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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981 - Chapter 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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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1화

어느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서인경의 머릿속을 강하게 울렸다.그녀는 멍하니 연기준을 바라보았다.“만약… 열셋 째 황숙의 모친께서 모든 것을 계획한 이유가 목족의 혈맥을 남기기 위함이었다면, 그리고 열셋 째 황숙께거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째서 끝내 혼인도 하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그에게는 목족의 사명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더 컸던 걸까요?”연기준의 손이 영패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아니면 이미 목족의 혈맥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과의 사이에서.”서인경의 목에 걸려 있던 말이 그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설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설산, 일불락의 옛 터에는 각 부족이 남긴 결계가 존재한다. 그 안에는 종족을 상징하는 신물이 보존되어 있고 오직 후손의 피로만 열 수 있었다.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은 분명하다. 희태비는 금족의 후예고 연도현은 목족의 후예다.만약 연기준의 피가 금족과 목족의 결계를 동시에 열 수 있다면... 그는 진정 연도현과 희태비의 아이가 된다.금족과 목족, 두 혈맥을 함께 잇는 존재.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서인경조차 현실감이 흐려졌다.기억 속의 희태비는 단아하고 절제된 여인이었고 연도현은 온화하고 겸허한 군자였다.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이 엄격한 세상의 규율을 넘어 아무도 모르게 목족과 금족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았던 것일까?그 순간, 서인경의 눈에 비친 연기준은 두 부족의 사명을 짊어진 존재처럼 보였다. 머리 위에 빛이라도 도는 것 같았다.연기준은 영패에 정신이 쏠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손끝으로 글자를 더듬으며 물었다.“이건… 어디서 났느냐?”“서왕부에서요. 방금 서왕비께서 주셨습니다.”“네가 서왕부에 갔다고?”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서왕비가 널 만났다고?”뜻밖의 반응에 서인경이 잠시 멈칫했다.“만났습니다. 왜요?”연기준의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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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꼬막이는 이제 열 달이 되었다. 말하는 것도, 걷는 것도 모두 또래보다 빨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 살 반쯤 된 아이로 착각할 만큼 야무졌다. 이제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발에 바람이 붙은 듯 앞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마차에서 내려 낯선 마당, 낯선 사람들 앞에 섰지만 꼬막이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들은 말 하나만 믿고 있었다. 두 달이나 떨어져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안에 있다는 것.평이의 품에 안겨 앞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몸을 비틀어 내려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아버지, 어머니!”앳된 목소리가 울렸다.늙은 관사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터졌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도 앞사람들을 향해 외쳤다.“어서, 세자께 길을 안내하거라! 주원은 바로 앞이다!”꼬막이는 작은 발로 종종걸음을 치며 뛰었다. 하인들은 벽에 바짝 붙어 손을 뻗어 길을 가리켰다.“세자, 오른쪽입니다.”“계단 조심하세요.”“천천히 쭉 앞으로 가십시오. 넘어지면 안 됩니다.”앞마당과 뒷마당이 한순간에 뒤집혔다. 모두 아이가 넘어질까 마음을 졸였다. 다들 앞에서 이끌고 옆에서 감싸며 따라붙었다.봉한설과 평이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그 소리를 들은 서인경은 재빨리 침전에서 뛰쳐나왔다. 날개라도 돋친 듯 걸음이 빨랐다.몇 번이나 연기준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서두르지 말거라. 곧 본다.”그러면서 그는 가볍게 몸을 날려 긴 회랑을 단숨에 넘어섰다.회랑 끝에서 방향을 틀던 순간, 정면에서 작은 덩어리 하나가 와락 부딪혀 왔다.꼬막이의 이마가 서인경의 종아리에 닿았다. 작은 몸이 반동에 뒤로 넘어갈 듯 흔들렸다. 엉덩방아를 찧을 줄 알고 눈을 질끈 감는 찰나, 커다란 손이 아이를 붙잡았다.다음 순간, 꼬막이는 허공으로 들려 올라 단단한 팔 안에 안겼다. 연기준이 그를 단숨에 끌어올린 것이다.설산에서는 행복했다. 지하흑시의 사람들도, 암위들도 모두 잘 대해 주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다시 마주한 부모의 얼굴 앞에서 꼬막이의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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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내가 안고 있을게. 할 말은 방에 가서 하자.”눈이 퉁퉁 부은 꼬막이가 제 소매로 서인경의 눈물을 닦아 주며 따라 말했다.“울지 마세요. 방에 가서 얘기해요.”서인경은 간신히 눈물을 눌러 삼켰다.연기준은 한 팔에 꼬막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서인경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방으로 향했다.세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평이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며 울음을 터뜨렸다.“왕비 마마와 왕야, 그리고 세자… 정말 너무 고생했어요!”봉한설은 그보다는 담담했지만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두 달 떨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큰 고생이라고.”평이는 눈물도 닦지 못한 채, 봉한설을 노려보았다.“무슨 소리야? 아직 돌도 안 된 아이가 부모랑 두 달이나 떨어져 설산 골짜기에서 지냈다는데, 그게 안 힘들겠어? 너,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해?”봉한설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인경과 꼬막이의 더 힘든 날들이 아직 앞에 남아 있다는 것을.방 안에는 이미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꼬막이가 들어오자마자 곧장 들여왔다.서인경은 아이의 옷을 벗기다가 그제야 그의 몸을 제대로 보았다.키는 조금 더 자랐지만 살이 오르지 않아 배 쪽 갈비뼈가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서인경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혹시 배고팠던 것이냐?”여덟 달에 젖을 뗐으니 영양이 충분했을 리 없다고 그녀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 버렸다.꼬막이는 고개를 숙여 자기 갈비뼈를 만져 보았다.설산을 떠나기 전, 설장로가 차려 주던 산짐승 한 상이 떠올랐다.그때마다 설장로는 설산 짐승의 씨가 마르겠다며 그더러 빨리 떠나라고 투덜댔었다. 그걸 떠올리니 엄마의 눈물 앞에서 괜히 미안해졌다.“배고팠던 거 아니예요. 설장로께서는 제가 먹는 만큼 소모도 많이 한다고 하셨습니다.”꼬막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매일같이 눈밭을 뛰어다니며 눈싸움하던 이야기였지만 서인경은 설산에서 추워서 열량이 빨리 소모된 거라 여겼다. 그녀는 마음이 또 저릿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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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평이와 봉한설이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꼬막이는 이미 살코기 죽 한 그릇을 비우고 난 뒤였다.고소한 향이 방 안에 퍼져 있었다. 설장로가 끓여 주던 산짐승 죽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서인경은 믿기지 않았다. 열 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른이 먹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다니. 꼬막이는 그녀가 부엌에 따로 준비시킨 이유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음이 놓이지 않던 서인경은 아이의 입을 벌려 들여다보았다.“열 달인데… 벌써 이가 다 난 거야?”그 말이 떨어지자 평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다 났어요. 설산에 도착하자마자 쑥쑥 나더니 금방 다 자랐어요. 예전에 제가 들은 게 있는데 아이들은 보통 두세 살은 되어야 이가 다 난다더라고요. 헌데 우리 세자는 길에서 죽만 먹더니 설산에 가자마자 이가 쫙 나면서 저희처럼 만두를 집어 먹더라고요.”서인경의 눈빛이 가늘어졌다.뭔가 이상했다.그녀는 꼬막이를 품에 안고 다시 입을 벌려 이를 하나하나 살폈다.“호청 의원도 불러 와. 이런 경우 본 적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이가 이렇게 빨리 나는 게 혹시 병은 아닌지…”꼬막이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 품에 눕혀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어머니, 괜찮습니다. 병 아니예요.”봉한설도 거들었다.“설장로께서 이미 다 보셨습니다. 원래 설산 아이들은 바깥 아이들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했어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설장로께서는 세자보다 더 빨랐으니까요. 그분은 다섯 달 만에 혼자 밥을 먹었다고 했어요. 그동안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세자를 너무 곱게 길러 자라기를 게을리한 거랍니다.”그 말에 서인경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연기준과 눈이 마주쳤다.“책에도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연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있었다. 아이에겐 아이만의 성장 법칙이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다만, 몇 달간은 밖에 데리고 나가는 것을 자제하거라.”서인경은 곧장 뜻을 알아차렸다.꼬막이의 성장 속도는 진국의 아이들과 달랐다. 아이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곧장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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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서인경의 시선은 온통 꼬막이에게 가 있었다. 연기준의 기색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다.“일 있으면 다녀오십시오. 저는 혼자서도 아이를 돌볼 수 있습니다.”연기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젓가락을 들어 서인경의 그릇에 육즙 가득한 만두 하나를 올려 주었다.“괜찮다. 연풍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서인경은 더 묻지 않았다.점심을 마친 뒤, 서인경은 꼬막이와 방 안에서 한동안 놀아 주었다. 꼬막이는 아직 졸린 기색이 없었지만 서인경 쪽이 먼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어젯밤 연기준에게 늦도록 붙잡혀 있던 탓에 하루 종일 몸이 부서질 듯 피곤했다. 그래도 아이가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한없이 놓였다.마음이 느슨해지자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꼬막이는 그런 서인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가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그러자 서인경이 아이를 끌어안으며 물었다.“왜 그러느냐?”꼬막이는 침상을 가리켰다.“올라가서 주무세요.”서인경은 아이가 낮잠을 자려는 줄 알고 겉옷을 벗겨 품에 안은 채 침상에 누웠다.작은 몸을 안고 있으니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그 안도감에 서인경은 금세 잠들었다.연기준이 방에 들어왔을 때, 침상 위에는 모자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안쪽의 작은 아이는 눈을 말똥히 뜬 채 전혀 잠들 기색이 없어 보였다.연기준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서인경의 이불을 다시 덮어 준 뒤 꼬막이를 품에 안고 침실을 나섰다.서재로 돌아와 그는 아이를 책상 위에 앉혔다. 마치 한 틀에서 찍어낸 듯 닮은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큰 눈과 작은 눈이 마주치자 연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낮잠을 자지 않는 것이냐?”꼬막이는 서인경 앞에서 보이던 아이 같은 모습과 달랐다. 말투와 표정이 어딘지 어른스러웠다.“기뻐서 잠이 안 옵니다. 눈 뜨면 어머니가 또 사라질까 봐 걱정돼요.”연기준의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설산에서도 그랬느냐?”꼬막이는 잠시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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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그게 언제 일어난 일인가?”맹은영은 꼬막이를 품에 안고 과자를 하나씩 먹여주며 바깥에서 들은 소문을 신나게 풀어놓았다.“한 시진 전이요. 우리 셋째 오라버니께서 말해줬는데 대황자부에 자객이 들었답니다. 단칼에 목을 베었다고 하더군요!”서인경은 순간 말을 잃었다. 단칼에 숨통을 끊다니. 그건 평범한 자객의 솜씨가 아니었다. 이미 황위와는 인연이 끊긴 대황자를 누가 노린 걸까?맹은영은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밖에서는 다들 그러더라고요. 지금 그를 제일 원망하는 쪽은 야랑국 단 씨 집안일 거라고. 예정임을 죽인 게 바로 그잖아요. 국구가 되겠다는 단 씨의 꿈도 자연히 끊어져 버렸습니다. 대황자가 국경으로 가지 않고 머뭇거리니 기다리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한 번에 목숨을 끊어버린 거라나.”서인경은 잠시 침묵했다.“대황자부에서 다른 피해는 없었는가?”맹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없습니다. 죽은 건 대황자 한 사람뿐이예요. 싸운 흔적도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 분명 고수일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치기는커녕 놀라지도 않았대요. 하인들이 시신을 발견했을 땐 이미 몸이 식어 있었고,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답니다.”그제야 서인경은 묘한 위화감을 깨달았다.정말 야랑국 단 씨의 복수였다면 그렇게 편하게 죽였을까?“지금 대황자부는 어떤가?”“진가이는 놀라 유산했다고 합니다. 단여월은 울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단 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대황자부엔 일을 챙길 사람도 없대요. 황태후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선준 집안에 도움을 청했는데 하선준 쪽은 문을 닫고 아예 궁에서 온 사람도 안 만났다고 합니다. 이번에 완전히 선을 그은 거지요.”대황자는 끝내 하선준 가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요 며칠 황태후가 후궁에서 벌인 일도 여러 태비들의 원성을 샀으니 앞날이 순탄할 리 없었다.맹은영은 황태후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 모자가 사람을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궁사점을 지워버리며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일도 없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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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며칠 전 왕비 마마께서 돌아왔다는 소식 듣고 선물 하나 만들어놨습니다.”진방옥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충천포를 꺼냈다. 예전에 서인경에게 만들어주었던 물건인데 이번엔 꼬막이를 놀려주려는 모양이었다.세상 구경을 제법 한 아이였지만 이런 건 처음 보았던 터라 꼬막이의 눈이 단번에 반짝였다.그 모습에 맹은영과 둘이서 한참을 깔깔 웃으며 정신없이 놀려댔다.서인경은 꼬막이를 두 사람에게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에서는 연기준이 연풍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인경이 들어서자 연풍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연기준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꼬막이는?”서인경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맹은영이랑 진방옥과 놀고 있습니다. 유모들도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연기준의 얼굴에는 숨기지도 못할 싫은 기색이 떠올랐다.“걱정할 건 없지. 다만 우리 아들, 그 둘이랑 너무 오래 놀게 하지 말거라. 지능에 영향 갈까 봐 무섭다.”서인경은 뜻밖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한 명은 이모고, 한 명은 삼촌인데 누구랑도 못 놀게 할 순 없잖아요.”연기준은 무심하게 말했다.“놀고 싶으면 둘이 애를 낳아서 자기들끼리 놀라 그래.”서인경은 웃으며 그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내렸다.“됐습니다, 그만 삐지세요. 우리 아들 머리는 당신을 닮았으니 누가 건드려도 안 흔들릴 겁니다.”괜히 투덜거리던 얼굴이 금세 풀렸다.서인경은 그가 입꼬리를 올린 틈을 타 물었다.“대황자랑 예정임 일, 당신이 한 겁니까?”순간 연기준의 미소가 굳었다. 찰나였지만, 그녀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당신이 한 거지요?”연기준은 숨기지 않았다.“그래.”서인경은 조용히 물었다.“왜요? 대황자는 이미 황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예정임은 돌아가지 못하면 야랑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연기준은 태연했다.“예정훈이 있으니 그럴 일은 없다.”“예정훈은 실권도 없는 태자입니다. 단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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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그 그림 속에는 노래하는 기녀들과 춤추는 무희들이 있었다. 얇고 노출이 심한 무복을 입고 몸을 흔드는 모습. 21세기라면 대수롭지 않을 장면이었으나 이 시대에서는 풍속을 어지럽히는 음란한 물건이자 밖으로 드러내선 안 될 치욕이었다.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서인경의 속을 뒤집어놓은 건 따로 있었다. 춤추는 모든 무희의 얼굴이 전부 그녀의 얼굴이었다. 마치 현대의 AI 얼굴 합성처럼.방금 죽은 대황자와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린 예정임의 일을 떠올리자 왜 그런 변고가 일어났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위장이 뒤틀리는 듯 속이 메스꺼워졌다.연풍은 서인경이 들이닥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급히 그림을 주워 화로 속에 밀어 넣었다. 새로 불길이 붙으며 불꽃이 치솟았다. 주변 공기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연풍의 등골은 얼음장 같았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건, 이런 일로 마마의 눈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셔서였습니다.”그제야 서인경은 조금 전 연기준의 얼굴에 스쳤던 그 표정을 이해했다.“누가 그린 것이냐?”연풍은 마른침을 삼켰다.“예정임입니다. 예정임이 죽은 뒤 대황자가 몇 점을 가져갔습니다.”그러니까 그런 더러운 마음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었던 셈이었다.서인경은 현대에서 온 사람이다. 고대 여인처럼 정절과 명예에 매달리는 사고방식은 없다. 누군가의 음습한 욕망 속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엔 역겨웠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것이다. 남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정도 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세상에 나서지도 못할 것이다.생각이 정리되자 마음속의 먹구름도 천천히 흩어졌다.“알았다. 내가 여기 온 건… 그에게 말하지 말거라.”연기준이 알리지 않으려 했다면 그녀도 모르는 척해주면 된다.서인경이 연풍의 뜰을 나서자, 앞에서 아이 하나가 달려왔다.아이의 이름은 모창. 예전에 서가군에서 훈련을 받았던 아이였다.키가 훌쩍 자라 제법 어른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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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원래 그렇잖아요. 애 엄마인 왕비 마마께서 말해 보십시오. 제가 맞지 않습니까?”진방옥이 억울하다는 듯 따졌다.그러자 맹은영이 얼른 서인경을 감싸 안았다.“무슨 애 엄마입니까? 말도 참 못되게 하십니다! 그런 호칭은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거든요? 들으면 꼭 부부 사이 같잖아요.”진방옥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당사자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당신이 왜 옆에서 난리입니까?”“그만, 그만!”서인경이 둘 사이에 서서 손을 내저었다.“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거 보니 둘이 진짜 뭐 있는 게 아닌가 의심 가는군.”“저 사람이랑요? 웃기지 마십시오!”“됐거든요!”두 사람은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묘하게도 호흡은 완벽히 맞았다.서인경은 그 부정 속에서 두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무언가를 또렷이 보았다.진방옥은 현대에서 왔기에 여자가 반드시 수절의 증표를 지켜야 한다는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니 맹은영의 직선적이고 과감한 태도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서인경은 두 사람이 잘되면 오히려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감정이라는 건 남이 대신 밀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꼬막이는 잠들었고 둘은 서로 보기만 해도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 각자 떨어졌다.맹은영은 주방에서 통양을 굽는다는 소리에 신이 나 기름 바르러 간다며 달려갔고 진방옥은 촌티 난다는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다시 쭈그려 앉아 자신의 충천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그의 말에 따르면, 이건 재미는 있지만 어른이 없으면 아이가 가지고 놀기엔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다치지 않는 충천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어린아이도 마음 놓고 들고 놀 수 있게 말이다.진방옥은 밤이 되면 경성의 아이들 모두가 충천포를 하나씩 들고 어둠 속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표정을 본 서인경은 자연스레 미소가 그려졌다.“만들어 보시게. 완성되면 내가 독점 유통을 맡아줄 테니. 판매 걱정은 하지 말고 자네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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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진방옥은 맹은영이 들고 온 소식에 기겁하며 무심코 외쳤다.“게이네!”맹은영은 처음 듣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게이? 뭐가 게이입니까? 먹는 게를 말하는 겁니까?”그러자 서인경이 대신 설명했다.“이 사람 고향에선 남자끼리는 게이라고 하고 여자끼리는 레즈라고 부르네. 워낙 흔해서 별로 놀라지도 않지.”맹은영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어머? 당신 고향이 천주라면서요? 경성이랑 멀지도 않은데 풍속이 그렇게 개방적이란 말입니까? 설마 당신도…?”진방옥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능숙하게 손끝을 세워 난초손을 만들고 목소리를 가늘게 흉내 냈다.“이제 다 들켰으니 숨기지 않을게요. 같은 자매끼리 예의를 좀 갖춰 주세요.”맹은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은 듯 부르르 떨더니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꺼지십시오!”두 사람의 극단적인 대비에 서인경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장난이 끝나자 진방옥도 진지해졌다.“원래 자유 연애라는 것은 성별 가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선입견도 없고요. 헌데 왜인지 모르겠는데, 대황자랑 예정임은 진짜 못 보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요. 둘 다 후원에 처첩이 줄줄이 있는데, 그 여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역겨워 하지 않겠습니까?”그러자 맹은영이 맞장구쳤다.“맞습니다. 그런 둘이 나라의 군주가 되겠다고요? 제정신입니까? 그러다 두 나라 백성들 성향까지 다 뒤집히면 어쩌려고요. 애도 안 낳고 다들 저러고 있다면 다른 나라가 쳐들어 오기 전에 멸종될 겁니다.”평소 맹은영과 한 편에 서는 일이 드문 진방옥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요. 좋아하면 둘이 산속에 들어가 문 닫고 살지, 왜 두 나라를 끌어들여 망치려 하는 겁니까? 게다가 후원 여자들은 또 얼마나 불쌍한지...”두 사람조차 이 소문을 의심 없이 믿고 있으니 하물며 경성의 구경꾼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불과 한 시진 만에 소문은 경성 전역으로 번졌다.대황자 연강헌과 야랑국 팔황자 예정임이 오래전부터 부정한 관계였다는 이야기.서로에게만 만족하지 못해 늘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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