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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1화

권력 다툼의 도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없다. 자신의 피와 목숨을 바쳐 누군가의 발판이 되는 일 따위, 누가 도맡아 하고 싶겠는가.그런데도 예정훈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눈 속에서 은근히 꿈틀대는 욕망이었다.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예전에 연기준이 했던 말이 결국 현실이 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야랑국의 황위. 아마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한 대신이 입을 열었다.“단 장군, 혹시 팔황자의 뜻을 오해하신 건 아닙니까?”단진혁이 의아한 눈으로 그 대신을 바라봤다.“무슨 뜻이지?”그 대신이 말을 이었다.“소신이 오늘 입궁이 조금 늦었습니다. 막 진국에서 전해져 온 따끈한 소문을 들었는데 우리 팔황자와 진국의 대황자가 용양지호라는 말이 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소란에 흔들렸다.단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방자하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팔황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설마 죽은 사람에게까지 이런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냐!”그 대신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소신은 한 마디도 지어낸 말이 없습니다! 입궁하기 전에 들은 그대로일 뿐입니다! 듣자 하니,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사병을 길러 진국과 야랑국 두 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황위를 노린 것도 천하 창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남다른 취향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야랑국까지 흘러왔으니 아마 진국에서는 이미 온 나라가 다 아는 이야기일 겁니다.”단진혁은 이런 이야기를 난생처음 들어 보는 터라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는 예정임과 함께 기생집이며 유곽을 수없이 드나들었던 사람이다. 예정임의 취향이 어떤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예정훈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다행이었다. 조회에 나오기 전에, 연기준의 소문을 미리 퍼뜨려 두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의 상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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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2화

연기준이 야랑국 안에 첩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예정훈에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여전히 사람을 놀라게 했다.그는 무려 첩자를 야랑국 형부 안에 심어 두었다.왕덕심. 그는 형부의 모든 사건을 총괄하는 상서였다.형부뿐만이 아닐 것이다. 연기준이 말한 그 ‘도움’이라는 것들이 과연 조정의 다른 어느 곳까지 뻗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조정 안에 연기준의 사람이 얼마나 더 숨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예정훈은 기어이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이 연기준이라는 자. 수단이 참으로 교묘했다. 멀리 진국에 있으면서도 야랑국의 국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으니 말이다.겉으로는 돕는다고 하지만 누가 자기 영토가 남의 뒷마당이 되는 걸 달가워하겠는가.예정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왕덕심을 붙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거두었다. 지탱해 주던 힘이 사라지자 왕덕심의 살찐 몸이 그대로 앞으로 쏠렸다. 그는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옆의 궁벽에 몸을 기대 간신히 버텼다.왕덕심은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주인께서 또 이런 말씀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태자께서 분명 화는 내시겠지만 그렇다고 소신을 죽이시지는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겁내지 말라고요. 태자께서 바라던 바를 이루시게 되면 소신은 형부를 시랑 교명에게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겠습니다. 태자의 눈에 거슬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형부시랑 교명은 바로 예정훈의 사람이었다. 그동안 형부에는 시랑이 둘 있었는데 한 명은 예정훈의 사람, 다른 한 명은 예정임의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줄곧 다투며 권력을 겨뤘지만 정작 형부의 실권은 언제나 왕덕심의 손안에 있었다. 왕덕심이 이렇게 보증을 내놓은 것은 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 주는 격이었다. 혹은 연기준의 뜻이 그만큼 담겨 있는 것이겠지.예정훈은 담담한 눈길로 왕덕심을 훑어보았다.“야랑국의 녹봉이 너를 기름이 흐를 만큼 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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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3화

덕비가 흥분한 이유는 연기준 때문이 아니었다.그녀는 정연 공주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너희 혼사는 이제 그만 접어라. 어미가 보기에는 차라리 야랑국에서 괜찮은 사내 하나 찾는 편이 낫다. 진국의 여자와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느냐. 그 여자는 너와 나란히 설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서인경을 떠올리자 정연 공주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호감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래서 더더욱 빼앗아야 하는 거예요. 누가 그 여자랑 나란히 서고 싶대요? 연기준이 제 사람이 되면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아들은 살아 있을 자격조차 없게 될 거예요.”예전의 정연 공주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던 약혼자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하지만 연기준을 직접 본 뒤로는 달랐다. 그는 그녀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차를 마셔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밥을 먹어도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밤낮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 다시 연기준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 덕비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연기준을 직접 본 뒤로는 오히려 딸이 그에게 시집가는 일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덕비는 부드럽게 설득했다.“정연아. 그 남자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미 말 좀 들어라. 우리는 그 사람을 포기하자. 어미가 반드시 그보다 나은 사내를 골라 주겠다.”정연 공주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저는 연기준 말고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요. 남자는 지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이에요. 제가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가 어떻게 저를 저버리겠어요?”그 순진한 말에 덕비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어미가 몇 번이나 말했느냐. 남자라는 것들은 가장 비루한 버릇이 하나 있다고. 무엇을 사랑하든 상관없지만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왜 너는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냐.”정연 공주는 입을 삐죽이며 반박했다.“그건 다른 남자들 얘기죠. 연기준은 달라요. 어머니는 못 보셨잖아요. 그가 서인경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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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4화

덕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얼굴에는 놀라움과 믿기지 않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소식이 그녀에게 준 충격은 너무 컸고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덕비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여장을 한 그 궁녀의 정체는 바로 지하흑시에서 오래전 실종되었던 남궁열이었다. 예전에 지하흑시에 있을 때, 남궁열은 ‘흑시는 절대 조정과 얽히지 않는다는 원칙’을 배신했다. 그리고 야랑국의 팔황자 예정임과 진국의 대황자, 이 두 잔혹한 인물의 앞잡이가 되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의 실종 사건과 사병을 길러낸 일 역시 모두 그가 지하흑시를 방패 삼아 저지른 일이었다. 그 후 남궁열은 설산에서 서회윤을 포위해 죽이려 했다. 지하흑시의 대장로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회윤은 이미 설산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그 일 이후로 남궁열은 이미 지하흑시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당시 대장로는 서회윤을 구하느라 정신이 분산되어 그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장로는 어릴 적부터 그를 지켜보며 키웠기에, 정 때문에 한 번만 기회를 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놓아주었다. 그 덕에 남궁열은 목숨을 건졌지만 대장로에게 큰 부상을 입었다.몸의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만큼은 달랐다.원래 그 눈은 깊은 산속에서도 백 리 밖을 꿰뚫어 보고 사냥감을 단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날카롭고 영민한 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초점을 잃어버린 눈이 되었다.완전히 실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검은 눈동자에서 흰자위까지 모두 핏빛처럼 충혈된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그는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그 붉은 기운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기괴한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상처는 그의 시력에도 영향을 주었다. 두 걸음, 세 걸음만 떨어져도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인지 도무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남궁열은 이미 폐인이 된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아직 생각할 줄 아는 머리 하나는 남아 있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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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5화

태자부.예정훈은 보고를 받았다. 한 궁녀가 사실은 남자가 여장을 한 모습이었는데 덕비의 후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그 사람은 궁문을 나서자마자 곧장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고 이내 단진혁 장군의 저택 뒷마당으로 들어갔다.예정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단진혁은 황후의 친오라비가 아니더냐? 헌데 어째서 덕비와 손을 잡았다는 거지? 황후와 덕비가 평소 서로 앙숙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덕비에게는 정연 공주 하나뿐이고 뒤를 받쳐 줄 강력한 외가도 없다. 헌데 단진혁은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그녀와 엮인단 말이냐?”보고하던 부하 역시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 번 다시 확인했지만 틀림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덕비의 궁에서 나왔고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단 장군의 저택으로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그자의 눈이 이상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듯한 이색 동공이었는데 눈이 전부 핏빛처럼 붉었습니다.”핏빛 눈이라니. 예정훈은 한참 동안 생각했지만 그 안에 숨은 음모를 도무지 짚어낼 수 없었다.그러다 문득 떠올랐다.예전에 연기준이 야랑국에 왔을 때, 그는 덕비를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연기준이 후궁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예정훈을 찾아와 부탁했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 금씨 가문을 조사해 달라고.그 일과 함께 떠오른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얼마 전, 단진혁이 야랑국 전역을 뒤지며 연기준을 찾던 때였다. 남쪽 산기슭에 있던 금씨 가문의 옛 터에서 대규모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그 붕괴로 뒤쪽 산까지 흔들리며 지진이 일어났고 산에서 쏟아진 물이 지대가 낮은 곳으로 역류해 내려왔다. 결국 금씨 가문의 옛 터는 지금 거대한 산사태가 지나간 폐허로 변해 버렸다.하지만 당시 단진혁은 연기준을 찾는 일에 급급했기에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예정훈은 그 일에 수상한 점을 느끼고 조용히 조사를 해 본 적이 있었다. 그 붕괴가 일어나기 며칠 전, 금씨 가문의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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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6화

야랑국에서는 지금, 아무도 모르게 조정의 권력이 뒤흔들리는 정변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연기준은 며칠에 한 번씩 왕덕심이 보내오는 소식을 받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색 동공에 대한 보고를 읽는 순간,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그때 서인경은 꼬막이를 데리고 어서재에서 놀고 있었다. 태자는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국사를 처리하고 있었고 모르는 부분이 생기면 곧장 연기준에게 물어보았다.평소 연기준은 꼬막이에게 장난감을 건네주면서도 몇 마디 말로 태자의 방향을 잡아 주었다. 그러면 나머지 세부적인 일들은 태자 스스로 처리할 수 있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태자가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연기준은 편지 한 장을 내려다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태자는 의아한 얼굴로 서인경에게 도움을 구했다. 서인경은 꼬막이를 태자의 품에 안겨 주고 연기준의 곁으로 다가갔다.“핏빛 같은 이색 동공이라니... 이 이야기, 왠지 익숙한데요?”연기준의 얼굴이 냉정하게 굳어 있었다.“야랑국에 가기 전에 나는 지하흑시에서 대장로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 말로는 설산에서 서 장군을 구할 때 남궁열의 눈을 다치게 했다고 했지. 어족의 눈 부상 증상은 바로 핏빛 이색 동공이다. 그 이후 남궁열은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니게 흔적 없이 사라졌고.”서인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남궁열이라고요? 그가 야랑국에 있다는 말이에요?”연기준은 화접을 꺼내 편지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천천히 타 들어가며 한 줌의 재로 변해 갔다.“남궁열은 이미 어족에서 이름이 지워진 사람이다. 다시 일어서려면 반드시 동맹이 필요하다. 누구와 손을 잡아도 이상할 건 없지만 하필 덕비와 단진혁을 택했다는 건... 그 속내가 꽤 흥미롭다는 뜻이지.”덕비는 야랑국 후궁의 후비였고 단진혁은 야랑국의 대장군이자 황후의 친오라비, 즉 국구였다.단진혁이 황위를 노린다 해도 보통이라면 황자가 있는 후비와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덕비와 결탁하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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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7화

그녀라면 오히려 금족과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금족의 순수한 혈통의 후손을 원한다니,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설마… 금족 어딘가에 보물이 숨겨져 있어서 순수 혈통의 사람만 열 수 있는 건 아닐까요?”서인경이 조심스럽게 짐작을 내놓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연기준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사람을 붙여 계속 지켜보겠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언젠가는 진상이 드러날 날이 올 것이다.”서인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각 부족의 흔적은 하나둘 나타나고 있는 유독 화족만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네요. 그들이 정말 자기 출신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화족 자체가 이미 후손이 끊어진 건지… 혹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더는 세상사에 얽히고 싶지 않아 이름을 숨기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중 어느 경우라 해도 저는 두렵지 않아요. 오히려 그들이 분쟁에서 멀어져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요. 헌데 화족이 이미 세상에 나타났는데도 마음을 바꿔 어딘가 숨어 있다가 언젠가 기회를 노려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는 거라면…”화족이 나타나지 않는 한 서인경의 마음은 늘 어딘가 불안했다. 그녀가 설산으로 돌아가려면 예전에 함께 힘을 모았던 여러 가문이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인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그중 단 하나라도 배신한다면 일불락의 부흥은 커다란 장애를 맞게 될 것이다.그래서 서인경은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겨 왔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설산에 들어간 뒤여야 했다.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문밖에서 육승이 알현을 청했다.“신이 조사해 보았습니다. 안태비와 흔태비께서 아이를 낳던 날의 일입니다. 그때 나타난 그 큰 새는 예전에 열셋 째 황자가 키우던 애완동물이었습니다. 그날 그 새에게는 사람을 보면 광폭해지는 약을 먹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자마자 흥분해 두 태비에게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사건이 끝난 뒤 그 새는 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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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8화

태후와 안태비, 흔태비 사이에는 본래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단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서인경이 궁 안에 갇혀 있던 시절, 두 사람이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말을 들었기에.그 일로 태후의 마음에 원한이 싹텄다. 서인경에게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니 그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후궁에서 아무도 감히 서인경에게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속셈이었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인경이 아이와 산모 모두를 살려냈기 때문이다.태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차라리 죽어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 소식을 들은 태상황은 새로 태어난 두 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태후가 서인경을 제대로 눌러 버리지 못한 일에 불만을 터뜨렸다.“뱀을 잡으려면 일곱 치를 쳐야 근본을 건드리는 법이다. 안태비와 흔태비가 죽는다 한들 서인경에게는 아무 상처도 되지 않는다. 괜히 풀숲만 흔들어 서인경과 연기준에게 네 존재를 알린 셈이지. 참으로 어리석군. 여인의 어설픈 자비란!”지금의 태후는 예전처럼 태상황을 두려워하거나 공손히 대하지 않았다.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유가영의 편전에서 돌아온 후, 자신의 몸을 바라보던 그 노골적인 혐오의 눈빛을.부부로 지낸 세월이 그토록 길었지만 그 남자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진심을 준 적이 없었다. 과거 그녀를 황후로 봉했을 때도 그저 하 씨 가문의 세력을 노린 것뿐이었다.태후는 또 하나 잊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만약 눈앞의 이 남자가 우유부단하게 균형만 따지며 망설이지 않았다면 그녀의 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황위에 올랐을 것이다. 어찌 연기준이 지금처럼 머리 위에 올라탈 수 있었겠는가.하지만 이제 그녀의 아들은 죽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는데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태후는 차가운 눈으로 태상황을 흘겨보았다.“폐하께서는 여인의 자비 따위는 없다 하셨지요. 그런데도 결국 연기준에게 지지 않았습니까? 서인경을 그렇게 오래 가둬 두고도 끝내 목숨 하나 끊어내지 못하셨으니… 폐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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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9화

“방자하다!”태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천한 유모 하나가 감히 그런 말을 전하는 것을 보고는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네가 감히 무엇이길래, 감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전하느냐!”그러나 유모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저는 그저 황후 마마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후궁의 일은 모두 황후께서 맡아 처리하고 계시니 태후 마마께서는 황후의 영역에서 부디 조용히 지내시는 것이 좋을 거라고요. 만약 앞으로 또 누군가가 태후 마마 때문에 상처를 입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태후 마마와 제대로 계산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태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좋다, 어디 해 보자! 내 황아를 죽게 만든 것도 그녀다! 나 역시 그녀와 이 빚을 제대로 따져 볼 것이다!”“그만!”태상황이 젓가락을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사람 밥도 못 먹게 할 셈이냐! 그깟 천한 후비 둘로 너희 황후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구나. 설령 죽는다 해도 그걸로 문제 삼을 사람도 없다.”그 말을 듣는 순간 유모의 마음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문득 후궁의 후비들이 불쌍해졌다.저 남자는 한때 그녀들이 목숨 걸고 총애를 다투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들이나 그녀들 배 속의 아이들에 대해 조금의 연민도 보이지 않았다.유모가 이 말을 서인경에게 전했을 때, 서인경은 마침 안태비와 흔태비의 궁에 와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대신해 막 태어난 아기들을 안아 주고 있었다.그 이야기를 듣고도 서인경은 놀라지 않았다. 안태비와 흔태비 역시 평온한 얼굴이었다.“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황실의 사람들은 본래 정이 얕은 법이니까요. 남은 생에 딸 하나 곁에 두고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이 두 사람은 후궁에서도 드물게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었다. 서인경이 두 번 정도 그녀들의 궁에 들른 이후, 후궁 전체가 두 사람을 더욱 정성껏 보살피고 있었다.서인경이 두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은 없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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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0화

안태비와 흔태비의 얼굴에는 격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이야기는, 그들에게는 지금껏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언젠가 정말 궁을 떠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평생 이 높은 성벽 안에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된다면...삶이라는 것이 갑자기 기다릴 이유가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성벽 밖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머리를 쥐어짜며 어떻게든 성벽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도 있었다.예를 들면 태황태후 궁에 머물고 있는 단은설. 또 하나의 예로는 나중에 스스로 궁에 들어온 유가영이 있었다.유가영은 입궁한 뒤 유난히도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스스로 궁 안에서도 가장 외진 전각에 살겠다고 청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안태비와 흔태비의 궁과 이웃한 곳이었다.사건이 일어났던 날에도 그녀는 몇 번이나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서인경이 사람을 시켜 문 밖에서 막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녀는 또 찾아왔다.서인경은 원래 돌려보낼 생각이었다.그러나 안태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들어오게 하시지요. 안 그러면 매일같이 찾아올 텐데,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잖아요.”흔태비는 그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서인경이 함께 있었기에 그녀도 서둘러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다음에 황후 마마께서 안 계실 때면 저희는 더더욱 막지 못할 거예요. 지금 저 사람도 아이를 가진 몸이잖아요. 혹시 무슨 꿍꿍이로 왔는지 누가 알겠어요? 만약 여기서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희가 입이 백 개라도 설명할 길이 없을 거예요.”서인경은 흔태비의 겁먹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날 일로 크게 놀란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예전에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 준 사람들이었다. 그 은혜는 서인경이 평생 잊지 않을 것이었다.서인경은 유모에게 말했다.“들어오게 하거라.”유모가 물러나고 잠시 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유가영을 너무 오래 보지 못해 서인경은 그녀의 얼굴이 어떤지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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