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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1화

눈을 피하기 위해, 꼬막이는 막 성주의 큰 가죽 상자 안에 숨겨져 배에서 내려온 후 그대로 막부로 옮겨졌다.상자에서 막 안겨 나왔을 때, 마치 어딘가에서 아버지의 지나치게 이른 기대를 들은 듯, 꼬막이는 가느다란 눈을 찡긋이며 온몸을 한 번, 두 번, 세 번 떨었다.‘우리 아버지는 진짜 구두쇠야. 역시 어머니가 최고지.’막수한은 품 안의 아이가 떠는 걸 느끼고는 추워서 그런 줄 알고 급히 부인에게 말했다.“어서 세자를 이불로 감싸거라. 감기 들면 안 되니까.”막 부인은 한낮의 햇볕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설산에서 그렇게 오래 있어도 멀쩡했는데 집에 와서 추워한다고요?”입으로는 의아해하면서도 손은 이미 두툼한 이불을 꺼내 꼬막이의 작은 몸을 칭칭 감쌌다.결국 꼬막이는 눈만 겨우 보인 채 꼼짝 못 하게 되었다.상왕부 주원.서인경은 속으로 꼬막이를 위해 삼 초간 묵념했다.연기준의 아들로 사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하지만 그녀는 연기준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꼬막이는 단지 진국 상왕의 아들이 아니라 설산 일불락의 후인이기도 했으니.언젠가 그가 맞닥뜨릴 세상은 연기준이 겪은 것보다 백 배는 험할 것이다.하지만 그것은 서인경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꼬막이가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것뿐.위험이 닥쳤을 때, 적어도 한 번은 맞설 힘을 가지기를. 자신처럼 무력하게 휘둘리지 않기를.꼬막이 이야기를 마친 뒤에도 서인경의 마음엔 몇 사람이 더 남아 있었다.“할아버지랑 고모는 설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열다섯 째 황자는 어디에 숨긴 겁니까?”연기준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며 하나씩 답했다.“설산은 세상과 떨어져 있고 돌보는 사람도 있으니 요양하기 좋은 곳이다. 열다섯 째 황자는 성 밖 군영에 숨겨 두었다. 필요할 때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고모는…”그는 이제 숙귀비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에 서인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고모가 왜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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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2화

그 여인이 고개를 들자 서인경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처음 보는 얼굴이어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강렬한 익숙함이 밀려왔다.열다섯 째 황자 연무성이 붓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그는 남장한 장수를 붙잡고 서인경 앞으로 데려왔다.“누님, 이분은 제 어머니입니다. 비록 얼굴은 달라졌지만 제겐 여전히 가장 소중한 분입니다. 이제 더는 숙귀비가 아닌, 그저 제 어머니, 서은숙입니다.”서은숙.너무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이름.한때는 황제의 여인이었고 후궁의 귀비였던 사람. 그리고 황자의 생모였던 사람이었다.아들의 입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서은숙의 가슴이 요동쳤다.그녀는 서인경을 바라보았다. 핏줄로 이어진 가족.눈가가 서서히 젖어들었다.“인경아…”익숙한 목소리.서인경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고모…?”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마주한 혈육.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고모, 어떻게 여기 계세요? 언제 돌아오셨어요? 그리고… 얼굴은…”서은숙은 눈물을 훔치고 서인경의 손을 잡아 앉혔다.“남경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어. 목숨은 건졌지만 얼굴 절반이 망가졌지. 다행히 지하흑시의 봉 대장로께서 뛰어난 의술로 새 얼굴을 만들어 주셨단다. 낯선 얼굴이었기에 후궁에 숨어들어 황자 곁에 머물 수 있었던 거지.”그녀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서인경은 그 과정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얼굴을 바꾸는 고통.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가는 시간.서인경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목이 메어왔다.“고모, 많이 힘드셨죠…”서은숙은 고개를 저으며 서인경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너의 막북 이야기는 다 들었다. 아이를 품고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버지까지 구해냈다더구나. 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이렇게 모두 살아 있지 않느냐? 그게 가장 큰 복이다. 이제는 후궁에 얽매인 숙귀비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가족을 희생해야 했던 장군부도 없다. 우리 가족, 다시는 흩어지지 말자.”서인경도 그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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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3화

연무성의 말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만큼 곧았고 직설적이었다.연기준의 눈빛도 함께 가라앉았다.“그날, 후궁에서 본왕에게 했던 말. 정말로 생각을 다 마친 것이냐?”그날 밤, 후궁의 어둠 속에서 연무성은 조용히 말했다.황위를 원한다고.최근의 변고는 그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서야만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더는 눈앞에서 가족이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연기준은 그를 말리지도 그 자리에서 허락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말했다.황제의 자리는 쉽지 않다고.자비로워서도 안 되고 마음이 약해서도 안 되며 우유부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제왕은 백성을 품되 결단할 때는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망설임은 곧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의 목숨을 잃는 일이라고.치국은 말로 하는 일이 아니다. 그 길의 끝에는 늘 고처불승한(高处不胜寒)의 외로움만 남는다.그래서 연기준은 시간을 주었다. 다시 생각해보라고.지금, 연무성은 고개를 들어 어릴 적부터 동경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황숙께서는 그 자리를 생각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연기준은 담담했다.“네 누님이 원한다면 본왕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헌데 지금 네 누님은 속박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본왕은 그녀를 따를 것이다.”서인경의 어깨 위에는 일불락의 미래가 얹혀 있다.그녀의 앞날은 아직 수많은 변수로 가득하다. 그가 함부로 또 한 나라까지 짊어질 수는 없다.연무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황위가 다른 황형들 중 누구에게 돌아가도 우린 결국 남의 뜻에 매여야 합니다. 헌데 제 손에 있다면 황숙께서 필요할 때 저는 언제든 물러날 수 있습니다.”그는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평온했다.마치 황위를 두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배 한 알을 서로 양보하는 것처럼.연기준이 옅게 웃으며 연무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 누님께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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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4화

열 살짜리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어른들의 권력 다툼과 시비 속에서 멀리 떨어진 곳, 아무 걱정 없이 숨 쉴 수 있는 세상으로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황실의 피를 타고난 이상, 평범한 집안 아이처럼 근심 없이 자라는 삶은 애초에 허락되지 않는다.연무성의 말에는 분명 옳은 부분이 있었다.지금은 가짜 죽음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발각될 위험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그때 진국의 황제가 누구이든 서 가의 혈통과 황실의 피를 동시에 이은 황자를 살려둘 리는 없을 것이다. 평생을 숨어 살며 자기 이름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삶을 택하느니 차라리 한 번 크게 부딪쳐보는 편이 낫다.그것이 연무성이 고른 길이라면, 그에게 그만한 뜻이 있다면, 서인경은 더 이상 그의 앞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대신 선택해 줄 자격도 없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그 아이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면 전 경성에 남아 그 아이를 돕겠어요. 헌데 고모, 이제 더는 서은숙이라는 이름을 쓰면 안 돼요. 죽다 살아났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면 또 다른 파문이 일어날 거예요. 할아버지의 가짜 죽음까지 파헤쳐 질 수도 있어요. 그땐… 모든 비밀이 무너질지도 몰라요.”서은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우려를 모를 리 없었다.“걱정 말거라. 이미 생각해두었다. 오늘부터 나는 서은숙이 아니다. 성은 운, 이름은 금. 신 황귀비 궁에서부터 열다섯 째 황자를 모셔온 운 유모다. 열다섯 째 황자가 내 음식을 좋아해 곁에 두고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신 황귀비 궁의 궁녀들이 모두 증인이니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운금.낯선 이름. 완전히 다른 얼굴.그제야 서인경은 마음을 놓았다.운금과 연무성이 함께 늦은 저녁을 마친 뒤, 서인경은 연기준과 말을 타고 군영을 나섰다.이미 밤이었다.은빛 초승달이 걸려 있었고 달빛은 옥처럼 두 사람의 윤곽을 감쌌다.서인경은 아무 말 없이 연기준의 품에 기대 있었다. 세상에는 말굽 소리만이 고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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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5화

서인경은 맹은영이 보내온 장난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물총을 들고는 한참을 이리저리 눌러보았다.이건 꼬막이뿐 아니라 엄마인 자신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물건이었다. 그때 들려온 연기준의 말에 서인경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여기 두면 쓰기 편하잖아요. 아, 다리 좀 치워요. 꼬막이 작은 수레 밟겠어요.”연기준은 한 발 물러섰다.그녀는 끝까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아직 아이는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자신의 자리가 밀려난 기분에 썩 유쾌하지 않았다.그가 균형을 잃고 있는 사이, 서인경은 여전히 장난감에 몰두해 있었다. 다음 순간,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들렸다.“어머!”본능적으로 연기준의 목을 끌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연기준은 발치의 상자를 툭 차 치우고 그녀를 안은 채 침상으로 걸어갔다.“그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본왕에게 한 번쯤 보상해 주는 건 어떠냐?”서인경은 웃음이 터졌다.“전혀요! 내일 꼬막이 마중 나가야 해요. 오늘처럼 늦잠 자면 안 돼요.”연기준은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고 곧장 몸을 숙였다.“상왕비,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느냐?”그가 진지하게 질투하는 모습이 오히려 우스웠다.“그럼 어쩌겠어요?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다 챙기다 보면 가끔은 물이 고르지 않을 때도 있는 거죠. 당신은 그 아이 친아버지잖아요. 어른이니까 이해 좀 해요.”그는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이 아이를 갖자고 끝까지 고집한 것도 결국 자신이었다. 사실은 딸을 바랐지만 말이다.“좋다. 이해는 하겠다. 그러니 그 아이 오기 전까지만은 본왕에게 집중하거라.”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었다.휘장이 내려오고 촛불은 천천히 타들어가다 꺼졌다. 방 안은 곧 어둠에 잠겼다.오늘의 연기준은 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웠다.전날의 거칢을 스스로 의식한 듯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가갔다.서인경은 그 밤, 기묘할 만큼 편안했다.몸은 가벼웠고 피곤함은 없었다.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낮에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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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6화

그날, 서인경은 연기준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황위를 남에게 넘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냐고. 결국은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려 했던 것 아니냐고.연기준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그래. 진국의 황위는 반드시 내 손에 있어야 한다.”그때의 서인경은 알지 못했다. 그가 왜 그토록 황위에 집착하는지.하지만 한참이 지난 뒤, 설산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으로 연기준을 한 줌 한 줌 눈 속에 묻어야 했을 때, 그리고 갑옷을 걸친 채 무기를 들고 일불락의 마지막 숨결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연기준이 오늘 황위를 놓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그가 여전히 꿈속에서 들은 말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희태비는 한때 그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그 여인은 복과 화가 함께 타고난 천명이 깃든 여자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사내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왕야의 신분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그때 연기준은 이렇게 답했다.“그녀에게 천명지자가 필요하다면 제가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겠습니다.”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가 내딛는 모든 걸음이 자연스레 그녀와 일불락과 이어져 있었다.서인경은 한 번도 황후가 되겠다고 꿈꾼 적이 없었다. 연기준과 이렇게 깊이 얽히게 될 줄도 몰랐다.그날 밤, 그의 한마디는 그녀의 잠을 앗아갔다.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를 자리라는 기쁨도 없었고 후궁이라는 세계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연기준이 막중한 책임을 짊어질까 염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분명 잘 해낼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믿고 있었으니까.그럼에도 처음으로 서인경은 미래 앞에서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연기준은 그녀의 흔들림을 감지했다.어둠 속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걱정 말거라. 설령 황제가 되더라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후궁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생에서 내 곁에 둘 사람은 너 하나뿐이니.”그녀가 염려한 건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서인경은 천천히 눈을 감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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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7화

연기준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걱정하지 말거라. 본왕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면 이미 준비는 끝났다. 너는 본래 대신들의 부인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지 않느냐? 내키지 않으면 억지로 할 필요 없다. 훗날 후궁에 들어가더라도 굳이 조정의 중신 가문을 대신해 네가 나설 이유는 없어. 국사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황후까지 나서서 사람을 끌어모아야 하는 황위는 나도 필요 없거든.”연기준은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서인경은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예로부터 진짜로 ‘후궁에서 꽃처럼 앉아 있기만 한 황후’는 없었다. 미래의 무게를 그 혼자만 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겉으로는 더 이상 무리하지 않겠다고 답했지만 연기준이 조정으로 나가자마자 서인경은 빠르게 몸을 단정히 하고 간단히 아침을 마친 뒤 곧장 밖으로 나섰다.먼저 향한 곳은 서왕부였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디선가 온 듯한 부인 하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서인경이 마차에서 내리자 급히 예를 올렸다.“상왕비께 문안드립니다.”서인경은 눈길을 한 번 훑었다. 낯선 얼굴이었다.“어느 부인이신지요?”그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신첩은 호부상서 손산의 부인입니다. 오늘 서왕비를 뵈러 왔으나 마침 풍한을 앓고 계셔서 손님을 받지 못하신다 하여 이제 돌아가려던 참입니다.”“서왕비께서 풍한을?”한 시진 전, 분명 사전에 사람을 보내 서왕비가 손님을 맞을 수 있다는 답을 듣고 왔다. 그런데 이렇게 금세 병이 날 리가.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안에서 한 유모가 급히 걸어나왔다.“소첩이 상왕비께 인사드립니다. 마침 상왕비께서 의술에 밝다 들었습니다. 부디 안으로 들어와 저희 왕비 마마를 좀 봐 주십시오. 어제부터 기침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아침에도 상왕비를 모셔오라 하셨는데 마침 이렇게 오셨으니 다행입니다.”손씨 부인은 그 말을 듣고도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눈앞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서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서인경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서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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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8화

비단 상자 안에는 나무로 만든 영패 하나가 고요히 누워 있었고 정중앙에는 큼직하게 ‘목’ 자가 새겨 있었다. 서인경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과거 화 상궁과 장군부의 마부 동 백부에게서 받았던 금자 영패. 형태는 지금 눈앞의 것과 완전히 같았다.다만 그때 것은 금으로 된 글자였고 지금 것은 윤기가 흐르는 자단목처럼 보이는 상등의 자목이었다.목족?그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설마, 서왕과 서왕비가 목족과 관련이 있는 걸까?예기치 못한 단서에 서인경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서왕비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상왕비, 오랜만이군요. 어서 앉으십시오.”서인경은 정신을 다잡고 감정을 눌렀다. 천천히 다가가 예를 올렸다.“서왕비, 안녕하셨습니까?”무릎을 굽히자 서왕비가 손을 뻗어 일으켰다.“예는 됐습니다. 전일 후궁에서 겪은 일, 다 들었습니다. 태상황이 어리석었지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몸은 괜찮습니까? 혹시 형벌을 당한 건 아닙니까?”서인경은 맞은편에 앉으며 담담히 답했다.“폐하... 아니, 이제는 태상황이라 불러야겠지요. 참언을 믿고 저에게 장생불사약을 기대하셨으니 감히 형을 가하진 못했습니다. 몇 끼 굶은 것뿐이지 큰일은 아니었습니다.”서왕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군요. 상왕비와 상왕이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동안 저도 몇 번 후궁에 들렀건만 상왕비가 그 안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참으로 미안합니다.”“서왕비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제는 다 지나갔으니 괜찮습니다.”서왕비는 서인경의 손을 꼭 잡았다.“무사하면 그만입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요. 세자는요? 이제 곧 경성으로 돌아오겠지요?”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을 보냈습니다. 오늘 오후면 도착합니다.”서왕비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잘됐군요. 상옹비와 상왕이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험했습니까? 앞으로는 세 식구가 평안하고 모든 흉사가 길로 바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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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9화

“사과라니요?”서왕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해는 희태비 마마와 열셋 째 왕야께서 세상을 떠난 날이었습니다. 저는 마침 어화원에 있었고요. 그때, 열셋 째 왕야께서 무슨 급한 일을 겪은 듯 보였는데, 몹시 다급한 얼굴로 이 비단 상자를 제게 맡기며 반드시 희태비 마마께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지요. 저는 그것을 들고 희태비 마마의 침전으로 향했습니다. 헌데 도착한 후 태황태후께서 희태비 마마를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태황태후께서는 본래 희태비 마마를 달가워하지 않으셨고 그때는 이미 선제께서 승하하신 뒤라 혹여 지켜 줄 사람이 없으면 곤란한 상황을 겪지 않을까 염려되어 저도 뒤를 따라갔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서인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이 모자의 금자 영패가 열셋 째 왕야가 남긴 것이라니.그의 물건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그에게 건넨 것이었을까?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서왕비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문 앞에서 통보를 청했는데 태황태후께서는 제가 가면 반드시 희태비 마마의 편을 들 것을 아셨는지 일부러 저를 편전으로 보내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지요. 지금은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을 테니 지금 들어가면 도리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거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후궁에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헌데 모두 제 한순간의 방심이었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달려갔을 때, 저는 희태비 마마와 열셋 째 왕야가 함께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태황태후가 내놓은 이유는 두 사람이 사통하여 간통을 저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실의 추문이 밖으로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부득이 처형했다는 말이었지요.”두 사람의 죽음이 태황태후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분명했다.“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열셋 째 왕야가 태황태후의 친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모두 제 부주의 탓입니다. 그때 끝까지 정전으로 들어갔더라면... 어쩌면 손이라도 한 번 내밀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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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0화

서인경은 목족의 영패를 꼭 쥐었다. 깊게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신 뒤에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놀라움과 아득함이 동시에 밀려왔다.본래 오늘은 서왕비를 찾아 서왕이 조정과 새 황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슬며시 떠보려 했지만 입술이 끝내 열리지 않았다.서왕비는 세상일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정의 암투와 황위 다툼에 진심으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서 분명히 느껴졌다.목족 영패를 건넨 뒤 서왕비는 곧장 군주와 세자를 안으로 들이라 하여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한동안 육아와 아이들 웃음소리만이 회랑 아래를 채웠다. 바깥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서인경은 더 이상 밖의 소용돌이를 끌어와 이 고요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본래 목적은 그 자리에서 접었다.아이들과 잠시 더 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원래는 맹국공부에도 들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마음이 사라져 곧장 상왕부로 돌아왔다.서인경이 떠난 뒤 서왕비 역시 피곤함이 밀려왔다.손주들을 유모에게 맡기고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왕애께서 정오에 돌아와 식사하신다 하셨지. 부엌에 미리 준비하라 전하라.”“예.”유모가 부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상왕부의 한가족이 다시 모이는 날이라 들었습니다. 상왕비께서 어찌 이리 여유롭게 우리 부에 들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긴요한 말씀도 없었던 듯한데요.”서왕비는 호수 위로 번지는 물빛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아이의 뜻을 내가 모를 리 있겠느냐. 상왕이 정말 황위에 뜻이 없었다면 상왕비를 구한 그날 곧장 아이와 함께 멀리 떠났겠지. 무엇 하러 금란전에서 그 소동을 벌여 태황태후와 폐하, 그리고 대황자까지 체면을 잃게 만들었겠느냐?”유모는 놀라 입을 가렸다.“설마… 상왕께서도 황위를 노리신다는 말씀입니까?”서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답이었다.유모는 곧 모든 정황을 이해했다.“그렇다면 오늘 상왕비께서 오신 것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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