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861 - Chapter 870

1010 Chapters

제861화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사과에 최수빈은 잠시 멈칫했다. 목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 숨이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그녀는 주민혁의 눈을 바라봤다. 깊고 짙은 그 눈빛 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겹겹이 뒤엉켜 요동치고 있었다.우울증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병이 아니고 심지어 강지원 같은 전문의가 봐도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고 말할 정도였다.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움직이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요. 그때 민혁 씨가 어떤 선택을 했든 출발점은 항상 나랑 예린이를 위한 거였잖아요. 민혁 씨는 민혁 씨가 할 수 있는 가장 옳은 방법을 고른 거고.”그녀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난 민혁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언젠가는 민혁 씨가 진짜로 마음을 열고... 그 안에 숨겨둔 이야기들을 나한테도 해줄 수 있기를 바라요.”주민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달래려는 그 말이 오히려 가슴을 더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자신의 잘못으로 그녀와 딸이 오랜 세월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떠한 비난보다도 더 아프게 느껴졌다.“날 환자 취급하면서 위로하지 마.”자조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주민혁은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고. 이런 말로 꾸며낸 위로는 필요 없어.”최수빈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가로막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그렇게 침묵이 흐르던 와중, 주민혁이 시간을 확인했다.“늦었으니까 어서 자. 내일 예린이 학교도 데려다줘야 하잖아.”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보지 않았고 최수빈은 입술을 다문 채 돌아섰다.하지만 몇 걸음 옮기다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민혁 씨도 일찍 쉬어요.”“응.”그의 등을 바라보며 최수빈의 마음에 설명하기 힘든 무력감이 스며들었다. 결국 그녀는 돌아서서 침실로 들어갔다....방 안.최수빈은 침대에 누운 채 좀처럼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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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2화

아무래도 아이의 마음은 단순해서 사람을 대할 때 복잡하게 재지 않으니 말이다....오후 다섯 시, 해온시 항공우주 연구원의 사무동은 점점 조용해지고 있었다.최수빈은 컴퓨터 화면에 띄운 무인기 설계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한동안 키보드 위에 멈춰 있었다.화면 오른쪽 아래의 시간이 계속 바뀌며 이제 주예린을 데리러 가야 할 때라는 걸 조용히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최수빈은 전날 밤 주민혁의 얼굴을 떠올리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익숙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는 세 번쯤 신호음이 울린 뒤에야 연결됐다.“여보세요?”휴대폰 너머로 주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응.”최수빈의 목소리는 약간 굳어 있었다.“갑자기 일이 생겨서 자리를 못 뜰 것 같은데 지금 어디예요? 혹시... 예린이 좀 데리러 가줄 수 있어요?”휴대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고 희미한 차량 소음과 함께 그의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혹시 거절하지는 않을까, 최수빈의 마음이 괜히 불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주민혁은 여태 단 한 번도 주예린을 데리러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지금 얘기 중이긴 한데 곧 끝나.”잠시 뒤 주민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주소 보내. 바로 갈게요.”“네... 고마워요.”최수빈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더니 서둘러 학교 주소를 보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오늘은 조금 낯을 가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좀만 더 신경 써줘요.”“알았어.”짧은 대답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최수빈은 휴대폰을 쥔 채 화면에 남아 있는 통화 기록을 바라봤다.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올라왔다.이번에 주민혁에게 주예린을 맡긴 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 그녀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그래도 단 한 번쯤은 딸이 ‘아빠가 데리러 오는 날’을 겪어보길 바랐다.한편, 주예린이 다니는 새봄 초등학교의 앞은 이미 아이를 기다리는 보호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주예린은 작은 책가방을 멘 채, 학급 친구들 대오의 맨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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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3화

주민혁은 딸의 등을 살며시 두드리며 손에 들고 있던 간식 봉지를 건넸다.“네가 좋아하는 딸기 맛 과자랑 지난번에 갖고 싶다던 토끼 인형도 들어 있어.”주예린은 봉지를 받아 들고 신이 나서 열어 보더니 안에 든 인형을 보는 순간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도록 웃었다.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아이의 행동은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작은 손으로 인형을 꼭 쥔 채 조금 전처럼 주민혁의 목을 끌어안지도 못했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주예린이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주민혁은 늘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었다.그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시후뿐이었다.그래서 주예린의 마음에 불안함이 스쳤다.‘아빠가 또 화내면 어떡하지?’주민혁은 금세 딸의 변화를 알아챘다.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주예린의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무언가에 쥐어짜이는 듯 시큰거렸다. 그리고 주민혁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예전 냉담하게 굴던 모습이 지금은 딸로 하여금 ‘아빠’라는 한마디조차 조심해서 내뱉도록 만든 것이었다.그는 손을 뻗어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유난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아빠 여기 있어.”그 짧은 대답 하나로 주예린은 마음이 놓였다.곧 아이는 고개를 들어 주민혁의 따뜻한 눈빛을 바라보더니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크게 외쳤다.“아빠!”주민혁은 딸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됐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지금 그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품에 안긴 작은 존재가 자신의 딸이자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뿐이었다.“집에 가자.”주민혁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차에 오르자 주예린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선생님이 글씨를 예쁘게 썼다고 칭찬해 줬다는 이야기, 교실 어항에 금붕어가 두 마리 더 생겼다는 이야기까지,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정말이지 꼭 참새 같았다.주민혁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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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4화

“그래.”주민혁은 공책을 받아 들더니 차분하게 주예린에게 문제를 설명해 주었다. 목소리는 한층 낮추고 메모지 위에 하나하나 계산 과정을 적어 내려갔다.주예린은 그런 아빠를 바라보다가 슬쩍 더 가까이 다가갔다.아이의 몸은 가볍고 연약했다. 그런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았던 주민혁은 주예린이 바짝 다가오자 아빠이면서도 어쩐지 어색해졌다.재계에서는 거침없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딸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살짝 다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러고는 주예린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설명 방식을 바꿔 가며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차근차근 짚어 주었다.“와, 아빠 진짜 대단해요!”답을 본 주예린이 손뼉을 치고 얼굴 가득 존경심을 담아 말했다.“엄마가 설명해 준 것보다 훨씬 잘 이해돼요!”딸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주민혁의 눈빛이 한층 더 따뜻해졌다.그는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아빠가 자주 숙제 도와줄까?”“네! 좋아요!”주예린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다른 숙제들도 꺼내 놓았다.최수빈이 음식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을 때, 거실에는 주민혁이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문제를 설명하고 주예린이 그의 옆에 붙어 진지하게 듣고 있는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그 장면을 보는 순간, 최수빈은 마음이 복잡해져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밥 먹자.”식탁 위에 반찬이 올려지자 주예린은 바로 연필을 내려두고 주민혁의 손을 잡아끌었다.“아빠, 밥 먹으러 가요! 엄마가 해 준 소고기 반찬 진짜 맛있어요!”식사 내내 주예린은 주민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반찬을 집어 주기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작은 입이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주민혁 역시 하나하나 받아 주며 대답했고 주예린이 좋아하는 소고기 반찬을 직접 골라 접시에 올려 주었다.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최수빈의 마음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시큰거렸다.이 시간이 주예린에게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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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5화

주민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최수빈은 굳게 다문 그의 턱선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아직도 속으로는 갈등하는 거예요? 예린이를 딸로 인정할지 말지?”그 말에 주민혁은 숨이 턱 막힐 듯했다.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이더니 시선은 자연스레 침실 문 쪽으로 향했다.안쪽에서는 주예린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인정해. 원래부터 내 딸이었어. 태어난 날부터.”이 한마디가 최수빈의 마음속에 조용히 떨어졌다. 그러자 그동안 가슴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왠지 모르게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두 걸음 다가가 주민혁과 반 미터도 채 남지 않은 거리에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그럼 요즘 대체 뭘 그렇게 혼자 끌어안고 있는 거예요? 선웅 씨 때문이에요, 아니면 그 교통사고 때문이에요? 같이 마주할 수는 없는 거예요?”이에 주민혁은 순간 멈칫하더니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최수빈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걸 마주한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지금껏 삼켜 온 억울함도, 자신을 둘러싼 위험도 전부 털어놓으며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다.하지만 이성은 냉정했다.그녀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마음속에서 치솟는 충동을 억누르며 주민혁은 일부러 목소리를 차갑게 했다.“내 일은 내가 해결해. 너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소파 위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늦었으니까 먼저 갈게.”최수빈은 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을 거두었다.문이 닫히고 나서 거실에는 그녀 혼자만이 남았다.공기 속에는 아직도 주민혁의 몸에 배어 있던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남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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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6화

육강민이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그는 펜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처럼 가슴 한가운데가 무언가에 붙잡힌 듯 저려왔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지금의 자신에게는 최수빈의 삶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제 그녀가 했던 ‘같이 마주할 수는 없는 거예요?’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설레면서도 고통스러운 말이었으나 그는 침묵으로 모든 감정을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진호성이 헛기침을 하고 회의를 시작했다.“오늘은 무인기 핵심 부품 공급 진행 상황과 다음 주 현장 테스트 일정이 주된 안건입니다. 주 회장님, 공회 쪽 자원 조율은 어떻게 됐습니까?”주민혁은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적외선 모듈은 이미 항공우주 연구원 창고에 입고됐고 복합 소재 샘플도 내일이면 도착합니다. 현장 테스트에 필요한 장소와 장비는 모두 조율해 둔 상태라 언제든 진행 가능해요.”“좋습니다.”곧 진호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선웅을 바라봤다.“플라잉 테크 쪽은 소프트웨어 시스템 디버깅에 문제없죠?”주선웅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웃었다.“문제없습니다. 저희 기술팀이 이미 항공우주 연구원과 연동 작업을 마쳤고 테스트 일정에 차질 없도록 보장하겠습니다.”잠시 말을 멈춘 그는 최수빈과 주민혁을 힐끗 훑어본 뒤 덧붙였다.“다만 이후 단계에서는 핵심 기술과 자원이 두 분 손에 있는 만큼, 수빈 씨와 주 회장님이 더 자주 소통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이윽고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본 최수빈은 마침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하지만 둘은 단 1초 남짓 눈을 맞췄다가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이내 공기가 묘하게 팽팽해졌다.회의는 계속됐고 육강민은 틈틈이 최수빈과 업무에 대해 논의했다. 주민혁은 끝까지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가끔 서류에 서명을 할 뿐, 머릿속에는 어제 최수빈이 했던 ‘같이 마주할 수는 없는 거예요?’라는 한마디가 가득했다.무척이나 답하고 싶었다.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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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7화

“왜 그렇게까지 서둘러 예린이한테 아빠를 만들어 주려는 거예요?”솔직한 시선이 최수빈에게서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적극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그 말이 귀에 닿는 순간, 주민혁의 마음은 툭 하고 가라앉았다. 따뜻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묵직한 죄책감만이 가슴을 짓누를 뿐이었다.그는 최수빈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가 주예린의 아빠를 하고 싶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그동안의 빚을 갚고 싶었고 놓쳐버린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하지만 곁에 있어 주는 것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일조차 해주지 못하며 그녀와 아이를 지켜 줄 힘도 없는데 그런 주민혁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아빠’라고 할 수 있겠는가.“나는...”입술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려운’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왜.”“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바로 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중요한 보고가 있어서요.”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려운의 목소리는 다소 급박했고 뒤에서는 어수선한 소음이 섞여 들려왔다.“주소 보내.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보지 않고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만 남긴 채, 마치 무언가를 피하듯 성급히 돌아섰다. 발걸음은 지나치게 빨랐다.최수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다급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음속에 의문들이 켜켜이 쌓여갔다.주민혁은 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면 ‘급한 일’이 있다는 말로 빠져나갔으니 말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곧바로 뒤를 쫓아갔다. 얼마 안 가 건물 아래에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사님, 앞에 가는 검은색 벤틀리 따라가 주세요.”그렇게 택시는 주민혁의 차 뒤를 따라 몇 개의 거리를 지나갔고 이내 한 5성급 호텔 앞에 멈춰 섰다.요금을 다 낸 최수빈은 조심스럽게 주민혁의 뒤를 밟았다.주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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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8화

“그해의 목격자를 찾아냈습니다. 당시 배에서 일하던 서비스 직원이었는데 보복이 두려워 지금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합니다.”려운의 목소리에는 침통함이 배어 있었다.“그 사람 말로는 그날 갑판에서 주선웅 씨와 구 원사님이 심하게 다투는 걸 봤다고 합니다. 결국 주선웅 씨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구 원사님을 바다로 밀어 떨어뜨렸고요. 그 이후 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현장을 조작했고 배에 있던 사람들까지 매수해서 진실을 덮었습니다.”문밖에 서 있던 최수빈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 피가 한순간에 식어 버린 것처럼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구 원사님의 죽음이 선웅 오빠의 짓이었다니... 그래서 민혁 씨가 그해 갑자기 연구를 포기했던 거구나. 줄곧 선웅 오빠의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어. 이 안에 이렇게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니...’차가운 문에 손바닥을 바짝 붙인 채, 그녀의 가슴은 충격과 뒤늦은 공포로 가득 찼다.구교진 같은 어른조차 서슴없이 제거한 사람이었다면 주민혁에게, 그리고 최수빈과 주예린에게는 과연 어떤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방 안은 잠시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주민혁의 거친 숨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최수빈은 지금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 물러나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미처 보지 못한 바닥의 카펫에 하이힐이 걸리며 아주 미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밖에 누구죠?”주민혁의 목소리가 즉각 날카로워졌고 다음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문이 열리자마자 그의 시선이 최수빈의 놀란 눈과 정면으로 부딪혔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에 퍼졌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색함이 천천히 번져 갔다.방 안에 있던 려운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급히 일어나 말했다.“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밖에서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려운은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지나 나가며 문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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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9화

방 안의 공기가 그대로 굳어 버린 듯했다.최수빈은 그 자리에 멈춘 채 눈앞의 남자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봤다.주민혁이 했던 ‘난 내 목숨보다 널 더 사랑해’라는 말이 무거운 망치처럼 그녀의 가슴을 거듭 내려쳤다.너무 늦게 도착한 고백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숨이 막힐 것처럼 가슴이 짓눌렸고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맴돌았지만 끝내 떨어지지는 않았다.그녀가 처음 입을 열어 묻고자 했던 것의 답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이 결국 끝을 맺은 건 결코 주민혁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그때의 최수빈은 알고 있었다.주민혁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것도, 막 스승을 잃고 가족들의 압박에 짓눌려 있다는 것도.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 하나만 믿고 끝까지 그와 결혼하길 고집했다. 함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풀릴 거라고, 그렇게 믿어 버렸다.갈등하는 주민혁의 눈빛을 보지 못했고 원치 않는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의 고통도 외면했다.돌이켜보면 그렇게 무리해서 다가간 것 역시 주민혁에게는 또 다른 상처였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최수빈은 이런 답을 듣게 될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었다.주민혁은 그녀가 얼어붙은 채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이런 말을 하는 건 네 대답을 바라서도 아니고 뭘 되돌리고 싶어서도 아니야. 그냥... 오랫동안 이 말 하나를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있었어. 너한테는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나는...”“알아요.”최수빈이 그의 말을 끊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막 울음을 삼킨 듯한 쉰 목소리였지만 이내 점점 차분해졌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주민혁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숨김이 없었다.“사실 오늘 민혁 씨의 뒤를 따라온 건, 민혁 씨가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사과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서예요.”주민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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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0화

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목이 메어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구 원사님 일도 그렇고 선웅 씨의 음모도 이제는 알게 됐잖아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단호하게 말했다.“민혁 씨, 이번에는 나를 또 밀어내지 않았으면 해요. 구 원사님의 억울함도 밝혀야 하고 선웅 씨의 야심도 막아야 하고 우리 사이에 쌓인 오해들도 제대로 풀어야 해요. 이 모든 걸... 우리 함께 마주하면 안 될까요?”말을 끝마치자 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함께 마주하자’는 제안을 들은 순간, 주민혁은 몸이 굳은 채로 천천히 돌아섰다.그렇게 최수빈을 등진 주민혁의 곧은 어깨는 굳어 있었고 손끝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최수빈은 단호해 보이는 주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콕 찔리는 듯 아파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싫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적어도 이건 말해 줘요. 우리가 민혁 씨한테 가까이 다가가면... 누가 나한테 접근하는 거예요? 선웅 씨에요, 아니면 그 뒤에 있는 사람들? 나랑 예린이를 멀리 떼어 놓으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못 건드릴 거라고 생각해요?”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선웅 씨는 구 원사님한테도 손을 댔고 민혁 씨의 교통사고까지 꾸몄어요. 마음만 먹으면 나랑 예린이에게도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민혁 씨가 혼자서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릴 밀어내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에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위험이 언제 닥칠지도 모른 채 서 있게 만드는 거지.”주민혁의 등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지금 돌아서면 결연하면서도 걱정이 담겨있는 최수빈의 눈빛에 무너져 버릴까 봐, 그녀를 다시 이 진창 속으로 끌어들이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그토록 애써 지켜 온 ‘마지막 남은 안전한 자리’를 자신의 약해진 마음 때문에 다시 더럽힐 수는 없었다.“넌 몰라.”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고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형 뒤에는 형 혼자만 있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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