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901 - Chapitre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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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1화

서재 안 공기는 얼어붙은 듯 숨 막히게 가라앉아 있었다.주기훈은 말없이 앉아 있는 주민혁을 바라보며 화를 눌러가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원하는 게 뭐야? 그 사람만 넘기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그는 주민혁이 끝까지 입을 다무는 것도 결국 이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한 대가만 제시하면 얼마든지 굴복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주민혁은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대앉을 뿐, 시선을 내리깔고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마치 주기훈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요했다.그에게는 이 대화 자체가 이미 우스운 일이었다.가문을 배신한 여자 하나 때문에 오랜 세월 함께한 아내를 버리고 심지어 진서령의 거취까지 흥정거리로 내미는 모습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주기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주민혁의 모습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억누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걱정 마. 손희경만 넘기면 네 엄마는 내가 제대로 모실게. 집이든 돈이든 원하는 건 전부 해줄 거야. 절대 불편하게 안 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재 문 쪽에서 ‘툭’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진서령이 서 있었고 손에서 놓친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며 안에 있던 열쇠와 휴대폰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빛에는 충격을 받은 기색이 가득했다.급히 돌아본 주기훈은 그녀를 발견하자 얼굴이 굳어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긴 왜 왔어? 누가 오라고 했어?”주민혁은 문가에 서 있는 진서령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그녀가 여태 얼마나 참고 살아왔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순간에 나타났다는 건, 조금 전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뜻이었다.가슴을 조여 오던 답답함이 더 거세졌고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쥔 듯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책상에 손을 짚고 일어나 진서령을 부축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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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2화

열린 서재의 문 너머로 바닥에 웅크린 주민혁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진서령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주민혁은 시선을 내리깔며 씁쓸하게 웃었다.결국 주기훈의 마음속에서 손희경과 주씨 가문의 체면은, 말을 듣지 않는 아들 하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복도에서 주기훈은 마침내 진서령을 따라잡았다. 손을 뻗어 붙잡으려 했지만 진서령이 거칠게 뿌리쳤다.“만지지 마요!”울음 섞인 목소리에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 난 당신에게 도대체 뭐였어요? 공짜 가정부? 체면 세우는 장식품?”“진정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해명하려 했지만 주기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힘이 없었다.“희경이와의 일은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야. 난 그저 그때의 일을 분명히 하려고 찾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다른 뜻이 없어요?”진서령은 피식 비웃으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나한테 보상해 주겠다면서 다른 뜻이 없어요? 주기훈 씨, 난 아무것도 없던 당신 곁에서 여태까지 함께 해왔어요. 주씨 가문의 가주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욕심부린 적 없고요. 그냥 편안한 가정,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는 남편 하나면 충분했어요. 그런데 당신은요? 당신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나도, 이 집도 없었잖아요.”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단호하게 말했다.“이혼합시다. 이제부터 당신 일도, 손희경 씨의 일도 전부 나랑 상관없어요. 난 민혁이랑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에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더는 주기훈을 보지 않은 채 계단 쪽으로 향했다.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난 삶과의 작별 같았다.주기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음이 어지러웠다.쫓아가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붙잡으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오랜 자존심과 손희경에 대한 집착이 그것을 다시 삼키게 만들었다.결국 주기훈은 진서령의 모습이 계단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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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3화

강지안은 숨 가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집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자 가슴속 불안함은 더욱 커졌다.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서재 바닥에 웅크린 주민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머리칼이 흠뻑 젖어 있었다. 두 손으로는 가슴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숨소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희미했다.“주민혁!”놀란 강지안이 그의 곁에 달려가서는 쪼그리고 앉아 숨을 확인했다. 이윽고 약하게나마 호흡이 느껴지는 걸 알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응급 전화를 걸고 조심스럽게 주민혁의 머리를 받쳐 올려 호흡이 막히지 않게 했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바닥에 생기 없이 누워 있는 그를 바라보자 강지안은 가슴이 저려왔다.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온 강지안은 강해 보이는 주민혁의 겉모습 아래에 얼마나 깊은 상처와 불안함이 숨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울증은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그를 옭아매고 있었고 주씨 가문의 갈등과 손희경의 일은 매번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조금 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주민혁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어쩌면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편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의료진이 주민혁을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몇 시간에 걸친 긴급 치료 끝에 그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해 질 무렵, 주민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병실은 고요했고 기계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삐’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강지안을 바라봤다. 눈빛에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았고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방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평온하고 냉정했다.강지안은 주민혁이 깨어난 걸 보고 안도하면서도 그 무표정한 얼굴에 가슴이 아려왔다.그래서 말없이 일어나 컵에 미지근한 물을 따라 두고는 침상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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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4화

마침내 휴대폰이 울렸다. 강지안에게서 온 전화였다.“어때요?”“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요. 지금은 일반 병실에서 쉬고 있고요.”강지안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그런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깨어난 뒤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안 보이네요. 수빈 씨, 아무래도 직접 와 보는 게 좋겠어요. 아마 걔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수빈 씨밖에 없을 거니까.”순간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며 최수빈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절망에 잠긴 얼굴로 누워 있을 주민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걱정과 안쓰러움이 뒤엉켜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뒤이어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바로 휴가 내고 오늘 안에 은산시로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최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실로 향했다. 휴가를 신청한 뒤에는 곧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몇 시간 후, 비행기는 은산시 공항에 도착했다. 최수빈은 짐을 들고 곧장 택시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앞에 선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조용히 문을 열었다.침대 위에서 주민혁은 멍하니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그는 문가에 선 최수빈을 보는 순간 손에 힘을 주었다.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주민혁은 애써 숨을 들이마시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며 자조 섞인 어조로 말했다.“왜 왔어? 또 강지안 말 듣고 나 불쌍한 사람 만든 거야?”시선을 떨군 채 그녀의 걱정 어린 눈빛을 피하며 목소리를 더 차갑게 낮췄다.“일도 바쁠 텐데 나한테 신경 쓰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말끝마다 가시가 서 있는 것이 일부러 밀어내려는 듯한 태도였다.최수빈은 속이 쓰리고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이렇게 힘들어하면서도 그는 가장 먼저 최수빈을 걱정하고 일을 방해할까 봐 마음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냉정한 말로 진심을 숨겼다.예전에도 늘 이랬으나 그때는 최수빈이 그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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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5화

최수빈은 병실을 나섰다. 그러자 복도에 퍼진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러 이미 답답하던 가슴이 더 무겁게 조여 왔다.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고 분주히 오가는 의료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강지안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그녀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만약 그랬다면 매일 함께 지내면서 왜 아무런 이상도 알아채지 못했을까.그녀는 과연 주민혁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걸까.정말 사랑했다면 그의 냉담한 모습 아래 숨겨진 불안한 모습을 왜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을까.최수빈은 눈을 살짝 감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결혼 생활 내내 그녀는 주민혁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 얼음 같다고 느꼈었다.집안일에는 무관심했고 그녀와 주예린의 일상에도 스스로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심지어 최수빈은 여러 번 주민혁이 차갑고 무정하다고 원망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 고요함 뒤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주씨 가문이 주는 숨 막히는 분위기를 최수빈은 시집오자마자 바로 느낄 수 있었다.주기훈의 강압, 진서령의 인내, 주나연의 계산적인 시선...모두가 가면을 쓴 채 살아가며 그 공간에는 늘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그런 환경에서 주민혁은 어린 시절부터 벗어날 길도 없이 버텨야 했다.이후 그는 도시 외곽의 별장을 신혼집으로 마련해 그녀와 함께 저택을 나왔고 그제야 최수빈은 숨통이 트였다고 느꼈다.그 뒤로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저택과는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그리고 최수빈은 주민혁 역시 그 복잡한 집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왔다고만 생각했다.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서 쌓여 온 상처와 고통이 이미 주민혁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렸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이제 더는 혼자 버티게 둘 수 없어.”최수빈은 눈을 뜨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우선 주민혁에게 먹일 것을 사 오기로 마음먹었다.그의 입맛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다. 기름진 음식은 싫어하고 담백한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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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6화

그가 자기혐오에 잠겨 있을 때,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주민혁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간호사가 약을 갈러 들어온 줄로만 생각하고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그러다 익숙한 음식 냄새가 스며들자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천천히 고개를 돌린 순간, 커다란 봉투 두 개를 들고 침대 곁에 서 있는 최수빈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온몸에 힘이 빠진 듯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수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음식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하나씩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 마치 자기 집에서 식사 준비를 하듯 자연스러웠다.“아무것도 못 먹었을 것 같아서 민혁 씨가 좋아하는 걸로 좀 사 왔어요. 의사 선생님도 지금은 영양 보충을 해야 한다 했고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먹어요.”포장 용기를 여는 순간, 맑게 끓인 갈비탕 향이 병실 가득 퍼졌다.곧 그녀가 작은 그릇에 국을 떠서 주민혁에게 내밀며 조심스레 말했다.“먼저 국부터 먹어요, 속 좀 풀리게. 안 뜨거워요.”그녀의 손에 들린 그릇과 진심 어린 눈빛을 번갈아 보던 주민혁의 가슴이 순간, 무언가에 부딪힌 것처럼 시큰하면서도 저릿저릿해졌다.입을 열려 했지만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이 더 답답해질 뿐이었다.그토록 차갑게 굴었는데도 그녀는 결국 다시 와 주었다.최수빈은 그가 받지 않자 억지로 건네지 않고 그릇을 내려놓은 뒤, 젓가락으로 가시를 발라낸 생선 살을 집어 작은 접시에 올려주었다.“살이 되게 부드러워요. 한 번 먹어 봐요. 싱거우면 간장도 가져올게요.”병실에는 최수빈이 그릇을 옮기는 잔잔한 소리만 흘렀다. 주민혁은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보내고 싶으면서도 오랜만에 느끼는 이 온기를 차마 빨리 잃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굳은 채 앉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최수빈은 주민혁이 어색해하는 것을 느낀 듯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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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7화

그녀가 곁에 있으니 숨 쉬는 공기마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를 짓누르던 부정적인 감정들도 조금은 옅어졌다. 분명 좋아진 부분이었다.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고 곧 더 짙은 불안함이 밀려왔다.최수빈의 부드러운 눈매를 볼수록, 지난 세월 동안 그녀와 딸에게 해 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럴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이것이 바로 괴로운 이유였다.주민혁은 국그릇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최수빈은 이러한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조용히 물었다.“왜 그래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주민혁은 고개를 저었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밥그릇을 괜히 휘적이며 쌀알만 찔러대고 있을 뿐, 거의 입에 대지 못했다.맞은편에서 최수빈은 말없이 국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녀를 바라볼수록 주민혁 가슴속의 죄책감은 밀물처럼 불어나 숨 막히게 했다.문득 그는 결혼하던 날을 떠올렸다.웨딩드레스를 입은 최수빈이 눈을 반짝이며 웃으며 말했었다.“앞으로 잘 부탁해요.”그때의 그녀는 대학을 막 졸업한,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고 원래라면 커리어를 마음껏 펼쳐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그와 결혼하면서 주씨 가문의 온갖 집안일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주기훈의 까다로운 잔소리, 진서령의 눈치 보기, 그리고 주선웅의 노골적이면서도 은근한 떠보기까지...“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요?”최수빈이 다시 묻자 주민혁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려 했다. 그러나 얼굴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아니... 그냥 입맛이 없어서.”“그럼 국이라도 더 마셔요. 회복에 좋대요.”“내가 할게.”...두 사람의 식사는 끝까지 조용했다.식사가 끝난 뒤, 최수빈은 그릇을 정리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씻고 올게요.”그 말과 함께 식판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순간,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주민혁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그는 입을 틀어막고 속이 뒤집히는 걸 참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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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8화

병실 안은 순간 규칙적인 기계 소리만 울릴 만큼 고요해졌다.이불 아래에서 서서히 손끝을 말아쥐는 주민혁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그는 시선을 낮추었다. 긴 속눈썹으로 인해 눈 아래에 작은 그늘이 졌고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잠겨 있었다.“사랑한 사람하고는... 친구로 못 지내.”최수빈의 심장이 세게 요동쳤다.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주민혁도 눈을 들어 곧장 그녀와 마주했다. 피곤해 보이는 눈빛에는 자조하는 기색도, 또 어딘가 체념한 듯한 기색도 엿보였다.그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숨길 것도 없어.”최수빈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늘 감정을 깊이 숨기던 남자가 이렇게 솔직하게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그동안 냉담하게 대하고, 거리를 두고, 다투던 모습들이 이 순간 하나의 답안으로 이어지는 듯했다.그는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사랑할 줄 몰랐던 게 아니라, 그저 두려웠던 거였다.“난 네 곁에 설 자격이 없어.”주민혁은 고개를 떨군 채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네가 원하는 삶도 못 주고 나 자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니까... 그래도 너랑 친구로 남는 건 못 하겠어. 그건 나한테 너무 잔인해.”최수빈의 가슴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따끔 아려 왔다.그녀는 말해 주고 싶었다.완벽한 사람이 되길 바란 적도 없고 그저 혼자 모든 걸 짊어지지 말고 마음속에 자신을 두길 바랐을 뿐이라고.하지만 그 말들이 주민혁을 더 자책하게 만들까 봐 끝내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럼... 일단 이렇게 해요.”최수빈이 조용히 말했다.“지금은 치료에 집중해요. 내가 자주 오고 연락도 계속할게요. 좀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천천히 이야기해요.”주민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두 사람 모두에게 생각해볼 시간을 주며 한 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주민혁의 속마음은 분명했다.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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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9화

다음 날 아침, 최수빈은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 공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어젯밤에는 좀처럼 잠들지 못해 뒤척이다가 밤을 거의 새웠고 아침 출근 시간대라 택시 잡기도 쉽지 않았다.그때였다.검은색 세단 한 대가 천천히 그녀 앞에 멈춰 섰고 창문이 내려가며 주민혁의 옆얼굴이 드러났다.최수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그는 몸에 딱 맞는 짙은 회색 수트를 입고 셔츠 깃을 단정히 여민 모습이었는데 소매 사이로 고급스러운 시계가 살짝 보였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차창에 기대선 그의 모습은 늘 그렇듯 차갑고도 품격 있는 분위기를 풍겼고 어젯밤 병실에서 창백하고 위태로웠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같은 얼굴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최수빈은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당황해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왜 왔어요? 안 보내도 된다고 했는데.”주민혁은 차에서 내려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자연스럽게 캐리어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 너무 익숙한 동작이라 수없이 해 온 일처럼 자연스러웠다.그러고는 그가 최수빈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배웅해주고 싶어서 왔어.”군더더기 없는 말 한마디, 억지로 설명하지도 잘 보이려 애쓰지도 않았다.그 순간 그녀는 예전 주민혁의 모습을 떠올렸다.늘 차분한 겉모습에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사소한 순간마다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다정함을 보여 주던 남자였다.야근하던 어느 날 밤, 폭우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최수빈이 회사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을 때, 주민혁의 차가 말없이 그녀의 앞에 멈췄던 일도 떠올랐다.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그는 그저 ‘지나가다 들렀어’라고 했을 뿐이었다.나중에서야 알았다.그날 그는 해외 회의를 막 끝내고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곧바로 최수빈의 회사로 달려왔다는 걸.남자의 이런 행동은 여성에게 감동을 주기 쉬웠다.그는 언제나 침착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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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화

차는 공항 터미널 앞에 멈춰 섰다.주민혁은 내려서 그녀의 캐리어를 꺼내 주고 차 안에서 포장백 하나를 더 꺼내 건넸다.“네가 좋아하던 쿠키야. 가는 길에 배고프면 먹어.”최수빈은 포장백을 받아 들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따뜻함에 가슴이 괜히 먹먹해졌고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정작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들어가. 비행기 놓치지 말고.”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비행기에 올라 이륙하기 전까지 최수빈의 마음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그녀는 두 손을 꼭 쥔 채 오늘 봤던 주민혁의 모습을 떠올렸다.현재 차분해 보이는 그의 진짜인지, 아니면 애써 숨기는 건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주민혁은 원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주씨 가문의 그 숨 막히는 환경에서 자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법을 몸에 익힌 사람이었다.속은 요동쳐도 겉으로는 완벽하게 감춰 누구도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 줄 알았다.최수빈은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마음은 혼란스러웠다.앞으로 그와 어떤 관계로 지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부부로 돌아가기에는 과거의 상처와 어색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친구로 지내기에는 사랑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던 그의 말이 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또 완전히 끊어 내자니 주민혁은 주예린의 친아빠라 그럴 수 없었다.“음료 드릴까요?”승무원의 목소리가 사색을 멈추게 했다. 최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어쩌면 강지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그의 병이 더 깊어지도록 방치하고 주씨 가문의 온갖 문제에 짓눌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진짜 잔인한 일일 것이었다....그 시각.최수빈을 보내고 돌아온 주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기훈이었다.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곧바로 성급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희경이 어디 있냐고!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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