼져나갔다.어떤 변호사 공문도, 어떤 홍보 자료도 없이 개인 계정에 단 한 줄이 올라왔다.[저랑 하지호 씨는 이혼합니다. 이제부터는 남남이고 각자 갈 길을 갈 겁니다.]지호가 이끄는 회사의 홍보팀은 바로 혼란에 빠졌다.언론사들의 전화가 쏟아져 들어오고, 지호가 그 글을 확인한 건 마침 원프리미엄에 돌아왔을 때였다.시아는 심지어 마지막으로 마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휴대폰 액정에 비친 차가운 글자가 지호의 얼굴빛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 그리고 입꼬리에 꽤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시아는 마지막 옷가지를 옷장에 넣고 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낌새가 손끝이 잠시 멈췄지만 고개는 들지 않았다.“나한테 할 말 없어?”지호는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어깨엔 대충 걸친 재킷에 마치 오늘 날씨나 묻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시아가 드디어 몸을 돌리자 창가에서 스며든 빛이 여자의 실루엣을 차갑게 그렸다.“당신 글 못 읽어요?”“읽었지.”지호는 느릿하게 소매를 걷으며 비웃었다.“근데 당신이 준비한 이 깜짝선물엔 어떤 답례를 해야 맞을까?”“난 이미 마음 정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요?”가느다란 목소리였으나 칼날처럼 곧장 지호의 가슴팍을 찔렀다.이내 지호의 웃음기는 서서히 굳어졌다.상처받은 눈빛이 스쳤으나 곧 다시 비아냥거리는 말로 덮였다.“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지호는 여유롭게 걸어 소파에 앉았고 길게 뻗은 다리를 아무렇게나 꼬며 중얼거렸다.“아무리 그래도 같이 산 시간이 얼만데, 참 당신답다, 참.”시아의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좋게 끝내요. 더 이상 추하게 만들지 말고요.”“추하다고?”지호는 눈매에 서늘한 웃음을 띠었다.“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어디서 부족했는지 말해봐. 응?”한 걸음씩 다가오는 지호의 기세에 시아는 창가까지 몰렸다.“당신은 충분히 잘했어요.”시아는 시선을 돌렸지만 지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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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잠깐만요

카페 유리창엔 빗방울이 맺혀 희뿌옇게 번져 있었다.시아는 창에 비친 흐릿한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손끝으로 커피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굴리고 있었다.“여기 앉아도 될까요?”깜짝 고개를 든 순간, 하자유의 키 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검은 트렌치코트에 빗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고, 남자의 손엔 빗물 맺힌 거베라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외할머니 소식 들었어요.”꽃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자유가 말했는데 목소리는 창밖 빗소리보다 더 부드러웠다.“마음 추스르길 바랄게요.”시아의 손끝이 잔가지를 움켜쥐듯 굳어졌다.“고마워요, 아주버님.”시아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호칭을 썼다.하지만 시선은 어느새 남자의 왼손 무명지로 스쳐 갔고 원래 있어야 할 반지가 사라진 자리가 허전했다.자유도 시아의 시선을 눈치챈 듯 손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이 집 라떼가 괜찮은데...”“전 아메리카노를 더 좋아해요.”시아가 말을 잘랐다.온라인에서 자유는 라떼파라는 시아의 취향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 했다.더 이상 자유와 온라인 속의 ‘사탕’이라는 인연으로 얽히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이에 자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직원에게 손짓했다.“아메리카노 한 잔에 시럽은 두 펌프로 주세요.”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제수씨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참 많이 닮았어요.”탁, 커피잔이 쟁반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시아의 심장이 순간 멎은 듯 쿵 내려앉았고, 자유는 이유 없이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분명 무언가를 알아차렸거나, 온라인 속 ‘사탕’이 그녀라는 걸 짐작한 게 분명했다.시아는 애써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다.“그분 아주버님에게 아주 소중한 분인가요?”그러자 자유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낡은 카드 한 장을 안 주머니에서 꺼내 시아의 앞으로 밀었다.“어린 왕자 21장, 장미 그림 옆에 적힌 문구 알아요?”시아의 입술에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다.“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말을 끝내자마자 시아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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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아파요

은산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돌아서더니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왜요?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운 건가요?”시아는 손을 놓으며 낮게 말했다.“전에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 괜히 형님까지 얽히게 해서 죄송해요.”은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시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사과하는 동서 모습, 참 귀엽네요.”은은한 향수 냄새가 나는 은산이 시아 귀에 속삭였다.“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안 써요.”한발 물러서서 시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솔직히, 난 동서의 그 독한 기질이 꽤 마음에 들어요.”은산은 손끝으로 시아의 가슴께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여자는 이래야 하거든요. 필요할 땐 절대 물러서지 않고 들이박을 때는 박아야죠.”그때 빗줄기가 한층 굵어졌다.은산은 검은 우산을 펼치며 돌연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하나는 알아둬요. 하씨 가문을 떠난 뒤엔 쉽게 살긴 힘들 거라는 것 말이죠.”은산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보호받던 새끼 짐승이 갑자기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그 자리를 노리던 사람들, 가차 없이 찢어버릴 거예요.”시아는 얇게 미소 지으며 눈가에 한 줄기 빛을 띄웠다.“난 그런 상황에서 되갚아 주는 게 제일 자신 있어요.”그 말에 은산은 소리 내어 웃었는데 맑으면서도 위험한 웃음이었다.“그래, 이게 내가 아는 강시아죠.”시아는 우산을 고쳐 쥐며 말을 이었다.“날 형님이라고 불러준 것 봐서 하는 말이에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말을 남기고 은산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떠났다.물이 튀어 오르며 불빛에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흩어진 보석 같았다.비가 너무 거세게 쏟아져 시아가 원프리미엄에 도착했을 땐 머리칼이 이미 젖어 있었다.물방울이 머리끝을 따라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번졌다.삑하는 지문 인식 소리가 고요한 현관에 뚜렷이 울렸다.문을 밀자, 거실 불이 켜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난 당신이 여길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낮고 쉰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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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이제 가도 돼요?

아무리 강한 여자라도 술에 취한 남자 앞에서는 결국 버티지 못했다.시아는 점점 힘을 잃고 몸부림을 멈췄고, 지호의 손길이 여자의 가는 허리를 스칠 때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지호의 입술이 쇄골 위로 내려앉자, 시아는 자기 심장이 통제를 잃은 듯 거칠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옷은 바닥에 흩어졌고, 달빛은 얇은 커튼을 뚫고 들어와 침대 위에 얼룩진 그림자를 드리웠다.지호의 동작은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었다. 마치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숨소리를 억눌렀지만 결국 버텨내지 못했다.모든 게 끝난 뒤, 방 안엔 둘의 거친 숨결만이 남았다.시아는 뻣뻣해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이제 가도 돼요?”그러나 지호는 갑자기 시아를 뒤에서 껴안았는데 팔은 쇠집게처럼 조여 왔다.“여보...” 지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나약했다.“왜 난 당신한테서 단 한 번의 응답조차 얻지 못하는 걸까?”뜨거운 물방울이 시아의 어깨에 떨어졌다.이에 시아는 놀라 고개를 돌리자 붉어진 지호의 눈가를 보았다.늘 세상 앞에서 여유로웠던 남자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시아의 가슴이 알 수 없는 힘에 조여 오는 듯 먹먹했다.지호는 얼굴을 시아의 머리칼 속에 묻었다.“처음 네가 다이빙대 위에 서 있던 그 순간, 그 뒤로는 다른 누구도 보이지 않았어.”그 말에 시아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시아의 기억 속에, 카메라를 들고 미아를 따라다니며 경기장을 누비던 지호의 모습이 겹쳤다.이에 시아는 쓸쓸하게 웃었다.“당신은 사람을 잘못 본 거예요. 나는 미아가 아니거든요.”캐리어를 끌며 원프리미엄 대문을 나서는 순간, 빗방울이 시아의 어깨 위로 투둑투둑 떨어졌다.그러나 시아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래서 뒤편의 거대한 창가에 서 있던 지호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손끝에 낀 담배는 이미 끝까지 타들어가 있었다.지호는 빗속으로 사라지는 가냘픈 뒷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했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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