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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1화

“이 바람이… 진국 안에서만 불어서는 안 된다.”연풍은 단박에 뜻을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물러났다.연기준은 요 며칠 몹시 바빴다. 집 안에 머물러 있어도 손을 놓는 법이 없었고 잠깐의 틈도 없이 공무를 처리했다.저녁 무렵, 연기준이 사람을 보내 전갈을 전했다.“왕비 마마, 왕야께서 급한 일이 생겨 잠시 나가셨습니다. 먼저 식사하시고 기다리지 말라 하셨습니다.”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맹은영과 진방옥, 그리고 꼬막이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오늘은 내가 부엌에 특별히 한 상 더 차리라 했네. 한번 맛을 보시게. 장군부 요리사는 솜씨가 좋거든.”맹은영은 먹으면서 연신 감탄했다. 음식은 물론이고 접시 위에 얹힌 꽃 장식까지도 빠짐없이 칭찬했다.옆에 서 있던 요리사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맹은영이 마음에 들어 한다면 매일 와도 좋다고, 매일같이 손수 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덧붙였다.맹은영은 곧장 장담했다.“당연하지. 백 년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거야.”그 말에 요리사의 웃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야말로 기분을 한껏 치켜세워주는 말들이었다.꼬막이도 맹은영을 따라 들뜬 얼굴로 밥을 먹었다. 서인경이 떠먹여줄 필요도 없을 만큼 신이 나 있었다.반면 진방옥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가 있었다.그는 입맛을 다시며 잠시 생각하다가 의자를 끌고 서인경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연기준은 뭐가 그렇게 바쁜 겁니까?”서인경은 태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그의 공무니 나는 묻지 않네.”진방옥이 눈을 흘겼다.“어이구, 현모양처 흉내까지 내시네요?”서인경이 곧장 반박했다.“흉내라니? 난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나?”진방옥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의 눈빛은 분명 말했다. 서인경과 ‘현모양처’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농담은 그만하고, 연기준한테 좀 말해보십시오. 저한테 한직 하나만 맡겨주면 안 되겠냐고. 권세나 지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 혼자 먹고살 만큼의 녹봉이면 됩니다.”뒷문을 찾겠다는 이야기였다.서인경은 조용히 반찬을 집어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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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저녁 식사가 끝나고 어둠이 사방에서 내려앉았다. 연기준은 돌아오지 않았고 두 사람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맹은영은 꼬막이를 품에 안은 채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꾸벅꾸벅 떨며 입으로는 웅얼웅얼 자장가를 흥얼거렸다.꼬막이가 호응을 안 해준다고 하기엔, 두 눈을 반짝이며 유심히 듣고 있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잘 맞춰준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게, 이건 분명 자장가인데 아이는 낮보다 더 또렷해져 있었다.꼬막이를 재우려던 맹은영이 오히려 먼저 잠들 기세였다.한편, 촛불 아래에서는 서인경과 진방옥이 머리를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진방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이 방법, 진짜 되는 거 맞습니까?”서인경은 어딘가 체념이 섞인 자신감으로 말했다.“지금 그대에게 다른 길이 있긴 한가?”진방옥은 잠시 곱씹다가 이를 악물었다.“그래요. 당신이 같은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믿고 일단 한 번 걸어볼게요.”서인경은 턱을 괴고 슬쩍 말을 돌렸다.“근데 혹시 안 되더라도,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정으로 나를 원망하지는 마시게.”진방옥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지요. 스승은 문까지 데려다줄 뿐, 수련은 각자 몫입니다. 잘되면 당신 공이고, 망하면 제가 운이 없는 거지요.”서인경은 엄지를 치켜세웠다.“좋군. 각오가 됐네. 역시 21세기 모범청년답네.”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에 진방옥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말하면 다 눈물이지요. 저는 넘어오기 직전에 모범 기념행사에서 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장 조명이 ‘쾅’ 하고 떨어졌지 뭡니까? 눈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진 가에 와 있더라니까요. 제 트로피는요? 제 상금 이천만 원은요?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다 빠져나갔습니다. 멀쩡한 행사에서 시설 점검도 안 하다니! 제가 만약 살아 있었으면 주최 측을 다 털어서 거덜 냈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서인경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모범 행사? 어디서?”진방옥은 자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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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고개를 들자 연기준이 서 있었다. 서인경의 눈이 순식간에 휘어졌다.“돌아왔어요?”연기준은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두 사람 사이에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진방옥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옆으로 밀려났다.“거기에도 자리 있잖아요. 왜 굳이 우리 사이에 끼어 앉는 겁니까?”연기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여 서인경을 바라봤다.“무슨 얘기 중이었느냐?”진방옥의 투덜거림은 이미 서인경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연기준만이 가득했다.“진로 상담이요.”연기준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뜻은 알아들은 듯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담담하게 진방옥을 한 번 훑어보았다.“끝났느냐? 끝났으면 돌아가거라.”진방옥은 못마땅한 얼굴로 일어섰다.“아까 말 취소. 당신 남자는 이 시대에서 제일 속 좁은 남자입니다.”그는 중얼거리듯 내뱉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인경은 웃음을 터뜨렸다.부모의 목소리를 들은 꼬막이는 맹은영의 자장가에서 관심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이모, 집에 가세요.”“응?”맹은영은 몽롱한 눈을 간신히 떴다. 고개를 들어 연기준이 돌아온 걸 확인하고는 꼬막이를 침상 머리맡에 내려놓았다.“아, 그럼 너 혼자 자. 이모는 간다.”맹은영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비틀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턱에서 넘어질 뻔하자 서인경이 밖을 향해 불렀다.“연풍.”곧 대답이 들려왔다.“예. 소인은 맹 아가씨를 무사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오직 세 식구만이 남았다.연기준은 자장가를 듣고 오히려 더 또렷해진 꼬막이를 작은 침상에 눕혔다.“혼자 잘 수 있겠느냐?”꼬막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당연하죠! 왜, 누가 재워줘야 합니까?”꼬막이는 제법 어른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줬습니다. 그래서 이모가 심심할까 봐 제가 같이 있어준 겁니다.”그 말을 맹은영이 들었더라면 얼마나 감동했을까.한편, 연기준은 꼬막이에게 이불을 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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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다음 날 아침, 연기준은 예전처럼 자줏빛 조복을 입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연청빛 장삼으로 갈아입고 서 있었는데 길게 뻗은 몸은 푸른 소나무처럼 곧고 단정했다.단정한 눈매와 기품 있는 이목구비.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조금 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군주가 될 것이다.솔직히 말해 서인경은 꽤나 단순하게도 그의 외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저 몸선이 궁궐로 들어가 용상에 앉고 위엄 어린 황룡포를 걸치면 얼마나 눈부시게 잘 어울릴까.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멋대로 그려보며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그 무렵 꼬막이도 잠에서 깼다.연기준은 침상 곁에 서서 울지도 보채지도 않고 혼자 옷을 입는 아이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지를 잘못 꿰어 한쪽 다리에 두 다리를 넣어버렸는데도 그는 도와줄 기색 하나 없이 냉정한 눈빛으로 지켜보기만 했다.“치마가 입고 싶다면 솔직히 말하거라. 내 녹봉으로 너 하나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 굳이 바짓가랑이를 치마처럼 쓸 필요는 없다.”꼬막이는 동작을 멈추고 제 다리를 내려다보더니 슬그머니 한쪽을 빼내 다른 쪽에 다시 넣었다.“저보고 멍청하다고 하고 싶으시면 그냥 그렇게 말씀하세요. 제 정신은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거든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푸흐.서인경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부자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바지도 제대로 못 입은 꼬막이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고 그사이 연기준은 성큼 다가와 침상 곁에 섰다.“일어났느냐?”서인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매를 잡아당기는 작은 손이 느껴졌다. 바지를 들고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꼬막이가 침상 위로 기어 올라왔다.“어머니께서 입혀주시면 안 됩니까?”저렇게 애교를 부리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아침 일찍 연기준은 밖으로 불려 나갔다. 봉한설과 평이가 들어와 서인경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단장해 주었다.서인경은 두 사람을 가만히 살폈다. 봉한설은 얼굴이 한층 둥글어졌고 평이는 떠나기 전보다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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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거물 친구 하나 두니 진짜 속이 다 시원하네요! 나중에 제가 돈 벌면 당신들이 끌어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연기준이 담담히 말했다.“은혜를 운운할 필요는 없다. 훗날 황상(皇商)을 제대로 일으켜 세우고 우리 진국의 경제를 굳건히 지켜낸다면 그게 가장 큰 보답이다.”말이 떨어지자 서인경과 진방옥은 동시에 멍해졌다.진방옥이 서인경을 노려봤다.“밖에는 말하지 말라더니 왕비 마마께서 먼저 얘기한 겁니까?”서인경은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맹세해. 난 아무 말도 안 했네.”“그럼 저 사람이 어떻게 압니까?”연기준이 대신 답했다.“너는 벼슬길에 뜻이 없고 전쟁도 모르지. 손재주가 아예 없는 건 아니나, 그렇다고 대단하지도 않다. 그러니 장사 말고 다른 길이 있겠느냐? 추측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진방옥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그렇게 읽히기 쉬운 사람이었나? 앞으로는 연기준처럼 늘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함부로 짐작조차 못 하게 살아야 하나? 혼자 씩씩거리며 생각하는데 연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 가는 벼슬길에 뜻이 없다. 집안 장사는 이미 정점에 닿아 더 키울 수도 없지. 단 씨 가문이 무너진 뒤로 황실과 이어지던 거래도 이리저리 꿰맞추는 형편이라, 흐름이 끊긴 지 오래다. 이제는 믿을 만한 사람을 세워 정리할 때가 됐다.”그는 시선을 들어 진방옥을 보았다.“나는 너를 믿는다. 다만 그 믿음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그 말은 어젯밤 서인경이 했던 이야기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녀가 진방옥에게 권한 길 역시 장사였다.단 씨 가문에 남은, 문 닫기 직전의 상점들을 사들여 다시 일으키고 그 뒤에서 연기준이 조용히 힘을 보태면 두각을 드러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예전 단 씨가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국고를 좌우하는 황상으로 성장하는 데 걸린 시간도 고작 두 해였다.연기준의 지지가 더해지자 진방옥의 눈빛이 한층 또렷해졌다.그는 벌떡 일어섰다.“천천히들 먹으세요. 전 가서 계산 좀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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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그제야 서인경은 문득 깨달았다. 연기준이 조금씩,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간관계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그녀와 진방옥은 같은 시대에서 건너온 ‘동향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유대와 신뢰는 이제 그녀와의 관계에 못지않았다.처음에 예정훈과 먼저 친구가 된 건 분명 그녀였다. 그런데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는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생긴 듯했다.그럼에도 연기준이 아직 손대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맹은영과 일불락.연기준은 한 번도 먼저 묻지 않았다. 막북에서 설산으로 향했던 그 여정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일불락의 막대한 재산과 숨겨진 비밀에 대해 호기심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 못지않게 일불락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원주의 기억 속, 전생에서는 분명 연기준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모두 죽였다. 그는 하늘 아래 함께 설 수 없는 원수여야 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연기준은 서 씨 가문을 무사히 물러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 하나 잃지 않게 만들었다. 지금은 할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적어도 모두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결말이었다.그는 서인경의 신분을 숨기는 데 힘을 보탰고 심지어 연 씨 황실과 맞서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전생에는 희태비와 열셋 째 왕야의 비밀을 몰랐고 일불락이라는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어족, 지하흑시, 금족, 목족, 화족, 그 어떤 것도. 이번 생의 흐름은 전생과 완전히 달랐다.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녀가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연기준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마음을 바꾼 걸까?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서인경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그럴 리가.연기준은 아무리 봐도 감정에 휘둘릴 사람은 아니었다.마차 안은 한동안 고요했다.연기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서인경은 한순간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가 또 한순간은 고개를 흔들며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이냐?”서인경이 고개를 들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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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열셋 째 황자가 가볍게 기침을 두어 번 했다.“우연히 감기에 걸렸을 뿐이지 큰 병은 아닙니다. 아홉 째 황숙께서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연기준은 태연하게 말했다.“감기는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커질 수도 있지. 너는 몸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태의가 직접 살펴봐야 마음이 놓이겠구나.”그러더니 열셋 째 황자가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연풍을 불렀다.“내 기억에 태의원에 새로 들어온 도 태의가 있지. 감기 치료에 능하다고 들었다. 내 패를 가지고 가서 반드시 도 태의가 열셋 째 황자를 직접 진맥하게 하거라.”“아닙니다, 황숙. 제가 찾아온 건 병 때문이 아니라...”“연풍. 도 태의에게 거듭 일러라. 열셋 째 황자는 그간 황릉에서 적잖은 고생을 했다고. 몸에 묵은 병이 많아 작은 감기에도 이리 위중해진 것이니 위아래 빠짐없이 전부 살펴보고 불편한 곳은 모두 조리하라 일러라. 만일 열셋 째 황자의 몸을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그 태의 자리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예!”연풍은 명을 받자마자 열셋 째 황자가 거절할 새도 없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열셋 째 황자, 옥체가 우선입니다. 소인이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아니다, 난 돌아가지 않는다! 아홉 째 황숙, 저와 약속한 일 잊으셨습니까? 우린 동맹이었습니다. 저를 우롱하시면 안 됩니다!”호위병들이 열셋 째 황자를 막아서며 더 이상 마차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 순간, 열셋 째 황자의 가슴에 짙은 위기감이 밀려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했던 용상이 눈앞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그의 간절한 시선 속에서 연기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본왕이 너에게 무엇을 약속했지?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열셋 째 황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 했다.“분명 약속했습니다! 제가 부황과 대황자를 끌어내리면 저를 새 황제로 세워주겠다고! 이렇게 말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황자들 중에 대임을 맡을 수 있는 이는 저뿐입니다!”주변에서 지켜보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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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연기준은 서인경의 손을 제 손안에 감싸 쥐고 다정하게 한 번 꼭 쥐었다.“콩이. 네가 호청에게 붙여준 제자, 잊었느냐?”서인경이 어찌 잊겠는가? 그녀가 후궁에 갇혀 있던 시절, 콩이가 전해주던 소식 덕에 버텨낼 수 있었는데.“이제 겨우 열 살이에요. 그런 아이를 태의로 세운다고요? 태의원에 있는 노인네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겠어요?”연기준은 담담히 말했다.“태의 자격을 쥐여주는 건 내 능력이다. 태의원에 계속 남을 수 있을지는 그 아이의 실력에 달렸고.”자신의 눈과 귀를 심어두겠다는 뜻이었다. 그 의도를 읽어내자 서인경은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콩이는 배우기를 좋아했고 욕심도 있었다. 훗날 태의원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다면 궁중 의료와 천하의 명의들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연기준의 큰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천천히 쥐고 있었다.“그 아이는 네 사람이다. 태의원 그 늙은 자들이 인정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네게 달렸다.”서인경은 곧바로 뜻을 알아들었다.“그럼 앞으로 매일 궁에 들어와 제 맥을 보게 하죠.”겉으로 보기엔 진국의 태의원은 황제와 후궁들의 맥을 짚고 병을 보는 곳이었다. 실제로 가장 많이 다루는 일은 후궁들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또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였다.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실력과 처세가 없이는 황실 주인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자리였다.과거 태의원은 파벌이 뒤섞여 있었고 인원 배치와 약재 조달 같은 중요한 사안도 어지러웠다. 그러니 이제 누군가 제대로 정리할 사람이 필요했다.마침 서인경은 입궁 후 무료할까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일이 저절로 찾아온 셈이었다.마차는 천천히 궁문을 지나 금란전으로 향했다.그 시각, 금란전 안은 이미 소란으로 가득했다.무장들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장이라도 창을 들고 전장으로 달려 나갈 기세였다. 태상황 시절, 진국은 너무 오래 억눌려 있었다. 이제는 되갚아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반면 문관들은 전쟁을 강하게 반대했다. 화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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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본왕의 명을 전하거라. 모든 무장은 평소처럼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무를 처리한다. 그 누구도 다시는 출병이나 개전 이야기를 꺼내지 말거라. 내가 살아 있는 한, 야랑국과 진국의 국경은 반드시 평안하다. 감히 또다시 전쟁을 입에 올리는 자는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아침에 이 명이 연기준의 뜻이라 전해졌을 때만 해도 무장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입으로 직접 들은 이상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무장들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연기준은 대체 무엇을 믿고 두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는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반면, 문관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연기준 앞에서 처음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역시 상왕이십니다. 싸움밖에 모르는 무식한 장수들보다 훨씬 현명하시군요!”말을 꺼낸 이는 하선준의 장남, 하문경이었다.대황자가 죽은 뒤, 하선준은 하 가의 영화가 끝났음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새 황제가 되든 한때 대황자를 전폭적으로 보좌했던 자신을 중용할 리 없었다.노년에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이미 맹국공과 서왕에게 사직서를 올린 상태였다. 지금 조정에 남아 있는 하 가는 장남 하문경뿐이었다.하지만 하문경은 눈치가 부족했다. 아버지가 물러난 이상, 자신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 백관을 휘두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무장들이 기세를 잃은 듯 보이자 그는 의기양양해졌다.“상왕, 그럼 이제 어느 공주를 야랑국에 보내 화친할지 정하면 되겠습니다.”연기준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스쳤다.하문경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분명 연기준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미소는 어쩐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상왕, 제가 무슨 말을 잘못했습니까?”연기준이 낮게 웃었다.“지금 조정의 대국은 맹국공과 서왕께서 맡고 계신다. 화친을 한다 해도 예부에서 처리할 일이지. 헌데 너는 누구냐? 언제부터 본왕에게 일을 가르칠 자격이 생겼느냐?”하문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상왕, 소인은 하문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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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대전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연기준은 등장하자마자 먼저 무장들의 출병 의지를 눌러버렸고 이어서 하문경이라는 어리석은 자를 본보기 삼아 문관들까지 단숨에 제압했다.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도무지 그의 의도를 가늠하지 못했다.오직 맹국공과 서왕만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가를 읽은 듯한, 묵직한 눈빛이었다.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연기준이 다시 말했다.“맹경운, 명을 받들라.”군중 속에 묻혀 있던 맹경운이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신, 받들겠습니다!”“본왕은 그대를 흠차대신으로 봉한다. 정예 병사 삼만을 내줄 테니 요동 변경으로 가라. 지난 십오 년간 우리 동쪽 경계에서 이어진 흉년의 진상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만일 그 배후가 요동이라면 군을 이끌고 요동을 치되 요동 황제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도록 하거라.”맹경운이 무릎을 꿇었다.“명 받들겠습니다. 다만 상왕께 여쭙고 싶습니다. 만일 진실로 요동의 소행이라면 그 책임을 어디까지 물어야 하겠습니까?”연기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우리 진국 변경 백성들이 십오 년간 잃은 농작과 교역 수익을 요동에서 열 배로 갚게 하거라.”“예! 결코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맹경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섰다. 그의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대신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연기준은 이미 또 다른 전선을 열어버린 것이다.“상왕! 우리와 요동은 오랫동안 혼인으로 맺어진 나라입니다. 두 나라의 관계도 원만했습니다. 함부로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됩니다! 백성이 고통받습니다!”연기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스쳤다.“지난 이십 년간, 우리 진국은 스스로 요동과 우호라 여겼습니다. 허나 변경의 백성들이 단 하루라도 편안한 날을 보낸 적이 있습니까? 본왕의 판단이 그르다 여긴다면 그대의 혀로 요동과 우리 사이의 빚부터 해결하고 오세요.”그 대신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금수 대장공주가 내놓았던 장부가 아직도 생생했다.그 액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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