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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1화

연기준이 웃었다.“반역이라니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제가 정말 이 황위를 원했다면 여기 있는 그대들과 대신들 중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에 손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격앙된 기색이었다.“그, 그대가...”그제야 그는 대전 한켠에 서 있는 서인경을 발견했다.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빛이 번뜩였다.“진국의 율법에 여자는 정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상왕은 왜 상왕비를 이 자리에 데려온 것입니까? 저 여인이 무슨 자격으로 이 대전에 섭니까?”연기준은 서인경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평범한 여인이라면 물론 자격이 없지요. 허나 이 사람은 머지않아 우리 진국의 국모가 될 겁니다. 즉위 대전에 황후가 참석하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순간, 대전이 술렁였다.연기준은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고 직접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서인경의 황후 자리를 먼저 인정하는 순간, 이미 황위가 자신의 것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손산은 경악했다. 연기준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무언가 큰 약점을 잡은 듯 손가락으로 연기준을 가리키며 외쳤다.“서왕! 맹국공! 들으셨습니까? 저자는 조정을 뒤엎고 황위를 찬탈하려 합니다! 대역죄입니다! 구족을 멸해야 마땅합니다!”서왕과 맹국공은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서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손 대인, 진정하시지요. 방금 대인께서도 말씀하셨듯, 나라는 군주 없이 하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강산은 연 씨 황실의 것입니다. 이치로 따지면 연 씨의 후손이라면 누구든 선택받을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손산이 눈을 부릅뜨고 서왕을 바라보았다.“그렇다 해도 태상황의 여러 황자 중에서 뽑아야지 어찌 일개 왕이 스스로를 밀어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이쯤에서 연기준은 오히려 더 태연했다.“본왕은 여기 서 있습니다. 모든 황자들이 저를 상대로 단독이든, 함께든 도전해도 좋습니다. 누구든 본왕을 꺾는다면 이 황위는 기꺼이 양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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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2화

맹국공이 담담히 손산을 바라보았다.“손 대인의 말씀대로라면 마음에 둔 태자 후보가 있습니까?”손산은 사태가 반전되는 줄 알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열셋 째 황자입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여러 황자들 가운데 가장 알맞는 적임자입니다.”맹국공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열셋 째 황자께서는 어릴 적 학문이 뛰어나 태상황의 총애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황릉으로 유배되어 오랫동안 경성을 떠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익힌 치국의 도는 이미 흐릿해졌을 겁니다. 게다가 외가의 뿌리도 약합니다. 즉위하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그 말의 뜻을 손산이 모를 리 없었다. 그 역시 열셋 째 황자를 고집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차선이라도 골라야 했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이름을 꺼냈다.“그렇다면 일곱 째 황자는 어떻습니까? 모친은 문양후 대군주로 신분이 높고 일곱 째 황자 또한 줄곧 후궁에서 자랐으니…”서왕이 고개를 저었다.“일곱 째 황자는 병약합니다. 며칠 전 태의가 말하길,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또 한 번 길이 막혔다.손산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그렇다면… 열다섯 째 황자는요? 상왕비께서 살아 계시다면 열다섯 째 황자도 생존해 있을 터. 서 가의 혈통이자 황실의 피를 이은 몸입니다. 신분으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이번에는 연기준이 입을 열었다.“열다섯 째 황자는 나이가 어린 것 외에는 황위를 잇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손 대인께 감사해야겠군요. 우리 진국에 훌륭한 태자를 골라주셨으니 말입니다.”뜻밖의 말에 손산은 잠시 멍해졌다.연기준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가 있나? 열다섯 째 황자가 서 가의 혈통이라서 순순히 황위를 넘기겠다는 건가?연기준이 대전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열다섯 째 황자를 들이거라.”대전 안의 대신들이 일제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조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열다섯 째 황자 연무성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연기준과 서인경 앞에 멈춰 섰다.연기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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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3화

대전 안은 끝내 침묵에 잠겼다. 누구도 먼저 나설 생각이 없었다. 괜히 앞장섰다가 훗날 연기준이 황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정리될 사람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그 사이, 무장들은 오히려 기세가 올랐다. 하나둘 무릎을 꿇더니 이내 갑옷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폐하께 삼가 절하옵니다!”무장들의 지지가 노골적이고 거침없었기에 문관들은 감히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들은 진짜였다. 칼을 쥐면 망설임이 없는 자들. 말로 다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게다가 상당수의 대신들은 애초에 반대할 생각조차 없었다. 지금 황위를 계승할 자격을 논하자면 그 누구를 다 합쳐도 연기준 한 사람만 못했다.진국이 오래가길 원한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부귀를 지키고 싶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맹국공은 연기준의 방식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가 황제가 되는 것 자체에는 이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와 맞설 인물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게다가 그의 아들은 지금 연기준의 손에 있었고 딸은 상왕비와 절친이었다. 그러니 선택지는 애초에 많지 않았다.연기준은 병사 한 명 쓰지 않고 단 몇 마디 말로 황위를 거머쥐었다. 서인경은 그의 손에 이끌려 함께 자리에 오를 때 잠시 현실감이 흐려졌다. 막상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릎 꿇은 대신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손바닥 위에 올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두가 이 자리를 탐하는 걸까?연기준은 요동 변경의 불안을 이유로 즉위 대전은 생략했다. 두 달 뒤면 대황자의 첫돌이니, 그때 백관을 불러 연회를 열겠다고만 했다.‘대황자’라는 말에 서인경은 순간 멍해졌다.아, 대황자. 자기 아들, 꼬막이, 연유청을 말하는 것이구나.이제 또 하나의 호칭이 생겼다. 대황자.황위 문제가 정리되자 대신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그렇게 조회는 금세 파했다.조회가 끝나자 연기준은 곧장 서인경을 데리고 양심전으로 향했다.이미 안팎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낯선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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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4화

오늘 조정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대외적 설명은 이러했다.태상황의 열다섯 째 황자가 아직 어리니 연기준이 잠시 그를 보필해 태자로 세운다는 것. 훗날 태자가 조정을 다스릴 능력을 갖추면 그는 자연히 권력을 내려놓을 것이다. 연기준은 이름은 황제이나 실상은 섭정에 가깝다는 이야기였다.그래서 오늘을 새 황제가 즉위한 길일이라기보다 태자를 책봉한 날이라 부르는 편이 더 맞았다.연기준은 자신의 심복들을 모두 동궁으로 보내 자리를 잡게 했다. 지금 이 시각, 동궁은 오히려 양심전보다 더 분주했다.서인경은 연기준이 서왕과 맹국공을 충분히 상대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진심으로 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묵인이 없었다면 오늘 대전에서 일이 이토록 순조로울 리 없었다.맹국공과 서왕이 들어올 때 서인경은 잠시 인사만 나눈 뒤 물러났다.이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러 가야 했다. 꼬막이를 데리고 동궁에 가 열다섯 째 황자와 고모 쪽 상황을 살펴볼 생각이었다.새로운 호칭을 얻게 된 꼬막이는 지금 봉한설과 평이를 따돌리고 어화원에서 두 다리를 힘껏 놀리며 달리고 있었다.그는 궁으로 오는 길에 들었다. 아버지는 황제가 되었고 어머니는 황후가 되었으며 작은 외삼촌은 태자가 되었다고.입궁한 뒤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세자라 부르지 않았다. 이제는 대황자였다.예전에는 그의 부모를 업신여기고 그에게도 냉랭한 얼굴을 보이던 이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웃으며 다가왔다. 마치 제단에 모셔야 할 존재라도 되는 듯.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꼬막이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는 지금 당장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었다.설산의 혹한은 견뎌냈지만 사람들 마음의 온도차는 아직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아직 아기였다.봉한설과 평이 역시 오늘의 일로 흥분해 있었다. 그 기세에 휩쓸려 꼬막이가 앞에서 날듯이 뛰어다니는 것도 제지하지 못했다.두 사람은 헐레벌떡 뒤를 쫓아가면서도 정작 서인경이 당부했던 말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지금 꼬막이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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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5화

“돌도 안 된 아이라고?”유가영의 질투는 한층 더 짙어졌다.왜 하필 서인경의 아이는 태어난 것부터 남다르단 말인가? 무엇이든 저 여인 쪽이 더 낫다는 듯한 현실이 못내 억울했다.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다 문득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태상황이 남긴 황자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연기준이 황위를 거머쥔 것이다.열다섯 째 황자가 태자로 책봉된 것도 어쩌면 민심을 달래기 위한 허울일 뿐일지 모른다. 연기준이 자리를 완전히 굳히고 나면 결국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겠는가?그렇다면 이 아이를 무사히 낳고 누구보다 뛰어나게 길러낸다면?언젠가는 황위를 다툴 자격이 생길지도 모른다.어둡기만 하던 삶에 아주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열다섯 째 황자가 동궁에 들었다지?”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예, 마마. 지금 동궁은 축하 인사와 선물로 북적입니다.”유가영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내 뱃속 아이의 이름으로 큰 선물을 보내거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우가 형이 태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전하고. 장차 이 아우가 태자를 보필해 명군이 되도록 돕겠다고도 덧붙이거라.”유가영의 대례가 동궁에 도착했을 때, 막 태자로 책봉된 연무성은 꼬막이를 안고 놀아주고 있었다.전갈을 전해 들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누님, 저는 그분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축하한단 말입니까?”서인경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그걸 묻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렴. 왜 뱃속 아이가 꼭 너의 아우라고 단정했을까? 누이일 수도 있는데.”태자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뜻을 알아차렸다.“속셈이 순수하지 않군요. 아이를 이용해 무언가를 꾸미려는 듯합니다.”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연기준이 이미 사람을 붙여 지켜보고 있다. 나는 그녀가 일을 벌이는 게 두렵진 않아. 다만 그 머리로 누군가에게 이용당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이다.”그때 운 유모가 갓 만든 과자를 들고 들어왔다. 먼저 꼬막이와 태자에게 한 접시씩 건네고 남은 것을 서인경 앞에 내려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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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6화

그것은 비취로 만든 옥여의였고 위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용은 천자의 상징이고 봉은 천자의 배필을 뜻한다. 이 물건은 곧 천자의 길상과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오직 천자만이 아래로 하사할 수 있다.더구나 어사로 내려진 물건은 절대 타인에게 다시 줄 수 없다. 이를 어길 경우 황실에 대한 불경으로 여겨지며 더 나아가 불충의 마음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유가영이 이런 비취 옥여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 태상황이 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귀물을 곱게 간직하지 않고 태자에게 축하 선물이라며 내보냈다니. 대체 무슨 뜻을 담은 것인가?바닥에 떨어진 옥여의는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그러자 운 유모의 얼굴빛도 순간 굳어졌다.“유가영은 태자를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야심이 보통이 아니군요. 태자가 폐하께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는다고 여긴 걸까요. 태자와 손을 잡고 반정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태자 역시 얼굴이 굳었다.이미 밖에서는 그와 연기준의 관계를 두고 온갖 추측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가 태자 자리에 오른 것이 진심인지 아닌지에 대해 말이다.유가영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답을 주는 수밖에.태자는 차갑게 명했다.“사람을 불러라. 이 옥여의를 유태비께 돌려보내라. 어사 물품을 타인에게 넘기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 전하고 하사한 분께 직접 가서 사죄하라고 말하거라.”폐하가 아닌 하사한 태상황에게 가라는 말이었다.태자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오늘은 모두가 들떠 있었다. 동궁으로 발탁된 자들 역시 축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태자의 목소리가 돌연 매서워지자 문 밖의 환관과 궁녀들은 숨을 죽였다. 누군가 재빨리 깨진 옥여의를 수습해 들고 물러났다.운 유모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경을 바라보았다.“유가영은 후궁에서 골칫거리입니다. 폐하께 미련이 남아 있다면 큰 위협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번거로울 겁니다.”서인경은 잔잔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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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7화

이제는 신태비라 불러야 했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그 뒤에는 열일곱 째 황자와 열여덟 째 공주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신태비가 먼저 서인경에게 예를 올렸다.“황후 마마를 뵙습니다.”서인경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우리 사이에 이럴 필요는 없어요.”신태비는 몸을 일으켰다. 단정하고 맑은 얼굴이 유난히 고요해 보였다.“축하드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손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드디어 스스로의 운명을 쥐게 되셨으니.”그 목소리는 축하처럼 들리면서도 어딘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은 여전히 타인의 손에 달려 있다는 자조가 스며 있었다.서인경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었다.“걱정 마세요. 우리 모두의 운명은 결국 우리가 쥘 수 있을 거예요.”그 온기가 전해졌는지 신태비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고맙습니다.”서인경은 미소 지었다.“태자를 보러 가세요. 아까도 당신 이야기를 했어요. 동생들 이야기도요.”“그러죠.”신태비는 다시 한 번 예를 올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서인경은 꼬막이를 안은 채 양심전으로 향했다.꼬막이는 어깨 위에 엎드린 채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어머니, 방금 그 이모네 형님, 나중에 엄청 대단해질 거예요.”서인경은 그의 시선을 따라 열일곱 째 황자의 등을 바라보았다.“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하게 웃었다.“그냥 알아 봤어요. 어머니, 저 믿죠?”서인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이 어미는 널 믿는다.”모퉁이를 돌아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헌데 이런 말은 어머니랑 아버지한테만 해야 한다. 밖에서는 절대 하면 안 돼. 알겠지?”꼬막이는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도 어머니와 어버지한테만 말하고 싶어요. 오늘 그 사람들, 저한테 진짜로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전 안 좋아합니다.”동궁에서 대신들이 달라붙어 아첨하던 모습이 떠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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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8화

연기준은 담담한 얼굴로 찢어진 주청서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훑어본 뒤, 제 아들을 향해 은근한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제법 고를 줄 아는구나. 어머니 편을 제대로 들어줬네.”‘어머니’라는 호칭에 서인경은 순간 멍해졌다. 그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는 걸 깨닫고는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연기준. 전 예전부터 분명히 말했어요. 당신에게 후궁은 안 돼요. 즉위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럼 이 황후 자리도 필요 없어요!”말이 끝나자마자 연기준은 몸을 기울여 입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한편 옆에서 지켜보던 꼬막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에서 곧 환한 얼굴로 바뀌었다.“아버지, 어머니, 뽀뽀! 나도 뽀뽀!”기어오르듯 다가오자 서인경은 여전히 화가 난 채로 연기준을 밀어냈다. 아이를 끌어안고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넘어갈 생각 마세요.”연기준은 웃으며 찢어진 나머지 반쪽을 건넸다.“억울하네. 누구를 위해 선발하겠다는 건지, 다시 보거라.”서인경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받아 들었다. 아까는 절반만 보였던 글이 이제야 온전해졌다.붉은 주사로 적힌 연기준의 필체.태상황의 여러 황자들을 위한 선발을 허한다.서인경의 눈빛이 풀렸다. 꼬막이를 연기준 품에 넘기고 두 쪽으로 갈라진 주청서를 맞춰 붙였다.대신들은 확실히 연기준에게 후궁을 늘리라 권했고 후보 명단까지 첨부해 두었다. 즉위 반나절 만에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고 대충 훑어도 마흔 명이 넘었다.참으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누구나 제 딸을 후궁에 들이고 싶어 안달이었다.연기준은 그 아래에 ‘준(准)’이라 적어 놓았다. 그러나 그 뒤에 덧붙은 한 문장이 있었다.‘여러 황자들의 나이가 점차 차오르니 더는 후궁에 머물게 할 수 없다. 각 황자에게 두 명씩 선발하여 생존한 모비와 함께 봉지로 나가게 하라. 공주가 봉지로 가기를 원치 않으면 후궁에 머물게 하되 적령이 되면 황제가 혼처를 정해 하가시킨다.’서인경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태비들과 황자들을 흩어 황위를 둘러싼 미련을 완전히 끊겠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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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9화

밖으로 내보내면 시한폭탄이 되고 눈앞에 두면 그나마 통제할 수 있다.“알겠어요. 당신이 결정해요. 굳이 나한테 설명 안 해도 돼요.”서인경은 그렇게 말했지만 연기준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었다.방금 전, 선발 주청서를 보던 그녀의 표정은 그의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선명했다. 다만 자기 여인이 질투가 많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낼 배짱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서인경이 다른 여인을 두고 예민해지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한편, 태황태후는 자신의 침전 안에 갇혀 있었다. 문밖에는 연기준의 사람이 지키고 서 있었기에 나갈 수 없었지만 곁의 유모는 드나들 수 있었다.그리고 금란전에서 벌어진 일은 곧장 태황태후에게 전해졌다.소식을 들은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침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연기준, 그 아이가 감히…! 이건 대역무도요, 반역이다!”유모가 다급히 물었다.“이제 상왕께서 황위에 오르셨습니다. 그간 태황태후 마마께서 그분에게 하신 일들을 생각해 봤을 때,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닐지…”태황태후는 손에 쥔 용두 지팡이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나를 가두겠다고? 어림도 없다! 이 지팡이는 성조 선황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자리는 안정되지 못한다!”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가서 지금의 태후에게 전하거라. 연기준이 황위를 빼앗기 위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아들을 죽였다고.”유모는 망설였다.“태후께서 믿지 않으시면요?”태황태후는 확신에 차 있었다.“대황자 측비 단여월을 찾아가거라. 그녀의 자필 진술을 받아오면 믿을 것이다.”단 가의 큰딸 혼사는 서인경이 망쳐 놓았고 둘째 딸의 앞날은 연기준이 끊어 놓았다. 지금 단 가가 가장 증오하는 두 사람은 바로 그들일 것이다. 그러니 적을 하나 더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나설 터였다.지금, 단은설과 단여월은 모두 단 가로 돌아와 있었다.저택은 절반 이상이 불타 버렸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건 몇 채 남은 별당뿐이었다. 큰 별당 하나에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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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0화

단 가의 장사는 무너졌고 돈도 사라졌다. 두 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단평안과 진보이는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사람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를 뒤져도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다.야랑국 단 가의 본가는 그들의 몰락을 알자마자 인연을 끊어버렸다. 맷돌을 다 돌리고 나면 나귀를 죽이고 강을 건너면 다리를 걷어차는 법. 그 잔혹한 처세를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었다.단 가는 이제 완전히 끝장이었다.그때 태황태후의 사람이 찾아왔다. 태후와 황제, 그리고 황후 사이를 이간질하라는 것이었다.단여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이 이토록 추락했으니 서인경과 연기준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단효산과 서풍교는 이 얼마간 세태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겪었다. 한때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기세는 이미 닳아 사라졌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무사히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더는 감히 무모한 짓을 벌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 우리 단 가는 이미 이 지경인데 폐하와 황후께 대들었다간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단여월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이미 이 꼴이 되었는데, 더 잃을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 어머니도 서 씨입니다. 서 가 사람이라고요. 헌데 어째서 서인경은 높디높은 황후가 되고 우리는 이 모양이 되어야 하는 겁니까? 걔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괜찮은 사내 하나 잘 꾀어냈을 뿐이라고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독기를 머금었다.“지금은 그 사내가 황제가 되었으니 조만간 후궁을 들이고 선발을 하겠지요. 그때 가면 서인경도 저처럼 다른 여자들과 한 사내를 나눠야 할 겁니다. 질투하고 다투고, 계략을 꾸미며 살겠지요. 그 여자는 후궁의 모든 여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될 텐데, 가만히 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그 말에 줄곧 침묵하던 단은설의 눈에 번뜩임이 스쳤다.금란전에서의 그날 이후, 단은설은 한 번 죽었다 깨어난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목적은 늘 연기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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