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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111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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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서인경은 두 손을 털며 돌아섰다.“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뭐가 두려워서 감춘 겁니까? 그리고 거짓말은 왜 한 겁니까?”그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단 하나, 속이 켕기기 때문일 것이다.“왕야는 제 돈으로 원래 제게 주려던 것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인에게 내주고도 도리어 저에게 잘못을 따지려고 하는 겁니까?”연기준이 무슨 대꾸를 할지 뻔히 짐작한 듯 서인경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겨우 한 닢일 뿐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그 한 닢도 제가 피땀 흘려가며 번 돈입니다. 그것을 쓸지 말지는 오직 저의 권한일 뿐, 누구도 저를 대신해서 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특히 왕야라면 더더욱.”연기준은 스스로도 잘못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부드러운 어투로 그녀를 달래주었다.“본왕의 잘못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그러자 서인경의 입술은 서늘한 비웃음으로 휘어졌다.“그 말을 누가 믿습니까? 언젠가 또 다른 여인이 제 목숨을 원한다면 왕야께서는 기꺼이 바치실 테지요.”그 말에 연기준의 얼굴빛이 단박에 바뀌었다.“네 눈에 본왕이 그리 보이느냐?”서인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전생을 떠올렸다. 안락당의 싸늘한 공기와 무력하게 잠식되어 가던 나날들이 어렴풋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아마도 요즘 연기준이 보여준 태도에 마음이 흔들려 그 기억마저 잊을 뻔했던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겨우 만두 하나가 그녀를 다시 정신 차리게 했다는 것.“왕야의 인품은 왕야께서 진정 아끼는 이들에게 증명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알아두세요.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군무를 익힐 것이고 서 가의 다음 주인은 제가 될 겁니다. 왕야의 속셈 따위는 거두어들이시지요. 저는 왕야의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고 서 가 역시 당신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연기준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서 가를 잇겠다는 것이냐?”오히려 그 반응은 그녀의 결심을 더 굳히는 불씨가 되었다.“서가군은 서 가의 것입니다. 제가 잇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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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서인경은 술 항아리를 받아들고 맹은영을 이끌어 자기 뜰로 향했다.“오늘은 내가 아가씨를 챙겨야 하네. 아니면...”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맹은영은 한치의 주저도 없이 이어받았다.“상왕과 다툰 것입니까?”서인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것인가?”맹은영은 태연하게 대꾸했다.“왕비마마께서 친정으로 돌아갔다 들었습니다. 장군댁에서 이틀이나 묵었으니 싸우지 않고서야 상왕께서 어찌 마마를 이리 풀어둘 수 있겠습니까?”서인경은 속이 막힌 듯 답답했다. 왜 하필 맹은영조차 이 사실을 상왕이 허락한 자비라 여기는 것일까?잠시 후 두 사람은 곧 방 안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서인경은 사람을 보내 서회윤에게 오늘 저녁은 함께하지 못한다고 전하게 했다. 맹은영은 국을 스스로 떠 마시며 입으로만 겸연쩍게 말했다.“제가 마마를 붙잡아두어 장군님께서 홀로 저녁을 드시게 되었군요. 송구합니다.”서인경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걱정 말게.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아가씨가 와서 기뻐하셨다네. 우리에게 안주를 더 올리라 분부한 걸 보면 모르겠는가?”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관이 들어서더니 시녀 넷이 줄줄이 접시를 들고 들어와 상 위에 차려놓았다. 맹은영은 술은 마시지 못했으나 그녀가 가져온 술은 서인경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잔을 몇 번 비우더니 마침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 사람은 아마 속으로 겨우 한 닢, 겨우 만두 하나쯤이라 여겼을 걸세. 정작 나를 속 좁다 흉보며 따지고 드는 여자라 여겼겠지.”이에 맹은영은 시집도 안 간 처녀이면서 마치 오래 산 여인처럼 태연히 입을 열었다.“상왕께서 마마를 속였다는 것은 그만큼 마마를 의식했다는 것이고 마마를 신경 쓴다는 뜻이지요.”서인경은 순간 그녀가 연기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얼굴빛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자 맹은영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잠깐만, 화내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저희 집은 아버지에 오라버니 셋입니다. 그 사이에서 제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사내란 직접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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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서인경은 몇 마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자 결국 연기준이 장원에 아이를 숨겨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맹은영은 그 말을 듣자 두 눈을 크게 뜨며 술기운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한설? 한설이요? 설마… 상왕과 단은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한설입니까?”서인경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의 뺨은 술기운에 붉게 물들었으나 정신만큼은 또렷했다.“아닐 걸세. 만약 그 아이가 단은설의 자식이라면 진작에 그걸 무기 삼아 온 궁을 뒤흔들었을 것이네. 최소한 측비 자리라도 얻어 떳떳이 왕부에 들어올 수 있었을 테니까. 한데 지금껏 은밀하게 수작만 부린다는 건 그 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뜻이지.”맹은영도 이내 차분해졌다.“마마 말이 맞습니다. 상왕 같은 사람이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황족의 혈맥인데 어찌 밖에 두겠습니까? 진작 왕부로 불러들였겠지요. 게다가 사람들 눈에 왕야가 첩을 하나쯤 두는 건 흠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숨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서인경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죽기 직전까지도 왕부에 군주가 있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만약 진짜 그들의 아이였다면 연기준이 그 아이를 바깥에 둘 이유가 없었다.맹은영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렇다면 상왕께서 마마를 배신한 건 아닐 테고 이 모든 것은 단은설의 수작이 분명한데 마마는 왜 굳이 상왕과 등을 지는 것입니까? 그럼 결국 단은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 아닙니까?”서인경도 단은설이 바라는 결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으니까.연기준이 장원에 있는 아이를 무척 아낀다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일을 정작 정실인 자신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단은설 조차 아는 비밀을 자신에게만 숨겼다는 것은 결국 불신이라는 뜻일 테니.금이 간 유리는 다시 붙을 수 없다. 이 문제는 다른 이들과 상관없는, 그저 그들 둘 사이의 균열일 뿐이다.서인경은 피식 웃었다.“어차피 이제 얼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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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왕야께서 왕비마마를 좀 단속하실 수만 있다면 저희 집 아가씨도 절반은 조용해질 겁니다.”연기준의 미간이 살짝 치켜 올랐다.“자네가 보기에는 본왕이 안 하는 것 같으냐, 아니면 못 하는 것 같으냐?”맹경운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혹시 내가 잘못 짚은 것일까…?그는 머뭇거리다 다시 물었다.“그럼…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려는지 왕야께서는 이미 아신단 말입니까?”연기준은 그저 백옥으로 조각된 계단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과 태연한 걸음걸이가 오히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게로 느껴졌다. 맹경운은 순간 기세에 눌려, 재빨리 몇 걸음 쫓아가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왕야, 한 마디만 귀띔해 주십시오. 두 사람이 또 무슨 화를 내고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됩니다. 혹 위험이라도 닥치면 저도 즉시 나서서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연기준은 옅은 표정으로 담담히 내뱉었다.“본왕이 내 여인을 지킬 때 네 누이를 같이 챙기는 것쯤이야 그리 수고스러운 일은 아니지.”맹경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왕부로 돌아온 연기준을 맞이한 건 방금 막 장원에서 돌아온 연풍이었다.“왕야, 한설 아가씨의 기운이 한결 나아졌사옵니다. 호청 말로는 그날 강가에서 찬 바람을 쐬어 원래 앓던 병이 심해져 몸살이 난 거라 하였사옵니다. 지금은 회복 중이옵니다.”연기준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내년 봄 따뜻해질 때까지 그 아이는 절대 밖에 내보내지 말거라. 호청이 또 마음 약해져 허락한다면 곧장 국경으로 쫓아내겠다.”연풍은 며칠 내내 호청이 그녀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으며 정성껏 돌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헌신은 부모를 모실 때보다도 더 지극했다.“명 받들겠사옵니다. 왕야 명 없이는 한 발짝도 내보내지 않겠사옵니다.”연기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또 명을 내렸다.“장군댁을 주시하거라. 오늘 밤 왕비가 집을 나선다면 그 뒤를 따라다니며 보고하도록.”연풍은 순간 멍해졌다.“지금 왕비마마를 감시하라는 말씀이옵니까?”연기준의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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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평이는 화가 안 풀렸는지 그에게 발길질하며 성을 냈다.“흥! 이제 귀군과는 놀지 않을 것입니다.”그녀가 말을 마치고 돌아섰을 때 연풍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아프지는 않는데... 도대체 나는 뭘 잘못한 걸까?’밤이 되자, 하늘에서 가는 눈송이가 흩날렸다. 서인경은 남자 차림으로 갈아입고 두툼한 청색 비단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 호성강에 서 있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눈송이는 아프지 않았으나 뼛속까지 차갑게 파고들었고 호흡을 할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폐부 깊숙이 내려앉았다.강변의 한쪽은 여전히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고 눈발 속에서도 등롱이 찬란히 빛나 더욱 요염한 풍경을 자아냈다. 반대편은 이미 얼어붙은 천리 설강, 며칠 전까지만 해도 뱃놀이가 가능하던 물길은 이제 꽁꽁 얼어붙어 은빛 장막을 펼쳤다.서인경은 잠시 강가에 서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뒤로는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내가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육승과 안포였다.“왕비마마, 정말 왕야께 말씀 안 드렸사옵니까? 이제라도 알려드리는 게…”두 사람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서인경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눈길을 흘기며 장난스레 대꾸했다.“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목숨도 내어줄 듯 큰소리치더니 고작 청루에 한번 데려왔다고 이렇게 투덜대는 것이냐? 내 너희들을 팔아먹기라도 할까 무서운 것이냐?”그녀는 하루 종일 똑같은 질문을 수백 번 듣고 있었다.육승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왕비마마, 그런 뜻은 아니옵니다. 다만 왕야께서 아시면 분명 노하실 것이옵니다.”안포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맞사옵니다.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저희는 호성강에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이런 곳은… 제발…”서인경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이 한겨울에 호성강에 뛰어들어서 무얼 하겠느냐? 오히려 방 안이 훨씬 따뜻하지. 고운 얼굴을 보며 좋은 술을 마시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낙이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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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서인경과 맹은영은 흐드러진 웃음소리에 휩쓸리듯 한 무리의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청루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육승과 안포는 몸이 굳어져 마치 쇠기둥처럼 똑바로 서 있기만 했다. 이 화려하고 요염한 공간은 그들의 세계가 아니었기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질감이 더 짙어졌다. 겨울밤의 매서운 한기조차 경성 사람들의 열정과 방탕은 꺾지 못했다.누각 안은 황금이 녹아내린 듯 찬란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주로 인해 눈과 귀에는 온통 환락이 쏟아졌다. 기녀 하나가 그들을 이끌어 2층의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문이 닫히자, 아래층에서 들려오던 거친 농담과 음탕한 웃음소리가 단박에 차단되었다.“공자님들은 어떤 취향이십니까? 저희 만춘원에는 무엇이나 다 있습니다.”맹은영은 천천히 소매 속에서 한 자루 접선을 꺼냈다. 부드럽게 펴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런 곳에 자주 드나드는 한량 같았다.“나와 내 동무들이 갓 경성에 발을 들였는데, 들어보니 최근 새 화괴(花魁:꽃의 우두머리)가 뽑혔다 하더군. 바로 그 이름을 듣고 찾아온 길이니 어서 불러내어 한 번 보게 해주거라.”기녀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머뭇거렸다.“아이고, 원래 화괴를 뵙고자 오는 분들이 하도 많아 벌써 예약이 다음 달까지 밀려 있습니다. 공자님들 성함을 적어두고 기다리시는 게 나으실 듯합니다.”맹은영은 순간 곤란한 듯 서인경을 흘끗 바라봤다.“이를 어찌하면 좋을지…”서인경은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뭘 보는 것이냐? 우리에게는 고작 사흘밖에 없다. 한데 다음 달까지 기다리라니! 본 공자는 오늘 반드시 화괴를 봐야겠구나. 만약 못 본다면 이 만춘원 땅을 파헤쳐 버리겠다!”그 기세에 맹은영은 난처하게 웃으며 기녀를 달랬다.“그대의 성함은 무엇이냐?”“목단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여기서는 마담 다음으로 제가 모든 걸 관리하거든요.”맹은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다.“목단 아가씨,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주거라. 우리 형님께서는 성정이 거칠어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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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맹은영은 본래 몸이 약해 세상 구경을 자주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자극적인 곳에 발을 들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늘 서인경이 자신을 위해 나서 주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가슴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교차했다.“저희가 데려온 건 고작 두 명입니다. 하지만 이런 곳에는 심어둔 호위들만 족히 수십 명은 되지 않습니까?”서인경은 그녀의 손에서 부채를 빼앗아 느긋하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연기준, 그 자는 반드시 올 걸세. 믿기지 않으면 저들에게 물어보든지.”육승은 속으로 감탄했다.‘과연 왕비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군.’안포는 옆에서 식은땀을 훔쳤다.‘역시 왕비의 눈은 매섭구나. 뒤를 밟고 있는 사실까지 다 꿰뚫어 보다니.’“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무리의 그림자가 뒤를 따랐사옵니다. 한쪽은 왕야의 사람, 다른 한쪽은 해를 끼칠 의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맹 가의 셋째 도련님께서 붙이신 이들 같사옵니다.”맹은영은 그제야 안심했다. 드디어 긴장이 풀리자 그녀는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누군가 저를 지켜준다는 기분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한데 아쉽게도… 언제나 다른 집 사내들이라는 게 문제지요.”서인경은 부채질이 멈추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어서재에서는 그토록 목숨 걸며 버티더니 지금은 후회라도 하는 겐가?”맹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후회는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는 축복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이들이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요.”서인경은 그녀 말속에 숨은 뜻을 눈치챘으나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상왕께서 마마를 꽤나 신경 쓰는 것 같은데 마마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하지만 서인경의 대답은 단호했다.“내가 상왕비라는 이름으로 경거망동해 자기 체면을 깎아내릴까 두려운 것이겠지.”맹은영은 턱을 괴고 혀를 찼다.“고집도 참.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는 건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 마음까지 부정하면 안 되지요.”서인경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가슴속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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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목단의 뒤를 따라 들어온 여인은 분홍빛 얇은 비단을 걸친 채 맑고 투명한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연하고도 청아한 자태, 빼어난 용모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요염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뽑힌 화괴는 과연 세상에 둘도 없는 절색미인이었다. 여자인 서인경조차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화괴 온조는 살짝 허리를 굽혀 정중히 예를 올렸다.“소녀 온조, 두 분 공자께 인사드립니다. 성은에 감사드리오나 이미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 오래 머무르기 어렵습니다. 부디 소녀가 술을 따르며 사죄드리오니 훗날 기회가 된다면 정성껏 모시겠습니다.”역시 청루의 기둥 같은 인물인지라 단정하고도 절도 있는 말투를 한 그녀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서인경은 그녀의 잔을 따르는 맑은 물 소리를 듣다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단호히 입을 열었다.“목단 아가씨, 마담에게 전해주거라. 은전 오백 냥을 줄 테니 화괴는 오늘 밤 우리를 위해 여기에 머물게 하겠다고.”말이 떨어지자 목단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공자, 절대로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분명 얼굴만 보고 보내드리기로 약조했잖습니까.”서인경은 게으른 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날카롭게 반박했다.“그건 내 아우가 한 약속일 뿐. 본공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육승과 안포가 눈치를 채고 무심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두 사람의 거대한 체구가 문 앞을 막아서자 방 안의 공기는 즉시 얼어붙었다.그러자 목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뒤돌아 맹은영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태연히 술잔 가장자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잘못했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멀어 욕심을 냈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쪽 손님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분입니다. 마담께 들키기라도 한다면 소녀는 죽은 목숨입니다.”목단은 두 손을 합장하며 울먹였다. 하지만 온조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조용히 술병을 내려놓았다.“소녀를 아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청루에는 청루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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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분홍빛 옷자락을 두른 온조는 잠시 흔들림 없던 얼굴에 미세한 표정 변화가 일었다.“두 분 나리께서 억지를 부리신다면 저도 더는 따르지 않겠습니다. 충고 하나 하자면 여기는 장터가 아니라 만춘원입니다. 돈으로 즐거움을 사고 기쁘게 돌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지요.”서인경은 부채를 휘적이며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허나, 본좌가 사고 싶은 건 바로 너 한 사람뿐이라면?”말 한마디에 방 안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목단과 온조의 얼굴은 동시에 굳어버렸다.서인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육승과 안포는 눈치껏 문을 더욱 단단히 지켰다.목단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더 지체하면 참사로 번질 게 뻔했기에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처음에는 귀한 손님이라 여겨 웃으며 맞이했으나 점점 선을 넘는군요! 여기는 천하의 경성, 죄다 권세 있는 이들만 모여있는 곳입니다. 우리 만춘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나 합니까? 이름만 대도 기절초풍할 것입니다!”서인경은 눈꼬리를 살짝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음... 그 이름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보자.”곁에 있던 맹은영은 마치 구경거리라도 난 듯 잔을 들며 즐거운 듯 중얼거렸다.“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겁먹어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좀 기대가 되는군.”목단은 진땀을 흘리며 눈을 굴렸지만 감히 이름을 뱉을 용기는 없었다.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목단 언니! 안에 있습니까? 어서 나오세요! 온조 언니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몰라도 저쪽 도련님께서 기다리다 성이 나셨습니다! 다른 아가씨들이 달래도 막을 수가 없어요!”서인경은 손짓으로 육승에게 문을 열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온조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저쪽에 가서 전하거라. 이 아가씨는 지금 내 옆에 있다고. 원한다면 직접 데리러 오라 하거라.”손목이 잡히는 순간, 온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미묘한 감정이 얽힌 눈빛으로 서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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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단평안은 이를 갈며 서인경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이곳은 내 땅이다. 네가 스스로 올무에 걸려든 셈이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네가 어떻게 내 발 아래에서… 크윽!”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승의 팔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그의 묵직한 손바닥이 단번에 단평안의 뺨을 후려쳤다.그 순간, 선 붉은 피와 함께 두 개의 이빨이 바닥에 나뒹굴었다.단평안은 사람인지 널브러진 짐짝인지 모를 형태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신음만 뱉어냈다.그 모습에 놀란 마담은 기겁하며 소리쳤다.“아이고, 어서! 어서 도련님을 부축하거라! 배은망덕한 놈들, 감히 손님을 치다니! 이자들이 미쳤구나. 당장 끌어내거라!”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들이 곤봉을 들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육승과 안포의 발길질에 돌진하던 이들은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계단을 굴러내린 육중한 몸들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래층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서인경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다 그녀는 문득 곁에 있는 맹은영이 걱정되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흥분으로 뺨이 붉게 상기된 채 당장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서인경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온조는 갑자기 벌어진 큰 싸움에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눈빛만은 덤덤했다.그때, 단평안은 입술을 달싹이며 겨우 한마디 꺼냈다.“상왕비...”당시 문이 열려 있던 터라 아래층의 떠들썩한 소음은 그대로 위 층에 전해졌다. 그래서 단평안의 목소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만 겨우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온조가 바로 그의 옆에 있었기에 ‘상왕비’라는 세 글자가 똑똑히 그녀의 귀에 흘러들었다.그녀는 구석으로 몸을 숨기며 집요하게 서인경을 바라보았다.마담은 이제야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으나 물러서기는커녕 더욱 기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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