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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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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언제부터였을까?밖에서 날리던 가느다란 눈발은 어느새 사라지고 굵직한 눈송이만이 겨울밤의 허공을 가르며 요란스레 흩날리고 있었다.앞마당을 벗어나 긴 회랑을 지나니 맞바람에 실린 눈발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 살갗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요한 정적을 메우는 건 오직 두 사람 거친 숨소리뿐.난생처음 겪는 모험에 맹은영은 정신이 아찔해 났다. 뒤를 따르는 기척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서인경이 날카롭게 일갈했다.“돌아보지 말게. 지금은 장부가 먼저네.”곧이어 뒤편에서 짧은 비명이 터지며 둔탁한 물체가 쓰러지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서인경의 일침에 맹은영은 억지로 궁금증을 접어야만 했다.그 시각, 전각 앞마당은 소란에 휩싸여 있었으나 후원은 풍설만 휘몰아칠 뿐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고요한 누각 이층, 좌에서 우로 여덟 개의 방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서인경은 그저 이층의 밀실 어딘가에 장부가 있다는 단편적 정보만을 손에 쥔 채 문을 하나하나 열며 확인해야 했다.경험이라곤 전무한 맹은영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보이지 않는 동조자들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상왕과 셋째 오라버니는 정작 급할 때 그림자도 안 비치는군요.”방 안을 살피던 서인경이 짧게 대꾸했다.“이미 손을 뻗었으니 우리가 여기까지 들어온 걸세.”그 말속에 숨은 뜻은 분명했다.연기준은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며 맹경운 또한 그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맹은영은 대충 그녀의 말을 이해했으나 장부를 찾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괜스레 방해가 될까 묵묵히 서인경 뒤만 따랐다.두 방은 허탕이었다. 세 번째 문을 열려는 순간 적막을 찢는 낯선 기척이 파문처럼 번졌다. 순간, 서인경은 맹은영을 등 뒤로 감싸안으며 외쳤다.“누구냐!”기둥 뒤로부터 어렴풋한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온조 아가씨?”그녀는 조금 전 앞마당에서 보았던 화류계의 꽃, 온조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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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이 세월 동안, 단 가는 만춘원을 통해 돈과 여색으로 관리를 매수하고 동업자를 짓밟으며 권세를 누려 왔습니다. 이 목함 안에 그 모든 더러운 거래의 장부가 담겨있으니 왕비마마께서 직접 살펴보시길 바랍니다.”서인경은 마마라는 호칭에 놀라지 않았다. 온조도 분명 단평안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을 테니까.목함을 열어 장부를 펼쳐 보니 빼곡히 적힌 거래 내역은 이 세상에 밝혀지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엄청난 기록들이었다. 옆에서 장부를 들여다보던 맹은영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경악했다.“이게 드러나면 조정이 통째로 뒤집히겠습니다.”서인경은 지금껏 거의 모든 시간을 연기준 곁에서 보냈기에 조정의 인물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하지만 맹은영의 반응 하나만으로도 이 사건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부를 고이 수습한 서인경은 시선을 돌려 온조를 바라보았다.“너는 누구인 것이냐? 왜 우리를 돕는 것이지?”창백한 얼굴의 온조는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저는 원래 평범한 시골 여인이었습니다. 마마를 돕는 건… 당연히 바라는 게 있어서지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어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제발 제 여동생을 구해 주십시오. 동생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저를 소나 말처럼 부려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그 말에 서인경의 눈빛이 깊어졌다.“네 여동생은 어찌 된 것이냐?”온조는 몸을 일으키며 눈가를 붉혔다.“이 두 해 동안, 도성 근처 마을에서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여자아이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이가 사라지면 집안에는 오십 냥의 은전이 떨어지지요. 시골에서는 딸을 본디 ‘패물’로 여기지 않습니까? 태어나면 집안일을 하고 자라서는 지참금을 남기는 존재로 길러집니다.”여자아이들의 운명을 말하는 온조의 얼굴은 비통으로 일그러졌고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갈라졌다. 서인경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들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옛 시대에 태어난 여인은 대체로 아이를 낳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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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아이의 몸이 검게 변한 것은 마치 독에 중독된 듯한 흔적이었다. 그때 서인경의 뇌리에 몇 가지 가능성이 스치자 그녀의 가슴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단 가는 단순히 딸들을 권세에 올려 세우려는 정도의 욕심이 아니었다.“그러니까... 네가 단 가가 세운 만춘원에 숨어들어 증거를 찾으려 했던 것이냐? 하지만 만춘원이 단 가의 업소라는 건 어찌 알고?”그녀조차 전생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을 온조는 어떻게 안 것일까?“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저는 단 가에 직접 들어가 증거를 찾으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단 씨 부인은 제 용모를 보고 불안하다 말하며 저를 만춘원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곳이 단 가의 업소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저도 한때는 반항했지만 어르신께서 이곳에 자주 손님을 불러들이고 또 늘 이 방을 드나든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체념한 듯 머무르며 기회를 엿봤습니다. 그러다 이 은밀한 장부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제 동생의 행방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왕비마마를 뵙게 되었으니 더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마마께서는 수많은 백성을 구하셨다지요. 부디 제 동생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제 겨우 네 살입니다!”온조는 이렇게 말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왕비마마 부디 불쌍히 여기시어 제 동생을 구해 주옵소서! 제발…!”아직 서인경이 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듣고 있던 맹은영이 소리쳤다.“그만 하거라. 내가 도와주겠다. 내 아버지는 맹국공이고 셋째 오라버니는 조정에서 벼슬을 맡고 있다. 그러니 반드시 너의 동생을 찾아줄 수 있을 것이다!”온조는 고개를 들어 맹은영을 바라보았으나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그녀는 여전히 간절한 눈빛으로 서인경을 쳐다보았다.맹은영은 안타까운 얼굴로 서인경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마마, 여동생이 고작 네 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서인경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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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호위병들의 엄호 속에 세 사람은 다시 2층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방 안에 막 들어서자마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왕비마마, 왕야께서 부르시옵니다.”서인경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연기준은 마치 왕비가 청루에 왔다고 세상에 알려주고 싶은 듯 대놓고 그녀를 불러내고 있었다.여기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서인경은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그 시각 단평안은 얼마나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서인경을 보자 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이번엔 내가 먼저 시비 건 것이 아니다! 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잖아! 내 여인을 빼앗아 간 거로도 모자라 나를 때리기까지 하다니! 왜 나는 어딜 가도 너 같은 재앙을 만나야 하냐고! 난 집에 갈 것이다!”서인경 그 꼴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터뜨렸다.“나도 그쪽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우연히 맞부딪힌 것이지.”그러자 단평안은 더 크게 울부짖었다.그 시각, 연기준 곁에는 흰옷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맑으며 피부는 희고 고왔다. 마치 현대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막 걸어 나온 아이돌처럼 잘생긴 얼굴이었다.서인경은 후원으로 가기 전에도 이미 그를 보았었다. 그때 그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단평안을 부축해 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싸움이 끝난 지금, 그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연기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와도 친분이 두터운 듯했다.서인경은 무심코 그의 얼굴을 두어 번 더 살폈다. 낯선 자라면 결코 연기준 곁에 설 수 없으니.그녀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 청년이 먼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아, 왕비마마셨군요.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마마께서 온조 아가씨와 더 이야기 나누고 싶으셨다면 제가 직접 모셔왔을 텐데.”서인경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댁은 누구시지?”그가 공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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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연기준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서인경을 노려보고 있었다.순간, 공기 속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경조부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오는 길에 다 들었습니다. 왕비마마께서 다치지 않으셨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부디 왕야와 왕비마마께서는 먼저 환궁하시지요. 여기는 신이 책임지겠습니다.”그제야 연기준은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민가의 여인을 강제로 빼앗고 몰래 불법을 저질러온 곳이 만춘원이 아니더냐? 네가 이 도성의 수령인데 어찌 한 점의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서인경은 그제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연기준은 이미 단 가의 더러운 짓을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인가?경조부윤은 그저 시시껄렁한 유흥 시비를 정리하라고 자신을 부른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는 길에 상왕비가 현장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가 지끈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상왕이 직접 목소리를 높이니 발뺌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부랴부랴 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신의 불찰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만일 증거가 드러난다면 엄히 다스릴 것입니다.”하지만 이런 판에 박힌 말은 서인경의 귀에는 그저 속임수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눈을 치켜떴다.연기준은 그에게 일말의 체면조차 주지 않았다.“네 관할에서 벌어진 일이니 네가 청렴하다는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순성어사는 어디 있느냐?”중년의 한 관리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신은 여기 있습니다.”“이 일의 전권은 너에게 맡기겠다.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거라. 누가 연루되었든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명 받들겠습니다.”경조부윤은 손을 덜덜 떨며 고개를 떨구었다.싸구려 향냄새가 코를 찌르는 장소에 연기준은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인경의 손을 잡아끌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 일대 모든 청루에 전하거라. 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라고 말이다. 다시는 상왕비를 청루 안에 들이지 말거라. 내 명을 어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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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이 와중에도 단 가를 두둔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방금 뭐라 했습니까? 누구든 연루되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이제 보니 죄다 개소리였네?”연기준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그게 사실이라 해도 나라에는 조정이 있고 폐하가 계신다. 이런 일을 처리할 자는 따로 있는데 왕비가 함부로 나서면 뭐가 된단 말이냐?”그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서인경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끝에 터져 나온 건 웃음 같지도 않은 냉소였다.“제가 함부로 나선다고요? 만약 오늘 제가 눈 감았다면 누가 나서서 조사했겠습니까? 만춘원이 여기 자리 잡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단 가의 업소란 걸 누가 알 수 있었겠느냐 말입니다. 그 안에서 벌어진 짐승 같은 짓을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런 일을 처리할 자는 따로 있다고 하셨지요? 조정이란 게 백성들 눈앞에서 세금을 축내며 놀고 먹으라고 존재하는 것입니까?”그녀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말을 쏟아냈다.“제가 장부를 찾자마자 금세 빼앗아 가셨지요. 그래야만 왕야 마음대로 단 가의 만행을 덮고 감싸 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증거는 제가 찾아낸 것이니 당장 돌려받아야겠습니다. 순성어사인지 뭔지 저는 믿지 못하겠으니까요.”그녀의 말에 연기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왕비라는 신분으로 기생집을 휘젓고 다닌 게 당당하다 말할 수 있겠느냐? 세상에 소문이라도 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그러나 서인경은 오히려 고개를 높이 쳐들며 대답했다.“소문? 소문을 누가 낸단 말입니까? 왕야께서 저를 억지로 끌어내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는 이미 집에서 발 벗고 자고 있었을 겁니다. 왕야께서 감싸주신 죄악을 제가 드러내면 죄가 되는 겁니까? 그럼 대체 누가 하늘의 뜻을 대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연기준은 비웃음을 흘렸다.“하늘의 뜻? 그게 아니지. 네 사사로운 원한을 풀려고 이런 게 아니더냐? 정작 맹 가 사람들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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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순성어사가 사람을 풀어 만춘원 안팎을 모두 포위했사옵니다. 저희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서풍교도 황급히 옷을 걸쳐 입고 나오며 물었다.“안이는? 우리 안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단평안 도련님은 순성어사에게 끌려갔사옵니다. 상왕께서 조사에 협조하라 명하셨거든요.”경조부윤이 보낸 부하의 말을 듣고 서풍교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목청을 높였다.“그저 청루에 간 것뿐이잖아! 도성 사내들 중 청루에 들르지 않는 자가 어디 있다고! 어찌 우리 안이만 끌고 간단 말이냐? 방금 상왕비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 않았느냐? 틀림없이 그녀의 짓일 거다. 일부러 우리 안이를 해치려는 거야!”단효산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한편 낮게 물었다.“안이는 오늘 진방옥과 함께 나갔다 하지 않았느냐? 혹 그도 함께 잡혀갔단 말이냐?”그러자 그 부하는 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본 대로만 전했다.“진 공자께서는 상왕과 제법 친해 보였사옵니다. 몇 마디 나누더니 바로 풀려나더군요. 현장에서 붙잡힌 자는 만춘원 사람들을 제외하면 도련님뿐이었사옵니다.”서풍교는 더욱 분노하며 모든 화살을 서인경에게 돌렸다.“상감, 어서 방책을 내리십시오. 분명 서인경이 앙심을 품고 상왕 앞에서 우리 안이를 헐뜯은 것입니다.”그러나 단효산의 낯빛은 더 굳어졌다. 그는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잠시 진정하거라. 안이는 별일 없을 게다.”지금 단효산이 두려워하는 건 따로 있었다.부하가 물러나자 그는 곧장 서재로 가 심복을 불렀다.“후원의 장부가 지금 어디 있는지 당장 캐내거라. 누구 손에 있든...”말을 멈추고 그는 손끝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만약 그게 상왕비의 손에 있다면...”단효산의 눈빛은 더욱 사나워졌다.“처리해야지.”“만약 상왕 손에 있다면요?”단효산은 잠시 굳은 채로 서 있다가 이내 숨을 내쉬며 안도의 기색을 드러냈다.“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심복은 그 속내를 헤아리지 못했으나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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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서인경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기운 하나 없이 신발을 벗고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나를 챙기지 말거라. 너도 얼른 자야지. 그리고 대문은 꼭 잠그거라. 누가 와도 열지 말고.”평이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건 곧 왕야를 향해 하는 말일 것이다.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방금 전 주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날카로웠기에 결국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평이가 대문을 잠그려는 순간 하얀 손이 문안으로 불쑥 들어왔다.“왕야께서 아직 서재에서 일을 보고 계신다. 왕비마마께서 드시라고 음식을 전하라 하셨는데 이렇게 서둘러 문을 잠그는 이유는 무엇이냐?”평이는 그 얼굴을 보자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터뜨렸다.“또 무슨 잘못을 하셨기에 왕비마마께서 화가 나신 겁니까?”‘또’라는 단어에 연풍도 난감해졌다. 그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니 묻지 말고 그냥 가져가거라. 이건 왕야께서 친히 명해 만든 음식이라는 말도 꼭 전해드리고.”그러나 평이는 팔짱을 낀 채 받지 않았다.“차라리 왕야께서 주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죠. 말씀드리면 왕비마마께서는 더더욱 안 드실 거니까요.”연풍은 다급히 재촉했다.“어서 들어가거라. 왕비마마께서는 저녁도 못 드셨다.”평이는 오히려 단호하게 받아쳤다.“그럼 틀림없이 또 화가 나서 그런 겁니다. 우리 왕비마마께서는 이런 거로 화가 풀릴 분이 아니에요.”아무리 달래고 설득해도 평이는 끝내 그 그릇을 받지 않았다.“왕비마마께서는 이미 주무시고 계시니 어서 돌아가세요. 더 있다간 마마의 잠을 방해할지도 모릅니다.”평이는 결국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다. 그 덕에 연풍은 손에 들린 그릇을 안고 한밤의 찬바람 속에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평이는 문을 잠근 뒤, 곧장 작은 부엌으로 가서 서인경이 가장 좋아하는 달걀부침을 부쳤다. 혹여 왕비마마께서 한밤중에 허기져 눈을 뜨실까 봐 미리 대비해 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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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두 사람은 며칠째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연기준은 문득 만춘원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서인경은 진방옥을 향해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었다. 겨우 자기보다 몇 살 어린 사내자식일 뿐인데. 그리고 피부가 흰 것이 남자답지 못한데 뭐가 좋다고... 질투 섞인 생각이 고개를 들수록 연기준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을 따라 손을 내렸다. 거칠고도 은밀하게, 그러나 또 어딘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다음 날, 서인경은 눈을 뜨자마자 침대 머리맡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옷은 어제 집을 나설 때 입었던 검은 속옷 그대로였고 허리 끈도 여전히 매어져 있었다.겉모습만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여기는 상왕부.남자라면 연기준 말고는 발 디딜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어제 평이더러 문을 걸어 잠그라 지시했기에 그는 분명 서재에서 잤을 텐데 어젯밤 그녀가 느꼈던 손길은 너무나도 생생했다.서인경의 뺨은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급히 평이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 시켰다.목욕을 마치고 나니 몸에는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겨우 안도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평이는 이미 밥상을 차려 두고 있었다.“어제 준비해 둔 달걀부침이 있사옵니다. 아침을 드시지 못하셨으니 점심은 함께 드시지요.”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늦잠을 잘 리 없는 그녀였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힘들게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어제 연기준과 함께 밤을 보냈던 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어제… 문을 꼭 잠근 게 맞느냐?”“그러하옵니다.”평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지어 자물쇠를 두 겹이나 걸었사옵니다.”서인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평이는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저를 놓으며 말을 이었다.“내일 밤은 섣달그믐이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왕야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셔야지요. 조금 전 왕야께서 잔치 때 입으실 옷을 보내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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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서인경은 그 말에 식은땀마저 맺혔다.“난 아이를 낳을 생각 없네. 그러니 아가씨가 가져가시게. 대신 맹국공과 맹부인께는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고.”맹은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마마께서 급하지 않다 쳐도 상왕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분 또래의 다른 왕야들은 자식들로 집안이 북적거립니다. 자기 자식이 생기면 당연히 다른 집 아이를 장원에 두고 기르는 일도 그만두지 않겠습니까?”서인경은 말을 잇지 못했다.평이에게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 말라 못 박은 게 겨우 어제인데 이번에는 맹은영이 또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내가 아이를 낳든 말든 그건 내 뜻이네. 그가 누구 아이를 기르든 그건 그 자의 일이지. 우리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네.”맹은영은 그 말에서 묘한 뉘앙스를 감지했다.“어제까지도 화해하지 못 한 것입니까?”화해는커녕 더 악화되었다.서인경의 얼굴빛이 달라지자 맹은영은 눈을 반짝이며 더 궁금해했다.“이상하군요. 저희 오라버니 말로는 왕야께서 마마가 만춘원에 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사람을 데리고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일부러 저희에게 엄호까지 붙였다고 하던데... 지금 궁 안에서는 다들 왕야께서 질투해 그 화를 만춘원에 풀었다며 떠들어대고 있어요. 불법 사실이 드러난 건 어디까지나 곁가지일 뿐이고 왕야께서 이렇게까지 마마 편에 서 주었는데 감동은커녕 왜 화만 난 것입니까?”“날 돕는 게 아니라 단 가를 돕는 거겠지.”서인경은 어젯밤 일을 맹은영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손에 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왕야의 행동이 확실히 잘못된 건 맞지만... 저는 지금 왕야를 두둔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 셋째 오라버니도 같은 말을 했거든요. 어젯밤 어머님께 호되게 혼난 것도 사실입니다.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그런 위험한 곳에 간 건 잘못이라면서요.”“그게 어떻게 아가씨 탓인가? 계획도 실행도 다 내가 한 건데. 아가씨를 데리고 간 것도 나이지 않은가? 이건 내 원한이자 복수네.”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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