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181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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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신수빈이 마음 편히 지내는 것과 달리 태후는 소영이 처형된 이후 크게 앓아누웠고 열흘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차도를 보였다.태후의 오라버니인 정양왕은 두 차례나 입궐해 문안을 드렸고 그녀가 기운 없이 축 처진 모습을 보자 부인에게 서난각에 자주 들러 태후의 곁을 지키라고 일렀다.오늘의 태후는 비교적 상태가 좋아, 화랑 앞에 앉아 두 마리 사자고양이가 공을 쫓으며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시 하나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린 태후는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혹시 섭정왕이더냐?”내시는 고개를 한껏 숙인 채 조심스럽게 아뢰었다.“태후 마마, 정양왕비께서 오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태후의 눈빛이 곧바로 어두워졌다.태후는 문득, 조정의 중대한 일이 아니면 이곳에는 오지 않겠다고 했었던 이도현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토록 오래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들라 하거라.”태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곁에 서 있던 여관 황상궁에게 다시 물었다.“내가 병석에 있던 동안 섭정왕이 사람을 보내 안부라도 물은 적이 있느냐?”비록 황상궁이 소영만큼 태후의 곁에서 중용되던 인물은 아니었으나 오래된 심복으로 태후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없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태후의 얼굴에 있는 쓸쓸함이 더욱 가려지지 않았다.이윽고 정양왕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태후의 안색이 한결 좋아 보이자 그녀 역시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지금의 천자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장 씨는 외척이었기에 일가의 모든 영광은 태후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태후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곧 장 가의 가장 큰 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마친 뒤, 태후는 정양왕비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재가하여 장 가로 들어온 몸이었지만 최 씨 가문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자 인재가 끊이지 않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 장 가가 권세를 누리고 있긴 하지만, 뿌리가 얕은 만큼 최 씨와의 혼인은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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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지방 관원들과 하도 관아 역시 선을 지키고는 있습니다. 대규모로 범람해 큰 수해가 나지 않게 막으며, 극히 일부 백성들만 피해를 입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문제로 번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신도연이라는 자가 굳이 단번에 근본부터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린 것이지요. 게다가 그는 섭정왕이 직접 지명한 인물이라 여기저기에 제약이 많습니다.”어쨌든 장 가가 가장 큰 몫을 챙긴 상황에서 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가는 불길이 제 몸을 태우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정양왕비의 말을 들은 태후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나 오라버니가 말하던 대로였다. 중원의 몇몇 큰 가문들의 두터운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그들의 뿌리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정의 요직과 자원이 여전히 몇몇 명문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었다.이제 막 벼슬길에 발을 들인 최문화 같은 인물, 그리고 내택에 머무는 최 씨 같은 부인이 관직의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으니 오라버니가 이 재가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 선택이 참으로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신도연이라… 어떤 자냐?”태후는 조정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관리가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양왕비는 태후가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차분히 답했다.“항주 출신입니다. 항주의 거상, 신병호의 셋째 아들이지요.”거상의 아들이라는 말에 태후는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그 신도연이 바로 신 씨의 셋째 오라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다른 이들은 몰라도 신 씨와 이도현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태후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이도현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다. 그가 아무리 여인을 총애한다 해도 결코 그 여인들이 그의 결정을 좌우하게 두지는 않을 인물이었다.그런데 이 신 씨라는 여인은 달랐다. 관직 하나 없는 백정 신분에, 그것도 상인의 집안 출신인 신도연을 단숨에 하도 감찰사로 만들어 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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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정양왕비 최 씨는 태후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신첩이 돌아가 왕야와 상의한 뒤, 문화를 향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태후는 짧게 응답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싸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정양왕비는 오늘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태후께서 요 며칠 크게 편찮으셔서 바깥 사정을 잘 모르실 듯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섭정왕의 새 총애가 요즘 몹시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섭정왕께서 직접 그녀를 데리고 유람을 나가셨는데 수레와 말이 화려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고 합니다.”그 말에 태후는 잠시 굳어버렸다.“새 총애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전부터 행궁에 머물던 진 씨 성을 가진 여인이요. 이름은 하빈이라 하더군요. 섭정왕의 후원에 들자마자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그 일로 섭정왕께서 이틀이나 조회를 파하셨습니다.”태후는 익숙한 이름에 곧바로 기억해 냈다. 마구간에서 열린 마상 구경 자리에서 그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몸매 또한 수려했다.태후의 마음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신 씨 하나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또 다른 진 씨 여인이 생겨 이렇게 떳떳하게 그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욱씬거렸다.역시 세상 사내들은 다 한결같았다. 누구나 좌우에 여인을 거느리고 싶어 했다. 최 씨는 태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울해 있는 것을 보고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섭정왕께서는 지금 천하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고 계십니다. 조정의 관원 임면과 군정의 조율 모두 그 분의 손에 달려 있지요. 비록 지금은 충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보이지만… 이처럼 지존의 권세를 쥐고 있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만약 섭정왕의 곁에 우리 사람을 두어 때때로 말 한마디씩 건넬 수 있다면 섭정왕 또한 신하로서의 분수를 잊지 않을 것이며, 태후께서도 섭정왕의 정무 판단과 내택의 사정을 수시로 알 수 있으실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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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태후는 마음이 아픈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이 일은 너와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결정하거라. 나는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겠다.”최 씨는 태후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알고 더는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예를 올린 뒤 서난각을 나섰다.요 며칠, 신수빈은 큰 오라버니에게서 전갈을 받았다. 형수가 얼마 전 딸을 낳았는데 신수빈을 쏙 빼 닮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름은 유진이라 지었고, 내년쯤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경성으로 데려와 보여 주겠다고 했다. 전생에서 신수빈은 그 작은 조카를 끝내 보지 못했고 집으로 온 편지로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신수빈은 후한 예물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 가가 보지 못했을 물건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 결국 손수 아이의 작은 옷과 백복으로 감싼 포대기를 지어 예물과 함께 항주로 보냈다.그 소식을 듣고 신수빈은 며칠이나 마음이 들떠 있었다. 다만 윤 가의 분위기가 지금은 잿빛이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표정을 숨겨야 했다.윤서원은 지금 요양 중이었는데, 의원이 몇 차례나 바뀌었지만 여전히 차도는 없었다. 하나같이 모두 때를 놓쳤다고만 할 뿐이었다.그 탓에 윤 가 안팎에서는 주서화에 대한 원망이 더욱 짙어졌다. 특히 서 씨는 사정을 모두 알게 된 뒤로 날마다 주서화의 거처를 찾아가 고함치며 매질을 했다. 본래 서 씨는 금족을 당했으나 자식들로 인한 충격에 정신이 온전치 않아 더는 제지하는 이도 없었다.“불이야!”그날 밤, 신수빈이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 바깥에서 누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원의 노복들과 시녀들이 이내 우르르 밖으로 달려나갔다.신수빈도 창을 열어 확인해 보았는데, 동쪽 하늘에 검붉은 연기가 치솟더니, 불길이 번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창틀을 꽉 움켜쥔 채, 하늘 한쪽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곧 금자가 달려 들어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마님, 윤서령 아가씨의 마당에 불이 난 것 같습니다! 한데… 불길이 너무 세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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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그의 두 눈에 공포가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촛불의 열기가 살을 파고들수록 눈동자 속의 고통은 급격히 짙어졌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달아나고 싶어 몸부림쳤지만,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반면, 신수빈의 눈은 여전히 깊은 연못처럼 고요했다. 그가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두려움에서 증오로, 그러다 다시 애원으로 변해 가는 표정을 그녀는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아파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한 부인처럼 극히 부드러웠다. “분명 몹시 아플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가장 잘 알거든요. 불에 타는 고통은…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고 차라리 이 살과 가죽을 모조리 벗겨 내고 싶게 하거든요. 그런 고통을 저와 연우는 꼬박 일곱 해를 견뎌야 했어요.”신수빈은 고개를 숙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겉으로는 웃는 듯했으나 눈동자 깊은 곳에 검고 짙은 냉기가 고여 있었다.“한데 서방님께서 느끼는 이 정도의 아픔이 뭐가 대수라고 그러십니까?”전생에서 그녀는 죽은 뒤에도 벗어나지 못했다. 쇄혼루의 멸령화진은 육신을 떠난 뒤에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혼백마저 날마다 불에 그슬리듯 고통받았다. 그의 팔 전체가 촛불에 그을려 새까맣게 변했을 즈음에서야 신수빈은 비로소 촛대를 치웠다.“걱정 마세요. 저는 서방님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후부께서 또다시 명의를 불러오셨다지요. 중풍과 반신불수를 가장 잘 다룬다는 분이라 들었어요. 저도 아는 의원인데 제법 수완이 있습니다.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못해도 말을 하게 하고, 걷게 만드는 정도는 어렵지 않다더군요.”그러자 윤서원의 고통에 찬 눈동자 속에서 희망의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신수빈은 곧바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데 제가 있는 한 서방님께서 말을 하게 두지는 않겠지요. 침상에서 내려와 걷게 두겠느냐 말입니다? 지금은 하인이 부주의로 촛대를 엎질러 서방님께 화상을 입힌 것처럼 꾸미면 되겠네요. 부인이 된 제가 서방님을 곁에서 직접 모셔야 할 테니까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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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그녀들 역시 모두 딸을 둔 엄마였다. 그런데, 지금 윤서령 하나 때문에 부내의 모든 규수들이 혼처를 잃은 셈이 되었으니, 원망이 얼마나 깊겠는가? 그들은 속으로 이를 갈며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다.이제는 사람이 죽었어도 소용이 없었다. 딸들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일은 더 이상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나란히 자기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셋째 마님이 둘째 마님을 힐끗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요즘 집안이 어찌 된 건지 영 불안하기만 하네요. 조만간 절에 가서 제대로 한 번 빌어야겠습니다.”둘째 마님은 예전에 신수빈에게 크게 한 번 당한 기억이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냉소를 흘렸다.“뭐긴. 집에 화근이 들어온 게지. 그 신 씨가 문에 들어선 뒤로 집안에 제대로 된 일이 하나라도 있었는가?”그러자 셋째 마님이 깜짝 놀라며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그런 말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신 씨는 일품 고명이고, 배 속에는 세자의 유일한 아이가 있습니다. 장차 이 후부를 물려받을 아이인데 괜히 그녀에게 밉보였다가는 우리만 손해입니다.”둘째 마님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분통을 터뜨렸다. 신 씨 앞에서는 감히 욕을 못 했지만 말이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겐가?! 원이가 이렇게 된 마당에 다시 일어설 리도 없고, 몇 해나 더 살지도 모를 일이네. 신 씨는 그저 여기 남아서 생과부로 늙어 가는 게지! 게다가 배 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지도 미지수고. 설령 태어난다 해도 딸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럼 이 후부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네!”셋째 마님은 둘째 마님보다 한 수 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곧장 화제를 틀었다.“설령 배 속 아이가 딸이라 해도 대방에는 아직 수혁 도련님께서 계시잖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가 적장자이기도 하고요.”그 말에 둘째 마님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그 애? 체면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 애에게 가업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네. 이 씨 집안의 일은 족로들조차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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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평양후가 초빙한 명의는 곧 경성에 도착했다. 그는 윤서원의 병세를 상세히 묻고 난 뒤 바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신수빈이 옆에서 한마디 물었다.“제 서방님의 병은 언제쯤 호전될 수 있을까요?”명의의 손놀림은 매우 빨랐다. 그는 침을 놓는 것과 동시에 신수빈의 물음에도 답해 주었다.“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일 침을 놓으면… 보름 후에는 손발을 들 수 있을 것이고 한 달 뒤면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을 거예요. 이후에는 거동이 다소 불편할 수 있으나 세자께서는 연세가 젊으시니 완전히 회복될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가득 실려 있었다. 신수빈은 그 말을 듣고 곁에서 옅게 미소 지었다.“그렇다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의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침을 모두 거둔 뒤, 신수빈은 사람을 시켜 명의를 별채로 모시고 휴식을 취하게 했다.동쪽 별채에는 이제 그녀와 윤서원만이 남았다.“들었지요? 명의께서 말씀하시길, 한 달 뒤면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고 어쩌면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꽤나 후련하시겠네요.”신수빈은 이내 침상 곁으로 다가가 작은 함 하나를 꺼냈는데, 그 안에는 역시 한 벌의 은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며칠 전, 어떤 의원에게 침술 하나를 배웠습니다. 방금 그 명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분이 다스려 놓은 경맥을 망가뜨리는 데에는 충분할 거예요.”윤서원은 눈을 부릅뜨고 신수빈이 은침 하나를 집어 그의 머리를 향해 가져오는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공포에 찬 그의 시선은 마치 독을 머금은 듯했다. 자신이 찔린 혈자리가 어디인조차 알 수 없었다.그저 머리가 터질 듯 아파 왔고 참기 어려운 고통에 온몸이 떨렸다. 입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 어떤 애원도 신수빈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신수빈은 그의 불에 데인 팔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었다. 약을 잘 발라 두었던 덕에 상처는 이미 다소 호전된 상태였다.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화석을 집어 촛불을 밝혔다. 불빛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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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그는 알고 있었다. 부엌에서 제멋대로 차려 준 음식이 아니라는걸. 분명 그녀가 따로 일러 두었을 터였다.윤수혁은 곁들여 나온 반찬과 함께 국수 한 그릇을 빠르게 비웠다. 배가 부르자 온몸이 한결 풀리는 듯했다.“더 있느냐?”그가 올려다보며 묻자 부엌에서 온 이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마치 산해진미라도 먹은 듯한 표정으로 국수를 비우는 걸 보고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있습니다, 있습니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배를 든든히 채운 뒤 윤수혁은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기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둥근 달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시선은 창란원을 향했는데, 등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아마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윤수혁은 창란원 주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을 가만히 살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창란원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되 분명히 밖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두 무리가 번갈아 가며 교대하기까지 했다.그 순간, 윤수혁의 머릿속에 역관에서 자신을 뒤쫓아 나오던 그 인물이 떠올랐다. 움직임이 극히 날쌔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자였다. 그를 떼어내기까지 적잖은 수고가 필요했었다.윤수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춘진각 동쪽 익실에서 그녀는 몸을 낮추기까지 하며 사내 앞에서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 역시 전부 이도현의 심복일 것이다.윤수혁은 한참을 더 바라보다가 지붕에서 내려와 방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그는 몸을 씻고 옷을 단정히 갈아입은 후 큰 마님의 처소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녀의 뜰에 이르렀을 때 마침 막 도착한 신수빈을 마주쳤다.큰 마님은 몸이 편치 않아 기상이 늦은 터라 두 사람은 마당에 서서 기다렸다.윤수혁은 신수빈한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한편, 그녀는 그에게서 불어오는 아주 옅은 비누풀 향을 맡았다. 맑고 산뜻한 향기였다. 윤수혁은 여느 세가 자제들처럼 향을 쓰는 습관이 없었기에 옷에는 늘 비누풀로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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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큰 마님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끝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유모마저도 참지 못하고 탄식하듯 말했다.“애초에 신씨 부인을 맞이한 쪽이 큰 도련님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큰 마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낮게 꾸짖었다.“앞으로 그런 말은 다시는 하지 말거라.”유모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때 마침, 마당 어귀에서 윤수혁이 손을 들어 예를 갖추며 신수빈에게 먼저 나가시라는 뜻을 보냈고, 그녀는 그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유모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시 한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기로 했다.창란원의 동쪽 별채 안에서 윤수혁은 윤서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말라버린 고목과도 같았다.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고 그가 왔음에도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 그 자체에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그들 형제 사이에는 본디 정이 깊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윤서원은 서 씨의 눈에 든 보배였고 이 집안의 세자였다. 반면 자신은 늘 가장자리에 위치한 존재였기에 하인들조차 거리낌 없이 무시해도 되는 처지였다.형제로 함께 지낸 날은,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사흘이 채 되지 않았다. 해마다 종묘에서 조상을 모실 때만 그저 잠시 얼굴을 스칠 뿐이었다.“아버지께서 명의를 모셔 왔다 들었습니다. 이 병세에 대해 명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신수빈은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답했다.“명의께서는 단 한차례만 진맥한 것 뿐이라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을 수도 있고 평생 이대로 지내야 될 수도 있다 하더군요.”윤수혁의 시선이 윤서원에게서 신수빈의 얼굴로 옮겨갔다. 온화해 보이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 다른 생각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만약 그가 평생 이 상태로 지내게 된다면… 앞으로 어찌할 생각입니까?”신수빈은 이미 제법 도드라진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흔들림 없는 온화함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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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윤수혁은 코끝에 맴도는 익숙하고 은은한 향을 맡으며 행궁에서 그녀가 자신의 몸을 그녀의 옷으로 덮어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시 맡으니 사향과 난초가 어우러진 듯한 깊은 향기였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눈동자는 빛을 머금은 듯 맑게 흔들렸고 얼굴은 옥처럼 윤택하고 고왔다. 말은 아직 입술에 맺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숨결마저 난초 향처럼 그윽했다. 그는 순간 마음이 아득해져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잊을 정도였다.신수빈은 그의 설명을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그가 더는 말을 잇지 않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윤수혁이 잠시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의아해했다. 다만 두 사람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한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이런 팔찌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 팔찌의 가치는 단순한 장신구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기에 망설임이 컸다.윤수혁은 집안에서의 처지가 애매했고 손에 넉넉한 재산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서 이렇게 귀중한 물건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한 암기는 솔직히 말해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정말 마음이 흔들리네요. 한데 너무 귀한 물건이라 감히 받기가...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 팔찌를 만드는 데 든 비용이 얼마인지 알려 주시면 제가 그만큼의 값을 드리겠습니다.”신수빈이 물러서는 순간 윤수혁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마님... 아니 이제 제수씨라고 불러야겠지요? 그냥 받아 두세요. 이제 저희는 한집안 식구입니다. 이걸 차고 계시다가 위급한 순간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저는 충분합니다.”그녀가 혹시 자신이 궁핍하다고 여길까 염려한 듯 그는 다시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동안 밖에서 나름의 생업도 꾸려 왔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은전이 모자라지는 않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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