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Chapter 521 - Chapter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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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1화

이도현은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 눈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리며 아이의 작은 발을 살며시 쥐었다.“네 어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아이는 몸을 일으켜 보려는 듯 이불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이도현은 녀석이 품에 싫증 난 걸 알아차리고는 아이를 안아 제 가슴 위에 엎드리게 한 채, 자신은 침상에 편히 누웠다.아이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그의 머리 쪽으로 기어 올라가려 애썼지만, 아직 힘이 모자랐다.이도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버둥거리면서도 꼼짝 못 하는 아이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참 둔하군.”바로 그때,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아이가 뽀드득 방귀를 뀌었다.이도현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가슴이 들썩일 만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소리에 아이도 신이 난 듯 까르르 웃어 댔다.“재주는 그것뿐이네.”이도현은 아이를 뒤집어 제 팔 안에 눕혀 안았다.신수빈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던 참이었다.안채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이 웃음소리에 그녀는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머리도 채 말리지 못한 채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남자의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보자마자 웃으며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우리 아들, 이 어미가 보고 싶지 않았느냐?”이도현은 그녀가 아이를 품에 안아 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젖은 머리카락 끝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서늘한 감촉은 금세 멀어졌다.그는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물기 어린 듯 윤기 도는 눈동자, 그 안에 가득 번지는 환한 기쁨.그래, 지금 이 순간의 그녀는 진짜였다.하지만 그것은 자신 때문만이 아니었다.신수빈은 한참 동안 아이를 품에 안고 다정히 위로해주다가, 뒤에 있던 남자가 계속 말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잠든 줄 알고 몸을 돌려 바라본 순간, 그대로 그의 짙고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그 순간, 신수빈은 살짝 멈칫했다.탐색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혼란스러운 눈빛까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왕야,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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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2화

신수빈이 조용히 그의 품으로 파고들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이도현의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게 했다.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거리낌 없이 잠옷 안쪽으로 스며드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의 숨결을 흐트러뜨렸다.이도현은 어느새 자신의 아랫배까지내려온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신수빈을 바라보았다.짙고 어두운 빛이 눈동자 깊숙이 스쳐 지나간 순간, 그는 몸을 뒤집어 순식간에 그녀의 위를 덮쳤다.곧이어 잠옷조차 벗겨지지 않은 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감각에 신수빈은 미처 준비할 틈도 없었다.통증이 밀려오는 순간 그녀는 멍하니 굳었다가, 이내 낮은 신음을 삼켰다.작고 고운 얼굴이 금세 괴로움에 일그러졌다.“왕야...”몸을 웅크린 채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와 눈가에 맺힌 물기를 본 이도현은 결국 차마 더 몰아붙이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천천히 닦아냈다.이어 뺨을 따라 내려가 붉은 입술과 새하얀 볼, 가녀린 목덜미까지 천천히 입술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그와 같은 열기에 잠식된 듯했다.복숭아꽃처럼 붉게 물든 얼굴, 물기 어린 흐릿한 눈빛, 그리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부름까지.점점 더 부드럽고 애틋하게 얽혀 들었다.이도현은 그녀의 뺨을 감싸 쥔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빈아, 나를 보거라...”신수빈이 눈을 뜨자, 그의 이마에는 옅은 땀이 맺혀 있었고 두 눈은 희미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이마의 땀을 조용히 닦아 주었다.지금의 그녀는 마치 그의 손안에 완전히 붙들린 사람처럼, 손끝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이도현은 그녀의 시선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은 채 집요하게 바라봤다.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는 쉰 숨결 속에서도 거칠고 강압적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본왕을 좋아하느냐?”“...네.”신수빈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아랫배 안쪽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타오르는 듯해 견디기 힘들었다.“직접 말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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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3화

“왜지? 저건 우리 수입의 가장 큰 부분이야. 광산을 닫아 버리면 정예 병력을 무슨 돈으로 굴린단 말인가.”“자객들이 모두 자결했지만 어젯밤 암살을 실패한 것은, 신 씨가 이미 경계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분명 무언가를 눈치챈 겁니다. 그녀 곁의 고수들은 황족이 길러 낸 최정예들입니다. 이도현이 모를 리 없지요. 이도현이 광산과 장씨 가문의 연관성을 알아차리는 순간, 반드시 끝까지 파고들 겁니다. 그러면 자금의 흐름도 드러날 것이고, 사병을 길러 온 일 역시 더는 숨길 수 없게 됩니다.”장한월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무엇이 더 중요한지도 분명했다.결국 그는 이를 악문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태후의 말이 맞았다.그 신 씨는 정말 장씨 가문의 재앙이었다.“광산은 반드시 닫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대신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 하나를 내세우셔야 합니다. 최근 주조한 은화도 함께 경성으로 보내 사죄하십시오.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가족이 몰래 사광을 캐고 있었다고 말하면서요. 일부러 요란하게 입경해 사람들이 직접 보게 해야 합니다. 주군께서 대의를 위해 친족까지 버렸다는 걸 말입니다.”장한월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낮게 물었다.“누굴 내세우라는 겐가?”검은 옷의 사내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세 글자를 내뱉었다.“적장자입니다.”장한월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그건 안 되네!”검은 옷의 사내는 오히려 웃어 보였다.“대업을 이루려는 분께서 어찌 작은 정에 얽매이십니까. 제가 모질어서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헌데 큰공자께서 그간 해 온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적장자가 훗날 주군의 뜻을 이을 수 있겠습니까? 큰공자 말고도 아드님은 많습니다. 그리고 적장자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정말로 주군께서 대의를 위해 친족까지 버렸다고 믿을 겁니다.”장한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은 옷의 사내는 그의 망설임을 읽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주군께서 차마 손을 쓰지 못하시겠다면, 경성으로 보낸 뒤 제가 처리하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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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4화

조정의 대신들은 오늘 분위기가 유난히 무겁다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숨 막히는 압박감이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모두 불안한 눈빛으로 상석에 앉아 있는 사내를 힐끗거렸다.장자를 얻은 뒤로 그는 한결 유해졌다.조정에서도 대신들의 의견을 많이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냉혹하고 무정한 표정을 드러내거나 독단적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일도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그 익숙한 압박감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먼저 예부 시랑이 통천서원의 이번 춘시 응시생들을 위해 선처를 구하자, 각 세가 출신 대신들까지 잇달아 나서며 힘을 보탰다.바닥에는 꿇어앉은 관리들이 새까맣게 깔려 있었다.평소 같았으면 설령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상소를 기각하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그러나 오늘의 그는 달랐다.이미 결정된 일이라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고, 오늘 구명을 청한 자들은 반년 치 녹봉을 삭감하겠다고 했다.더 떠들면 벼슬을 떼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다시 조정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매서운 꾸짖음까지 이어졌다.대신들은 아직도 마용 일가가 그와 맞섰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감히 더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졌지만, 동시에 원망 또한 짙어졌다.황좌에 앉아 있는 천자마저 숨을 죽인 채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대신들은 서로 얼굴만 힐끗 주고받은 채, 큰일은 짧게 보고하고 사소한 일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인 끝에 겨우 파조 시간이 되었다.이도현은 근정전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지만, 눈앞의 상주문을 펼쳐 놓고도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그러다 밖에서 심복이 찾아와 무언가를 보고하자, 그는 곧장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놈들의 신원은 밝혀졌느냐? 단서는?”“없습니다. 자객들은 포위되자마자 독낭을 깨물고 자결했습니다.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단서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이도현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손짓으로 그를 물러가게 했다.이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근정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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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5화

신수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도현은 조금 더 세게 그녀를 눌렀다.그녀가 낮게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그는 못 본 척한 채 여전히 그녀를 내려다봤다.“침상 위의 노리개라면, 본왕은 그녀가 오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가 그녀를 속상하게 했는지 굳이 마음 쓸 필요가 없다. 그녀가 본왕에게 무엇을 바라든 신경 쓸 이유도 없지. 본왕이 원할 때면 언제 어디서든 불려와야 하고, 거절할 권리도 없다. 그저 본왕의 비위만 잘 맞춰 주면 되는 거다. 그 이상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슨 상관이겠느냐.”신수빈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 갔다.입술은 몇 번이나 떨리듯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때 이도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조금 전까지의 냉기가 거짓말이었던 듯, 그의 눈빛에는 어느새 짙고 다정한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헌데 내 부인이라면 다르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나는 그녀를 아끼고 존중할 것이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겪을까 두렵고, 아플까 마음이 쓰이겠지. 그녀에게 존귀함과 영광을 모두 안겨 줄 것이고,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며, 그녀가 근심하는 일도 함께 짊어질 거다. 침상 위에서조차 내 조급함을 누르고, 가진 모든 인내를 그녀에게 내어 줄 수 있다. 영광도 치욕도 함께 나누고, 비바람 또한 대신 막아 줄 것이다. 이 생이 다할 때까지 그녀를 내 날개 아래 지켜 줄 거다.”이도현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한 마디 한 마디는 부드러웠고, 그사이 그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조용히 닦아 주었다.“빈아, 잘 생각해 보고 내게 대답하거라.”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빼내어 그대로 돌아섰고, 다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신수빈은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그렇게까지 거세게 심장이 요동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심지어 남자가 떠나려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싶어졌다.하지만 끝내 축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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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6화

신수빈은 한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유모에게 넘긴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물 좀 준비해 주거라. 씻고 나갈 것이다.”그녀가 정원에 도착했을 때, 정자 안에는 두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는 이도현의 뒷모습이 보였다.신수빈은 마음 한쪽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뒤 몇 걸음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며칠 전, 성 밖에서 크게 다친 사람 하나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함께 있던 낭화 언니께서 그러더군요. 그 사람을 쫓던 자들이 장씨 가문 사람들 같다고요. 그 말을 듣고 저도 이 일이 장씨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짐작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계속 의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몸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 안에서는 위조 은화 몇 닢과 손으로 그린 지도가 나왔고요. 치료받는 동안 정신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사광이며 은 주조 이야기들을 중얼거렸어요. 그래서 감히 짐작했죠. 이 일이 장씨 가문과 무관하지 않다고.”“처음엔 곧바로 왕야께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헌데 곧 왕야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여 귀비 마마께서 장씨 가문에 큰 은혜를 입었고, 왕야께서는 여 귀비 마마의 유언 때문에 장씨 자손들의 평안과 부귀를 지켜 주기로 했다던 말이.”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그래서 망설였지만, 제가 직접 끝까지 확인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장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면... 반드시 일을 크게 만들겠다고요. 온 세상이 다 알게 해서, 왕야께서도 더는 그들을 감싸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신수빈은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바로 그의 뒤에 섰다.“제멋대로 행동한 거 맞습니다. 어젯밤엔 이곳에서, 왕야 앞에서까지 속셈을 부렸습니다. 제가 왕야를 실망시켜 드렸네요. 벌을 내리셔도, 꾸짖으셔도... 저는 다 받겠습니다.”그녀가 치맛자락을 걷어 죄를 청하려던 순간, 이도현이 돌아서며 그녀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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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화

발길질이 몇 번이나 신수빈의 몸에 닿았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감고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내일 다시 놀아 줄게...”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다는 게 느껴졌다.이도현은 꼬마를 슬쩍 끌어안아 바깥쪽으로 옮긴 뒤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이 녀석, 좋게 해 주니까 분수를 모르네. 안 자면 혼자 재워 버린다?”하지만 아이는 이도현이 자기와 놀아 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까르르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붙잡고는 옹알거리며 한참 말을 걸었다.잠시 후, 놀다 지쳤는지 이도현이 다시 아이를 두 사람 사이에 눕혀 놓자 금세 잠이 들었다.이도현 역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어제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이었다.다음 날 아침, 이도현은 일찍 눈을 떴다.곁에 놓인 손그림 지도와 위조 은화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눈빛을 깊게 가라앉혔다.그리고 모자를 위해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준 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신수빈이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오른 뒤였다.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개운했다.하지만 방 안에는 이준우도, 그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 마당에서 이준우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복도 아래에는 앵무새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시녀들은 재미있다는 듯 먹이를 내밀며 말을 따라 하라고 놀려 대고 있었다.“앵무새는 어디서 난 것이냐?”청하가 웃으며 답했다.“마님, 전에 왕야께서 도련님께 보내 주신 겁니다. 어제 오후에 도련님께서 계속 기운이 없으셔서, 제가 왕부에 들러 가져왔습니다.”다만 청하는 차마 진짜 이유는 말하지 못했다.‘저 녀석 말이 너무 많으니까 앵무새라도 하나 붙여 두거라.’그게 이도현이 원래 했던 말이었다.신수빈은 빛깔 고운 앵무새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무슨 말까지 할 줄 아는데?”앵무새를 키우던 어린 시녀가 얼른 앞으로 나와 공손히 답했다.“마님께 아룁니다. 이 앵무새는 제가 직접 길렀는데,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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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8화

신수빈은 윤수혁의 이름을 듣고나서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윤수혁은 여러 번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었으니, 그녀 역시 그에게 악감정은 없었다.그러나 행궁에서 벌어졌던 암살 사건만큼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윤수혁과 이도현 사이에 원한은 없었지만, 그의 친구는 분명 이도현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그때 그녀는 윤수혁이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생각해 그를 도와주었다.하지만 이제 윤수혁이 점점 이도현의 중용을 받게 될수록, 그녀는 어쩐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중상을 입은 사내가 들것째 마차에 실렸다.잠시 후 윤수혁이 앞으로 나와 두 손을 모아, 호국사 입구에 서 있는 신수빈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바람이 거세니 호국부인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이제 그녀는 윤 가로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그러니 제수씨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설령 부른다 한들, 이미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으니까.호국부인.그 호칭은 오직 만인 위에 선 권신만이 곁에 둘 수 있는 여인에게 어울렸다.신수빈은 잠시 마차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윤수혁에게 옮겼다.“아주버님, 저 사람은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제게도 아주 중요한 사람이고요. 부디 무사히 데려다주십시오.”“염려 마십시오. 왕야께서도 이미 당부하셨습니다.”윤수혁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도현이 그를 중용할 리 없었다.윤수혁이 몸을 돌려 떠나려던 순간, 신수빈이 조용히 그를 불러 세웠다.“아주버님, 그 친구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십니까?”윤수혁의 걸음이 멈췄다.그는 신수빈을 바라봤다.구름 사이에 숨은 달빛처럼, 그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져 보였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직 경성에 있습니다. 헌데 뜻이 다르면 함께 갈 수 없는 법이지요. 갚아야 할 은혜는 이미 다 갚았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의 인생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만약 또다시 일을 그르친다면... 그땐 저도 더는 관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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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9화

며칠 전부터 민 씨와 일행은 이미 경성에 들어와 있었다.하지만 이도현은 그동안 신수빈과 냉랭한 기류 속에 있었던 탓에 그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마침 며칠 숨 돌릴 틈이 생기자, 이제는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무엇보다 생전의 모비께서 늘 그 여동생을 마음에 두고 계셨으니까.장녕이 마련한 저택은 선양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권문세가들이 모여 사는 내성에서도 멀지 않았고, 일반 백성들이 사는 거리보다는 궁성과도 가까운 곳이었다.이도현이 도착했을 때, 저택 안에서는 맑고 서늘한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는 걸음을 멈춘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단단하고 맑은 음색이었다.규방 여인들의 애달프고 처연한 선율과는 전혀 달랐다.잠시 듣고 있던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민 씨는 섭정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딸과 함께 급히 나와 맞이했다.그 순간 거문고 소리도 멎었다.“섭정왕을 뵙습니다.”모녀는 함께 무릎을 꿇었다.이도현이 곁의 시종을 힐끗 바라보자, 시종은 곧장 앞으로 나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이도현의 시선은 민 씨에게 머물렀다.모비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였다.그는 끝내 마지막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그의 기억 속 모비는 아직도 열다섯 살 그해, 회하 전선으로 떠나던 자신을 붙잡고 조용히 당부를 건네던 모습 그대로였다.그런데 이 민 씨는 생각보다 훨씬 모비를 닮아 있었다.마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관리를 잘한 탓인지 삼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마치 모비가 눈앞에 살아 돌아온 듯했다.다만 그녀 몸에 밴 풍진의 기운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단아하고 온화했던 모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모비께서는 생전 내내 이모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셨지만 끝내 찾지 못하셨지요. 모비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마음에 담고 계셨습니다. 이제라도 이모를 찾게 되었으니, 모비께서도 하늘에서 편히 눈을 감으실 겁니다.”민 씨는 눈앞의 권세 높은 남자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이윽고 눈가를 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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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0화

이도현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민 씨 뒤에 서 있던 초담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섭정왕을 배웅할 때조차 시선은 계속 바닥에 있었다.이도현이 떠나자마자 민 씨는 손에 들고 있던 뜨거운 찻잔을 그대로 집어던졌다.찻잔은 초담의 이마 끝을 스치며 깨졌고, 뜨거운 차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초담은 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제가 무엇을 잘못해 어머니 심기를 거슬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세요.”민 씨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부드럽지만 질긴 얇은 대나무 자를 들고 나왔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대로 초담의 뺨을 후려쳤다.초담은 고통에 짧게 신음했지만, 감히 몸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이런 부드러운 죽척은 가장 아프게 때리면서도 흔적은 남기지 않는 물건이었다.청루에서 기녀들을 길들일 때 흔히 쓰는 도구이기도 했다.“장안으로 오기 전에 내가 뭐라고 했느냐? 섭정왕을 만나면 네가 평소 배운 수법들을 전부 쓰라고 하지 않았더냐. 세상에 천진난만하고 교태 부리는 여자를 싫어하는 사내가 어디 있느냐. 헌데 넌? 내내 고개만 처박고 있었지! 차를 따르라 해도 못 들은 척이나 하고, 그분 눈에 띌까 겁이라도 난 사람처럼 굴더구나. 차라리 벽 틈에 숨어 버리지 그랬느냐?”초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곧이어 두 번째 죽척이 날아들었다.양쪽 뺨이 화끈거리며 아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입 다물고 버티겠다는 거냐? 좋아. 네 입이 센지, 내 수단이 센지 한번 보자꾸나!”민 씨의 손이 다시 연달아 내려쳤다.찰싹, 찰싹.결국 초담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애원했다.“어머니, 제발 그만하세요. 제가 섭정왕 앞에서 교태를 부리기 싫었던 건... 지금은 예전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어머니와 제가 천한 신세라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으니, 이 몸 하나로 권세가들 사이를 떠돌 수밖에 없었어요. 헌데 이제는 사촌 오라버니께서 황족이시고, 천하를 거느리는 섭정왕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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