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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131 - Chapter 140

209 Chapters

제131화

서인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만춘원에 있던 다른 아가씨들은?”맹은영은 눈을 찡긋하며 되물었다.“사실은 온조 아가씨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지요?”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맹은영은 아침에 셋째 오라버니가 전해온 이야기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아가씨들은 모두 몸값 문서를 돌려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가난한 집 출신이라 친정이 있어도 돌아가기 힘들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 봤자 손가락질 당할 것이고 몸을 팔아 집안을 욕보였다는 소문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대개는 다른 청루로 흩어져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온조는 갓 뽑힌 화괴이지 않습니까? 여러 청루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다더군요. 다들 온조로 돈을 벌 궁리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마마께서 찾아온 뒤로는 종적이 묘연하다고 들었습니다. 누구도 온조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만약 오늘 밤 온조가 마마를 찾아온다면 정말 그 자의 동생을 찾아주실 겁니까?”서인경은 이미 결심이 선 듯 바로 대답했다.“그 애의 동생이 단 가의 음모와 얽혀 있네. 장부로는 단 가를 끌어내릴 수 없으니 난 다른 길을 찾아야지.”맹은영은 눈을 반짝이며 즉시 손을 들었다.“저도 돕겠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잡혀간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저도 찾는 데 힘을 보탤게요.”서인경은 그녀의 팔을 흘깃 보며 망설였다.“하지만 아가씨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걸 허락하겠는가?”맹은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어차피 저는 시집도 가지 못하는 몸이지 않습니까? 제 체한증도 거의 나았고 마마께서 주신 약 덕분에 상처도 더는 아프지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요즘 마마 칭찬만 하십니다. 그러니 마마를 돕는 일이라면 절대 반대하지 않지요.”서인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언제부터 바깥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그녀는 맹은영의 팔 소매를 걷어 올려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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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연기준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자 육승과 안포는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듯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박았다.“왕야, 감사하옵니다!”“명 받들겠사옵니다! 목숨 걸고 왕비마마를 지키겠사옵니다!”잠시 후, 두 사람은 물러났지만 연기준의 미간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그녀 곁에 붙어 있는 게 그렇게도 즐겁단 말인가? 내 옆에 있을 때는 웃지도 않던 것들이.연기준의 불만이 얼굴에 드러나자 연풍은 그가 전날 밤 왕비에게 문전 박대를 당한 일을 떠올렸다. 그는 조심스레 헛기침을 하며 어설프게 그를 위로했다.“왕비마마께서는 잠시 왕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옵니다. 당장은 마음을 닫으셨을지라도 훗날 왕야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 은혜에 감사드릴 것이옵니다.”연기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본왕이 그녀의 감사를 구걸할 것 같으냐?”어젯밤, 만춘원에서 진방옥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녀,마차 안에서조차 냉랭한 얼굴을 내보이던 그녀,그리고 결국 자기 방 문을 굳게 잠그고 그를 들이지조차 않았던 그녀.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내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것인지?’연풍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단효산께서 장부를 찾고 있사옵니다. 이미 몇 차례 만춘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저희 사람들이 모두 막아냈사옵니다.”연기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만춘원 일은 오늘로 모조리 정리하도록.”“예, 이미 조치를 내려 두었사옵니다.”연기준은 몸을 일으켜 두 걸음쯤 걸어가더니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연풍은 곧장 알아차렸다. 그녀라 함은 당연히 왕비일 것이다.“맹 아가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옵니다.”연기준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모두가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데 어째서 자신에게만은 곁을 내주지 않는 것일까?“군영으로 간다.”연풍은 급히 그 뒤를 따랐다.그 시각, 서인경은 맹은영과 함께 의서를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평이가 헐레벌떡 뛰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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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서인경의 마음은 더욱 쓰라렸다.“가지 말거라. 연기준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한다.”육승과 안포는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이 어찌 이렇게 술술 풀린단 말인가? 너무 순조로워 오히려 어제 거짓말을 했던 게 마음에 걸릴 지경이었다.서인경은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눈빛을 더욱 단단히 굳히고 부관에게 말했다.“이들의 녹봉과 의식주는 상왕부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가 책임질 것이다. 연기준에게 전하거라. 앞으로 이들은 내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이들의 거취를 결정할 권리는 없어.”안포는 벌떡 일어나 단호히 맹세했다.“왕비마마,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녹봉도 의식주도 필요 없사옵니다. 다만 왕부에 남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이제부터 왕비마마의 사람이옵니다. 오로지 왕비마마의 명만 따르겠사옵니다!”육승은 군더더기 없는 말 한마디로 고개를 숙였다.“육승, 주군을 뵙사옵니다.”서인경은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득 그들과 함께 생사를 건너온 세월이 떠올랐다.그들을 절벽에 빠뜨릴 뻔했던 날도, 자신 때문에 쫓겨날 뻔한 지금도 그들은 그녀에 대해 원망의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 그들은 결국 같은 배에 몸을 싣게 된 것이다.곁에서 지켜보던 맹은영은 뭔가 이상한 눈빛의 교환을 느꼈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한지 짚어내지 못했다. 그러더니 곧 그녀의 성격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마마, 이젠 마마도 마마의 사람을 가지게 되었군요! 저도 집에 돌아가면 우리 셋째 오라버니한테 부탁해서 제 사람을 만들어야겠습니다!”한편, 군영.연풍은 전해 받은 소식을 빠짐없이 연기준에게 전했다. 그는 듣자마자 입가를 씰룩이며 낮게 중얼거렸다.“한 무리의 연극꾼들이군!”옆에서 듣고 있던 서회윤은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경이는 의리 있고 정정당당한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 서 씨 집안의 딸 답군요. 왕야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서회윤마저 그의 고심을 알아주니 그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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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저녁 식사가 끝나자 서인경은 안포를 불러 가까이 앉혔다.“너는 장군댁 뒷문에 가 있거라. 술시가 되면 어젯밤 우리가 본 온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오면 바로 여기로 데려와야 한다.”안포는 곧장 명을 받들어 물러갔고 잠시 후 정말 온조를 데려왔다.그녀는 전날 밤의 요염한 기색을 모두 벗어던지고 허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온조는 수수한 색감의 긴 치마를 입었는데 여기저기 얼룩져 누더기처럼 보였다. 그녀의 머리 매무새는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촘촘한 주근깨가 번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길거리를 떠도는 초라한 아낙네나 거지 같았다. 맹은영은 그녀의 몰골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이냐?”온조는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오늘 하루만 해도 저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변장하지 않으면 금세 발각될 게 뻔하지요. 왕비마마를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서인경은 고개를 저었다.“괜찮다. 여기 앉거라.”방 안에는 이제 모두 그녀의 사람이라 여길 수 있는 이들만 모여 있었다. 서인경은 누구도 물러내지 않고 둥글게 둘러앉아 말을 이었다.“네 동생을 찾으러 다녔던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해 보거라.”온조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그녀의 여동생은 이제 막 네 살이 되었고 이름은 온난이었다. 반 년 전 어느 오후, 그녀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고 온난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그녀는 혹시 아이가 밖으로 나갈까 걱정되어 대문에 자물쇠까지 걸어 두었는데 밥을 다 하고 나왔을 때 아이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마당에는 헝겊에 싸인 은자 오십 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최근 이어지던 유아 실종 사건이 자신의 집에도 닥쳤음을 직감했다. 사람들은 그동안 실종된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 온갖 억측을 내놓았다.“산신에게 잡혀 산을 지키게 되었다.”“부잣집에서 골라 가서 어린 며느리로 삼았다.”“그 아이들은 본디 팔자가 사악하여 하늘이 거둬 갔다.”많은 부모들은 은자 오십 냥을 받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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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서인경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수많은 소녀들이 끌려간 뒤 어떤 비극을 맞이하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 오십 냥 은전, 아직 가지고 있느냐?”온조는 고개를 끄덕였다.“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 두었어요. 마마께서 필요하시다면 내일 가져오겠습니다.”그러자 서인경이 다시 물었다.“네가 사는 곳은 어디지?”“성남의 성황묘에 작은 방을 빌려 살고 있습니다.”이 말에 맹은영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거긴 온갖 부류가 들끓는 곳이다. 여기까지 걸어오려면 두 시진이나 걸리는데 어찌하여 그런 데서 지내고 있단 말이냐?”온조는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손에 쥔 돈이 많지 않아서요. 그나마 그곳이 가장 저렴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모든 청루에서 절 찾고 있으니 다른 곳에 머무르면 너무 쉽게 들켜 버릴 겁니다. 화류계의 화괴가 성황묘에 몸을 숨겼으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하겠지요.”서인경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거기에 계속 머물 순 없다. 여인의 몸으로는 너무 위험해. 우리 왕부로 오거라. 나와 함께 살면 네 동생을 찾는 것도 더 수월해질 테니.”뜻밖의 제안에 온조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격에 차 몸 둘 바를 몰라 했다.“아닙니다, 아닙니다… 마마께서는 이미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데 어찌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제 신분이…”“네 신분이 어떻다는 것이냐?”서인경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만춘원은 이미 봉쇄되었으니 넌 이제 자유의 몸이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본왕비가 청루에 드나드는 걸 다 알지 않느냐? 내가 너를 데려와 여동생이라 부른다 한들 감히 누가 뭐라 하겠느냐?”온조는 급히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마마와 자매라 칭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마마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제겐 팔세(八世)의 복이라 여깁니다. 제 동생과 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마마께 충성하며 마마만을 섬기겠습니다.”서인경은 곧장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함부로 무릎을 꿇지 말거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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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만춘원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그날 밤 곧장 단효산의 귀에 들어왔다.그 시각,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젊은 여인을 품에 끼고 있었다. 그 여인은 서풍교가 아니라 가냘픈 몸매를 한 아리따운 미녀였다.소식을 들은 단효산은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뒷마당이 전부 깡그리 타버린 게 확실하냐?”부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직접 제 눈으로 보았사옵니다. 불길이 워낙 거세 금군이 불을 끄고 들어갔을 땐 이미 전부 재로 변해 있었사옵니다.”이 화재는 수상쩍으면서도 절묘한 시점에 일어났다. 소문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순성어사가 상왕의 꾸지람을 듣고 석 달 봉급을 깎였다고 했다.단효산은 그제야 안심했다. 불타 증거가 없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비록 대신들을 쥐고 흔들 증거가 사라졌으나 겁낼 것이 없었다.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장부 문제가 일단락되자 그는 비로소 아들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안 그래도 장부 문제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서풍교가 하루 종일 울고 불며 난리를 치는 통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단효산은 결국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안이는 감옥에서 어떻다더냐? 부인은 오늘 가서 그 아이를 보았느냐?”그러자 그의 부하가 대답했다.“순성어사는 회유도 협박도 통하지 않는 자라 부인께서 길가에서 소리치며 울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사옵니다. 끝내 도련님을 보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대공녀께서 마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셨지요.”그러자 단효산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혐오가 번졌다.“망신만 당한 멍청한 계집! 가지 말라는데 꼭 가서 사달을 내다니! 이게 다 그 여자가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안이도 그렇게 버릇없게 크지는 않았을 텐데!”곁에 있던 젊은 여인이 가녀린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노여움을 푸십시오. 부인께서도 도련님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리하신 게 아니겠습니까.”단효산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흡족하게 얘기했다.“그 여자가 너의 절반만큼만이라도 상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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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또 한참을 걸어가던 중, 온조가 불현듯 소리쳤다.“보입니다. 바로 저기예요!”사람들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 위에 외로이 선 무덤 하나와 나무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지저분한 흔적은 없었다. 비석 앞의 눈은 말끔히 쓸려 있었고 공터에는 한 다발의 탕후루와 과자 봉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땅바닥에는 종이를 태운 뒤 남은 재가 흩어져 있었다.서인경은 온조가 들고 온 같은 모양의 탕후루와 종이돈을 흘끗 쳐다보았다.“벌써 제사를 지낸 건 아니겠지?”온조는 숨을 죽이며 고개를 저었다.“제가 묻은 뒤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때 저 혼자 장례를 치렀으니 다른 사람은 이곳을 알 리가 없지요.”서인경은 미간을 좁히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탕후루와 과자는 분명 어린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즉, 이곳에 누가 묻혔는지 아는 사람이라야만 두고 갈 수 있는 공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헛되이 잘못 찾아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온조는 쪼그리고 앉아 자기가 가져온 탕후루를 나무 비석 앞에 놓았다. 평이도 옆에서 종이돈에 불을 붙여 그녀를 도와주었다.서인경은 비석에 새겨진 삐뚤빼뚤한 글자를 살폈다.‘소화의 묘.’이 아이는 올해 고작 다섯 살이었다고 한다.서인경은 천천히 다가가 손끝으로 글자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소화야, 언니가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게. 다만 그전에 언니가 하는 일을 조금만 거들어주렴.”산골짜기에는 매서운 바람만이 스쳐 지났고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맹은영은 빨갛게 언 코끝을 훌쩍이며 추위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에 몸을 떨었다.온조가 제사를 마치자 사람들은 무덤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가 죽을 당시 온몸이 검게 변했다고 말했기에 서인경이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삽을 들기도 전에 육승이 갑자기 비석 뒤의 흙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무덤, 누군가 건드린 흔적이 있사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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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온조도 그 광경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분명히 저는 검게 변한 걸 봤어요. 절대로 착각이 아니란 말입니다.”서인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마 생전에 무슨 약을 먹어서 이런 반응이 나온 것 같군.”그녀는 머릿속을 재빨리 뒤져 어떤 약이 이런 증세를 남길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그리고 다시 소녀의 눈과 입, 사지까지 꼼꼼히 확인했다.“육승, 내가 준비하라고 한 것 있지?”육승은 삽을 내려두고 품속에서 의료 도구 세트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서인경은 그것을 받아 쥐고 깊게 숨을 들이켠 뒤 떨리는 마음을 꾹 눌렀다.“너희는 물러 서거라. 보지 않는 게 좋겠다.”그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들 묵묵히 십여 보 뒤로 물러났다.서인경은 소녀의 시신을 세밀히 검시했다. 그동안 가장 두려워하던 가능성을 배제한 후에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만약 짐승 같은 짓이 행해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검시를 마친 뒤 그녀는 필요한 몇 가지 증거를 채취해 조심스레 수거했다.그제야 서인경은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때와 먼지로 더럽혀진 작은 얼굴이었지만 이목구비만 보아도 씻겨내면 얼마나 곱고 귀여울지 상상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웃으며 뛰어놀 수 있었을 아이였을 텐데... 천재지변처럼 닥친 비극은 그녀를 영원히 다섯 살에 멈추게 했다.서인경은 평소 귀신이나 윤회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간절히 빌었다.소화가 저승길에서 넉넉히 망각의 국을 마셔 생전의 고통을 잊고 다음 생에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평온히 자라나기를.“됐다, 다시 묻거라.”육승과 안포가 매장을 마쳤을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되는 시각이었다.서인경은 근처 얼지 않은 개울을 찾아가 차디찬 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오늘은 섣달그믐이니, 가자구나. 오늘 밤은 본왕비가 한턱 내겠다. 너희들에게 성대한 저녁을 차려주마.”맹은영과 평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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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연기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명했다.“당장 데려오거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왕비마마, 보십시오! 이 얼마나 경사스럽습니까? 제가 왕부에 들어온 이래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보옵니다.”곧이어 서인경의 목소리가 뒤따랐다.“그럼 실컷 구경해 두렴.”연기준이 소리에 이끌려 문쪽을 바라보니 서인경과 평이가 서로 팔짱을 낀 채 흥겨운 발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낯선 아가씨 하나가 따르고 그 뒤에는 육승과 안포가 모습을 드러냈다.맹은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기준은 속으로 은근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오늘 밤만큼은 나와 그녀를 두고 실랑이가 없겠군.”그러다 그의 시선은 서인경의 팔짱을 낀 평이에게로 옮겨졌다. 그러자 방금 막 올라가려던 입꼬리가 다시 축 처졌다.“어디를 다녀온 것이냐?”연기준의 말소리가 떨어지자 평이는 깜짝 놀라며 급히 손을 거두었다. 서인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누가 보면 산짐승이라도 본 줄 알겠다. 어찌 이 자만 보면 이리 겁을 내는 것일까?’“오늘이 섣달그믐이라, 거리를 좀 거닐며 집안에 필요한 게 있나 보고 왔습니다.”연기준은 그녀의 텅 빈손을 훑어보며 대뜸 꾸며낸 거짓말임을 알아챘다.“그래? 그럼 왕비께선 무엇을 구해오셨는가?”서인경은 태연히 대답했다.“음… 결국 특별히 살 건 없더군요. 그래도 부관이 있어 다행입니다. 미리 다 준비해 둔 것을 보니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왕비마마, 이것이 금년 하인들의 세찬 명단이옵니다. 부디 살펴주십시오.”서인경은 매년 이런 절차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명단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대충 눈으로 훑어보니 화려하고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이 가득했다. 모두 이름조차 외우기 어려운 진귀한 음식들이었다.“대명절 섣달그믐인데, 후원 주방의 요리사들도 일 년 내내 고생했으니 오늘 하루쯤은 쉬게 해 주는 게 어떨까요?”부관은 그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주방을 쉰다고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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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연기준은 단호히 한마디 했다.“왕비 말대로 하거라. 일단은 점심부터 먹고 그 뒤에 얘기하도록 하지.”그리하여 이 일은 그녀의 뜻대로 정해졌다.서인경은 자기 뜰로 돌아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야 부관에게 상을 차리도록 지시했다. 늘 쉬지 않고 일만 하던 연기준이 오늘은 드물게 부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인경은 허기를 참지 못해 앉자마자 젓가락을 들었다.그러자 연기준이 느닷없이 물었다.“아침에 어디 갔었느냐?”서인경은 고개도 들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거리를 좀 걸었지요.”연기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날도 밝기 전인데 대체 무슨 거리를 걸었다는 거지?”서인경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만두 파는 거리요. 새벽 장사꾼들은 날 밝기 전부터 장사를 시작하잖아요. 지난번에는 동전 하나를 내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일찍 나가 그 집 만두를 기다렸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얼굴에는 어떠한 기색도 없었다. 연기준은 잠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도 화가 나서 핑계를 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만두 때문에 새벽부터 나간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 집 만두가 마음에 든다면 사람을 불러들여 왕부에서 네 입맛에 맞게 만들게 하면 되지 않느냐?”이 얼마나 전형적인 패도적 총재 같은 말인가! 권위적이다 못해 호화스럽기까지 했다.서인경은 속으로 웃음이 터졌으나 꾹 참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매일 먹으면 질리지요. 이렇게 가끔 한 번 먹는 게 제격입니다.”연기준은 그 말속에서 다른 의미를 곱씹었다. 그 순간, 전날 서회윤이 했던 말이 그의 귓가에 메아리쳤다.‘옛날에는 왕야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두었는데 이제 와 돌연 마음을 거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왕야 스스로 무슨 짓을 했는지 반성해 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흥! 반성해 보는 게 좋겠다고? 명백히 이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싫증을 낸 것뿐이다.새것만 좋아하고 낡은 건 내팽개치는 바로 그 성정!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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