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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1화

꼬막이는 반으로 갈라진 수박을 두 손에 들고 한 입 베어 물고는 즙을 쭉쭉 빨아 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이 버림받은 처지라며 억울함을 토해내고 있었다.목에는 번쩍이는 장명쇄가 걸려 있었는데 아마 맹경운에게 데려온 뒤 다시 채워준 모양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장명쇄는 이미 수박 즙으로 한 번 씻긴 상태였다.꼬막이를 보니 손이며 얼굴이며 온몸이 온통 붉은 즙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그때 서인경과 연기준이 안으로 들어오자 꼬막이의 작은 눈이 번쩍 빛났다.그는 들고 있던 수박 껍질을 내던지듯 버리고는 두 사람을 향해 냅다 달려왔다.“아버지, 어머니, 꼬막이가 보고 싶었어요!”뒤에 서 있던 봉한설과 평이는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이 아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또박또박 말도 잘하면서 유독 서인경과 연기준 앞에만 서면 저절로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바뀌었다.온몸에 수박 즙을 묻힌 채 그대로 두 사람에게 몸을 비비려 들자 서인경과 연기준은 약속이나 한 듯 양옆으로 피했다.“옷 갈아입고 오거라!”연기준은 변방에 머문 지 벌써 보름이 넘었고 가지고 온 옷도 애초에 많지 않았다. 며칠 전 전투에서 두 벌이나 망가져 이제 갈아입을 것도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 옷까지 더러워지면 오늘은 정말 알몸으로 지내야 할 판이었다.반면, 서인경의 행동은 완전히 반사적인 것이었다. 이 작은 녀석은 길에서 나쁜 버릇을 하나 배워와서는 손에 묻은 진흙을 깨끗한 옷에 문지르길 좋아했기 때문이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꼬막이는 이미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 있었다.“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꼬막이를 싫어합니다. 그럼 나 이름도 아무개라고 할래요!”서인경은 평이가 내민 물대야를 받아 들고 쪼그려 앉아 그의 손을 씻기며 차분히 타일렀다.“우리 꼬막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헌데 이렇게 더러운 손을 다른 사람 옷에 문지르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지. 우리 잘생긴 꼬막이는 예의 바른 아이가 되고 싶지 않느냐?”연기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흔들렸다.서인경이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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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2화

그 모든 일을 마친 뒤, 연기준은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서인경은 이미 책상 앞에 앉아 군무 관련 문서를 넘겨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최근 전투 상황과 병력 손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눈에 띄게도, 사흘 전 전투의 피해가 가장 컸다. 연강호가 변방에 도착한 뒤, 진국 군에 적잖은 혼란을 안긴 것이 분명했다.서인경이 그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던 순간, 눈앞의 문서가 갑자기 뽑혀 나갔다.연기준은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익숙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내 입술이 가까워지고 뜨거운 숨결이 거의 그녀를 감싸 안았다. 서인경이 무심코 몸을 뒤로 물리자 연기준의 눈이 번뜩이며 그녀를 노려봤다. 그 눈동자에는 채워지지 않은 욕망과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잠깐 떨어져 있으면 신혼보다 더 뜨겁다던데 넌 그렇지 않느냐?”서인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노골적이었지?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아직 씻지도 않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막 돌아서려는 순간, 허리를 감싼 큰 손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 연기준의 숨결이 다시금 코끝을 가득 채웠다.“끝나고 같이 씻으면 되지.”다음 순간, 책상 위의 문서들이 그의 손에 쓸려 바닥으로 흩어졌고 서인경은 그대로 들어 올려져 책상 위에 앉혀졌다. 옷이 하나둘씩 벗겨지자 이번에는 서인경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이별이 얼마나 뜨겁게 돌아오는지.허리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연기준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몸이 저릿하게 떨려왔다.군영은 왕부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기에 서인경은 겨우 욕조에서 간단히 몸을 씻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연기준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이 사람은, 왜인지 모르게 끝이 없는 힘을 가진 듯했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연기준은 두 팔에 힘을 주며 마치 그녀를 자신의 안으로 끌어안아 버리려는 듯했다.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서인경의 머릿속에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연기준은 어쩌면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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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3화

연기준이 더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자 서인경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고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다. 생각을 맡고 있던 정신은 아직 허공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멍하게 흩어져 있었다.서인경은 지금 연기준이 자신을 속이는 걸 알아채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연기준이 군영으로 떠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정리한 뒤 곧 사람을 보내 맹경운을 불러오게 했다.맹경운은 마침 성 안의 방비를 점검하던 중이었는데 서인경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찾아왔다.“마마, 무슨 분부이십니까?”그가 한참이나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서인경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차를 마시고 있었고 꼬막이는 그녀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모녀는 철저히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맹경운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짧은 1분 사이, 그는 지난 1년간 자신이 한 일을 전부 떠올려 보았다.딱히 문제 될 만한 짓은 없었는데…속은 점점 조급해졌다. 성 안의 병사들이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마, 부르신 뜻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 일도 아니시라면 저는 다시 임무로 돌아가야 합니다.”서인경은 찻잔을 내려놓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맹 장군, 연기준을 따른지 몇 년 되었느냐?”맹경운의 긴장이 단번에 더 조여들었다. 보통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나오면 반드시 큰일이 난다는 뜻이었다.서인경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구, 구 년입니다.”“구 년…”서인경은 몸을 뒤로 젖혀 긴 의자에 기대 앉았다. 시선은 천장 너머로 향했다.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들어온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들며 묘하게 서늘한 기운을 드리웠다.“시간이 꽤 됐구나. 맹 장군, 앞으로 또 다른 구 년을 보내고 싶으냐?”맹경운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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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4화

하지만 지금은…맹경운은 그제야 진짜 위기가 닥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얼굴빛은 어리둥절함에서 점점 신중함으로 굳어갔다.어떤 말을 해야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그러나 서인경은 단번에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거짓말하면 연기준을 시켜서 너를 멀리 보내버릴 방법쯤은 얼마든지 있다. 베갯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맹경운은 속으로 숨이 막힐 듯했다. 감히 얕볼 리가 있겠는가. 지금 그는 오히려 그 베갯바람을 모셔두고 싶을 지경이었다.“저는 감히 그럴 리 없습니다. 다만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금슬이 깊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황후 마마께서도 이렇게 점검하실 때가 있으시군요. 헌데 안심하셔도 됩니다. 폐하의 마음속에는 황후 마마 한 분뿐이십니다. 게다가 변방은 매일같이 전투가 이어지고 장수들은 모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폐하께서도 하루 종일 정무에 시달리시고 곁에 있는 건 저희 같은 거친 사내들뿐이지요. 맹세컨대 어떠한 여인도 폐하께서 계신 곳 십 장 안으로 가까이한 적이 없습니다.”서인경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맹경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맹 장군, 넌 연기준이 가장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너한테 묻는 거야. 만약 어떤 일을 내가 다른 사람 입에서 먼저 듣게 된다면 네 자리는 보장 못 한다. 잘 생각하고 말하거라.”맹경운은 가슴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버티기조차 힘들었다.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던 꼬막이는 손에 토끼 인형을 들고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맹 아저씨, 우리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여자는 절대 화나게 하면 안 된다고요. 특히 우리 어머니처럼 무서운 여자는 더더욱 말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맞는대요! 헌데 아저씨가 아버지를 화나게 했다면 어머니는 아저씨를 지켜줄 수 있을 겁니다.”이 모자, 제발 사람을 덜 놀래키면 안 되나.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황후 마마, 말씀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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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5화

연기준은 군영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서인경이 맹경운을 불렀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불운한 맹경운이라는 사람은 서인경에게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연기준 앞에 달려와매끈하게 무릎을 꿇고는 거의 무너질 듯한 얼굴로 외쳤다.“폐하,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신은 결코 일부러 폐하를 팔아넘긴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황후 마마와 대황자 전하께서 한마음으로 몰아붙이시는 바람에 제가 겁에 질려 그만… 입이 미끄러져 전부 말해버렸습니다.”연기준은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핑계는 잘도 대는구나. 진국의 장군이라는 자가, 고작 여인 하나와 아이 하나에 겁을 먹고 저 꼴이 되어, 뻔뻔하게 내 앞에 와서 변명이나 하다니.”맹경운은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그게 어디 보통 여인과 아이인가. 그건 사람 속을 훤히 꿰뚫는 모자였다.연기준은 서인경이 영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무언가를 짐작했을 터였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내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맹경운은 얼른 일어나 뒤를 쫓았다. 혹시라도 옆에서 말을 보태며 만회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문 앞에 다다르자 연기준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밀서에 적힌 일부터 처리하거라.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훈련장에서 나와 맞붙게 될 것이다.”맹경운은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얼굴에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포가 번졌다.어제도 훈련장에서 연기준과 겨뤘다가 그 자리에서 처참히 당했던 터라 지금도 엉덩이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돌아서 책상 앞으로 향했다. 탁자 위에는 누가 보냈는지 모를 밀서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진국 군영 안에 아직도 요동에서 파견된 첩자가 숨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맹경운의 표정이 굳어졌다.연기준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연기준은 임시 거처로 쓰는 부청으로 돌아왔다.멀리서부터 문 앞 계단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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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6화

봉한설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다 남겨두는 겁니까?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둘 정도만 먼저 남겨보는 게 어떻습니까?”서인경은 담담하게 답했다.“고작 넷인데 뭐가 많은 것이냐. 옛날에 무측천이라는 여황제가 있었는데 후궁에 미녀가 삼천, 미남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대. 넷쯤이야, 그 사람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봉한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 역시 제가 책을 덜 읽어서 견문이 짧았던 거군요. 넷도 많다고 생각하다니. 선조들이야말로 더 잘 즐길 줄 아는 법이네요. 앞으로 전 죽어도 마마 곁에 붙어서 더 많이 배우겠습니다.”평이는 얼굴을 붉힌 채 허둥지둥 끼어들었다.“그만 좀 하거라! 황후 마마께서는 원래 얼마나 순수하셨는데! 다 네가 망쳐놓은 것이다!”서인경과 봉한설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그 시선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눈이 먼 걸까, 아니면 순수하다는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걸까?연기준은 한참을 듣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보게 되었다. 서인경과 봉한설, 평이가 상반신을 드러낸 네 남자를 앞에 두고 하나하나 품평을 하고 있는 광경을.서인경과 봉한설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반면, 평이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손가락 사이가 다 벌어져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연기준이 들어서자 네 남자는 깜짝 놀라 바닥에 놓인 옷을 움켜쥐고 허겁지겁 몸을 가렸다.“폐, 폐하!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저희가 원해서 온 게 아니라 황후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저희를 데려오신 겁니다!”언제부터 이런 짓까지 배운 건지.연기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곧장 서인경에게 꽂혔다.“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그러나 서인경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조금도 찔리는 기색 없이, 마치 스스로 당당하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그리고 입을 열었다.“당신, 죽고 싶다면서요. 그럼 죽기 전에 꼬막이 새 아버지부터 골라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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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7화

봉한설은 연기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꼬막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벌 같은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연기준은 어릴 때부터 봉한설을 통제하지 못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었다.게다가 꼬막이는 그녀에게 있어 심장보다 더 소중한 아이였다.평이 역시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다.마당에는 이제 서인경과 연기준, 두 사람만이 남았다.연기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앉아 있는 서인경을 바라봤다.“여황제라도 될 생각이냐?”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그는 똑똑히 들었다. 후궁에 미녀 삼천, 미남이 셀 수 없이 많다는 이야기.그녀는 그게 부러운 걸까.서인경은 아무렇지 않게 긴 의자에 앉았다.“당신이 죽으면 어린 군주에 나라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겠지요. 그때라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연기준은 할 말을 잃었다.이 판은 자신이 완전히 진 것이다.서인경이 후궁에 미남을 가득 들이는 장면이 떠오르자 그의 심장은 미칠 듯이 시려왔다. 그게 전부 자신을 약 올리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결국 내가 그날 밤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싶은 것이지 않느냐. 그걸 알아내겠다고 그렇게까지 일을 벌이고, 비꼬고, 심지어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냐? 정말 그렇게까지 하고 싶단 말이냐?”서인경은 눈을 굴렸다.“아까 그 네 명이면 충분하니까요. 그렇게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한 사람 얼굴만 계속 보는 것도 질리잖아요.”연기준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속에서는 분명 화가 치밀고 있었지만 저렇게 태연한 얼굴을 마주하니 그 분노가 이상하게 힘을 잃었다.한참을 지나서야, 그는 결국 먼저 물러섰다.“야랑국의 덕비, 그리고 예정연을 만났다.”서인경은 그 이름들을 듣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벌써 변방까지 왔네요. 꽤 서두른 모양입니다.”연기준은 말을 이었다.“진방옥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하나, 우연히 알게 된 게 있다.”서인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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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8화

그가 끝내 생각한 것은 결국 서인경이었다.그녀에게 남겨주고 싶은 것은 서로 불신하고 위태로우며 각자의 속셈을 품은 채 흩어진 일불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보통의 어려움 정도로 연기준이 이렇게까지 두려워 할리 없을 터.“사라진 아이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찾은 겁니까?”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동쪽으로 팔십 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다. 입구에는 홍주림이 펼쳐져 있는데, 지금까지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납치된 아이들은 아마 그 안에 있을 거다. 덕비의 말로는, 그 붉은 숲을 지키며 장생불사를 연구하는 자는 이미 금족 최고 경지의 무공을 익혔다고 한다. 그 자에게서 사람을 구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서인경은 그가 드디어 핵심을 말하려 한다는 걸 느꼈다.“그 방법이 당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연기준은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금족의 선조들은 이 무공을 창안할 때, 혹시라도 악한 자가 이 힘을 손에 넣어 세상을 어지럽힐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 무공에 스스로 족쇄를 걸어 두었다. 그게 마지막 초식, ‘이형환영’이다. 금족의 혈맥을 지닌 자와, 금족 최고 경지의 무공을 익힌 자가 목숨을 맞바꾸면 그를 쓰러뜨릴 수 있다. 이형환영은 금족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익혀야 하는 기술이다. 심지어 무공을 모르는 여자와 아이들조차도 예외가 없다. 악한 마음을 품은 자가 나타나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함께 죽는 방식으로 막으라는 뜻이다.”서인경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황당한 방법이란 말인가.하지만 곱씹을수록 이상한 점이 더 또렷해졌다.“당신, 금족 무공을 연마한 적이 없잖아요. 그건 어디서 배운 겁니까?”연기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금족 무공은… 사실 그 한 초식밖에 모른다. 이형환영.”서인경은 말문이 막혔다.결국, 처음부터 희생을 위해 준비된 셈이었다.“그건 누가 가르쳐준 겁니까?”“예전에 야랑국 금족의 지하 묘지에 갔을 때, 벽면에 수많은 무공 도식이 새겨져 있었다. 금족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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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9화

서인경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연기준이 그녀를 떼어놓고 혼자 움직이는 일은더는 불가능해졌다.다만 홍주림으로 향하기 전에 반드시 요동과의 전쟁부터 정리해야 했다.*이튿날, 요동의 사신이 도착했다.그는 금수 대장공주의 친필 서신을 가져왔다.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양국은 혼인을 맺은 뒤로 영광을 함께 나누며 한 몸처럼 지내왔고 이미 이십여 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늘 태평성대를 누려왔다. 그러니 이제 와서 굳이 전쟁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한마디로 연기준과 마주 앉아 앞으로도 두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할 방도를 함께 논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서신이 탁자 위에 놓이자 맹경운이 곧장 욕설을 터뜨렸다.“태평한 건 요동 쪽 얘기지! 우리 진국의 변방 백성들은 십수 년을 떠돌아다니며 고생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맞습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 백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합니다!”“싸웁시다!”“싸웁시다!”“싸웁시다!”부장들은 하나같이 격앙되어 있었다. 금수 대장공주의 제안 따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십 년 쌓인 원한과 계산 속에서 이미 두 나라는 다시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연기준은 책상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맹경운은 강경한 주전파였다. 그는 심지어 요동의 수도까지 쳐들어가 그들의 군주의 목을 베어 억울하게 죽어간 백성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어 했다.“말단 장수, 출전을 청합니다! 요동의 군주를 베지 못하면 결코 군을 거두지 않겠습니다!”부장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출정을 청했다.그 함성은 하늘을 울렸고 막사 밖의 병사들까지도 무기를 움켜쥔 채 긴장된 눈빛을 드러냈다.그때, 서인경이 꼬막이의 손을 잡고 부청에서 군영으로 들어왔다. 막사에 가까이 다다르자 안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이 들려왔다.서인경은 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섰다.“다들 이렇게 들떠 있는 걸 보니 죽으러 가고 싶은 모양이네?”장수들이 고개를 돌렸다.한 손에는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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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0화

서인경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그녀는 장 부장 곁으로 다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의 갑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장 백부는 어릴 때부터 내 곁에 있지 않았느냐? 내가 사람을 속인 적이 있었느냐?”뜻밖의 다정함에 장 부장은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는 서가군에 대한 충성이 깊었고 서 노장군을 아버지처럼 여겨왔다. 서인경을 보자마자 마치 제 딸을 보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그는 금세 설득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없지요. 황후 마마께서 무슨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마마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겉으로만 하는 말이었다. 누가 봐도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서인경은 그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장 부장은 그저 그녀를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서인경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셌다.셋, 둘, 하나.그 순간, 장 부장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몸에서 느껴지던 생기와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 그는 텅 빈 눈으로 아무 기색 없이 서인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인경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명령했다.“가서, 저걸 먹거라.”순간, 장수들의 얼굴이 굳었다.장 부장은 아무 저항도 없이 의자 앞으로 걸어가더니 정말로 의자 팔걸이를 입에 물었다. 씹히지 않자 더 세게 물었고 이내 잇몸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이게… 장 부장, 대체 무슨 짓입니까?”“그거 놓으십시오! 그건 먹는 게 아닙니다! 제정신입니까?”“이상하네! 장 부장, 대체 왜 저러는 것인가?”“귀신 들린 것 같은데!”“설마 황후 마마의 말씀이 진짜였던 겁니까? 이게 바로 고충에 걸린 겁니까?”연기준은 한 손으로 꼬막이를 붙든 채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인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서인경은 장 부장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기세를 보이자 충분하다 싶었는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은침 하나를 꽂았다.장 부장의 눈이 뒤집히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서인경은 아무렇지 않게 은침을 거두며 말했다.“셋,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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