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apítulo 881 - Capítulo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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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죠. 제가 수빈 씨를 찾은 데에는 다른 의도가 없고 그저 한마디 조언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에요.”“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최수빈은 다시 한번 선을 그었다.“시간도 늦었고 집에 가서 아이를 돌봐야 해서요. 이만 끊겠습니다.”이 말을 끝으로 심종연이 더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최수빈은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이러한 심종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최수빈으로 하여금 더욱더 확신하게 만들었다.주선웅 쪽에서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고 자신과 주예린은 이미 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새벽 세 시, 최수빈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그때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밤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주민혁’이라는 이름이 떠 있는 걸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 시간에 왜 전화를 건 거지? 무슨 일이 생겼나?’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주민혁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심종연이랑 가까이하지 마.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믿지 말고 절대 혼자 만나지도 마.”잠긴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 묻어 있었다.최수빈은 잠시 멈칫했다가 곧 상황을 이해했다. 려운에게서 심종연이 자신에게 야식을 먹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그래서 그녀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막 깬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네, 알겠어요. 그 사람하고는 안 만날게요.”휴대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녀가 이렇게 바로 수긍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왜 그런지는 안 물어봐?”“민혁 씨가 그렇게 말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죠.”최수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 원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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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주민혁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가서 심종연이 형에게 정보를 넘겼다는 증거를 전부 정리해둬.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공개하도록.”“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려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곧 사무실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는 주민혁은 마음속에 온통 초조함뿐이었다.내일 열릴 입찰은 분명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주선웅은 어떤 수를 써서든 프로젝트를 손에 넣으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최수빈과 주예린을 협박 카드로 끌어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때문에 그는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프로젝트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까지 반드시 보호해야 했다.같은 시각, 최수빈은 침대 위에서 좀처럼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었다.내일이면 항공우주 연구원 무인기 프로젝트의 공개 입찰이 열린다.그 프로젝트는 그녀와 팀원들이 수없이 밤을 새워가며 쌓아 올린 결과물이자 모두의 기대가 걸린 일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주선웅과 심종연이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었기에 입찰 현장에서 어떤 수작을 부릴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불안한 것은 이번 입찰을 계기로 주민혁이 주선웅과 완전히 적이 될 경우였다.그렇게 되면 위험이 언제든 자신과 주예린에게로 향할 수 있으니 말이다.최수빈은 휴대폰을 들어 강지안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몇 마디라도 나누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지만 문장을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화면을 껐다.이미 강지안은 자신과 주민혁의 문제로 충분히 마음을 써주고 있었기에 더 이상 걱정을 얹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최수빈은 잠깐 졸음이 오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서둘러 몸을 일으켜 씻고 주예린의 아침 식사를 챙겨준 뒤, 아이가 식사를 마치는 걸 보고서야 항공우주 연구원으로 향했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이 몰려왔다.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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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대문을 여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 주민혁이 들어왔다.그는 검은 정장을 입은 채 곧게 서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말없이 건네는 격려가 담겨 있었다.그 맞은편에는 이미 주선웅과 심종연이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맞댄 채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최수빈과 주민혁을 발견하자 주선웅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꿍꿍이가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최수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말 없는 전쟁이 이제 막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그녀는 손에 있는 서류를 꽉 움켜쥐고 한 걸음씩 회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프로젝트를 따내야 해.’주선웅의 음모를 막아야 하고 무엇보다 주민혁을 실망시켜서는 안 됐다.주민혁은 최수빈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꿈을 이루길 바라면서도 이 입찰로 인해 주선웅의 표적이 될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래서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만은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입찰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심사위원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고 언론사 기자들은 카메라를 세팅하기 시작했다.최수빈은 단상에 올라 프로젝트의 기술적 강점과 향후 발전 가능성을 설명했다. 목소리는 또렷했고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아래에서는 주민혁이 자부심과 존경심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반면, 주선웅과 심종연은 간간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말 없는 교감 속에서 무언가를 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최수빈의 발표가 끝나자 회장 안에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자리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종연이 최수빈의 쪽으로 다가왔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진심이 없었다.“수빈 씨, 발표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몇몇 기술 수치가 조금 애매해 보이더군요. 따로 시간을 내서 한번 자세히 이야기해보는 게 어떻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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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바로 그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앞으로 다가와 주민혁의 손을 잡으며 감회에 젖어 말했다.“주 대표, 정말 오랜만이야. 지금 이렇게 상공협회를 잘 이끌고 있을 줄은 몰랐어. 생각해보면 예전에 자네가 구 원사 밑에서 연구하던 시절부터 나는 자네가 크게 될 인물이란 걸 알아봤지. 다만 아쉽게도....”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 한마디로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구 원사라는 사람이 주민혁의 스승이자 그의 마음속에 깊게 남아 있는 상처라는 걸.그해 구교진이 뜻밖의 사고로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뒤, 주민혁은 연구원의 길을 완전히 접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좀처럼 구교진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 역시 감히 그의 앞에서 구교진을 언급하지 못했다.최수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컵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주민혁만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서였다.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주민혁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그는 그저 노인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지난 일은 이제 그만 얘기하시죠. 산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잖아요. 선생님께서 많은 걸 가르쳐주신 건 사실이지만 지금 제 마음은 사업에 있습니다. 연구 쪽은... 이미 손을 놓은 지 오래됐고요.”너무도 태연한 태도가 일부러 더 무심해 보이려 애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마치 한때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던 스승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주변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고 더 이상 누구도 구교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구석에 서 있던 최수빈은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가슴 한가운데가 세게 움켜쥐어지는 듯한 느낌에 숨이 막혔다.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민혁의 저 담담한 모습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밤마다 되살아나는 죄책감,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몰려오는 고통, 그리고 우울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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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최수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고개를 돌려보니 주선웅이 주민혁 앞에 서 있었다. 입가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걸려 있었고 일부러 그런 말을 던졌다는 게 분명했다.주변은 숨소리조차 사라진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주민혁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나 주민혁은 주선웅을 그저 힐끗 바라봤을 뿐, 목소리는 놀랄 만큼 차분했고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없었다.“내 일은 형이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럴 시간에 잠시 후 입찰회에서 형이 제출한 기술 안에 들어 있는, 표절 의혹 부분을 어떻게 설명하실지나 고민해.”단 한마디에 주선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는 주민혁이 이 이야기를 꺼낼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고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주민혁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곧장 몸을 돌려 심사위원석 쪽으로 걸어가다 최수빈 옆을 지나는 순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그리고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 마. 내가 있잖아.”최수빈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그는 늘 그랬다. 이미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먼저 다독여주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겉으로는 정서상의 문제 따위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상’이라는 가면 아래에 어떤 고통과 싸움이 숨겨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입찰회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최수빈은 단상에 올라 프로젝트의 기술적 세부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목소리는 또렷했고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객석의 주민혁을 향했다.그는 맨 앞줄에 앉아 꼼꼼히 듣고 있었고 때때로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발표가 끝나자 심사위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대부분 기술적 난점이나 시장성에 관한 내용이었고 최수빈은 침착하게 하나씩 답해 나갔다.그때, 주선웅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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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그전까지 두 사람은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고 서로의 상황도 알지 못했다.곧 회장을 나선 최수빈의 시야에 복도 끝에서 주민혁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키가 크고 반듯한 실루엣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서늘하고 고독한 분위기가 느껴졌다.최수빈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옆에 서더니 조용히 말했다.“아까는... 고마워요.”주민혁은 담배를 비벼 끄고 쓰레기통에 버린 뒤, 그녀를 돌아봤다.“별거 아니야. 프로젝트만 잘 풀리면 된 거지.”최수빈은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삼켰다.예전부터 주민혁은 늘 최수빈의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최수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민혁 씨, 그렇게까지 항상 강한 척 안 해도 돼요. 힘들면 잠깐 멈춰서 쉬어도 되고 모든 걸 혼자 짊어질 필요 없어요.”그러자 순간적으로 몸이 굳은 주민혁이 최수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괜찮아. 너랑 예린이만 무사하면 돼.”최수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벌써 여섯 시가 넘었는데 같이 밥 먹을래요? 그냥... 프로젝트 잘 풀린 기념으로요.”주민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두 사람은 나란히 항공우주 연구원을 나섰다.분위기가 따뜻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 전처럼 팽팽하게 날이 서 있지도 않았다.“먼저 예린이 데리러 가요. 우리가 같이 가면 분명 엄청 좋아할 거예요.”주민혁은 별다른 말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학교 쪽으로 차를 몰았다.차 안은 조용했다.최수빈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 차분한 동행이 마치 오래전, 아직 이혼하기 전의 그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그때의 그들은 각자 꺼내지 못할 말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었다.그 시절에는 주민혁의 차에 함께 타는 것만으로도 며칠씩 마음이 설렜고 원금영은 늘 둘을 다시 붙여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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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차가 다시 움직였고 최수빈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을 골랐다. 예전에 가끔 주예린을 데리고 와서 어린이 세트를 먹이던 곳이었다.레스토랑에 들어서 보니 한창 저녁 시간대라 내부는 제법 붐볐다.최수빈은 메뉴판을 받아 몇 장 넘겨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예린에게 물었다.“뭐 먹을래? 어린이 스테이크 어때?”“좋아요! 딸기 아이스크림도요!”주예린이 신이 나서 말했다.최수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주민혁을 바라봤다.“민혁 씨는... 늘 먹던 걸로 할까요? 미디엄으로 구운 설로인 스테이크에 블랙페퍼 소스.”주민혁은 잠깐 멈칫했다.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입맛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고 그만큼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응.”그가 낮게 답했다.직원이 자리를 뜨자 테이블 위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주예린은 포크를 쥔 채 접시 위를 살짝 긁으며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고 최수빈과 주민혁은 각자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이혼한 뒤, 이렇게 조용히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건 아마 처음이었다.다툼도 없고 뭘 숨기는 말도 없었지만 대신 예전처럼 자연스럽지도 않았다.최수빈은 주민혁의 몸이 미묘하게 긴장돼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손가락이 의미 없이 컵 가장자리를 문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편하지 않아 보였다.“오늘 입찰회에서... 고마웠어요.”최수빈이 먼저 침묵을 깼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민혁 씨가 그때 나서주지 않았으면 주선웅 씨는 계속 트집을 잡았을 거예요.”주민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고마워할 일 아니야. 난 그냥 그 사람이 프로젝트를 망치는 게 싫었을 뿐이거든. 무엇보다 너랑 팀원들이 들인 노력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모욕당해선 안 되지.”“그래도... 고마워요.”최수빈은 미소를 지었다가 문득 려운의 말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은... 좀 어때요? 우울증약은 제때 챙겨 먹고 있어요?”우울증이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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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그동안 그는 딸의 성장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어린 주예린이 그 시절, 주시후에게만 다정함과 인내를 보이던 자신의 모습을, 또 주시후의 일로 늘 바쁘게 움직이던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주민혁은 차마 상상할 수가 없었다.혹시 지금처럼 분명 마음속으로는 상처받고 서러웠으면서도 그 감정을 꾹 눌러 삼킨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버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조금 늦은 이제서야 그는 어떤 것들을 제대로 보게 되었고 또 이해하게 되었다.“아빠, 왜 그래요?”주예린은 그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주민혁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에서 일렁이던 복잡한 감정을 꾹 눌러 담았다.그러고는 새우 하나를 집어 들며 웃어 보였다.“아무것도 아니야. 아빠가 새우 까줄까? 예린이 새우 좋아하잖아.”“네! 고마워요, 아빠!”주민혁은 새우 하나를 집어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겼다. 곧 손에는 말끔하게 손질된 새우 살만이 남았다.“천천히 먹어. 뜨거우니까.”주예린이 기쁜 얼굴로 입을 벌려 막 새우를 물려는 순간, 레스토랑 안쪽 칸막이 사이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리고 주민혁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을 세게 쳐냈다.새우 살은 바닥에 떨어져 몇 번 굴러가더니 먼지가 잔뜩 묻었고 주민혁과 주예린은 동시에 얼어붙었다.이내 그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주민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주시후였다.다만 지금의 주시후는 예전의 말끔하고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도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늘 정성껏 꾸며져, 어딘가 버릇없는 티가 남아 있던 기억 속의 아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주민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시후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작은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이윽고 아이는 두려움과 서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아빠... 드디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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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주시후는 눈앞에 선 주민혁을 바라봤다.한때 자신을 향해 늘 다정하고 온화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지금은 차가움만 남아 있었다. 따뜻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작은 몸이 본능처럼 뒤로 물러섰고 눈에 서려 있던 고집은 서서히 두려움으로 바뀌어 갔다.이 사람은 더 이상 장난감을 사 주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던 기억 속의 ‘아빠’가 아니었다.주민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연민이라 할 만한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박하린이 귀국해 주시후를 데려가겠다고 찾아왔을 때, 주민혁은 거의 망설임도 없이 허락했었다.그때 최수빈은 이미 2년 동안 주시후를 키운 상태였다. 아이는 예의 바르고 얌전하게 자라 있었지만 주민혁은 알고 있었다. 최수빈 혼자서 주예린을 돌보며 일을 병행하는 상황에서 주시후까지 챙기는 건 지나치게 버겁다는 것을.게다가 박하린은 주시후의 친모였다.아이를 친엄마에게 보내는 편이 명분상으로도 옳았고 그만큼 최수빈의 짐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날의 장면도 기억에 생각했다.주시후는 친엄마와 살게 된다는 말을 듣자 눈빛을 반짝이며 박하린의 손을 붙잡고 연신 ‘엄마’라 불렀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최수빈에게 날 선 말을 퍼부었다.그때는 그저 아이의 본성쯤으로 여겼다.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렇게 예의 바르던 아이가 지금의 모습이 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주민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미 정해진 사실을 말하듯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네 엄마는 박하린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아니에요! 맞아요! 내 아빠라고요!”주시후는 이렇게 울부짖더니 손을 뻗어 주민혁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아이의 울음소리에 레스토랑 안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몇몇은 식사를 멈추고 상황을 지켜봤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어 몰래 사진을 찍고 있었다.주민혁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그는 주시후의 어깨를 눌러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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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주시후는 애초부터 박하린이 주민혁에게 접근해 주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다.그리고 지금 와서 보니 주시후는 애초에 송지훈의 아이도 아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주민혁이 이토록 냉정할 리가 없었다.주시후가 울면서 달려들어 잘못을 빌던 모습은 예전에 사고를 쳤을 때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하지만 최수빈은 알고 있었다. 그건 진심에서 나온 반성이 아니라 더는 갈 곳이 없어서 택한 임시방편이라는 것을.보육원에서 힘든 생활을 하다 보면 한때 자신에게 ‘잘해 주던’ 사람을 다시 보았을 때, 그를 붙잡고 싶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그 연민에 마음이 흔들려 다시 주시후를 곁에 두는 건 스스로 위험을 끌어들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박하린이 이미 아이의 가치관을 완전히 비틀어 놓은 뒤였다.지금의 주시후는 자기 이익만을 먼저 보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언제든 질투심 때문에 주예린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그래서 최수빈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마음속으로 수없이 갈등하고 있었다.그때 식당 입구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려운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주민혁에게서 메시지를 받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그는 최수빈의 다리를 붙잡고 울고 있는 주시후를 보자 망설임 없이 다가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두 분, 늦어서 죄송합니다.”려운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주시후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가자. 보육원 원장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안 가요! 다시는 안 가요!”주시후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손발을 휘두르고 려운의 품에서 뛰어내리려 안간힘을 썼다.그러다 옆에 서 있는 주예린을 발견하자 마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은 듯 눈빛이 돌변했다.아이는 손가락으로 주예린을 가리키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다 너 때문이야, 진짜 못됐어! 네가 있어서 아빠랑 엄마가 나를 싫어하게 된 거라고! 네가 우리 아빠랑 엄마를 다 빼앗았어! 난 네가 싫어! 넌 죽어야 해!”그 말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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